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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네오이마주(neoimages)와 영화 깊게 읽기]]></title>
<description><![CDATA[영화비평 매거진 '네오이마주(http://neoimages.co.kr)'의 편집스탭 우디79의 블로그입니다. 영화를 읽는 너른 시선을 공유하고 싶습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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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네오이마주(neoimages)와 영화 깊게 읽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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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극장이 하는 것 또는 할 수 있는 것. 혹은 해야만 하는 것]]></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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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center;clear:both;&quot;&gt;&lt;img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ad/59/woodyh79/folder/14/img_14_509_1?1264024803.jpg&quot; alt=&quot;&amp;#x00c0ac;&amp;#x00c6a9;&amp;#x00c790; &amp;#x00c0bd;&amp;#x00c785;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quot; height=&quot;340&quot; width=&quot;510&quot;/&gt;&lt;/div&gt;&lt;br /&gt;&lt;div style=&quot;TEXT-ALIGN:right;&quot;&gt;양석중&lt;br /&gt;&lt;/div&gt;&lt;br /&gt;&lt;p&gt;&lt;strong&gt;영화 관람 환경에 대한 또 다른 생각&lt;/strong&gt;&lt;/p&gt;&lt;br /&gt;&lt;p&gt;극장. 극장에서 우리는 연극을 보거나 혹은 연주를 듣거나 또는 영화를 본다. 극장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극장은 오로지 개인의 것이 아니다. 극장의 경제적 물적 토대를 소유한 사람에게도 역시 그러하다. &amp;#39;극장주&amp;#39;라는 사람은 극장을 가졌으되, 그것을 끊임없이 극장을 찾는 이들에게 내놓아야만 하는 사람이다. 혹은 그런 척 이라도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장사가 되지 않을 것이므로, 예를 들자면 멀티플렉스에서 관객이 받게 되는 살갑도록 따가운 &amp;#39;친절함‘같은 것들. &lt;br /&gt;&lt;br /&gt;이야기를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으로 제한시켜서. 영화가 관객을 최종적으로 만나는 곳은 극장이다. 관객이 영화를 만나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언제나 관객을 찾는다. 영화를 보고 &amp;#39;거기에 영화가 있다&amp;#39;고 말해 줄 수 있는, 기억할 수 있는 관객을 찾는다. 그렇게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극장이다. 관객은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 극장은 그러니까 영화의 최전선이 된다. 그곳은 전장이며 애틋한 사랑이 맺어지는 곳이다. 악다구니를 치며 촬영한 현장에서, 편집기사와 끊임없는 신경전을 벌일 수밖에 없는 편집실에서, 기획 단계에서의 투자자와 기획사와의 끝이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들. 그런 지난한 과정들을 통해 영화는 만들어진다. - 서두르지 말자. 영화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 영화는, 최종적으로 자신에게 합당한 관객을 만나야만 한다. 그 때 정말로 영화는 완성된다. 그런데 여기서. 최초의 감독의 혹은 기획자의 머릿속에서 상상되었던 영화와, 극장에 최종적으로 걸리는 영화는 같은 것일까.&lt;br /&gt;&lt;br /&gt;&lt;br /&gt;영화는 위대한 타협과 우연의 산물이다. 그 타협이 행복한 것이 될 수도, 또 그 우연이 구차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흔히 감독들은 자신들이 만든 영화를 개봉한 극장에서 보면 참담한 기분이 든다고 한다. 그 이유의 대부분은 화면비와 음향 때문이다. 공들여 짜맞추어낸 화면이 개봉 극장에서는 자신의 의도대로 보여지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조금 감안하고 이야기하자면, 일반적으로 관객석에 경사가 있는 극장은 그 만큼 화면의 외곡과 유실이 크다. 영사기와 화면의 높이가 차이 날수록, 관객이 볼 수 있는 화면의 손실은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다. 이론적으로 영사기에서 나오는 빛은 영사막에 90도의 각도로 조사되어야 화면의 왜곡이 최소화된다. 또한 영사기는 화면정중앙에 위치해야만 한다. &lt;br /&gt;&lt;br /&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center;clear:both;&quot;&gt;&lt;img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ad/59/woodyh79/folder/14/img_14_509_3?1264024804.jpg&quot; alt=&quot;&amp;#x00c0ac;&amp;#x00c6a9;&amp;#x00c790; &amp;#x00c0bd;&amp;#x00c785;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quot; height=&quot;270&quot; width=&quot;500&quot;/&gt;&lt;/div&gt;&lt;br /&gt;&lt;br /&gt;그러나 대부분의 멀티플렉스가 이런 기준을 준수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무엇보다 건물 설계 과정에서 영사기의 위치와 극장 내부 설계가 함께 진행되어야 하지만, 멀티플렉스는 안전한 입지 확보를 위해 상가건물에 함께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극장 전용의 건물로 설계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의미가 된다. 이 경우, 건물의 내구성 확보를 위한 기둥과 자잘한 설비 배선으로 인해 영사기가 화면 정중앙에 위치할 수 있는 확률은 적어진다. 기둥을 피하거나, 또는 배선 관계로 인해 영사기가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경우도 발생한다. 심하면 영사기의 치우침으로 인해 화면 왼쪽에 들어가는 자막의 포커스가 맞지 않는 경우도 발생한다. 반대로 자막의 포커스를 맞추면 오른쪽으로 갈수록 화면의 포커스가 맞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한 예가 아닌, 실제로 영업중인 어떤 멀티플렉스의 경우이다. &lt;br /&gt;&lt;br /&gt;신촌에 위치한 멀티플렉스 아트레온의 경우 심한 키스톤 현상으로 인해 농담처럼 &amp;#39;스타워즈 극장&amp;#39;이라고 불리기까지 한다.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심하게 좁아지는 화면은 마치 스타워즈의 오프닝 시퀀스를 떠올리게 한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웃을 수 없는 현실이다. 이것은 극단적으로 말해, 최초 설계 단계부터 잘못 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무리 만곡 스크린을 사용하고, 스크린 아래쪽을 조금 들어 올려서 영사각도를 맞춘다 해도, 근본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심하게 경사진 멀티플렉스 상영관은 이러한 왜곡 현상을 제어 할 수 없다. 결국 이것은 아트레온만의 문제가 아니다. &lt;br /&gt;&lt;br /&gt;위에 예로 든 사운드의 문제도 있지만, 관객이 보는 것만으로 국한 시켜 이야기 하자면, 결국 관객은 감독의 의도대로 만들어진 화면을 보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것 역시 처음에 이야기한 &amp;#39;위대한 타협과 우연&amp;#39;의 결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극장 측에서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문제가 다르다. &lt;br /&gt;&lt;br /&gt;우리가 보고 있는 영화의 화면 사이즈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비스타 비전(1.85:1)과 시네마 스코프(2.35:1) 두 가지가 있다. 멀티플렉스는 이 두 개의 화면 사이즈를 기준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그것 말고도 영화에는 다양한 화면 사이즈가 있다. 4:3, 1.33:1, 1.37:1, 1.66:1, 1.75:1, 1.85:1 이렇게 다양한 사이즈의 화면 모두를 지원하는 극장은 현실적으로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맞는 렌즈와 관련 부품이 구비되어야 하며, 영사막의 다양한 세팅이 가능해야 한다. 여기에 영사기사의 실무교육과 운용능력 배양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lt;br /&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center;clear:both;&quot;&gt;&lt;img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ad/59/woodyh79/folder/14/img_14_509_2?1264024804.jpg&quot; alt=&quot;&amp;#x00c0ac;&amp;#x00c6a9;&amp;#x00c790; &amp;#x00c0bd;&amp;#x00c785;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quot; height=&quot;405&quot; width=&quot;500&quot;/&gt;&lt;/div&gt;&lt;br /&gt;&lt;br /&gt;일반적인 대중영화는 비스타 비전과 시네마 스코프 둘 중의 하나로 만들어진다.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대중영화의 시각은 위의 두 개의 사이즈로 ‘표준화’ 되어 있다. 물론 표준화가 나쁜 것은 아니다. 표준화는 영화처럼 다양한 ‘공정’을 거쳐야만 하는 작업의 효율성을 더해준다. 그러나 만드는 이의 시야와 보는 이의 시야가 이렇게 단촐하게 표준화 되는 경우,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영화를 통해 보는 세계의 더 다양한 시각적 가능성들을 놓치게 될 수도 있다. &lt;br /&gt;&lt;br /&gt;이제부터 이 글의 핵심. 구스 반 산트는 몇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데뷔 이후 계속해서 4:3의 비율로 영화를 촬영했다. 그것은 자신의 영화가, 자신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세계가 관객에게 4:3의 비율로 보여지기를 바란다는 의미다. 그의 데뷔작 &amp;lt;말라노체&amp;gt;는 4:3의 비율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한국에서 개봉된 &amp;lt;말라노체&amp;gt;는 1.85:1, 비스타 비전 사이즈의 &amp;lt;말라노체&amp;gt;다. 결론적으로 두 영화는 전혀 다른 영화다. 왜냐하면 화면의 아래위가 (거기에 더해 양 옆 까지) 잘려나간 그것에서 우리는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영화를 수입했으면서 또한 상영주체이기도 한. 그러니까 수입사이면서 극장 운영 주체이기도 한 스폰지 측에서 말 한 것처럼 이 영화의 해외 배급을 총괄하는 회사와, 영화를 만든 감독의 &amp;#39;상영권고방식&amp;#39;이 특별히 없는 경우 해당 극장의 사정에 맞추어 상영을 해도 문제는 되지 않는다. - &amp;#39;문제는 되지 않는다.&amp;#39; 라는 부분에 주의 - 그러나 상영권고방식을 예로 들어 해명 할 수 있는 것은 &amp;#39;영화사이자 수입사 스폰지&amp;#39;의 경우에만 해당된다. 극장으로서의 &amp;#39;스폰지 하우스&amp;#39;라면 좀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lt;br /&gt;&lt;br /&gt;위에 장황하게 늘어놓았듯이, 극장은 영화가 관객을 만나는 최전선이다. 극장은 영화를 감독의 의도에 최대한 가깝도록 상영할 의무가 있다. 아무리 특별한 상영권고방식에 대한 부분이 없었다 하더라도, 극장에서 실제로 상영되는 화면을 검토해서 4:3 화면이 무리 없이 전체적으로 1.85:1의 화면 속에서 소화가 될 수 있는지의 범위를 결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amp;lt;말라노체&amp;gt;속의 세계는 아래위가 좁은 1.85:1의 화면에 들어가기엔 지나치게 가깝고, 가파르다. 이 영화는 인물들의 표정보다는 그 들의 몸이 가지는 세부의 흔적들을 스케치하듯 스쳐가는 것처럼 잡아내었지만, 그 모두를 보기에 우리가 만나고 있는 시야는 너무 답답하다. &lt;br /&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center;clear:both;&quot;&gt;&lt;img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ad/59/woodyh79/folder/14/img_14_509_0?1264024803.jpg&quot; alt=&quot;&amp;#x00c0ac;&amp;#x00c6a9;&amp;#x00c790; &amp;#x00c0bd;&amp;#x00c785;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quot; height=&quot;374&quot; width=&quot;510&quot;/&gt;&lt;/div&gt;&lt;br /&gt;&lt;br /&gt;또한 그 전의 &amp;lt;라스트 데이즈&amp;gt;가 그러했으며, 스폰지 하우스가 아닌,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열렸던 &amp;#39;팡테옹 드 시네마&amp;#39; 특별전에서 상영된 장 뤽 고다르의 &amp;lt;네 멋대로 해라&amp;gt;가 그러했다. 장 폴 벨몽도와 진 셰버그가 함께 샹젤리제 거리를 걸어가는 유명한 롱테이크 장면에서, 벨몽도의 춤추는 것처럼 주름진 멋들어진 이마는 영사막의 위쪽, 어둠속에서 넘실거렸으며, 도망자의 것 치고는 지나치게 여유작작한 발걸음은 자막 아래 어디쯤에서 사라졌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광화문 시네큐브는 아트플러스 라인에 등록되어 있는 극장이며, 흔히 말하는 ‘예술 영화’를 집중적으로 상영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곳의 상영 환경은 일반 멀티플렉스 극장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결국 광화문 시네큐브, 또는 스폰지 하우스 모두 일반적인 멀트플렉스 수준의 극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lt;br /&gt;&lt;br /&gt;극장은 단순히 영화를 보여주기만 하는 곳이 아니다. 아니, 이 보여준다는 단어에는 얼마나 많은 것이 들어있는가. 극장은 영화를 ‘제대로’ 보여주어야만 한다. &amp;lt;말라노체&amp;gt;는 1985년, 미국 포틀랜드의 어느 거리에서 촬영 되었다. 그 후로 이십 몇 년의 시간이 흘러 우리는 서울의 한 극장에서 그 영화를 본다. 그 만큼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감독이 보고, 생각하고, 꿈꾸었던 것과 거의 동일한 모습으로 영화를 본다는 것. 그것은 영화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기쁨이면서 동시에 그 끝을 알 수 없는 신비이기도 하다. 하나의 영화를 통해 우리는 얼굴도 잘 알지 못하는 지구 건너편의 누군가와 동일한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감독의 의도한 사이즈, 감독의 생각한 세부가 포함된 화면을 최대한 살려내는 것. 그것이 바로 극장이 &amp;#39;하는&amp;#39; 것이며 할 수 있는 것, 해야만 하는 일이다. &lt;br /&gt;&lt;br /&gt;- 이 글은 스폰지 하우스 카페 혹은 또 다른 관련 공간에 등록할 수도 있을 있을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한한 영화사 스폰지측에서는 더 이상의 의견 개진에 대해 난색을 표명했다. 신기하게도 그 이후 이 건에 대한 회원들의 게시물은 아예 올라오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 문제는 (적어도 스폰지하우스 카페라는 온라인 공간에서는)더 이상 이야기 되어서는 안되는 문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문제이다. &lt;br /&gt;&lt;br /&gt;이 글이 이러한 &amp;#39;정책&amp;#39;에 대한 우회 공격,혹은 뒤통수치기 같은 것이 될 수 있을까? 받아들이는 쪽에 따라서는 그렇게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극장 스폰지 하우스뿐만 아니라, 이 땅위의 모든 &amp;#39;극장&amp;#39;이라면, 그것도 예술 영화 전용관을 표방한다면 더욱 더 짚고 넘어가야만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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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21 Jan 2010 07:00:04 +0900</pubDate>
