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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사랑의보물섬]]></title>
<description><![CDATA[시작입니다 많은 도움 주세요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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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사랑의보물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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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예수님은 누구신가?제25과 나의 영이신 예수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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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예수님은 누구신가?제25과 나의 영이신 예수님&lt;br&gt;&lt;br&gt;&lt;dl&gt;&lt;dt&gt;본문 : &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고린도후서 3:12-18&lt;br&gt;&lt;/font&gt;&lt;font style=&quot;FONT-SIZE:9pt;FONT-FAMILY:궁서체;&quot;&gt;&lt;dd&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lt;/font&gt;&lt;/font&gt;&lt;p&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gt;&lt;/p&gt;&lt;dd&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이곳으로 이사오기전의 사무실이 건대입구역 로데오거리에 있었는데 저희 사무실 맞은편 2층에 여행사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이 사무실은 가끔 불이 꺼지지 않고 밤 세도록 켜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도 저토록 열심히 일을 하는데 내가 하나님을 위해 선교를 하면서, 저 사람들만큼 열심히 하는지를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영광을 위해서도 밤을 새우기도 하고, 땀을 흘리기도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lt;br&gt;&lt;br&gt;오늘 본문에 바울은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고후3:12)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소망은 앞의 7-10절을 말한 것입니다. “구약의 모세를 따르던 사람은 단순히 죄를 알려주는 직분이었습니다. 이 없어질 직분이 영광스러웠다면 사람을 의롭게 하는 영원한 직분은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러니 담대히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제가 오늘 설교를 담대히 증거 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썩어질 것을 위해서도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의 영원한 일을 위해서 어찌 열심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바울은 이러한 심정으로 담대히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lt;/font&gt;&lt;p&gt;&lt;/p&gt;&lt;d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 color=&quot;#339999&quot;&gt;1. 모세의 광채는 유한한 것이었습니다.&lt;/font&gt;&lt;/font&gt; &lt;/font&gt;&lt;/font&gt;&lt;dd&gt;&lt;p&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고후3:13) 이 말씀은 출34:29-35절을 예로 든 것입니다.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421.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모세&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가 얼굴에 수건을 쓴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421.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모세&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에게 있던 광채가 사라졌을 때 그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질 것을 염려해서였습니다. 그리고,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421.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모세&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에게 나타났던 광채를 통해서 백성들이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421.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모세&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에게 현혹되어 영원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lt;br&gt;&lt;br&gt;본문 말씀은 바울이 자신과 모세를 비교한다기보다는 복음과 율법을 비교한 것입니다. 율법은 유한한 것이며 복음은 영원한 것입니다. 율법의 일꾼이었던 모세와 다르게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대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당당하고 마음의 속박함이 없이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할 것 같아 수건을 썼던 것입니다. 그러나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509.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바울&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에게 있어서는 복음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건을 써야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lt;/font&gt;&lt;p&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gt;&lt;/p&gt;&lt;d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 color=&quot;#339999&quot;&gt;2. 수건이 마음을 덮고있었습니다.&lt;/font&gt;&lt;/font&gt; &lt;/font&gt;&lt;/font&gt;&lt;dd&gt;&lt;p&gt;&lt;a href=&quot;http://kcm.co.kr/sermon/jesus/image25.gif&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img alt=&quot;&amp;#x006d39;&amp;#x00ba83;&amp;#x00251d; : &quot; src=&quot;http://kcm.co.kr/sermon/jesus/image25.gif&quot; width=&quot;140&quot; align=&quot;right&quot; border=&quot;2&quot;&gt;&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고후3:14)라고 말합니다. 그러고 보면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421.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모세&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만 수건을 덮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수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대하는데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수건을 덮어쓰고 있었던 것은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서 그랬던 것입니다. 원어의 ‘완고(에포로테:ejpwrwvqh)’는 의학용어인 피부 경질이란 뜻입니다. 이 경질은 뼈가 부러졌다가 다시 붙은 자리에 생기는 것으로 굳으면 원래 뼈보다 더 단단한 것을 말합니다. 이들은 성경을 읽을 때에 돌과 같이 무감각하고 굳어진 경질 같은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자신들의 고집을 버리지 않고 읽었다는 말입니다. &lt;br&gt;&lt;br&gt;언젠가 강아지에게 안대를 씌어준 것을 보았습니다. 강아지는 그 안대가 얼마나 갑갑했던지 발로 비비고 고개를 휘두르고 난리를 떨었습니다. 우리에게 이 답답한 안대 같은 수건이 얼굴을 덮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답답합니까? 당연히 수건은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의 수건을 벗는 방법은 딱 한가지가 있습니다. &lt;/font&gt;&lt;p&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gt;&lt;/p&gt;&lt;d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 color=&quot;#339999&quot;&gt;3. 주님께 돌아오면 벗어집니다.&lt;/font&gt;&lt;/font&gt; &lt;/font&gt;&lt;/font&gt;&lt;dd&gt;&lt;p&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후3:14)고 했습니다. 이 수건을 벗는 것은 율법의 한계성을 영원하게, 미완성적인 것은 온전하게 만드신 율법의 완성 자이신(마5:17-18, 롬10:4)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원문은 (엔 크리스토 카타르게이타:ejn Cristw&amp;#39;/ katargei&amp;#39;ta) [그리스도 안에서만 완전히 소멸된다]는 뜻입니다. 카타르게이타(katargei&amp;#39;ta)는 현재형 수동태로 ‘지금 그렇게 되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수건이 벗어지는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lt;br&gt;왜! 