    <category><![CDATA[필진 칼럼]]></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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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위대한 침묵] 누군가에게는 위대할 수도 있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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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center;clear:both;&quot;&gt;&lt;img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ad/59/woodyh79/folder/9/img_9_510_0?1264024804.jpg&quot; alt=&quot;&amp;#x00c0ac;&amp;#x00c6a9;&amp;#x00c790; &amp;#x00c0bd;&amp;#x00c785;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quot; height=&quot;331&quot; width=&quot;510&quot;/&gt;&lt;/div&gt;&lt;br /&gt;&lt;div style=&quot;TEXT-ALIGN:right;&quot;&gt;박정애&lt;br /&gt;&lt;div style=&quot;TEXT-ALIGN:left;&quot;&gt;30분이면 족했다. 30분만 집중한다면 감독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직원의 안내방송 말이 맞았다. 월요일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전석매진이라는 말이 나를 의외의 기대감으로 몰아넣은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기대감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추락해버리고 말았다.&lt;br /&gt;&lt;br /&gt;알프스의 깊숙한 산 속 고즈넉하게 있는 수도원은 그 주위의 풍경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속세를 벗어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카메라는 말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카메라는 수사들의 옷자락이나 창문으로 스며드는 햇살에 초점을 맞춰 클로즈업하는데, 보이는 먼지까지도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다. 딱 거기까지, 거기까지는 영화가 좋았더랬다.&lt;br /&gt;&lt;br /&gt;영화의 큰 흐름은 수사들이 독방에서 성경말씀을 읽으며 절제된 생활을 하고, 자란 머리를 깎고, 새로운 수사들이 주님 앞에 당신의 제자가 되겠노라 맹세를 하는 등 수도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미묘한 계절의 변화에 맞춰 겨울에서 봄을 거쳐 여름, 가을, 그리고 다시 겨울이 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가장 먼저 영화를 보면서 계속 방해를 받은 것은 중간 중간에 반복적으로 삽입되는 성경말씀의 일부 글이었다. &amp;quot;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지 않는 자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느니&amp;quot;라는 말 등이 지나치게 자주 반복되고 있었다. 영화 자체는 상당히 절제된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 표현 방법은 과하게 넘치고 있었다. 비슷한 장면이나 말의 반복으로 나는 마치 지하철에서 &amp;quot;예수천국, 불신지옥&amp;quot;을 외쳐대는 사람들과 이 영화가 다를 게 뭐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lt;br /&gt;&lt;br /&gt;&lt;/div&gt;&lt;/div&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center;clear:both;&quot;&gt;&lt;img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ad/59/woodyh79/folder/9/img_9_510_1?1264024804.jpg&quot; alt=&quot;&amp;#x00c0ac;&amp;#x00c6a9;&amp;#x00c790; &amp;#x00c0bd;&amp;#x00c785;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quot; height=&quot;333&quot; width=&quot;510&quot;/&gt;&lt;/div&gt;&lt;br /&gt;&lt;br /&gt;언론과 여러 관객들이 이 영화를 호평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 호평이 정말 제대로 받아 마땅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이유인즉슨, 이 영화는 자기만족에 빠졌기 때문이다. 엔딩부분에 눈 먼 수사가 이런 말을 한다. &amp;quot;내가 보지 못하게 된 것 또한 주님이 나를 배려해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눈이 먼 것 또한 내가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이로써 주의 사랑을 나로 하여금 세상에 보여줄 수 있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행복하다&amp;quot; 내가 느끼기엔 자기위안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지인과 종교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종교의 가장 큰 역할은 자기위안이라는 결론을 내린 적이 있다. 즉, 슬픔을 견디게 해준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셔서 슬프기도 하겠지만, 하나님의 곁으로 간 것이기 때문에 기쁘다는 것이다. 그래서 슬픈게 슬픈게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종교를 찾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싶다. &lt;br /&gt;&lt;br /&gt;이 영화는 비슷한 위치에 있는, 그러니까 수녀, 스님, 기타 종교에 헌신하는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위로 차원으로 만든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소통의 범주 또한 좁다. 나는 그 카테고리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지 그 위로를 이해하기가 버거운 부분이 많았다. 찍는 사람, 찍히는 사람, 보는 사람이 그 &amp;#39;위대한&amp;#39;이란 말을 얼마나 이 영화에 맞고, 맞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수사들은 자신의 절제를 통한 신과의 교섭이 얼마나 높아져가는지를, 감독은 16년을 기다려 앞으로도 없을 수도원의 모습을 담는 고귀한 일이라는 자기만족에 빠져서 한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lt;br /&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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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21 Jan 2010 07:00:04 +0900</pubDate>
    <category><![CDATA[필진 리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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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파주] 절박한 자들(만)이 말한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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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center;clear:both;&quot;&gt;&lt;img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ad/59/woodyh79/folder/9/img_9_511_0?1264024804.jpg&quot; alt=&quot;&amp;#x00c0ac;&amp;#x00c6a9;&amp;#x00c790; &amp;#x00c0bd;&amp;#x00c785;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quot; height=&quot;338&quot; width=&quot;510&quot;/&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right;&quot;&gt;&amp;nbsp;양석중&lt;br /&gt;&lt;/div&gt;&lt;br /&gt;&amp;nbsp;&lt;em&gt;진실의 장소&lt;br /&gt;&lt;br /&gt;&lt;/em&gt;술을 먹고 들어온 중식은 형에게 말 한다. 아마도, 은모가 준비한 모종의 &amp;#39;이벤트&amp;#39; 전날의 장면일 것이다. 이 장면에서 비가 내렸다. 중식은 젖어있었고, 꽤 많이 취해있었다. 귀농을 위해 자신이 떠난 뒤 &amp;#39;이 곳&amp;#39;을 부탁하는 형의 제안에, 중식은 &amp;#39;해서는 안 되는 말, 할 수 없는 말&amp;#39;을 하기 때문에 자신은 자격이 없다한다. 그리고 중식은 자신의 방에 돌아와 눕는데, 이어지는 스승의 날 시퀀스는 마치 중식의 꿈처럼, 혹은 악몽처럼 연결된다. 아이들이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이 목덜미를 드러내고 &amp;#39;중식 씨, 사랑해요&amp;#39;라고 입을 맞추어 말한다. 중식은 놀라서 쓰러진다. 중식의 첫사랑의 기억은 재현된 악몽으로 귀환한다. &lt;br /&gt;&lt;br /&gt;&amp;lt;파주&amp;gt;는 말에 관한 영화이다. 세상의 어느 누가 적절한 말과 부적절한 말, 할 수 없는 말과 해도 되는 말을 선별 할 수 있을까? 말이 입 밖으로 던져진 바로 그 순간을 마주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말의 무게와 질감을, 그 생김새와 밀도를 들여다 볼 수 있다. 바로 그 순간 자신이 한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게 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진실은 (당신과 나사이의) 공기 속으로 사라진다. &lt;br /&gt;&lt;br /&gt;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은 반드시 말을 한다는 행위를 통해서 선별된다. 정확히 그 순간. 깨닫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 던져진 말은 누구도 거두어들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은 말하여질 수 없다. 진실은 침묵을 통해 남겨질 수 있는, 세상 마지막의 장소이다.&lt;br /&gt;&lt;br /&gt;진실과 사실은 다르다. 은모의 혼란은 진실과 사실을 동일한 것으로 유추하기 때문이다. 은모가 ‘형부’에게 요구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말하여 질 수 없는 ‘진실’ 이었다. 은모는 진실을 아는 것이 사실을 아는 것이라고 믿는 것으로 보인다. 진실이란 마음이 묶여있는, 마음이 정주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진실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다른 이들은 거짓이라고 믿어도, 누군가의 마음은 그 곳에 묶일 수 있다. 진실이 상대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진실은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것 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lt;br /&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center;clear:both;&quot;&gt;&lt;img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ad/59/woodyh79/folder/9/img_9_511_1?1264024804.jpg&quot; alt=&quot;&amp;#x00c0ac;&amp;#x00c6a9;&amp;#x00c790; &amp;#x00c0bd;&amp;#x00c785;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quot; height=&quot;342&quot; width=&quot;510&quot;/&gt;&lt;/div&gt;&lt;br /&gt;‘한 시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라는 중식의 말은 자신의 의지로 인해 말하여진 것이 아니라, 침묵을 지킬 것을 결심한 중식이 더 이상 꺼낼 말을 찾지 못해 수동적으로 은모에 의해 끄집어내어진 말이다. 은모가 진실을 알고 싶다고 할 때, 그것은 언니가 왜 죽었는지에 관해 알려는 것이 아니다. &amp;#39;그럼에도 불구하고&amp;#39; 그러니까 자신이 언니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지 중식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식의 마음은 어떤 것인지, 그의 마음이 어디에 묶여 있는지를 알려는 것이다. 은모는 사랑을 갈구한 것이 아니라 용서를 구한다.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귀의 할 수 있는 장소에 대한 끈질긴 모색과 탐색.&lt;br /&gt;&lt;br /&gt;은모의 요청에 중식은 엉뚱하게도 ‘단 한 시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amp;#39;고 말한다. 은모의 절망은 사랑받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용서 받지 못함에 있다. 앞으로도 그럴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은모는 알고 있다. 이미 언니는 죽어버렸고 진실은 말하여질 수 없다. 말하여지는 순간 진실은 진실이 아닌 것, 듣는 이가 원하는 것, 혹은 말하는 이가 원하는 무엇이 된다. 중식은 침묵하고 (또는 진실을 감추기 위해 거짓을 말하거나, 그러니까 진실은 얼마나 연약한가. 거짓으로 감추어지는 진실은) 은모는 형부가 보험사기를 저질렀다는 (다른 이들 에게는 진실과 동의어인)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렇게 꺼내어진 거짓은 사실로 굳어진다. 딱딱하고 창백하게.&lt;br /&gt;&lt;br /&gt;은모는 계속해서 정주할 곳을 찾지 못하고 길 위로 떠난다. 살아있는 자는 누구도 은모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은모는 (다른 사람의) 어떠한 말도 진실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떠돌 수밖에 없는 은모의 운명은 우리들 대다수의 운명과, 혹은 시간들과 영화 바깥에서 (필연적으로) 겹쳐진다. 