외국의 많은 신학교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못하고 이상한 교리에 많은 문제가 발생되었는지 아십니까? 학문이라는 것은 원래 발전해야 되는데 공학과 또 역사적으로 무엇을 발굴해 내는 학문은 나름대로 그 분야에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학은 생각해 보십시오. 박사 과정의 논문을 준비하는 학생에게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일부의 학교에서는 그 정도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교수는 그것을 학문적으로 증명해 보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다원주의로 흘러가고 예수 안에서만이 아니라 선행만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나, 종교는 다 같다는 식의 논리가 성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없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lt;br&gt;&lt;br&gt;그러나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고후3:16)입니다. 돌아온다(에페스트렙호:ejpistrevfw)는 말은 회개를 말합니다. 그리고 ‘복귀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결코 수건은 벗어지지 않습니다. &lt;br&gt;저는 지금도 가끔 수건을 덮어쓰고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다름 아닌 율법에 젖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유대교인이나 안식교인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단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지만 교회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보다 자신들의 전통을 더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교단이 될 수도 있고, 학교가 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교회나 목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교회가 아니면 안되다는 생각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교회에 대한 자부심과 프라이드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쳐서 혹 교회나 목사님을 그리스도보다 앞서서 생각하면 안됩니다. 교회에 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에게 예배하기 위함이 아니라 목사 설교 들으려고,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이런 모습이 우리 자신이었다면 그리스도안에서 회개하고 그분에게로 온전히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sermon/jesus/href=http://kcm.co.kr/sermon/jesus/jesus042.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죄인&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약5:19-20). 나 자신이 그리스도안에서 돌아올 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을 돌아서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lt;/font&gt;&lt;p&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gt;&lt;/p&gt;&lt;d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 color=&quot;#339999&quot;&gt;4. 주의 영은 자유롭습니다.&lt;/font&gt;&lt;/font&gt; &lt;/font&gt;&lt;/font&gt;&lt;dd&gt;&lt;p&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영’ (프뉴마:pneu&amp;#39;ma)는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bible/kor/joh3.html#joh03_2&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성령&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을 뜻합니다. 이 단어가 성경에서 제일 처음에 나타나는 곳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animal/044.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비둘기&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3:16) 입니다. 주님이 성령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께 돌아간다는 것은 주의 영이 우리의 속에 역사하고 있음을 말합니다(롬8:15, 갈3:2, 엡5:18).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994.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요한&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했습니다. 성령은 다름 아닌 진리의 영입니다. ‘자유함’이라는 말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죄로 인해서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bible/kor/Mar8.html#mar8_5&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사단&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에게 속박 당하고 있었던 모든 문제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성령이 있는 곳에는 그리스도가 있고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의 영은 하나이십니다(요10:30). 이분에게 불가능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 하시는 것입니다.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bible/bible.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성경&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 어느 곳에서나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bible/kor/joh3.html#joh03_2&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성령&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은 모든 생명, 진리, 능력, 거룩함, 축복, 영광의 근원으로 나타납니다. 이 자유의 그리스도의 영은 나를 모든 죄악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것입니다. &lt;br&gt;&lt;br&gt;가끔 우리는 TV이나 신문을 통해서 사람의 약점을 잡고 그것을 빌미로 계속해서 돈을 뜯어내는 아주 파렴치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의 약점을 잡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계속해서 막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깨끗하게 해결됩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사단에게 계속해서 질질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이제 결단을 하십시다.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고 질질 끌려 다니지 않기 위해서,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자유함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lt;/font&gt;&lt;p&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gt;&lt;/p&gt;&lt;d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 color=&quot;#339999&quot;&gt;5. 주의 영은 우리를 주님과 같이 변화시킵니다.&lt;/font&gt;&lt;/font&gt; &lt;/font&gt;&lt;/font&gt;&lt;dd&gt;&lt;p&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전3:18)&lt;br&gt;여러분 여기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두 단어를 주시해야 합니다. 하나는 ‘형상(에이코나:eijkovna)’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모방이나 유사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형적 대표, 실체를 말하는 것이며 아울러 현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골1:15, 히10:1). 그리고 ‘화하여’(메타모르푸메타:metamorfouvmeqa) 내적 본성에서 변화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막9:2-3에 “엿새 후에 예수께서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522.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베드로&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와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824.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야고보&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만큼 심히 희어졌더라”하신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수건을 벗고 주님의 영광을 보면 바로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aster/&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부활&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형체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aster/&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부활&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된 몸과 같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빌3:21, 요일3:2). 이런 영광은 주의 성령을 통해서 된 것입니다. 주의 영광을 보는 한 분을 소개합니다. &lt;br&gt;&lt;br&gt;얼마 전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mission/map/europe/Unitedkingdom/&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영국&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에서 수련회가 있었는데, 한 집회에서 신앙 때문에 18년을 감옥에서 보낸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mission/map/Asia/China/&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중국&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인 목사가 소개되어 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청중에게 자신의 감옥살이 경험을 이런 말로 들려주었습니다. &lt;br&gt;“제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bible/kor/Luk12.html#luk12_2&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친구&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들은 제가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어떤 일을 하였기에 몸의 건강을 지킬 수 있었는지 궁금해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들에게 그곳에서의 삶은 너무너무 고된 것이었다고 대답합니다. 수용소 당국자들은 제게 인분 구덩이를 치우는 일을 시켰습니다. &lt;br&gt;그 구덩이는 수감원들조차 가까이 가기를 꺼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국자들은 내가 교육 수준이 높은데다 유복한 집안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특히 자기들은 무신론자인데 나는 그리스도인 지도자였기 때문에 나에게 그런 일을 시켰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나에게 인분 구덩이 치우는 일을 시키며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여러 해 동안 내가 거기서 일하는 것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lt;br&gt;그 구덩이는 수용소 전체에서 수거된 인분으로 가득 찬 넒이 2미터 이상에 길이도 2미터나 되는 구덩이였습니다. 인분이 꽉 차면 적당히 썩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퍼서 밭에 비료로 보냈습니다. 구덩이는 아주 깊어서 바닥까지 깨끗하게 퍼낼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병균 덩어리 속에 직접 들어가 시종 악취를 맡아가며 인분을 조금씩 차례로 퍼내야 했습니다.&lt;br&gt;간수들과 모든 수감원들은 악취 때문에 가까이 오지도 않았습니다. &lt;br&gt;&lt;br&gt;그런데 내가 거기서 일하는 것을 좋아한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바로 혼자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강제노동수용소에서는 보통 모든 수감원들이 엄격한 감시하에 있기 때문에 아무도 혼자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구덩이에서 일했기 때문에 혼자 있을 수도 있었고, 주님께 실컷 큰 소리로 기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외우고 있던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bible/psa/&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시편&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 모두와 여러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bible/bible.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성경&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 말씀을 암송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아무도 가까이 와서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인분 구덩이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했던 이유입니다. 그때까지 외우고 있던 찬송들을 큰 소리로 부를 수도 있었습니다.&lt;br&gt;당시 내가 제일 즐겨 부르던 찬송 중 하나가 ‘저 장미꽃 위의 이슬’(499장)입니다. 그것은 체포되기 전에도 제일 좋아했던 찬송이었지만, 그때는 그 찬송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인분구덩이에서 일하면서 나는 우리 주님과의 놀라운 교제를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이 찬송을 부르면서 내 곁에 계신 우리 주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lt;br&gt;그 구덩이 안에서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이 찬송을 부르면서 나는 주님의 임재를 맛보았습니다. 그 분은 결코 나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살아나게 되었고 그 인분 구덩이는 주님과 교재하는 나의 은밀한 동산이 되었습니다.” &lt;br&gt;&lt;br&gt;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lt;br&gt;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lt;br&gt;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lt;br&gt;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lt;br&gt;&lt;br&gt;&lt;br&gt;v 우리도 이와 같이 주의 영광을 바라보아 그분과 같이 새로운 부활의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bible/kor/joh1.html#joh01_2&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생명&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lt;br&gt;창세기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하셨습니다” 생령(生靈)은 ‘살아있는 영’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도 원래는 영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을 왜 영이시라고 다시 말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영은 이미 하나님을 떠나 죄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영으로는 하나님께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죽은 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를 다시 살리십니다. &lt;br&gt;“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bible/kor/joh1.html#joh01_2&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생명&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이라”(요6:63)고 하셨습 &lt;/font&gt;&lt;/p&gt;&lt;br&gt;&lt;dl&gt;&lt;d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본문 : 고린도후서 3:12-18&lt;br&gt;&lt;/font&gt;&lt;font style=&quot;FONT-SIZE:9pt;FONT-FAMILY:궁서체;&quot;&gt;&lt;dd&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lt;/font&gt;&lt;p&gt;&lt;/p&gt;&lt;dd&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이곳으로 이사오기전의 사무실이 건대입구역 로데오거리에 있었는데 저희 사무실 맞은편 2층에 여행사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이 사무실은 가끔 불이 꺼지지 않고 밤 세도록 켜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도 저토록 열심히 일을 하는데 내가 하나님을 위해 선교를 하면서, 저 사람들만큼 열심히 하는지를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영광을 위해서도 밤을 새우기도 하고, 땀을 흘리기도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lt;br&gt;&lt;br&gt;오늘 본문에 바울은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고후3:12)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소망은 앞의 7-10절을 말한 것입니다. “구약의 모세를 따르던 사람은 단순히 죄를 알려주는 직분이었습니다. 이 없어질 직분이 영광스러웠다면 사람을 의롭게 하는 영원한 직분은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러니 담대히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제가 오늘 설교를 담대히 증거 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썩어질 것을 위해서도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의 영원한 일을 위해서 어찌 열심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바울은 이러한 심정으로 담대히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lt;/font&gt;&lt;p&gt;&lt;/p&gt;&lt;d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 color=&quot;#339999&quot;&gt;1. 모세의 광채는 유한한 것이었습니다.&lt;/font&gt;&lt;/font&gt; &lt;/font&gt;&lt;/font&gt;&lt;dd&gt;&lt;p&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고후3:13) 이 말씀은 출34:29-35절을 예로 든 것입니다.