영화 &amp;lt;파주&amp;gt;의 지독한 농담. 혹은 벗어날 길 없는 결정론. &lt;br /&gt;&lt;br /&gt;&lt;br /&gt;&lt;em&gt;말을 하지 않는 것. 침묵의 주식&lt;br /&gt;&lt;/em&gt;&lt;br /&gt;영화 속에서 말들은 누군가의 입김과 함께 공기 중에 떠돌거나, 벽에 걸린 걸개위에서 펄럭이거나, 거칠게 그은 낙서로 벽 위에 남겨진다. 벽과 그 위의 말들은 시간이 지나 부서지거나 무너질 것이다. 그 위로 새로운 집과 건물과 도시가 세워질 것이다. 철대위, 이 절박한 이들이 내뱉은 말들. 그 말들은 아무것도 지켜낼 수 없(었)다. 오직 이 영화 속에서, 절박한 자들만이 말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아무도 듣지 않는 말들은 하릴없이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 말들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폐허와 침묵뿐이다. 희망과 절망마저도 사라져버린 명백하고 단단한 현실의 거죽들 뿐. &lt;br /&gt;&lt;br /&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center;clear:both;&quot;&gt;&lt;img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ad/59/woodyh79/folder/9/img_9_511_2?1264024804.jpg&quot; alt=&quot;&amp;#x00c0ac;&amp;#x00c6a9;&amp;#x00c790; &amp;#x00c0bd;&amp;#x00c785;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quot; height=&quot;177&quot; width=&quot;220&quot;/&gt;&lt;/div&gt;&lt;br /&gt;이경영이 연기한 나이트클럽 사장은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 그의 말은 오직 &amp;#39;전언&amp;#39;의 형태로만 육화된다. 침묵함으로써 권력은 범접할 수 없는 공간을 소유한다. 부재함으로써 권력은 편재한다.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 설치된 CCTV의 눈초리가 상정하는, 그 뒤의 모든 감시의 체계들. 은모가 망연하고도 집요하게 응시하는 복도,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은모가 본 것은 말의 흔적이 아니라, 침묵이 단단히 현존하는 공간이다. 침묵은 어떠한 말들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진다. 기형도는 &amp;#39;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amp;#39;있다고 노래했다. 그러나 불행이도 침묵의 주식은 누구나 가지지 못한다. (매주 &amp;#39;라듸오&amp;#39;에서 정례 방송을 하던 이명박은 마치 복화술사처럼 정운찬을 내세운다. &amp;#39;너무 말이 많았던&amp;#39; 이명박은 &amp;lt;올드보이&amp;gt;의 이진우에게 혀가 잘리기 전에 교활하게도 침묵의 주식을 사들이는 것을 선택했다. 이 기묘한 영화와 현실의 참조.)&lt;br /&gt;&lt;br /&gt;철거용역들의 포크레인 공격을 막기 위해 화염병 사용을 제안하는 중식은 자신이 ‘책임을 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책임을 지지 못한다. 은모가 푸념했듯, (말은) &amp;#39;힘이 없&amp;#39;다. 중식은 자신이 &amp;#39;현역&amp;#39;이던 시절 그대로, 화염병으로 경찰이 올 때까지 용역들의 접근을 막고, 경찰이 몰려오면, 그 때 (시위 전력이 있는) 자신만 구속하는 조건으로 투쟁을 접으면 승산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더 이상 중식은 경찰이 구속하고 싶을 정도로 중요인물이 아니다. 다가오는 철거 용역들을 향해 중식이 외치는 &amp;#39;주거는 기본적인 인권이다&amp;#39;라는 구호는, 집이 주거 공간 보다는 (남들보다 빠르게 선점하고 되파는 것으로) 개인의 재화를 기형적으로 증식하기 위한 용도로 쓰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시대에, 뒤늦게 도착해버린 건조한 외침이다. &lt;br /&gt;&lt;br /&gt;‘이 일을 왜 하는 거에요? 이 일이 형부에게 무슨 보람이 되죠?’ 라는 은모의 말에, 그리고 의외로 솔직하고 담담했던 중식의 대답을 들어버린 우리가 그를 더 이상 지금까지와 같은 눈으로 볼 수 없었음을 기억하자. ‘처음에는 멋져 보여서 시작했던 것 같은데, 그 다음에는 내가 갚을게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지금은 잘 모르겠어. 그냥 내가 할 일이 생기는 것 같아. 끝이 안나.’ 중식의 이 말은 충분히 그 뜻을 인식 할 수 있기도 전에 창 밖에서 뿜어져 들어온 물줄기에 의해 중단된다. 그리고 물과 (쉼표) 불. &lt;br /&gt;&lt;br /&gt;&lt;br /&gt;&lt;em&gt;물과 불, 그리고 안개&lt;br /&gt;&lt;/em&gt;&lt;br /&gt;&amp;lt;파주&amp;gt;의 안개는 말하여진 말들, 입 바깥으로 나왔으나 육체를 얻지 못했던 말들의 형상이다. 안개는 끊임없이 우리 주위를 떠돈다. 당신과 나 우리 모두는 안개의 말을 해독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이 안개의 형상, 말의 형상은 기화된 물이다. 물은 불을 끈다. 우리 여기에 있다. 여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 창문이 없는 창밖으로 던져진 화염병의 불길을 덮어버리는 차가운 물. 그 물이 기화되어 안개가 된다. 그것이 말이 되고 거꾸로 산자들의 말을 덮어버린다. 이것은 선한 말과 악한 말의 대립이 아닌, 그러니까 물과 불의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역학이다. 물과 불이 엮여 안개가 되고, 무거워진 안개는 물로 다시 지상에 내린다. 이 모든 외침들, 의지와 욕망과 엇갈린 시선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젖어들듯 켜켜이 쌓여버린 땅. 그곳은 파주다. 당신과 내가 살아가는 모든 장소이다. &lt;br /&gt;&lt;br /&gt;결국 &amp;lt;파주&amp;gt;의 이야기는 땅으로 귀결된다. 토지대장에 올라가는 몇 번지 몇 호. 같은 기호가 아닌, 가장 물질적이면서 가장 근본적이고, 동시에 가장 첨예하게 정치적인 땅. 그 땅에 누가 머물 것인가, 어떻게 머물 것인가, 언제까지 머물 것인가. 그러니까 주인은 누가 될 것인가의 문제. 그리고 주인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의 문제. 진실이 묶여 있는 곳, 진실이 정주할 수 있는 땅을, 정말로, 마지막에는 발견할 수 있는가의 문제, 그곳에 결국엔 머물 수 있는가의 문제. 그렇다면 &amp;lt;파주&amp;gt;는 사나운 질문들만 남겨두고 등을 돌려버리는 영화인가. 아니다. 당신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 질문들의 해답을. 그러니까 이제 남는 것은 이 해답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 혹은 당신은 은모처럼 철조망을 내 오른쪽 혹은 등 뒤에 둔 채로 길 위를 (언제까지나, 영원히) 떠돌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까 절대로 그 너머로 넘어가지 못 한 채로, 그 안에서만 떠돌게 될 때, 그것을 용납할 수, 혹은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lt;br /&gt;&lt;br /&gt;&lt;br /&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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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21 Jan 2010 07:00:04 +0900</pubDate>
    <category><![CDATA[필진 리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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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네이키드] 오프닝 시퀀스와 엔딩을 곱씹으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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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center;clear:both;&quot;&gt;&lt;img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ad/59/woodyh79/folder/9/img_9_505_0?1264021204.jpg&quot; alt=&quot;&amp;#x00c0ac;&amp;#x00c6a9;&amp;#x00c790; &amp;#x00c0bd;&amp;#x00c785;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quot; height=&quot;281&quot; width=&quot;510&quot;/&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right;&quot;&gt;강연하&lt;br /&gt;&lt;/div&gt;&lt;br /&gt;이 영화는 대체 뭔가. 너는 대체 누구니. 반쯤 미친 채 끊임없이 분노하고 비꼬며 입을 놀리는 남자 주인공 조니와 그를 따라가는 영화, [네이키드]를 보며 계속 되물었던 생각들이다. 영화에서는 내 물음과 비슷하게, 여러 인물들이 서로에게 묻는다. 너 여기서 뭐하니. 런던에 왜 왔니. 이런 일을 왜 하니. 결국 내 질문도, 그들의 질문도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하고 영화는 끝난다. 이 영화가 걸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 애매하게 나와 성적인 분위기와 폭력적인 섹스장면 구성에만 역할을 하고 사라져버리는 몇 명의 여성들 때문에 불편한 지점도 있다. 하지만, 감독 마이크 리가 너무도 힘 있게 연출해낸 시네마틱한 장면들과 영화 전체에서 느껴지는 멜랑콜리한 정서는 분명 [네이키드]의 멋진 성취이고 주목해야 할 부분이며, 나로 하여금 [네이키드]를 곱씹게 한다. &lt;br /&gt;&lt;br /&gt;영화는 어두운 밤 맨체스터의 뒷골목에서 시작한다. 멀리서 남녀가 비명을 지르며 섹스를 하고 있고, 카메라는 미친 듯이 그들을 향해 돌진해 간다. 스크린에 제작사와 영화사 이름이 살며시 뜨고 사라지자마자 이어지는 이 충격적인 카메라 무빙은 단숨에 &amp;#39;[네이키드], 보통이 아니겠는걸.&amp;#39; 하는 예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남자는 여자를 벽에 밀어 붙인 채 반강제적인 섹스를 하고 있다. 여자가 욕설을 날린 후 도망치자 남자는 홱 돌아서 뛰어가고, 또 다시 카메라도 그를 따라 뛴다. 남자는 차를 훔쳐 타고 도망치듯 떠난다. 런던으로 향하는 도로의 몽타주가 이어지고, &amp;quot;NAKED&amp;quot; 타이틀이 검은 바탕에 흰 거친 글씨체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펼쳐진다. 이후 런던에 도착한 남자를 허름한 집들이 이어선 길목에 홀로 세워둔 채, 카메라는 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풍경과 남자를 함께 잡으며 무빙한다. 이 오프닝 시퀀스의 놀라운 리듬감을 잊을 수 없다. 아무런 동기나 설명 없이 단숨에 관객을 사로잡으며 앞으로 펼쳐질 영화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아니, 초대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돌진하듯 거칠게 달려가는 영화에 우리는 끌려가게 된다. &lt;br /&gt;&lt;br /&gt;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과 조응한다. 며칠 동안을 부랑자로 런던 거리를 헤매다 옛 애인 루이즈가 사는 집으로 돌아온 조니는 그녀와 함께 맨체스터로 돌아가기로 한 약속을 저버리고, 집 안의 돈을 움켜쥐고 다시 집을 나온다. 카메라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처음 들어섰던 거리를 절뚝거리며 빠져나가는 조니의 앞모습을 담으며 무빙한다. 안정과 약속을 뒤로 하고 다시 골목을 걸어가는 남자의 얼굴과 절뚝거림으로 문을 닫는 영화는 절망적이고 스산하다. &lt;br /&gt;&lt;br /&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center;clear:both;&quot;&gt;&lt;img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ad/59/woodyh79/folder/9/img_9_505_1?1264021204.jpg&quot; alt=&quot;&amp;#x00c0ac;&amp;#x00c6a9;&amp;#x00c790; &amp;#x00c0bd;&amp;#x00c785;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quot; height=&quot;279&quot; width=&quot;510&quot;/&gt;&lt;/div&gt;&lt;br /&gt;&lt;br /&gt;오프닝 시퀀스와 엔딩만으로는 [네이키드]라는 영화를 반의 반도 채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말로는 도저히 다 묘사할 수 없는 배우들의 끝없는 대사와 연기, 마치 세기말 풍경을 연상케 하는 런던의 뒷골목 장면들과 같은 여러 요소들이 합쳐져 영화는 강렬한 자기만의 세계와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영화 속 인물들의 구체적인 배경이나 행동 이유에 대해 끝까지 알 수 없지만, 분위기에 이끌려 점차 그들의 삶의 고단함과 분노에 동화된다. &lt;br /&gt;&lt;br /&gt;영화를 보면서, (재작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상영했었던) 미국 독립영화의 기수 할 하틀리의 초기 연출작 [심플맨]과 일정 부분 닮아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두 영화 모두 1990년대 초반에 나온 영화들이며, 그 시기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혼란과 절망적인 기운을 담아내고 있다. [심플맨]이 좀 더 형식적으로 진보적이며 정치적인 반면, [네이키드]는 좀 더 본능적이고 날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영화는 현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고 있는 &amp;quot;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amp;quot;의 상영작이다. 아직도 두 번의 상영이 더 남았고, 오프닝 시퀀스는 꼭 극장에서 봐야 진가를 느낄 수 있다. 할 하틀리의 [심플맨]을 본 관객이라면 1990년대 초반의 현실을 묘하게 비틀어 담아낸 두 영화를 비교하며 감상해보기를 추천한다. &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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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21 Jan 2010 06:00:04 +0900</pubDate>