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421.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모세&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가 얼굴에 수건을 쓴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421.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모세&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에게 있던 광채가 사라졌을 때 그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질 것을 염려해서였습니다. 그리고,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421.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모세&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에게 나타났던 광채를 통해서 백성들이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421.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모세&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에게 현혹되어 영원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lt;br&gt;&lt;br&gt;본문 말씀은 바울이 자신과 모세를 비교한다기보다는 복음과 율법을 비교한 것입니다. 율법은 유한한 것이며 복음은 영원한 것입니다. 율법의 일꾼이었던 모세와 다르게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대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당당하고 마음의 속박함이 없이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할 것 같아 수건을 썼던 것입니다. 그러나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509.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바울&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에게 있어서는 복음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건을 써야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lt;/font&gt;&lt;p&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gt;&lt;/p&gt;&lt;d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 color=&quot;#339999&quot;&gt;2. 수건이 마음을 덮고있었습니다.&lt;/font&gt;&lt;/font&gt; &lt;/font&gt;&lt;/font&gt;&lt;dd&gt;&lt;p&gt;&lt;a href=&quot;http://kcm.co.kr/sermon/jesus/image25.gif&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img alt=&quot;&amp;#x006d39;&amp;#x00ba83;&amp;#x00251d; : &quot; src=&quot;http://kcm.co.kr/sermon/jesus/image25.gif&quot; width=&quot;140&quot; align=&quot;right&quot; border=&quot;2&quot;&gt;&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고후3:14)라고 말합니다. 그러고 보면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421.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모세&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만 수건을 덮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수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대하는데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수건을 덮어쓰고 있었던 것은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서 그랬던 것입니다. 원어의 ‘완고(에포로테:ejpwrwvqh)’는 의학용어인 피부 경질이란 뜻입니다. 이 경질은 뼈가 부러졌다가 다시 붙은 자리에 생기는 것으로 굳으면 원래 뼈보다 더 단단한 것을 말합니다. 이들은 성경을 읽을 때에 돌과 같이 무감각하고 굳어진 경질 같은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자신들의 고집을 버리지 않고 읽었다는 말입니다. &lt;br&gt;&lt;br&gt;언젠가 강아지에게 안대를 씌어준 것을 보았습니다. 강아지는 그 안대가 얼마나 갑갑했던지 발로 비비고 고개를 휘두르고 난리를 떨었습니다. 우리에게 이 답답한 안대 같은 수건이 얼굴을 덮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답답합니까? 당연히 수건은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의 수건을 벗는 방법은 딱 한가지가 있습니다. &lt;/font&gt;&lt;p&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gt;&lt;/p&gt;&lt;d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 color=&quot;#339999&quot;&gt;3. 주님께 돌아오면 벗어집니다.&lt;/font&gt;&lt;/font&gt; &lt;/font&gt;&lt;/font&gt;&lt;dd&gt;&lt;p&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후3:14)고 했습니다. 이 수건을 벗는 것은 율법의 한계성을 영원하게, 미완성적인 것은 온전하게 만드신 율법의 완성 자이신(마5:17-18, 롬10:4)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원문은 (엔 크리스토 카타르게이타:ejn Cristw&amp;#39;/ katargei&amp;#39;ta) [그리스도 안에서만 완전히 소멸된다]는 뜻입니다. 카타르게이타(katargei&amp;#39;ta)는 현재형 수동태로 ‘지금 그렇게 되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수건이 벗어지는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lt;br&gt;왜! 외국의 많은 신학교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못하고 이상한 교리에 많은 문제가 발생되었는지 아십니까? 학문이라는 것은 원래 발전해야 되는데 공학과 또 역사적으로 무엇을 발굴해 내는 학문은 나름대로 그 분야에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학은 생각해 보십시오. 박사 과정의 논문을 준비하는 학생에게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일부의 학교에서는 그 정도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교수는 그것을 학문적으로 증명해 보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다원주의로 흘러가고 예수 안에서만이 아니라 선행만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나, 종교는 다 같다는 식의 논리가 성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없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lt;br&gt;&lt;br&gt;그러나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고후3:16)입니다. 돌아온다(에페스트렙호:ejpistrevfw)는 말은 회개를 말합니다. 그리고 ‘복귀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결코 수건은 벗어지지 않습니다. &lt;br&gt;저는 지금도 가끔 수건을 덮어쓰고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다름 아닌 율법에 젖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유대교인이나 안식교인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단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지만 교회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보다 자신들의 전통을 더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교단이 될 수도 있고, 학교가 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교회나 목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교회가 아니면 안되다는 생각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교회에 대한 자부심과 프라이드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쳐서 혹 교회나 목사님을 그리스도보다 앞서서 생각하면 안됩니다. 교회에 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에게 예배하기 위함이 아니라 목사 설교 들으려고,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이런 모습이 우리 자신이었다면 그리스도안에서 회개하고 그분에게로 온전히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sermon/jesus/href=http://kcm.co.kr/sermon/jesus/jesus042.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죄인&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약5:19-20). 나 자신이 그리스도안에서 돌아올 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을 돌아서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lt;/font&gt;&lt;p&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gt;&lt;/p&gt;&lt;d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 color=&quot;#339999&quot;&gt;4. 주의 영은 자유롭습니다.&lt;/font&gt;&lt;/font&gt; &lt;/font&gt;&lt;/font&gt;&lt;dd&gt;&lt;p&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영’ (프뉴마:pneu&amp;#39;ma)는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bible/kor/joh3.html#joh03_2&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성령&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을 뜻합니다. 이 단어가 성경에서 제일 처음에 나타나는 곳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animal/044.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비둘기&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3:16) 입니다. 주님이 성령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께 돌아간다는 것은 주의 영이 우리의 속에 역사하고 있음을 말합니다(롬8:15, 갈3:2, 엡5:18).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994.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요한&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했습니다. 성령은 다름 아닌 진리의 영입니다. ‘자유함’이라는 말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죄로 인해서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bible/kor/Mar8.html#mar8_5&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사단&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에게 속박 당하고 있었던 모든 문제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성령이 있는 곳에는 그리스도가 있고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의 영은 하나이십니다(요10:30). 이분에게 불가능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 하시는 것입니다.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bible/bible.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성경&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 어느 곳에서나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bible/kor/joh3.html#joh03_2&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성령&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은 모든 생명, 진리, 능력, 거룩함, 축복, 영광의 근원으로 나타납니다. 이 자유의 그리스도의 영은 나를 모든 죄악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것입니다. &lt;br&gt;&lt;br&gt;가끔 우리는 TV이나 신문을 통해서 사람의 약점을 잡고 그것을 빌미로 계속해서 돈을 뜯어내는 아주 파렴치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의 약점을 잡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계속해서 막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깨끗하게 해결됩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사단에게 계속해서 질질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이제 결단을 하십시다.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고 질질 끌려 다니지 않기 위해서,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자유함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lt;/font&gt;&lt;p&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gt;&lt;/p&gt;&lt;d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 color=&quot;#339999&quot;&gt;5. 주의 영은 우리를 주님과 같이 변화시킵니다.&lt;/font&gt;&lt;/font&gt; &lt;/font&gt;&lt;/font&gt;&lt;dd&gt;&lt;p&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전3:18)&lt;br&gt;여러분 여기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두 단어를 주시해야 합니다. 하나는 ‘형상(에이코나:eijkovna)’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모방이나 유사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형적 대표, 실체를 말하는 것이며 아울러 현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골1:15, 히10:1). 그리고 ‘화하여’(메타모르푸메타:metamorfouvmeqa) 내적 본성에서 변화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막9:2-3에 “엿새 후에 예수께서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522.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베드로&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와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824.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야고보&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만큼 심히 희어졌더라”하신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수건을 벗고 주님의 영광을 보면 바로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aster/&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부활&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형체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aster/&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부활&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된 몸과 같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빌3:21, 요일3:2). 이런 영광은 주의 성령을 통해서 된 것입니다. 주의 영광을 보는 한 분을 소개합니다. &lt;br&gt;&lt;br&gt;얼마 전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mission/map/europe/Unitedkingdom/&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영국&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에서 수련회가 있었는데, 한 집회에서 신앙 때문에 18년을 감옥에서 보낸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mission/map/Asia/China/&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중국&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인 목사가 소개되어 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청중에게 자신의 감옥살이 경험을 이런 말로 들려주었습니다. &lt;br&gt;“제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bible/kor/Luk12.html#luk12_2&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친구&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들은 제가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어떤 일을 하였기에 몸의 건강을 지킬 수 있었는지 궁금해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들에게 그곳에서의 삶은 너무너무 고된 것이었다고 대답합니다. 수용소 당국자들은 제게 인분 구덩이를 치우는 일을 시켰습니다. &lt;br&gt;그 구덩이는 수감원들조차 가까이 가기를 꺼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국자들은 내가 교육 수준이 높은데다 유복한 집안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특히 자기들은 무신론자인데 나는 그리스도인 지도자였기 때문에 나에게 그런 일을 시켰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나에게 인분 구덩이 치우는 일을 시키며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여러 해 동안 내가 거기서 일하는 것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lt;br&gt;그 구덩이는 수용소 전체에서 수거된 인분으로 가득 찬 넒이 2미터 이상에 길이도 2미터나 되는 구덩이였습니다. 인분이 꽉 차면 적당히 썩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퍼서 밭에 비료로 보냈습니다. 구덩이는 아주 깊어서 바닥까지 깨끗하게 퍼낼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병균 덩어리 속에 직접 들어가 시종 악취를 맡아가며 인분을 조금씩 차례로 퍼내야 했습니다.&lt;br&gt;간수들과 모든 수감원들은 악취 때문에 가까이 오지도 않았습니다. &lt;br&gt;&lt;br&gt;그런데 내가 거기서 일하는 것을 좋아한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바로 혼자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강제노동수용소에서는 보통 모든 수감원들이 엄격한 감시하에 있기 때문에 아무도 혼자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구덩이에서 일했기 때문에 혼자 있을 수도 있었고, 주님께 실컷 큰 소리로 기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외우고 있던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bible/psa/&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시편&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 모두와 여러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bible/bible.