    <category><![CDATA[필진 리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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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시네마테크, 영화, 그리고 친구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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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center;clear:both;&quot;&gt;&lt;img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ad/59/woodyh79/folder/9/img_9_506_2?1264021204.jpg&quot; alt=&quot;&amp;#x00c0ac;&amp;#x00c6a9;&amp;#x00c790; &amp;#x00c0bd;&amp;#x00c785;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quot; height=&quot;378&quot; width=&quot;510&quot;/&gt;&lt;/div&gt;&lt;br /&gt;&lt;div style=&quot;TEXT-ALIGN:right;&quot;&gt;김시원&lt;br /&gt;&lt;/div&gt;&lt;br /&gt;&lt;strong&gt;1.&lt;br /&gt;&lt;/strong&gt;내게 시네마테크는 지금의 영화 친구들을 만난 곳이다. 나는 혼자 영화를 보는 일이 익숙한 사람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그런데 이 곳에선 그러한 존재들을 꽤 많이 마주쳤다. 초반엔 경계심이 작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우리는 서로를 알아 챘다. 그것은 영화를 보고 나서 무언의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교신하려는 신호로서 이루어졌다. 내가 찌리릿한 이것을 너도 느꼈니? 너의 그 표정은 내 것과 같은 그것 맞지? 우리 같은 것을 본 것 맞지? 나는 어느 날인가부터 이 무언의 신호를 해석하고, 해석받고 싶어졌다. 온라인 회원 까페를 찾았고 무식한 티를 벗지 못한 어설픈 생각들을 감흥에 취한 채 나열하기 시작했다. 주업과는 관련 없는 공부를 들척이게 된 것 또한 이 곳의 영화들, 친구들과 제대로 소통하고 싶은 간절함 때문이었다. 까페 회원들이 반응을 해주는 날엔 세상이 밝아질 정도로 시야가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비 시네필이 시네필과 과연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을까. 늘 자괴감에 빠져 있던 나에게 시네필들은 하나 둘씩 말걸어 주었다. 나는 카페에서 지금의 친구들을 얻었다. 2008년 친구들 영화제 때에 트뤼포의 &amp;lt;녹색방&amp;gt;에 대한 글을 처음 썼는데 그 때에 한 10년 지기 시네필이 나에게 처음 반응해주었다. 믿기 어려웠다. 이어진 배창호 감독 특별전에서 알게 된 일본영화광이자 종교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는 심지어 내 글이 좋다며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 그 이후 역시 까페를 통해 만나게 된 대한민국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영화에 도전하고 있는 영화광 그 자체가 정체성인 씩씩한 언니, 공포와 슬래셔 무비를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눈망울 굴려가며 보는 귀여운 소녀, 그리고 지금 여기 네오 이마주까지 이어진 사람들까지. 이 모든 친구들과의 영화적 인연은 순전히 시네마테크로부터 시작되었다. &lt;br /&gt;&lt;br /&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center;clear:both;&quot;&gt;&lt;img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ad/59/woodyh79/folder/9/img_9_506_0?1264021204.jpg&quot; alt=&quot;&amp;#x00c0ac;&amp;#x00c6a9;&amp;#x00c790; &amp;#x00c0bd;&amp;#x00c785;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quot; height=&quot;190&quot; width=&quot;510&quot;/&gt;&lt;/div&gt;&lt;br /&gt;&lt;br /&gt;이 곳은 영화가 생소하던 나에게 고전 영화의 개봉관이나 다름 없었다. 또한 이로 인해 제2의 삶의 가능성을 발견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매너리즘의 낮 다음의 삶, 그 밤의 삶에 대한 새로운 종류의 흥분을 선사해주었다. 너무 늦게 온 것은 아닐까, 나만 혼자 멀리 온 것은 아닐까 싶은 순간마다 변함없이 불이 꺼지고 영화가 상영되었다. 불이 꺼지는 상태는 암흑이었으면서 동시에 또 다른 빛이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어둠은 절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막을 알리는 장면 전환효과로서의 암전이었다. 멀리 떨어진 오래된 시대의 영화들이 깜깜한 공간을 뚫고 빛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멀리 돌아온 현재의 나를 주인공으로 하여 둥글게 둘러 싼 거대한 원형극장 같았다. 그것은 혼란에 빠져있는 나를 포용해주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언제나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영화들은 대개 한 두회 상영으로 끝이 나게 되어 있었다. 나는 꽤 긴박한 사명감이라도 띈 것처럼 극장을 밤마다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타인에게 말해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amp;#39;약속있다&amp;#39;는 말을 밥먹듯이 하며 무척 바쁜 척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실상은 &amp;#39;시네마테크에 영화보러 간다&amp;#39;는 것이었으나 왠지 모르게 나는 이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lt;br /&gt;&lt;p&gt;이것은 점차 내 삶의 은밀한 행위가 되었다. 나는 이 곳에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만 인지되고 싶었다. 이 곳에서는 일상과는 다른 사람이고 싶었다. 시네마테크의 영화들과 나는 예정된 운명처럼 만나고 있었다. 이 만남은 시기상으로, 시선상으로도 늘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미 알려진 유명한 고전을 나는 완전히 새로운 영화처럼 보았고, 이미 지나간 영화적 표현 방식들을 나는 현대적인 방식으로서 수용했다. 이것은 시선의 오류를 낳기 시작했다. 그 날의 기록들은 엉뚱하고도 이해불가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혼자서는 충분히 들떠있었고 영화도 이런 나를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았다. &lt;/p&gt;&lt;br /&gt;&lt;p&gt;영화는 어긋난 시간과 인식을 탓하지 않았다. 영화는 생각보다 관용이 깊었다. 그것은 실체가 없는 환영이었으므로 나 같은 시선을 통과하는 것쯤은 별 문제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작은 움직임에도 온 몸을 통째로 반응하는 일은 영화도 나도 서로 즐거운 일이었다. 어쩌면 나의 영화에 대한 감정은 중세인들의 신에 대한 숭고심보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흠모에 가까웠다. 나는 그것을 찬양하기보다 그것을 닮고 싶었고 따라하고 싶었고 닮아가고 싶었으며 훔쳐내고도 싶었다. 나는 내 안의 경직된 종교성을 버려가고 있었다. 환영들의 움직임에 따라 굳은 신념들이 부드러운 운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절대적 진리에 정죄되어온 상대적 진리들이 유예상태를 벗어나고 있었다. 해방감이었다.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오류가 시작된 지점에 늘 재차 도착했다. 그 곳에 서지 않고는 그 너머를 볼 수 없었다. 시네마테크가 아니고는, 스크린이 아니고는, 감독의 카메라가 아니고는, 나의 한계를 도저히 넘을 수 없었다. 결국 난 그 지점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영화는 그 지점에 나를 세워주었다. 그는 고마운 내 삶의 인도자였고 그 이후 가는 길을 배반하지 않은 동지였다. &lt;br /&gt;&lt;br /&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center;clear:both;&quot;&gt;&lt;img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ad/59/woodyh79/folder/9/img_9_506_1?1264021204.jpg&quot; alt=&quot;&amp;#x00c0ac;&amp;#x00c6a9;&amp;#x00c790; &amp;#x00c0bd;&amp;#x00c785;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quot; height=&quot;247&quot; width=&quot;510&quot;/&gt;&lt;/div&gt;&lt;br /&gt;&lt;br /&gt;&lt;strong&gt;2.&lt;br /&gt;&lt;/strong&gt;서울 아트시네마에서 얼마 전 진행되었던 &amp;#39;헐리우드 고전 특별전&amp;#39;에서 만난 막스 오퓔스의 &amp;lt;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amp;gt;는 오퓔스의 영화관과도 같은 영화다. 마치 멜빌의 &amp;lt;당신이 이 편지를 읽을 때&amp;gt;를 떠올리게도 하는데 이 영화의 여주인공인 리사는 자신이 이미 죽은 시점으로부터 남자 주인공인 스테판에게 보낸 편지를 읽으며 영화의 내레이션을 시작한다. 리사는 영화 바깥에 처한 존재로서 영화 안에서 상상화(이미지화)된다. 오퓔스의 영화는 전체가 회상의, 원형의 구조이다. 그것은 환상적이면서도 물리적인 구조이다. 회상은 영화의 시선을 새롭게 배치한다. 리사의 회상으로 진행되는 영화는 드라마적 전개와는 별도로 시점과 메세지와 감정을 부과해간다. 거리에서 스테판에 의해 발견되는 리사의 이미지는 오퓔스가 영화에서 여성을 보여주는 방식의 전형적인 것이다. 그것은 거리의 여자, 창녀의 그것이다. 하지만 오퓔스 영화에서 이것은 관음적 시선이 아니다. 스테판이 리사를 보는 이미지는 스테판의 시선이 아니라 영화 바깥에서 내레이션하고 있는 리사의 시선이다. 이것은 스테판이 자신을 봐주길 바라는 상상적 이미지면서 동시에 리사가 쓰고 리사가 연출하고 있는 자신의 인생 극장같은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리사가 스테판과 첫 데이트를 하는 환영열차 신에서 다시 한번 분명하게 제시된다. 그들은 환영열차를 타고 마치 세계일주를 하는 것처럼 들뜬 채 실제 가보지 않은 여행지의 풍경을 생생하게 이야기한다. 이것은 영화의 환영성에 대한 반영적인 장치로 영화 이전의 파노라마를 연상시킨다. 리사는 자신의 스테판에 대한 운명적인 사랑을 철저히 판타지에만 의존한 채 재연한다. 그녀는 스테판과의 예정된 어긋남을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그녀는 좌절하지도, 자신을 설명하지도,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않는다. 영화는 리사와 스테판이 만나지 않은, 만날 수 없었던 시간을 재현한다.&lt;br /&gt;&lt;br /&gt;&amp;lt;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amp;gt;가 도착하여 읽혀지는 그 시간은 마치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보는 행위와 겹친다. 우리는 미지의 여인이 보낸 편지를 본다. 그녀는 철저히 자신의 상상적 이미지들을 우리에게 투영시킨다. 영화에서 우리가 직접적으로 목도할 수 있는 이미지란 없다. 우린 그녀를 통해서만, 그녀의 상상력에 의존해서만, 그녀의 욕망에 의해서만 볼 수 있다. 편지가 읽혀지며 보여질 때에야 그녀는 미지로부터 벗어나 우리에게 인식의 존재가 된다. 영화를 보고 나서야 우리는 이제 그녀가 누군인지 말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다른 세상에 있다. 그녀는 어찌 보면 순진함을 가장해 우리를 속였고, 조롱하기도 했으며, 이런 그녀는 부도덕하기도 했다. 그녀가 다른 세상으로 갔을 때(죽었을 때)에야 스테판이 그녀를 보기 시작한다. 이 또한 상상의 이미지다. 현실에서의 만남과 사랑의 맺음은 처음부터 리사의 의도로 인해 불가능했기에 치명적이고 운명적인 만남은 예정된 것이었다. 리사의 피학적 판타지와도 같은 이 영화는 필름의 릴이 돌아가며 상영해내는 고통스러운 영화의 상영을 상대적으로 느끼게 한다. 고다르와 세르주 다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푸코의 철학, 어떤 고통에 근거를 둔 윤리적 선택으로서 영화, 그 구제할 수 없는 오욕의 각인, 아니 오욕에 대한 윤리적인 구조 그 자체. 사물에 대한 감금이 해제됨과 동시에 해방과 감시가 교차하는 영역, 망각되어 있는 것의 오욕이 기억되어 있는 것의 오욕과 교착하는 영역의 그 영화. 영화는 개념적 망각의 어둠 속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빛으로 끌어 내는 것이었다. 여기엔 망각의 자유 속에서 안주할 지 모르는 것을 기억속으로 감광하는 오욕의 고통이 있다.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것의 윤리적 요청과 고통. 고다르에게 영화를 계속 찍는 다는 것의 윤리적 고통은 곧 스스로의 망각 속에 두어야 했을지 모르는 기억의 시선 속에 끊임없이 영화를 각인시키는 행위에 다름 아니었다. &lt;br /&gt;&lt;p&gt;스테판은 현실(결투)에 나가기 전 망각 속에 있었던 그녀의 영화를 봐야만 했다. 나 또한 그러했다. 시네마테크에서는 미지의 혹은 망각된 영화를 끊임없이 상영하고 우리는 그것을 계속해서 본다. 영화를 꿈꾸는 자들이 영화를 계속해서 찍듯이. 이것은 멈추지 않는 윤리적 고통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영화의 예정된 반복이자 그 운명이다. 이 강박은 운명에 힘을 싣는다. 관객은 압도된다. 새로운 응시들이 계속해서 이 운명을 우연처럼 목격한다. 응시의 대상으로, 기억의 대상으로서 탄생한 영화를 고통스럽더라도 지켜봐야하는 사회적인 윤리가 우리 안에 암묵적으로 형성되어가고 있다. 이것에 동의하는 이들이 영화에 매혹된다. 그들이 시네필이요 그들이야말로 영화의 친구들일 것이다. 시네마테크가 이 사회에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운명적 근거는 어쩌면 여기에 있다. 영화가, 그리고 그것을 만들고 보여주는 동지들이, 그것의 목격자인 우리들이 이렇게 계속해서 있기에.&lt;/p&gt;&lt;br /&gt;&lt;p&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lt;br /&gt;&amp;nbsp;&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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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21 Jan 2010 06:00:04 +0900</pubDate>
    <category><![CDATA[필진 리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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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39;2010 친구들 영화제&#39; [쳐다보지 마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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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center;clear:both;&quot;&gt;&lt;img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ad/59/woodyh79/folder/9/img_9_507_0?1264021204.jpg&quot; alt=&quot;&amp;#x00c0ac;&amp;#x00c6a9;&amp;#x00c790; &amp;#x00c0bd;&amp;#x00c785;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quot; height=&quot;277&quot; width=&quot;510&quot;/&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right;&quot;&gt;김시원&lt;br /&gt;&lt;/div&gt;친구들 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의 추천작으로 니콜라스 뢰그의 &amp;lt;쳐다보지 마라 Don&amp;#39;t Look Now&amp;gt;(1973) 를 보았다. DVD로 봤을 때의 날카로운 충격을 상대적으로 느낄 수 없었다. 영화가 나른한 공포감처럼 몰려왔다. 무척이나 강렬한 해체주의적 영화인데 예민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력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영화는 빨간 옷의 아이가 강물에 빠져 죽는 신으로부터 시작한다. 가족들은 아이의 죽음을 현재의 일상 속에서 목도한다. 인상적인 일상과 사건의, 집 안과 집 밖의 교차편집 오프닝 시퀀스는 그 이후 이어지는 영화의 모든 내러티브를 이 지점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이 시퀀스는 죽음이 발생하는 과정을 마치 도미노처럼 우연적이면서도 필연적인 물리적인 반응처럼 묘사한다. 마치 죽음을 위해 완벽하게 짜여진 각본처럼 죽음은 순차적인 불길한 이미지들의 누적으로서 발생한다. &lt;br /&gt;&lt;br /&gt;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를 소금기의 바닷물에 의해 부식하는 도시 베니스에서 찍은 가장 인상깊은 영화중의 한편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몰락하는 유럽의 문화와 도시의 비장미를 강조했다. 그러면서 등장인물들 모두가 실제로는 유령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내비쳤다. 줄리 크리스티가 식당에서 현기증을 일으키며 쓰러질 때, 그리고 도널드 서덜랜드가 성 니콜라스 성당의 복원 현장에서 사고를 당할 때 그들은 이미 죽은 것이며, 그 스스로의 죽음 이미지를 강 위에서 목도한 것이다. 그들은 이미 죽었고, 유령이 되었고, 그들이 좇는 심령술사 맹인 자매와 빨간 옷의 정체 모를 아이는 그들이 만들어 낸 환상이라는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플래시 포워드 기법을 인상 깊게 사용한 부부의 정사신을 이야기하면서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것에 대한 영화라고 말했다. 특히 미래가 개입하고 있는 현재성에 대해 언급하며 이러한 시각은 숙명론적인 것이자 현재를 현재화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실패의 이미지, 즉 현실과 현재의 바깥, 온통 포커스 아웃된 것들의 이미지들의 총체적 결합이다라고 했다. &lt;br /&gt;&lt;br /&gt;이러한 해석은 미래에 대한 현재적 나르시시즘과 같다. 그것은 이미 본 것(과거)에 대한 죄의식이자, 그것으로부터 발생된 미래의 심판 이미지이다. 현재는 이미 본 것과 앞으로 볼 것 안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에 점점 잠식당해가고 있다. 현재는 과거의 반작용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식당에서 남편이 창문을 닫자 출입문이 열린다. 그 문으로 티끌이 들어와 맹인의 눈에 박힌다. 아내는 맹인을 돕는다. 과거의 행동에 반작용처럼 지배당하는 현재를 우리는 우연이라는 명목상으로 목도하고 경험한다. 현재는 온통 어지럽고, 목졸리고, 피를 토한다. 지금 보는 이미지는 과거로부터 투영된, 이미 보았던, 이미 겪었던 것의 반영체이다. 완전히 새롭고 낯선 것은 현재의 조망권에 포착되지 못한다. 남편이 보았던 자신의 장례식은 자신의 미래 이미지일 수 있지만 이미 죽은 아내의 현실 이미지일 수 있다. 그가 좇게 되는 빨간 우비의 정체 모를 아이는 이미 목도한 자신의 아이의 죽음, 그 빨간 색에 대한 죄의식의 이미지를 투영한 자의식적 결과물이다. 그것은 현재에 와 완전히 낯선 이미지(연쇄 살인마)로 포커스 아웃되지 못한다. 그의 누적된 과거 이미지들의 시각성이 이 연쇄 살인마를 친숙한 자신의 핏줄로서 포커스 인하는 것이다. 죽음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이런 그야말로 시각적 영매일지 모른다. 이 영화에서 눈먼 영매는 어쩌면 맥거핀이다. &lt;br /&gt;&lt;br /&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center;clear:both;&quot;&gt;&lt;img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ad/59/woodyh79/folder/9/img_9_507_1?1264021204.jpg&quot; alt=&quot;&amp;#x00c0ac;&amp;#x00c6a9;&amp;#x00c790; &amp;#x00c0bd;&amp;#x00c785;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quot; height=&quot;307&quot; width=&quot;510&quot;/&gt;&lt;/div&gt;&lt;br /&gt;&lt;br /&gt;배창호 감독은 시네마테크 친구들 영화제 개막식에서 &amp;#39;영화를 통한 진정으로 강력한 체험이란 감독이나 작가가 자기의 삶에서 몸과 마음으로 절실히 느낀 체험을 관객들과 함께 느끼고 공유해서, 관객의 생각과 마음을 깊고 넓게 확장시켜주는 그런 체험이다&amp;#39;라는 말을 했다.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눈이란 성숙된 것이다. 친구들 영화제에서 감독들이 추천한 영화를 함께 보고, 그들과의 시네토크를 듣고 있으면 감독의 시각이란 관객보다 훨씬 정제되어 있고 밀도 있으며 입체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조망권역과 그 바깥의 영역을 나눈다. 영화의 화면을 만드는데 있어서의 내화면과 외화면, 즉 선택과 배제라는 영역을 항상 언급한다. 그들이 쇼트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심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영화를 확장시키고, 풍부하게 만드는 것은 영화의 기술적인 효과가 아니다. 그것은 시각의 고도화에 대한 체험이자 그 훈련이다. 고도화는 공감각적인 감각과 과학적 공간지각능력과 인문학적 정신의 깊이까지를 포함하는 단어일 것이다. &lt;br /&gt;&lt;br /&gt;이 영화는 박찬욱 감독이 언급했듯 깨지는 이미지, 유리의 잔상같은 영화적 이미지들을 동반하여 시작한다. 참을 수 없는 시각의 유혹층, 그 얇디 얇은 층에서 미끄러지듯 깨질 듯 시작하는 영화는 본 것을 끊임없이 의심하면서도 부정하지 못하는 곤경의 심안의 이미지체로 들어선다. 그 안에서 목도하게 되는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영혼의 이미지에서 감독은 이미지에 대한 영안에 도전하려한다. 이 영화에서 죽음은 시각의 가장 바깥층에 있는 유리의 깨짐으로부터 발생한다. 그 죽은 육체가 물안에 깊숙히 잠긴다. 얇은 시각층을 깨고 죽음을 목도한 시각이 물 속을 유영하며 아이의 시신을 찾아 건져올린다. 그는 이 물 속의 입체성을 통과하며 심안을 획득한다. 이 심안은 평안한 유리체로 구성된 현재의 이미지를 깨고 들어온 과거의 이미지를 찾아 유영한다. 그것은 이미 깨진 현재 바깥에 있었던 미래의, 보이지 않는 영역의 이미지들을 불러들인다. 이것은 영안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이 영화는 이미 목도한 것에 대한 윤리적인 질문들을 시각의 시간적, 공간적 층을 넘나들며 묻고 있다. &lt;br /&gt;&lt;br /&gt;&lt;br /&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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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21 Jan 2010 06:00:04 +0900</pubDate>
    <category><![CDATA[필진 리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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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시네마테크전용관’, 서울시가 나서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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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center;clear:both;&quot;&gt;&lt;img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ad/59/woodyh79/folder/14/img_14_508_7?1264021206.jpg&quot; alt=&quot;&amp;#x00c0ac;&amp;#x00c6a9;&amp;#x00c790; &amp;#x00c0bd;&amp;#x00c785;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quot; height=&quot;340&quot; width=&quot;510&quot;/&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right;&quot;&gt;백건영(영화평론가)&lt;br /&gt;&lt;/div&gt;서울토박이라서가 아니라 내 취향에 꼭 맞는 도시는 서울 밖에 없다고 생각했더랬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공기가 나쁘고 인심 사나운 교통지옥일지언정,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사는 일을 없을 것이라 다짐하곤 했다. 얼마간의 여행지라면 몰라도 서울 외에 다른 지방을 부러워해본 적이 없었으니, 문화예술 인프라에 관한한 더더욱 그러했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딱 한 곳, 서울에 없는 것을 가진 부산이 부러워졌다. 서울에 없는 것이라면, 부산국제영화제? 그야 때맞춰 내려가면 그만이지. 아니면 세계최대의 백화점 신세계 센텀시티? 패리스 힐튼도 아닌 마당에 나와 무슨 상관인가. 도처에 펼쳐진 바다와 지천에 널린 횟감? 회도 바다도 모두 좋아하지만, 어디 그런 곳이 부산뿐일라고. 파리에도 있고 로마와 뉴욕에도, 서구의 웬만한 도시 마다 하나쯤은 있으며 하물며 부산에도 있는데, 서울에는 없는 것. 다름 아닌 ‘시네마테크 전용관’이다. 그래서 나는 부산이 부럽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상문화도시로의 발돋움을 기획하고 지속적인 지원을 실행시켜가고 있는 부산광역시 공무원을 가진 부산 사람이 부럽다. 역으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살림을 맡고 있는 문화행정가들이 부끄럽다. 아니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lt;br /&gt;&lt;br /&gt;시네마테크가 뭐 그리 중요하기에 이렇듯 부산과 서울을 단순비교 하면서 호들갑이냐고 말할 런지 모르겠다. 시네마테크는 한 마디로 ‘영화의 집’이다. 영화를 발굴하여 보존, 복원하고 상영하는 공간으로서의 시네마테크의 시작은, 1930년대 초 유성영화 시대의 도래와 맞물린다. 즉 토키시대에 문화유산으로서의 영화를 보존하고 이후 세대를 위한 영화 역사의 전달 임무를 지닌 시네마테크가 전 세계적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 알다시피 서구에서 영화는 산업에서 예술의 대상으로 종국에는 문화유산의 대상으로 변해왔다. 이때 시네마테크를 이루는 추동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게 되는데, 하나는 시네필의 고유한 노력과 역할이며 다른 하나는 국가의 제도적 역할이다. &lt;br /&gt;&lt;br /&gt;&lt;br /&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center;clear:both;&quot;&gt;&lt;img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ad/59/woodyh79/folder/14/img_14_508_9?1264021207.jpg&quot; alt=&quot;&amp;#x00c0ac;&amp;#x00c6a9;&amp;#x00c790; &amp;#x00c0bd;&amp;#x00c785;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quot; height=&quot;383&quot; width=&quot;510&quot;/&gt;&lt;/div&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center;clear:both;&quot;&gt;&lt;img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ad/59/woodyh79/folder/14/img_14_508_8?1264021206.jpg&quot; alt=&quot;&amp;#x00c0ac;&amp;#x00c6a9;&amp;#x00c790; &amp;#x00c0bd;&amp;#x00c785;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quot; height=&quot;283&quot; width=&quot;510&quot;/&gt;&lt;/div&gt;&lt;br /&gt;&lt;br /&gt;시네마테크의 상징처럼 알려진 &amp;#39;시네마테크 프랑세즈(Cinematheque Francaise)&amp;#39;를 보유한 프랑스의 경우, 일찌감치 영화를 문화유산으로 인정하고 고유한 지위를 부여했다. 프랑스가 문화유산으로서의 영화에 대하여 제도적 지원을 적극 실시했다면, 미국의 경우는 시장에서 비상업적인 방식의 영화 상영을 통해 시네마테크 문화를 활성화시켰다. 예컨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재정의 90%가 문화부와 CNC(국립영화센터-우리의 영화진흥위원회 격)의 지원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 미국의 대표적 시네마테크인 ‘필름포럼(Film Forum)’의 경우 이사회를 비롯해 개인, 단체, 기업 후원회원을 통해 재원을 조달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시네마테크인 서울아트시네마도 서구의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lt;br /&gt;&lt;br /&gt;서울아트시네마는 2002년 5월 10일 소격동 선재센터에서 개관해 시네마테크의 역할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시작했는데, 영화진흥위원회의 ‘시네마테크 전용관 지정위탁’ 사업자로 선정된 이후 현재까지, 영진위의 재정지원(임대료)과 극장활용수익을 통해 운영비를 충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lt;br /&gt;&lt;br /&gt;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시네마테크를 가진 도시답게 파리에는 약 150개의 독립영화관과 89개의 실험영화관이 있다. 게다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필두로 ‘제오드’, ‘포럼 데 이마지’, ‘퐁피두센터’ 등에서는 고전향취 물씬 풍기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시네필을 유혹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부러워해야 할 것은, 파리시의 영화산업 지원정책이다. 이를테면 상업 활동이자 예술로서, 청년층이 가장 선호하는 문화여가활동으로서 영화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영화산업을 행정측면에서 지원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를 위해 파리시에서는 프랑스 국립영화연맹 등과 협력해 다양한 정책을 시도하고 있다. 영화관람 권장 행사를 벌이는 한편, 영화관 현대화 정책을 병행함으로써 문화예술의 도시 파리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분투 중이다. &lt;br /&gt;&lt;br /&gt;파리시는 독립영화관들, 오래된 유명 영화관들, 동네 영화관들을 지원하기 위해, 프랑스 예술 및 실험영화단체와 협력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지원정책을 지속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프랑스의 가장 유명한 영화감독 모임인 ARP가 프랑스 및 유럽영화를 적극적으로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직접 &amp;#39;영화인들의 영화관(Le Cinema des cineastes)&amp;#39;을 경영하는 것도, 이러한 파리시의 적극적인 영화예술에의 지원정책에 힘입은 결과다. 정책방향과 정책적 지원주체와 형태에서 다소 차이가 있을 뿐, ‘필름 소사이어티’나 ‘시네마테크 온타리오’ 같은 북미의 시네마테크들 역시, 영화산업의 육성 및 보존을 위한 해당 시의 적극적인 정책적 지원에서 기원한다. 그렇다면 서울시는 문화예술, 좁혀서 영화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지원하고 있을까? &lt;br /&gt;&lt;p&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center;clear:both;&quot;&gt;&lt;img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ad/59/woodyh79/folder/14/img_14_508_10?1264021207.jpg&quot; alt=&quot;&amp;#x00c0ac;&amp;#x00c6a9;&amp;#x00c790; &amp;#x00c0bd;&amp;#x00c785;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quot; height=&quot;277&quot; width=&quot;510&quot;/&gt;&lt;/div&gt;&lt;br /&gt;&lt;br /&gt;서울시가 내놓은 2010년 시정 중점 과제 중 하나는 ‘일상에서 문화가 흐르는 예술도시 구현’이다. 