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성경&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 말씀을 암송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아무도 가까이 와서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인분 구덩이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했던 이유입니다. 그때까지 외우고 있던 찬송들을 큰 소리로 부를 수도 있었습니다.&lt;br&gt;당시 내가 제일 즐겨 부르던 찬송 중 하나가 ‘저 장미꽃 위의 이슬’(499장)입니다. 그것은 체포되기 전에도 제일 좋아했던 찬송이었지만, 그때는 그 찬송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인분구덩이에서 일하면서 나는 우리 주님과의 놀라운 교제를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이 찬송을 부르면서 내 곁에 계신 우리 주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lt;br&gt;그 구덩이 안에서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이 찬송을 부르면서 나는 주님의 임재를 맛보았습니다. 그 분은 결코 나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살아나게 되었고 그 인분 구덩이는 주님과 교재하는 나의 은밀한 동산이 되었습니다.” &lt;br&gt;&lt;br&gt;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lt;br&gt;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lt;br&gt;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lt;br&gt;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lt;br&gt;&lt;br&gt;&lt;br&gt;v 우리도 이와 같이 주의 영광을 바라보아 그분과 같이 새로운 부활의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bible/kor/joh1.html#joh01_2&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생명&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lt;br&gt;창세기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하셨습니다” 생령(生靈)은 ‘살아있는 영’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도 원래는 영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을 왜 영이시라고 다시 말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영은 이미 하나님을 떠나 죄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영으로는 하나님께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죽은 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를 다시 살리십니다. &lt;br&gt;“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bible/kor/joh1.html#joh01_2&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생명&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이라”(요6:63)고 하셨습 &lt;/font&gt;&lt;/p&gt;&lt;/dd&gt;&lt;/dt&gt;&lt;/dd&gt;&lt;/dt&gt;&lt;/dd&gt;&lt;/dt&gt;&lt;/dd&gt;&lt;/font&gt;&lt;/dl&gt;&lt;/font&gt;&lt;/dl&gt;&lt;/fon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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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9 Jan 2010 23:51:00 +0900</pubDate>
    <category><![CDATA[나의 관심 정보]]></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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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예수님은 누구신가?제26과 나의 창조주이신 예수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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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예수님은 누구신가?제26과 나의 창조주이신 예수님&lt;br&gt;&lt;br&gt;&lt;d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본문 : 요한복음 1:1-13&lt;br&gt;&lt;/font&gt;&lt;font style=&quot;FONT-SIZE:9pt;FONT-FAMILY:궁서체;&quot;&gt;&lt;dd&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bible/kor/joh1.html#joh01_2&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생명&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lt;br&gt;&lt;br&gt;&lt;img hspace=&quot;5&quot;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73/26/yydeokk196/folder/6/img_6_12574_0?1259572376.jpg&quot; vspace=&quot;5&quot; border=&quot;0&quot;&gt;&lt;br&gt;&lt;br&gt;오늘 본문 요한복음1:1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왜 자신의 복음서시작을 이렇게 시작하는 것입니까? &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372.html&quot;&gt;마태&lt;/a&gt;는 “아브라함과 &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201.html&quot;&gt;다윗&lt;/a&gt;의 자손”이라고 시작하고 &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348.html&quot;&gt;마가&lt;/a&gt;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고 했으며 &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159.html&quot;&gt;누가&lt;/a&gt;는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로 시작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던 창조주이시라면 바로 예수님도 창조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lt;br&gt;&lt;br&gt;“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1:10)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첫 이적의 사건을 2장에 기록하는데 이것은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표적)인 것입니다. 요2:1-12에 기록된 “가나의 혼인 잔치”입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lt;br&gt;&lt;br&gt;“갈릴리 &lt;a href=&quot;http://kcm.co.kr/ency/place/0001.html&quot;&gt;가나&lt;/a&gt; 지역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 &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360.html&quot;&gt;마리아&lt;/a&gt;도 그곳에 있었고 예수님과 &lt;a href=&quot;http://kcm.co.kr/bible/new/12disciples.html&quot;&gt;제자들&lt;/a&gt;도 초청을 받아서 그 잔치에 참석했습니다. 정확히 누구의 잔치인지는 모르나 예수님의 어머니와 예수님, &lt;a href=&quot;http://kcm.co.kr/bible/new/12disciples.html&quot;&gt;제자들&lt;/a&gt;이 참석한 것으로 보아 예수님의 일가나 친척의 결혼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잔치에 충분히 있어야할 포도주가 모자랐습니다. 아마 생각보다 하객들이 많이 온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아직까지 한번도 예수님은 이적을 일으킨 일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적을 일으켜 준다고 믿고 예수님께 말하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360.html&quot;&gt;마리아&lt;/a&gt;는 예수님께 포도주 없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어머니 &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360.html&quot;&gt;마리아&lt;/a&gt;는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든지 그대로 순종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가까운데 가서 포도주를 사올 수 있는 것이라면 구태여 예수님께 말하지 않고 자신이 하인들에게 직접 포도주를 사오라고 권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이 난감한 일을 어떤 방법으로든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의 반응은 처음에는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야흐로 때가 가까이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돌 항아리 여섯이 나란히 놓여있는 것을 보시고 그 항아리에 물을 아구까지 가득히 채우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항아리에 물은 아구까지 채워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요2:8)고 하셨습니다. 