참으로 소박하고 아름다운 구호다. 연중 시청 앞 광장에서 음악회를 열고 청계천의 밤빛을 배경 삼아 다양한 문화행사를 기획 중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놈의 서울특별시 문화행정을 총괄하는 문화국의 콘텐츠에는 ‘영화’가 쏙 빠져있다. 아니 영화‘만’ 빠져있다. &lt;br /&gt;&lt;br /&gt;정작 심각한 문제는 편중된 예산편성이다. 즉, 일상에서 문화가 흐르는 예술도시를 지향하겠다는 서울의 1년 예산 가운데, ‘문화’ 분야 예산이 (일반회계를 기준으로)1.8%에 불과하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겠다. 그러니까 2010년 서울특별시 총예산 21조 2853억 중 문화부문 예산은 3,769억 원이고, 이 가운데 ‘문화시설 건립운영 지원’에 242억 원을 배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외적으로 수도서울의 위상을 과시하기 급급한 공공프로젝트와 일회성 행사에 치중한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광화문 광장에서 계절스포츠 행사를 치르느라 시설물을 세우고 부수기를 반복하며 예산을 쏟아 부을지언정, 시네마테크 하나 건립하는 데는 시가 발 벗고 나서는 법이 없으면서, 무슨 재주로 ‘일상에서 문화가 흐르는 예술도시’를 만들겠다는 말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영화만큼 시민의 일상과 밀접한 문화예술분야가 또 어디 있다고.&lt;br /&gt;&lt;br /&gt;앞서 말했듯이 파리와 뉴욕의 시네마테크가 너무나 부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서울과 단순 수치로 비교할 마음은 없다. 그래서 다시 부산으로 돌아간다. 서울의 일 년 예산 중 문화부문에 배정된 것이 1.8%(3,769억 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부산은 어떨까? 부산광역시의 2010년 총예산은 7조 2,136억 원으로 서울의 1/3 밖에 안 된다. 그런데도, 이중 문화관련 예산은 3.040억 원이고, 영화와 직접적 연관이 있는 영상센터 건립에 565억 원이, 영상중심도시 지속사업에 650억 원이 배정되어 있는 등, 그야말로 ‘영상산업도시 부산’의 면모가 예산편성에 드러나 있다(서울특별시 공식홈페이지 문화국 콘텐츠에는 ‘영화’만! 빠져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lt;br /&gt;&lt;br /&gt;2006년 4월의 어느 밤, 종로타워 바에서 ‘앱솔루트 트리오’의 리더인 피아니스트 페터 폰 빈하르트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내 직업을 알아차린 그는 자신도 영화광 못지않은 애호가임을 밝히면서 대뜸 “기회가 되면 서울의 시네마테크를 가보고 싶다”고 했다. 순간 뜨끔한 마음에서 임기응변으로 “유럽만큼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곳은 아니지만, 서울에도 시네필의 기운이 살아있는 시네마테크가 있다”고 호기 있게 말하면서 나도 모르게 서울아트시네마 쪽을 바라보았다. 만약 그가 서울아트시네마를 방문했더라면, 무엇을 보았을 것이며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수집, 보존, 복원, 연구, 상영의 공간인 우리들의 시네마테크의 뒷모습은, 오랜 벗처럼 겹으로 똬리를 튼 낡은 영사기와 만성적 재정문제라는 검은 그림자가 아닐까. &lt;br /&gt;&lt;br /&gt;만성적자와 노후 된 설비와 제대로 된 교육 공간 하나 없이, 이 남루한 하드웨어를 몸에 가난처럼 짊어지고도 우리의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는, 8년 세월을 시네필의 성소로 버텨왔다. 그렇다고 서울아트시네마의 활동이 외국의 시네마테크에 비해 모자랄까? 천만의 말씀이다. 프로그래밍만 놓고 본다면 뉴욕의 필름포럼보다 더 낫다는 사실을 당신은 아는가. 필름아카이브 구축과 현대식 영사시설의 구비가 급선무이긴 하나, 이처럼 기획전과 대관전을 비롯해 교육상영과 포럼, 출판에 이르기까지, 척박한 환경을 딛고 이뤄온 서울아트시네마의 성과는 실로 놀라울 정도다. &lt;br /&gt;&lt;br /&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center;clear:both;&quot;&gt;&lt;img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ad/59/woodyh79/folder/14/img_14_508_6?1264021206.jpg&quot; alt=&quot;&amp;#x00c0ac;&amp;#x00c6a9;&amp;#x00c790; &amp;#x00c0bd;&amp;#x00c785;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quot; height=&quot;259&quot; width=&quot;510&quot;/&gt;&lt;/div&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center;clear:both;&quot;&gt;&lt;img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ad/59/woodyh79/folder/14/img_14_508_0?1264021205.jpg&quot; alt=&quot;&amp;#x00c0ac;&amp;#x00c6a9;&amp;#x00c790; &amp;#x00c0bd;&amp;#x00c785;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quot; height=&quot;250&quot; width=&quot;510&quot;/&gt;&lt;/div&gt;&lt;br /&gt;&lt;br /&gt;영화는 산업이면서 예술이고 문화인 동시에 유산이다. 서구의 국가들은 이미 70여 년 전 이를 인식하고는 찬란한 유산을 후대에 남겨줄 공간으로 ‘영화의 집’을 기획하여 실천에 옮겼으며, 이 노력은 각 도시와 구역을 중심으로 현재도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인구 1,200만 명의 거대도시 서울특별시는, 이곳에 ‘시네마테크전용관’ 하나 없다는 사실을 인식이나 하고 있을까? 나는 진심으로 서울시장에게 묻고 싶다. 도대체 문광부와 영화진흥위원회가 양동작전으로 생사여탈권을 휘두르는 야만적 작태를, 자발적으로 시작하여 문화운동을 거쳐 하나의 보통명사가 되어버린 ‘서울아트시네마’의 외롭고 고단한 싸움을 언제까지 외면하고 방치할 것인지를. &lt;br /&gt;&lt;br /&gt;시네마테크 전용관에 관한 공모제가 공표될 날도 머지않았다. 어차피 이치에 맞지 않은 제도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입 아픈 일일 테니 이제는 무시하기로 하자. 설사 그렇더라도 ‘1000만 영화 관객 시대’를 질주하는 한국에서 전용관 하나 구할 수 없어 떠도는 한국 시네마테크의 현실이 여기에 있다는 점만큼은 분명히 알려야 한다. 2005년 4월 3일 &amp;lt;안녕, 용문객잔&amp;gt;을 끝으로 낙원동으로 이사 온 이래, 시네마테크는 다양한 경로와 방법을 통해 ‘시네마테크전용관’의 필요성을 호소해왔다. 그러나 영진위나 문화부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5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용관에 대한 마스터플랜은 고사하고 기본 계획조차 전무한 집단에 더 기대할 것이 없어 보인다. 셋방살이가 고달픈 게 아니라 삶 자체를 부정하고 폄하하려는 냉소적 시선을 못 견디겠다는 것이다. &lt;br /&gt;&lt;br /&gt;이제는 시네마테크 전용관 건립과 유지 발전을 위해 서울시가 나서야 할 때이다. 지금 발 벗고 나선다 해도 부산보다 10년이나 늦었다. 무엇이 두려운가. ‘일상에서 문화가 흐르는 예술도시를 구현’하겠다는 거창한 캐치프레이즈에 걸 맞는 사업으로 ‘시네마테크전용관’ 만큼 확실한 보증수표가 또 있을라고. 시네마테크전용관이야말로 600년 고도(古都)의 문화유산 남대문과 근대화의 상징인 남산타워에 이은, 서울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할 것이라 확신한다. 서울시가 앞장서서 그 일을 맡는다면, 박수치면서 애써 도울 사람은 천지에 널려있다. 왕조는 무너져도 왕조의 기록은 역사로 남듯이, 지방자치단체의 역할과 성취가 훗날까지 남겨질 만한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문화예술에 기여한 공로만한 것도 없을 터. 정치적 논리를 떠나 문화예술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인식을 가진 기관장의 용기와 실천이 보태진다면, 서울시민도 시네마테크 전용관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영화의 집’이 필요하다. 그러니 서울시가 나서라! &lt;br /&gt;&lt;br /&gt;&lt;br /&gt;&lt;br /&gt;(추신) &lt;br /&gt;하나. 시장을 시민의 손으로 뽑게 된 이래로 ‘시네마테크’를 공약으로 내세운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놀랍지만, 한편으로는 시네마테크를 사랑하는 이들이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대처한 건 아닌지 되물어 봐야 한다. 단합된 힘을 보여주면서 압박도 하고, 새로운 시장선거의 공약으로 채택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공약이 얼마나 멋지고 매력적이면서 서울의 미래를 풍요롭게 할 것인지를 각인시키고 요구해야 할 것이다. &lt;br /&gt;&lt;br /&gt;둘. (오래전부터 주장해온 일이지만) 정말로 시네마테크를 사랑한다면, ‘관객회원’들은 4,000원의 할인금액이 아닌 오히려 일반 관객보다 단돈 1,000원이라도 더 내고 영화를 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건 수혜자부담 원칙을 떠나 애정표현의 실질적 방법의 문제이다.ㅡ머리를 맞대고 고민한다면, 추가요금의 부담만큼 다른 혜택으로 보상해주는 방법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 않을까ㅡ나는 시네마테크 측이 과감하게 이 문제를 공론화 하고 다양한 경로로 의견수렴을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당신이 진정으로 시네마테크의 친구이고 서울아트시네마의 열혈관객이라면, 회원에 가입하고 더 많이 자주 찾는 것만큼이나 기꺼이 (특히나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 지갑을 열어야 한다. 가끔씩 어디선가, 이명처럼 들려오거나 매체의 지면으로 접하던 “이 좋은 영화들을 너무 싼 값에 봐서 미안하다”는 말들은 괜한 소리였던가. &lt;br /&gt;&lt;br /&gt;&lt;br /&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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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21 Jan 2010 06:00:07 +0900</pubDate>
    <category><![CDATA[필진 칼럼]]></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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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09 서독제 장편초청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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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center;clear:both;&quot;&gt;&lt;img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ad/59/woodyh79/folder/9/img_9_501_0?1261125677.jpg&quot; alt=&quot;&amp;#x00c0ac;&amp;#x00c6a9;&amp;#x00c790; &amp;#x00c0bd;&amp;#x00c785;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quot; height=&quot;306&quot; width=&quot;510&quot;/&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right;&quot;&gt;&lt;br /&gt;김시원&lt;br /&gt;&lt;/div&gt;&lt;br /&gt;&lt;strong&gt;홍형숙 &amp;lt;경계도시2&amp;gt;&lt;br /&gt;&lt;/strong&gt;&lt;br /&gt;&lt;p&gt;2003년에 제작된 이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해 영화로서의 형식에 대한 논의를 하기엔 우선적으로 껄끄러운 지점이 있다. 영화가 소재주의에 함몰된 경향을 운운할 수는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가 소재로 삼은 대상에 대한 무지, 즉 송두율 개인에 대한 삶을 언론을 통해서 보도 받은 대로 알고 믿고 있었던 역사적, 정치적 무의식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의 부끄러움을 사실 스스로도 숨길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국내의 독립 다큐멘터리 운동의 시작이 된 공동체 중 하나인 서울영상집단에서 영화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계속적으로 사회 정치적인 운동으로서의 다큐를 만들어오는 홍형숙 감독은 이 영화의 카메라를 여러 사람에게 옮겨 다니면서 찍게 한다(촬영자만 5-6명은 되었던 것 같다). 그녀가 카메라를 들지 않았을 때는 스스로 카메라에 등장해보이기도 한다. 여러 사람이 든 카메라에 담기는, 이 영화의 소재이자 주제인 송두율의 모습은 어떤 함축적 경계를 두고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감독의 관찰자적 내레이션이,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송두율의 말보다 더 신뢰가 가는 광화문 전광판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헤드라인이, 그가 검찰에 출두할 때만 쫓아다니는(즉 국내에서 주로 이루어진 그의 학술활동 등엔 관심이 전무하다시피 한) 기자들의 무식한 폭력에 가까운 취재 행태가 그를 계속 경계선 위로 몰아세우는 느낌을 준다. &lt;/p&gt;&lt;br /&gt;&lt;p&gt;송두율의 통일철학에 대한 핵심론은 변두리로 몰려나고 그의 배후 세력 캐기에 온통 집중하는 이 나라의 주류 언론들은 그를 정치인이나 연예인의 가십거리에 열 올리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수준으로서 대한다. 당시엔 진실처럼 우리 위를 군림했던 이들의 명제와도 같은 주장들은 1년도 채 안되어 거짓임이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 당시 진실로 받아들였던 자신의 기억에 보다 절대적인 우위를 둔다. 송두율이 구속되는 이미지가 남았을 뿐, 그가 무죄가 되어 언론과 그로 인해 좌우지되던 남한 사회를 향해 가했던 일침을 제대로 본 사람도, 기억하는 사람도 드문 것이다. 게다가 그가 독일로 결국 돌아간 것, 남한 사회에서의 통일 관련 일을 접은 사실은 거의 아는 사람만 아는 일이 된 것이다. &lt;br /&gt;&lt;br /&gt;&lt;br /&gt;송두율은 남한으로의 귀국을 결심했을 때 어차피 스스로는 경계인이기 때문에 국내의 어느 정도 부정적인 반응을 예상했겠지만 그것은 예상보다 훨씬 대단한 것이었다. 남한에서 사상적 경계선은 곧 회색지대나 다름없다. 대한민국의 경계엔 군사적 긴장(군인과 철조망)만이 흐른다. 그 곳은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니다. 그 곳은 이 나라에서 가장 위험한 지대이다. 자신의 identity에 대한 질문에 가장 먼저 nationality(대한민국 국민임)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만큼 우리는 한반도 경계선의 남쪽을 &amp;#39;내부(자아)&amp;#39;로, 북쪽을 &amp;#39;외부(타자)&amp;#39;로 인식한다. 우리는 이 경계의 &amp;#39;안&amp;#39;에 속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긴다. 그런데 밖에 소속된 자가 신분을 버젓이 유지한 채 이 안에 오려고 한다. 안과 밖을 평화적으로 통일하자며, 내 안의 타자를 발견하자고 한다. 이것은 우리의 identity의 존재적 근거를 위협하는 자의 그러한 발언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이 나라의 국경선을 구성하는 하나의 구성원이다. 