흔히 ‘물이 변하여 보도주가 되어라’는 기도나 주문 등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퍼다 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미 포도주로 변해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포도주의 맛은 다른데서 구할 수 없는 맛을 내었습니다.“ &lt;br&gt;&lt;br&gt;저에게 온 메일을 하나 소개합니다. &lt;br&gt;&lt;br&gt;“이 목사님께 e-mail로 문안 인사를 드려 죄송합니다. 충남에 사는 김.. 입니다.&lt;br&gt;성경을 읽다가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 부분이 있어 문의 드립니다.&lt;br&gt;예수님의 정체성입니다. 결국 성경은 예수님을 기록한 것인데,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고 또한, 나름대로 성경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생각되는데, 아니 &lt;a href=&quot;http://kcm.co.kr/bible/kor/indexcomm/synoptic.html&quot;&gt;공관복음&lt;/a&gt;서 공부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정체성에 의심이 갑니다. &lt;br&gt;과연 예수님이 god 혹은 human인가조차 이해가 안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의미가 과연 단순히 god을 의미하는 것인 지요? 외국에서나 학계에서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설은 정말 신화로서 받아드리는 것인 지요? 우리가 &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713.html&quot;&gt;아담&lt;/a&gt;과 &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1066.html&quot;&gt;하와&lt;/a&gt;로 인해 죄인인가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돌아가셨나요?&lt;br&gt;저는 하나님은 존재하고, 예수님이 god 혹은 human이든 신앙에는 변화가 없을 것입니다. &lt;br&gt;불교에서 부처님이 인간이었기에 불자들이 믿지 않는 것은 아닌 것처럼...&lt;br&gt;그러나 신앙으로서가 아닌 현대 신학으로서의 견해로서 알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으로서 사실을 안다는 것은 무리지만요. 저는 안티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제가 교회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은 단지 저희교회 목사님께 누가 될까봐서 입니다. &lt;br&gt;이영제 목사님께 이런 질문을 드린다는 것이 죄송스럽지만, 제가 자꾸 이런 갈등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다보니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목사님의 견해를 듣고 싶으며, 제가 읽을 만한 책이 있으면 또한 소개 부탁드립니다.”라는 내용입니다. &lt;br&gt;&lt;br&gt;&lt;br&gt;이런 고민을 하는 분이 이분뿐이겠습니까? 우리 또한 이러한 궁금증과 문제들을 안고 있으면서 나는 아닌 것처럼 행동하거나 그저 교회에 와서 고개나 끄덕이다가 평생을 지낼 수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문제에서 확실히 &lt;a href=&quot;http://kcm.co.kr/sermon/jesus/jesus031.html&quot;&gt;믿음&lt;/a&gt;이 있는 자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lt;br&gt;예수님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1:11)라고 했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이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하다가는 큰일납니다.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마24:41)고 했습니다. 사람이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이고 한 사람은 아닙니다.&lt;br&gt;위의 분의 글에서 한가지 이상한 곳이 있습니다. 저에게 상담을 요청하면서 ‘신앙으로서가 아닌 현대신학으로서의 견해’를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 신학이 예수그리스도를 창조주로서 또는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다른 종교의 교주처럼 그런 성인의 한 분으로 예수를 믿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이 믿음에서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언 듯 볼 때 신앙이 깊으신 분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분이 꼭 진실하신 하나님의 아들인 우리의 생명의 주가 되신, 그분만이 유일하신 우리의 구주라는 사실을 믿고 영접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lt;br&gt;저는 솔직히 신앙으로서가 아닌 신학으로 대답해 달라는 이분의 말뜻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분의 질문의 의도 속에 나타난 생각은 ‘신앙’이라는 말로 모든 것을 합리화하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신앙은 제대로 된 신학과 다르지 않습니다. 신학과 신앙은 일치하는 것입니다. 또한 거짓을 신앙으로 밀어 부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설교했다고 해도 만일 그런 식의 설교를 전했다고 하면 그것은 모두 헛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lt;br&gt;그러나 저는 상담을 하신 분이 미리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고 질문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고 자신의 생각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또 다른 목사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lt;br&gt;그래서 저는 목사로서가 아닌, 즉 배운 대로만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대답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한 개인의 입장에서 설명해 주었습니다.&lt;br&gt;그리고 성경 중에서 특히 요한복음을 많이 읽을 것을 권해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과 같이 오신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혼자 계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로 오셨고 그분과 동행하셨습니다. 다음 성경의 구절들이 증거 합니다.&lt;br&gt;&lt;br&gt;“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요3:34)&lt;br&gt;“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요3:35)&lt;br&gt;“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7:16)&lt;br&gt;“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7:17)&lt;br&gt;“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요8:26)&lt;br&gt;“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요8:28)&lt;br&gt;“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요8:29)&lt;br&gt;“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lt;a href=&quot;http://kcm.co.kr/bible/kor/Luk11.html#luk11_1&quot;&gt;아버지&lt;/a&gt;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요12:49)&lt;br&gt;“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요12:50)&lt;br&gt;“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14:10)&lt;br&gt;“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14:11)&lt;br&gt;“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14:20)&lt;br&gt;“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lt;br&gt;“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요17:8)&lt;br&gt;“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 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17:9)&lt;br&gt;“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요17:10)&lt;br&gt;이 정도면 믿으시겠습니까! 요한복음은 한마디로 예수님이 늘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나타납니다. 저는 요한복음을 너무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42번이나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1장으로 되어있는 요한복음 중에 17장에 걸쳐 나타납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요한이 자의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아버지께 받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lt;br&gt;“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이 비밀은 하나님께로 오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분에게 생명이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서 6일만에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무엇을 못하시겠습니까? 여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lt;br&gt;&lt;br&gt;주님만 바라보는 그 자체로도 힘이 생깁니다. 