우리에게 이 나라의 정체성은 비판적이던 친화적이던 우리의 영원한 소재이자 주제이다. &lt;/p&gt;&lt;p&gt;&lt;br /&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center;clear:both;&quot;&gt;&lt;img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ad/59/woodyh79/folder/9/img_9_501_1?1261125677.jpg&quot; alt=&quot;&amp;#x00c0ac;&amp;#x00c6a9;&amp;#x00c790; &amp;#x00c0bd;&amp;#x00c785;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quot; height=&quot;367&quot; width=&quot;220&quot;/&gt;&lt;/div&gt;&lt;br /&gt;&lt;br /&gt;&lt;p&gt;&amp;lt;경계도시2&amp;gt;에서는 송두율에 대해 친화적이던 비친화적이던 누구나가 훈수를 두려고 한다. 사람들은 개인 철학자 송두율 교수를 마치 사회의 대안적인 영역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그 자체의 존재에 대한 찬반을 표명하는 것처럼 군다. 철학자 세미나를 마친 리셉션 자리에서 대표적 보수인사인 한홍이 송두율에게 건배를 제의하며 &amp;#39;당신 피엔 예수의 피가 흐른다. 핍박받는 것은 당연하다. 사오로가 바오로가 됐듯이 당신도…….&amp;#39; 운운하고(이날 한홍은 거의 전향을 선언했다?), 송두율의 귀국 후 긴박하게 돌아가던 검찰 수사에 대한 비대위에 모인 사람들은 &amp;#39;당신은 어떤 사람이다&amp;#39;, &amp;#39;대한민국은 당신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amp;#39;, &amp;#39;따라서 당신은 이처럼 행동해야만 한다&amp;#39;고 끊임없이 제의하고 주장한다. 송두율은 거의 침묵으로 일관한다. 사실 관계를 묻는 질문(자신이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임을 북한 방문 전에 알았는가에 대한 문제 등)에도 헛갈리는 대답들을 내놓는다. 37년 만에 밟은 고향 땅에서 송두율은 스스로의 identity로 여겼던 borderer에 대해 근본적인 위협을 받는다. 이 나라엔 &amp;#39;대한민국 국민&amp;#39;과 &amp;#39;북조선 인민&amp;#39;만이 존재한다(외국인 노동자와 탈북자, 교포2세들의 문제도 여전히 있겠지만 그들의 출신이 어디든 이 &amp;#39;고귀한&amp;#39; 땅을 선택한 이상 엄연히 이전의 사상을 버리고 대한민국 헌법 사상으로 전향한 사람이다). 그것의 선택은 자유이다. 다만 제3의 변수는 없다. &lt;/p&gt;&lt;br /&gt;&lt;p&gt;송두율은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아버지의 땅을 밟고 싶어 했다. 그리고 민족주체철학자로서, 남과 북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경계인으로서 고국을 방문해야만 했다. 남한이 보수 세력의 집권에 눌려있을 시절 북한에서의 활동이 있었고 2000년 들어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었다. 그는 이 화해적인 분위기에 힘입어 더 늦기 전에 남한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만들어가야만 했다. 하지만 이 학자의 철학적 소신에 따른 행동적 실천은 국가 전체의 이데올로기를 뒤흔드는 일대 혼란적인 이슈가 된다. &amp;#39;당신이 무엇이기에 남한에 와서 스스로를 &amp;#39;borderer&amp;#39;로 말하느냐?&amp;#39;, &amp;#39;북한 노동당원이 국내 간첩으로 대대적으로 귀화하는 뻔한 공작에 우리가 또 속을 것 같으냐?&amp;#39; 언론과 여론은 하나가 되어 송두율의 남한 귀국에 대한 관점이 아니라 이 기회에 우리가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모든 이데올로기적 근거들을 쏟아내며 이 나라의 border를 또 한 번 단체적으로 그려나가는데 집중하기 시작한다. 송두율은 어떤 사람이냐를 이야기하는 것은 곧 송두율은 &amp;#39;대한민국&amp;#39;에서 어떤 사람이냐를 말하는 것과 같아진다. 세계적으로 그는 유명한 주체철학자이자 민족평화운동에 앞장서는 지식인인데 이 나라에선 노동당에 가입된 북한 공작원 김철수로서 당연히 분리조치(구속수감)되거나 추방되어야할 사람일 뿐이다. &lt;/p&gt;&lt;br /&gt;&lt;p&gt;송두율은 이 같은 남한 사회에 대해 할 말을 잊은 듯 사람들의 훈수와 인터뷰 요청에도 거의 어떠한 제스처도 하지 않다가 기자회견을 통해 결국 &amp;#39;독일 국적을 포기하고 국내 귀화하겠다&amp;#39;는 선언을 한다. 대한민국 헌법을 따라서 북한에서 편향된 활동을 한 점을 사과하고 사법처리 되어야할 부분은 엄중하게 받겠다는 것이다. &amp;#39;경계인&amp;#39;으로서의 정체성을 주장하던 그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는 이 &amp;#39;대국민 사과&amp;#39;에 진정성이 부족했다는 여론의 채찍을 맞고 수차례의 검찰 조사를 더 받은 후 결국 구속 수감된다. 송두율은 2003년 귀국 시점부터 신문과 뉴스의 톱을 장식하며 일대 이슈 메이커가 되었지만 스스로의 반전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부로 밀려났다. 그가 구속된 바로 그 시점부터 언론과 여론은 일제히 그에게서 관심을 접는다. 몇 개월 후 항소심에서 승리하고, 노동당원으로서 활동한 적이 없음을 확인받아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이미 사람들의 관심밖에 멀어진 후의 일이었다. 그 당시 우리의 반응과 대처는 옳았고, 송두율은 국내에서 사상 검증을 받은 후 감옥에 갔었던 사건으로 기억돼있을 뿐이다.&lt;/p&gt;&lt;br /&gt;&lt;p&gt;전편의 &amp;lt;경계도시&amp;gt;가 송두율이 국내 귀국을 시도하다 좌절된 사건을 그의 베를린에서의 일상적인 모습들과 함께 스케치하며 마치 일기같은 형식으로서 기록했다면 &amp;lt;경계도시2&amp;gt;는 본격적인 국내 다큐멘터리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려 한다. 영화는 정치적 민감함을 건들인 개인, 그 집단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개인의 모습을 철저하게 따라가며 사회적 활동가의 기록물로서 우리에게 전달된다. 영화는 당시 KBS에서 제작 방영한 송두율 관련 다큐의 편파성 논란으로 인해 KBS사장까지 해임되는 사건을 보여주면서 이에 따라 &amp;lt;경계도시2&amp;gt;영화를 TV 방송분으로 내보내려했던 계획을 접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린다. 국영 방송이 허용하는 미디어 활동과 영화의 다큐멘터리 활동사이의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하지만 2003년에 벌어진 민감한 정치적 상황을 기록한 영화가 2009년에 와 상영(완성)될 수 있었던 것을 본다면 독립 다큐멘터리로가 가진 운동의 한계성도 분명 느껴지는 것이다. &lt;/p&gt;&lt;p&gt;이 당시의 생생한 활동의 영화가 2009년의 지금에 와 과거의 기억과 망각을 사유하는 영화가 된 것은 기획 의도로 보았을 때 좀 아이러니하다. 지금 존재하지 않는 송두율의 과거 영상을 끄집어 내 편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시간이 지난 영화를 지금 트는 것이다. 이것은 엄연히 말해 다큐 집단의 다큐멘터리 운동의 일환으로 보기엔 어려운 점이 있다. 영화는 생생한 현장을 위험을 무릅쓰고도 쫒으며 가려진 진실의 이면을 드러내고자 애쓰는데 이 지점에서의 감흥은 6년이란 시간이 지나 우리에게 이 시간을 &amp;#39;기억&amp;#39;하는가의 또 다른 화두를 제시하며 그 날의 진실을 알지 못했던 현재의 관객을 반성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한다. 이 지점은 송두율이 석방 후 소회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언론이 &amp;#39;계몽&amp;#39;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신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는 말을 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이 영화의 운동성은 결국 소재적이고 주제적인 것으로부터의 운동성에서 멈추지 않고 시간의 흐름을 지나 형식적인 운동성이 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지금 우리에게 어떤 &amp;#39;계몽&amp;#39;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현실에서 실패한 운동을 기록한 영화를 뒤늦게 볼 때 이 영화는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필름 위, 우리의 망각, 그 시절에만 군림했던 언론, 혹은 나올 수 없었던 국영 텔레비전 화면 위. 아니면, 2003년의 상상적 스크린. 그도 아니면 그냥 보이는 그대로 2009년의 스크린?&lt;br /&gt;&lt;br /&gt;&lt;br /&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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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8 Dec 2009 17:41:17 +0900</pubDate>
    <category><![CDATA[필진 리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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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09 서독제 장편초청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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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center;clear:both;&quot;&gt;&lt;img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ad/59/woodyh79/folder/9/img_9_502_0?1261125678.jpg&quot; alt=&quot;&amp;#x00c0ac;&amp;#x00c6a9;&amp;#x00c790; &amp;#x00c0bd;&amp;#x00c785;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quot; height=&quot;340&quot; width=&quot;510&quot;/&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right;&quot;&gt;김시원&lt;br /&gt;&lt;br /&gt;&lt;div style=&quot;TEXT-ALIGN:left;&quot;&gt;&lt;strong&gt;이송희일 &amp;lt;탈주&amp;gt;&lt;br /&gt;&lt;br /&gt;&lt;/strong&gt;도시의 밤, 청춘들이 오토바이를 탄 채 거리를 질주하고, 카메라는 이들의 얼굴을 바짝 쫓는다. 이들은 절망했고, 벗어나고 싶고, 도망치고 싶어 담을 넘고 숲을 지나 도로 위를 나온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중요하진 않다. 다만 지금 여기 정주하고 싶지 않다. 그래선 안 된다. 붙잡힐 것이기 때문이다. 범죄라도 저지른 것일까. 어쩌다 여기까지 온 것일까. 김성수 감독의 &amp;lt;비트&amp;gt;(1997) 이후 12년이 지난 2009년, 한국 중견의 감독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거리의 청춘들을 오토바이에 태우기 시작한다(정성일 &amp;lt;카페느와르&amp;gt;, 김정 &amp;lt;경&amp;gt;, 박찬옥 &amp;lt;파주&amp;gt;, 이송희일 &amp;lt;탈주&amp;gt;). 그들(청춘과 카메라)은 밤 혹은 안개 속의 거리, 그 불확실한 시야의 도로 위를 헤드라잇 불빛 하나에 의지한 채 달린다. 어쩌면 레오 카락스 영화의 오토바이 질주를 떠올린다. 그 새까만 어둠을 향해 온몸으로 춤을 추다 오토바이에 몸을 싣는 드니 라방과 줄리엣 비노쉬. 그 엄청난 속도에도 불구하고 눈빛 하나 떨지 않은 채 정면의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는 눈동자. 완전히 절망했거나 완전히 포기한, 백지 같은 얼굴의 순전함, 그 검은 눈동자속의 작은 흰 빛 같은 것. &lt;br /&gt;&lt;br /&gt;&amp;lt;탈주&amp;gt;는 세 젊은이가 군대로부터 탈영한 직전의 상황으로부터 6일 간의 여정을 담고 있다. 강재훈 일병(이영훈), 박민재 상병(진이한)과 함께 나온 친구는 가장 먼저 다리에 총격을 맞는데, 해병대 출신 아버지가 헬기 위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기겁한 나머지 자살해버린다. 그 친구는 집으로 가도 군대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재훈은 죽어가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민재는 예전 여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출을 감행한다. 하지만 민재의 불안한 심리상태와 불완전한 정신상태(군대 내 성폭행사건으로 인한)는 이들을 끊임없이 티격태격하게 만들면서 수시로 위기적인 상황에 마주치게 한다. 하지만 수색대의 추격에 쫓기는 때면 이들은 몸을 붙여 서로 의지해가며 그 미로 같은 산 속의 숲길을 함께 헤쳐 나간다. 마치 러시아 해빙기에 나온 전쟁영화들, 특히 라리사 셰피트코의 &amp;lt;고양&amp;gt;같은 데서 보았던 장면(성격적으로 상반된 두 병사(세속적 vs 초월적)가 다친 몸을 부여잡고 함께 의지하여 눈길을 헤쳐 나가던)이 떠오르기도 한다. &lt;br /&gt;&lt;br /&gt;&lt;br /&gt;&lt;/div&gt;&lt;/div&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center;clear:both;&quot;&gt;&lt;img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ad/59/woodyh79/folder/9/img_9_502_1?1261125678.jpg&quot; alt=&quot;&amp;#x00c0ac;&amp;#x00c6a9;&amp;#x00c790; &amp;#x00c0bd;&amp;#x00c785;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quot; height=&quot;183&quot; width=&quot;220&quot;/&gt;&lt;/div&gt;&lt;br /&gt;&lt;br /&gt;&lt;br /&gt;영화는 재훈과 민재의 현실적 소망을 철저하게 앗아가 버린 후(재훈의 어머니는 이미 죽었고 민재는 여자 친구를 만나지 못한다) 재훈이 알고 지내던 &amp;#39;누나&amp;#39; 이소영(소유진)을 그녀의 낡은 차와 함께 이들에 합류시키면서 본격적인 로드 무비의 길을 향한다(남2, 여1의 삼각 로드무비). 이들 셋이 동승한 자동차는 추격을 피해 계속해서 옮겨 다닌다. 똥차에서 개장수 트럭이 되었다 길거리에서 훔친 차량들이 된다. 시간이 하루씩 지나면서 돈과 식량은 점차 바닥나고, 도피 과정에서 입은 재훈의 총상은 자꾸만 그를 무겁게 만든다. 재훈은 소영에게 계속해서 돌아가라고 말하며 끊임없이 불만을 토로하는 민재로부터도 벗어나고 싶어 한다. 어느 갈림길에서인가 재훈은 오토바이 하나를 훔쳐 달아나기 시작한다. 그는 길거리에서 뒤 따라오던 차를 세운 뒤 운전자를 산 속으로 몰아가 잔인하게 살해한 후 다시 갈림길로 돌아온다. 뿔뿔이 흩어질 뻔한 셋은 다시 만나 질주를 시작한다. 이들은 이제 차를 버리고 오토바이 위에 세 몸을 포갠다. 재훈과 소영과 민재가 마치 한 몸이 되어 오토바이에 동승한 채 달리는 신은 더할 수 없는 청춘의 절망감을 가슴 시리게 흔들어놓는다. 젊음의 시간은 계속해서 도로 위에서 소진된다. 이들은 어디에도 발붙일 수 없다. 카메라가 이들의 운동을 가까이에서 포착할 때 그것은 흔들리거나 부유하지 않는다(핸드헬드가 거의 불가능한 무게를 가진 바이퍼 카메라로 찍었다). 공간은 시간과 함께 계속해서 흘러가지만 이들은 마치 그것을 따르지 않는 점처럼 존재한다. 배경만 흘러갈 뿐 상황은 그대로 있거나 더욱 악화된다. 이들은 6일에 가까운 시간을 계속해서 운동하지만 이들 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공간과 시간이란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자신들의 입지를 더욱 좁혀가는, 멀리 나아가는 희망적 운동이 아닌 막다른 길을 향해 가는 비극적 운동일 뿐인 것이다. &lt;br /&gt;&lt;br /&gt;군대 같은 사회 조직도 아니고 집도 아닌 곳, 그야말로 울타리도 없는 벌판, 대한민국 어디인지도 모를, 지도로 찾을 수도 없는 도로 위를 질주하는 청춘들의 존재감은 마치 경계 위에 선 자의 그것 같다. 끊임없이 경계를 만들어 내부(나)와 외부(타자)를 분리시키는 국가는 결코 경계 위의 존재를 허락할리 없다. 그 위에 선다는 것은 곧 비극을 선택하는 일이다. &lt;br /&gt;&lt;br /&gt;탈주의 5일 째, 이들은 마치 아메리칸 뉴 시네마를 열어젖힌 기념비적인 작품 &amp;lt;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보니 앤 클라이드)&amp;gt;의 한 장면처럼 이 셋은 대낮게 과감하게 은행을 털지만 결국 그 돈이 이들의 운명을 가르게 된다. 민재는 이 땅에서 새롭게 살아보겠다며 성형수술 비용을 챙겨 떠나고, 재훈과 소영은 돈으로 브로커를 사 중국으로의 밀입국을 시도하게 된다. 어쩌면 이 땅에서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밤, 재훈과 소영이 사랑을 나누는 사이 민재는 오토바이를 홀로 질주하다 경찰에 발각되고 만다. 만감이 교차하는 밤이 지나가고 드디어 운명의 6일 째 아침이 찾아온다. 로드무비는 이 젊은이들을 어느 샌가부터 마치 무전여행이라도 하는 것처럼 만들어버리고, 그들은 자신이 전국에 수배령이 내려진 존재라는 것을 현실적으로 느끼지 못한다. 비극은 항상 슈퍼에서 생필품을 사다 발생한다. 주스와 담배. 여행에 앞서 기호품을 챙기게 되는 심리라도 발동한 것일까. 어느 새 이들은 새까만 수색대에 둘러싸여있다. &lt;br /&gt;&lt;br /&gt;영화는 &amp;lt;보니 앤 클라이드&amp;gt;의 엔딩에서처럼 장렬하게 총에 몸이 뚫리는 청춘 남녀들의 몸을 보여줄까 싶더니 난데없이 기호품을 챙긴 소영의 머리통만을 뚫어버린다. 수색대의 차량 안엔 벌벌 떨고 있는 민재의 구겨진 모습이, 도로 위엔 총을 맞고도 여전히 살아있는 재훈의 절규가 흐른다. 이 결말은 셋이 함께 몸을 부대끼며 동승해 온 로드 무비의 정서를 뒤집는다. 세속적인 자가 선택하는 결말은 그렇다 쳐도 지금까지 구축되어온 재훈의 캐릭터가 소영의 죽음을 목도하고도 살아있는 상태로 끝이 나는 것은 사실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lt;br /&gt;&lt;p&gt;경계도시인 대한민국에서 경계에 내몰린 청춘들의 영화, 그 정신의 운동을 살려가는 영화였다고 한다면 이들 중 누군가는 자진적인 결정을 해야만 했다. 셋 모두가 수색대 앞에 꼼짝없이 당하는데, 운명을 같이하는 것도 아닌, 각기 다른 운명에 처하는 이러한 결말은 어둠 속을 헤치고 달려온 간절하고도 절실했던 길, 작은 빛 하나를 부여잡기 위해 끊임없이 절망하고 비극을 겪어내야 했던 이들의 여정을 무력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탈주는 과거의 레지스탕스 영화들에서만 희망적으로나 비극적으로 성공했는지도 모르겠다(브레송, 르누아르, 멜빌의 영화들).&lt;br /&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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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8 Dec 2009 17:41:18 +0900</pubDate>
    <category><![CDATA[필진 리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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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09 서독제 장편경쟁작  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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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center;clear:both;&quot;&gt;&lt;img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ad/59/woodyh79/folder/9/img_9_503_0?1261125678.jpg&quot; alt=&quot;&amp;#x00c0ac;&amp;#x00c6a9;&amp;#x00c790; &amp;#x00c0bd;&amp;#x00c785;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quot; height=&quot;341&quot; width=&quot;510&quot;/&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right;&quot;&gt;김시원&lt;br /&gt;&lt;/div&gt;&lt;p&gt;&lt;strong&gt;1. 김미례 &amp;lt;외박&amp;gt;(2009)&lt;br /&gt;&lt;/strong&gt;&lt;br /&gt;김미례 감독의 &amp;lt;외박&amp;gt;은 510일간 이랜드 총파업을 이끈 비정규직과 정규직 여성노동자들간의 연대의 힘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이 영화는 당연히, 그들에게 돌아가야할 영화일 것이다. 이 공동체 의식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정규직과의 차별철폐를 외치는 비정규직 편에 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이 나서 장기 투쟁을 이끌어나가는 모습은 낯설고도 감동적인 것이었다. 결국 정규직 지도부들의 일괄 총사표를 전제로 이들을 전원 복귀조치하게된 결말에 이르면 더욱 그러한 것이다. 영화는 초반, 막 투쟁을 위한 그녀들의 외박이 시작되는 시점의 막연한 흥분감들을 유쾌하게 스케치하며 곳곳 쉬어가는 틈을 이용해 정규직과 비정규직, 비정규직 180일 일수를 넘는 자들과 넘지 못하는 자 등 각각 다른 입장에 있는 그녀들의 사적인 속내들을 질문하는 인터뷰를 인서트하며 즐거움과 그 이면의 미세한 갈등들을 긴장감있게 교차시켜 나간다. 영화는 특별히 하루가 지나고 밤이 되었을 때, 이들이 투쟁(외박)을 결심하는데 있어 매일같이 결단을 해야하는 지점의 풍경을 인상깊게 보여준다. 마트에서 외박을 할 것인가,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가정으로 들어갈 것인가. 낮동안 지속되었던 공동 집회와는 또 다른 개인적 선택이 요구된다. 영화는 거의 대부분을 마트의 시멘트 바닥에 버티고 있는 여성들의 선택을 지지한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맞고, 지금이 아니면 안될 일이라는 서슬퍼런 결단임에도 겉핧기로 보면 그녀들의 활기찬 모습 때문에 마치 그녀들이 집안을 내팽개치고 될대로 되라,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수는 없다는 오기식으로 비취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의 중반부부터 이런 모습은 점점 사라진다. 투쟁이 장기화될 기조가 보이자 민주노총 지도부의 공식적 지원선언과 대선 당시 권영길 후보를 앞세운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연대를 위한 개입이 본격화되고, 예상대로 공권력이 투입되면서 영화엔 불가피한 폭력적 요소들이 연출된다. 팔과 팔로 짜여서 누운 채 버티고 있는 여성들의 몸 위로 경찰들의 뜯어내기(?)가 시행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성 경찰들을 동원한 모습은 웃지못할 풍경을 연출한다. 그녀들은 끌려가며 &amp;#39;니들은 엄마도 없냐&amp;#39;는 말을 반복한다. 이 지점은 혼란스럽다. 후에 면목 홈에버 매장을 점거했을 때에도 한 전경과 대화하는 신을 통해 &amp;#39;엄마 보고 싶어?&amp;#39;란 말이 얼핏 들려온다. 그녀들은 지도부가 자신들을 &amp;#39;아줌마&amp;#39;라 부르는 것이 격노하지만 집회에서는 스스로 &amp;#39;아줌마&amp;#39;들이 이렇게 나섰다라고 말한다. 나는 영화가 이 점을 지목해서 보여주는 것을 생각해보았다. 그녀들은 분명 공적 노동자로서 집회에 나왔다. 하지만 그녀들은 여전히 가정주부라는 역할에 매여있다. 이 투쟁은 민주노총 지도부들의 싸움과는 달리, 그녀들에겐 완전히 공적인 싸움이 아닌 것이다. 그녀들은 마치 이 두가지의 역할론에 대해 함께 투쟁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게다가 그녀들은 공적으로 노동자이면서 사적으로는 엄마일텐데, 이들이 결국 사회에서 불리는 말은 &amp;#39;아줌마&amp;#39;로 통일된다. 이 단어는 공적이지도 사적이지도 않은, 그 성격이 불분명한 특정 집단을 표현하는 익명성의 단어이다. &lt;/p&gt;&lt;br /&gt;&lt;p&gt;영화는 이 &amp;#39;아줌마&amp;#39;란 단어가 불편한 여성 노동자들이 자신들을 사회에 설득시켜야할 불가피한 때에 스스로 사용하는(인정하는) 모순을 보여줌으로 그녀들이 사회에 처한 모순적인 위치를 그대로 드러낸다. 영화의 후반부 물대포를 맞고 농성 천막이 부숴지고 지도부가 체포되는 모습들은 앞서 보여주었던 활기찬 풍경에 담긴 이상들을 조금씩 지워나간다. 투쟁이 장기화되면서 점차 생계유지에 지쳐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몇몇은 떠밀리듯이 돌아가지만,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있는 정규직,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끈질긴 투쟁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생계비 마련을 위해 물품 판매에 나서기도하면서 사측과의 협상의 시점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마침내 타결이 이뤄진다. 올림픽 매장을 점거한 지 정확히 510일만의 일이다. 정규직 지도부들의 결단을 요한 처사였다. 이 결말은 일반 관객에게 직접적인 감동을 준다기보다는, 끝까지 남아 싸운 사람들과 그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지도부들의 희비 교차를 보여주며 어찌 보면 차가운 현실의 느낌을 전달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데 치중하지 않고 보다 공공적으로 중요한 것의 가치를 믿고 선택한 자들에게만은 다 말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amp;lt;외박&amp;gt;은 여러 불리한 변수들 가운데서도 결국 불합리한 사측과의 투쟁을 결단했고 감당해냈던 그녀들, 공적, 사적 위치 어디에서도 온전히 자신만의 자리와 합당한 이름을 부여받지 못했던 그녀들의 소중한 일기이며, 결국 그녀들의 공동체를 위한 영화일 것이다. 활동하는 집단에 활동적으로 참여한, 연대하는 풍경에 동일하게 연대하여 들어간 카메라는 현실의 투쟁을 지속시키는 일에 기여한다. 여기에서 영화와 현실의 구분은 무해하다. 그녀들은 이 영화를 기뻐하고, 이 영화도 그런 그녀들을 기뻐할 것이다. &lt;br /&gt;&lt;br /&gt;&lt;br /&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center;clear:both;&quot;&gt;&lt;img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ad/59/woodyh79/folder/9/img_9_503_1?1261125678.jpg&quot; alt=&quot;&amp;#x00c0ac;&amp;#x00c6a9;&amp;#x00c790; &amp;#x00c0bd;&amp;#x00c785;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quot; height=&quot;340&quot; width=&quot;510&quot;/&gt;&lt;/div&gt;&lt;br /&gt;&lt;br /&gt;&lt;strong&gt;2. 정재훈 &amp;lt;호수길&amp;gt;(2009)&lt;br /&gt;&lt;br /&gt;&lt;/strong&gt;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전체가 완전한 공포(현실)영화이다. 초반부, 철거가 진행되기 이전의 마을의 고요하면서도 평화로운 풍경을 보여주다 후반에 이르러 시간이 어느정도 흐른 후 철거가 진행되면서부터의 황폐한 풍경을 보여 주지만, 내 느낌으로 이것은 대비적인 풍경이 결코 아니다. 초반부는 너무나 일상적이면서도 한적한 풍경 속에서 오히려 은밀한 암시들을 보여준다. 영화는 느리게 걸으며 이따금씩 먼산을 올려다보는, 근심을 다 헤아릴 수 없을 듯한 노인의 무표정과 골목을 밟고 뛰어다니며 서로 쫓고 쫓는 놀이에 치중하는, 근심이라고는 헤아릴 수조차 없는 어린아이들의 무동기적 흥분의 표정을 대비시킨다. 초반의 이러한 방식은 우리를 이상한 느낌으로 몰아간다. 노인의 기우뚱한 근심어린 뒷걸음과 카메라를 향해 돌진하는 어린아이들의 대단스런 앞걸음질, 완전한 정적을 연출하는 롱 테이크의 불길한 카메라와 귀를 째는듯한 비명과 이보다 더 의도가 없을 수 없는 날것의 표정에 거의 참여하는듯 이들과 마치 함께 뛰노는 듯한 정신없는 컷을 이어가는 카메라의 대비는 우리에게 지속적이고 자연적인 관찰에서 얻은 섬뜩한 지점들을 그대로 노출시킴으로 후반부 기계소리로 인한 공포감보다 외려 더 섬찟한 지점을 선사한다. 가히 일상(현실)의 스펙터클이라 불릴만한 것이다. 영화엔 낮과 밤의 이미지와 그 각각의 소리들이 대비적으로 연출된다. 낮의 빛과 밤의 어둠, 낮의 아이들의 소리와 밤의 개짓는 소리. 이것은 개발 이전과 이후 즉, 전반부와 후반부를 기이하게 연결짓는다. 전반부에서 동네의 건물을 쏘아대는 듯한 강렬한 낮의 빛은 후반부 포크레인이 철거를 위해 뿌려대는 강렬한 물줄기와 연결되고, 동네 전체를 깨어내듯 날카롭게 질러대는 아이들의 (즐겁고도 무서운)비명소리는 후반부 귀를 쨀듯한 포크레인 소리로 연결된다. 단순히 아름다움이 철거의 비극적 풍경으로 파괴되었다고 말하기에 이 두가지 이미지와 소리들은 현상적으로 사실 유사해서 약간 섬찟하다. 밤의 완전한 시각적 어둠 상태에선 저 멀리 작은 네모난 유리창문으로 비쳐 보이는 불빛이 존재한다. 이 불빛은 밤이 깊어가면서 점점 작아지거나 점차 어두워진다. 철거가 시작되면서 이 동네 주택들의 유리창은 완전히 사라진다. 빛을 반사시키던 유리가 없고, 완전히 뚫린 시멘트 창들이 그보다 더욱 어두운 내면을 드러내며 완전한 시각적 눈멀음의 상태로 우리를 안내한다. 여기가 주택의 안인지 바깥인지 우리는 감지할 수가 없다. 어느 순간 카메라가 꽝꽝 닫히는 문의 소리들을 들려주며 이곳이 사람이 사라진 집의 내부임을 드러낸다. 순간적으로 우리는 완전한 공포에 노출된다. 언제부터 카메라가 이 안에 들어와있었던 것일까. 우리가 지금까지 느낀 어둠과 정적이란 어떤 현상이었던 걸까. &lt;p&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center;clear:both;&quot;&gt;&lt;img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ad/59/woodyh79/folder/9/img_9_503_2?1261125678.jpg&quot; alt=&quot;&amp;#x00c0ac;&amp;#x00c6a9;&amp;#x00c790; &amp;#x00c0bd;&amp;#x00c785;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quot; height=&quot;195&quot; width=&quot;220&quot;/&gt;&lt;/div&gt;&lt;br /&gt;영화는 빛과 사람이 소멸한 밤에 자연발생적인 소리에 집중한다. 바람소리, 그리고 개짖는 소리. 개들은 한 곳에서 누군가 짖으면 여기저기서 따라 짖는다. 그들은 마치 교신하면서 서로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소리로서 연대한다. 이 집단적인 짖음은 영화 전반부의 낮, 어린아이들이 놀이를 하며 질러대던 중첩된 소리들의 연결시킨다. 아이들이 떠난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개들의 함성. 영화엔 사람들이 나오지만 그들의 행동력은 등장하지 않는다(오히려 행동력은 개들로 인해 실천된다해도 과언은 아니다). 사람은 마을의 풍경의 하나로서 등장할 뿐 동네가 철거될 것을 알고는 있는지, 이들은 반대 투쟁을 했었는지조차 전혀 알길이 없다. 카메라는 &amp;#39;경축, 재개발&amp;#39;같은 플래카드만 무심하게 보여줄 뿐이다. 사람이 완전히 사라진 마을 안에 혼로 남아 마치 레지스탕스처럼 동네의 최후 풍경을 날것으로 담아내는 카메라는 완전한 매체 그대로의 느낌, 즉 사람이 없이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는 카메라의 느낌을 준다. 하지만 감독은 카메라를 세워둔 것이 아니라 늘 이 카메라와 함께 다녔다고 말했다. 즉 직접 체험한 풍경만 담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조차도 물질적인 느낌이 압도적이다. 여기엔 세상의 변화를 관찰하고도 참여하려는, 기록하면서도 연출하려는 카메라의 이중적 욕망의 경계가 그대로 노출되어있다. 시네마베리떼와 다이렉트시네마의 경계가 무너진, 아찔하면서도 통쾌한 미학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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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8 Dec 2009 17:41:18 +0900</pubDate>
    <category><![CDATA[필진 리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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