생명이 그 안에 있습니다. 세상의 학문이 구원시키는 것 아닙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께 생명이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2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우리 또한 사람의 방법으로 난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lt;br&gt;“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5-17)고 말합니다. 천지의 창조와 천사들도 예수님을 위해서, 그분에 의해서 창조된 것입니다. 그래서 &lt;a href=&quot;http://kcm.co.kr/bible/rev/&quot;&gt;요한계시록&lt;/a&gt;에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lt;a href=&quot;http://kcm.co.kr/sermon/jesus/jesus034.html&quot;&gt;아멘&lt;/a&gt;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계3:14)라고 말합니다.&lt;br&gt;&lt;br&gt;“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lt;a href=&quot;http://kcm.co.kr/sermon/jesus/jesus018.html&quot;&gt;독생자&lt;/a&gt;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예수님은 육체로 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독생자 이셨습니다. 말씀을 하실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라는 말을 사용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주님만을 바라보시기를 축원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없는 것도 창조되는 힘이 나타납니다. - 할렐루야 - &lt;br&gt;&lt;br&gt;출저:kcm&lt;/font&gt;&lt;/dd&gt;&lt;/font&gt;&lt;/dt&gt;&lt;/fon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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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9 Jan 2010 23:50:14 +0900</pubDate>
    <category><![CDATA[나의 관심 정보]]></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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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예수님은 누구신가?제27과 나의 말씀이신 예수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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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예수님은 누구신가?제27과 나의 말씀이신 예수님&lt;br&gt;&lt;img hspace=&quot;5&quot;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73/26/yydeokk196/folder/6/img_6_12601_0?1260960319.jpg&quot; vspace=&quot;5&quot; border=&quot;0&quot;&gt;&lt;br&gt;&lt;br&gt;&lt;d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본문 : 요한복음 1:1, 요한계시록 19:13&lt;br&gt;&lt;/font&gt;&lt;font style=&quot;FONT-SIZE:9pt;FONT-FAMILY:궁서체;&quot;&gt;&lt;dd&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계 19:13) &lt;br&gt;&lt;br&gt;&lt;img hspace=&quot;5&quot;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73/26/yydeokk196/folder/6/img_6_12601_1?1260960319.gif&quot; vspace=&quot;5&quot; border=&quot;0&quot;&gt;&lt;br&gt;여러분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lt;br&gt;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러 오신 분입니다. 그 동안 선지자도 보냈었고, 왕도 세웠었고, 예언자도 보내셨습니다. 그것이 다 필요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최종적으로 친히 아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왔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즉 종으로 왔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전에 마지막으로 왔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입니다. 그는 예수님 앞서서 길을 평탄케하는 사명을 받고 왔던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 3:11)라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눅 7:28)라고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을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필요한 모든 &lt;a href=&quot;http://kcm.co.kr/bible/kor/Mar1.html#mar1_7&quot;&gt;제사장&lt;/a&gt;, 선지자, 왕, 예언자를 보내셨던 것입니다. 이제 이 모든 역할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마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왔던 이분들이 완성하지 못한 것을 최종적으로 완성하시고자 오신 것입니다.&lt;br&gt;&lt;br&gt;이렇게 중요한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가리켜 제퍼슨은 ‘만일 하나님의 거룩한 도서관이 되어 있는 성경이 우리에게서 없어지는 날이면 우리는 가장 불행하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또 앤드류 잭슨은 ‘미국은 &lt;a href=&quot;http://kcm.co.kr/bible/bible.html&quot;&gt;성경&lt;/a&gt;을 반석으로 서 있다’고 했고 &lt;a href=&quot;http://kcm.co.kr/mission/map/europe/Unitedkingdom/&quot;&gt;영국&lt;/a&gt;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나는 모든 영토는 버릴지라도 성서는 버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lt;p&gt;&lt;/p&gt;&lt;/font&gt;&lt;d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 color=&quot;#339999&quot;&gt;1. 말씀이 육신이 되었습니다.&lt;/font&gt;&lt;/font&gt; &lt;dd&gt;&lt;p&gt;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말로만 전해주고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씀을 친히 그의 육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 덩어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 자신이 말씀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습니다. &lt;br&gt;그리고 요1:14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lt;a href=&quot;http://kcm.co.kr/sermon/jesus/jesus018.html&quot;&gt;독생자&lt;/a&gt;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lt;br&gt;&lt;br&gt;여러분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자기가 한 말을 자신이 지키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 말씀을 지키신 분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표현하기를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계 19:13)고 했습니다. 말만 하는 사람보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운동경기를 보면서 안타까울 때 그런 말을 자주 합니다. 저렇게 하니까 안되지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운동선수는 “그럼 네가 해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고 가셨다면 우리는 그 말씀을 따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lt;br&gt;&lt;br&gt;말씀이 육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순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이 말씀이 우리에게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lt;p&gt;&lt;/p&gt;&lt;d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 color=&quot;#339999&quot;&gt;2. 섬기러 오셨습니다.&lt;/font&gt;&lt;/font&gt; &lt;dd&gt;&lt;p&gt;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지시고 속죄 재물이 되어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고 구원으로 이끌어 영생에 이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lt;br&gt;여러분 그분이 우리를 섬기러 오셨대요. 이해가 됩니까? &lt;br&gt;&lt;br&gt;출저:kcm&lt;br&gt;&lt;br&gt;그래서 세례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lt;br&gt;“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 3:14)&lt;br&gt;그러면 그 동안 많은 선지자, 왕, 예언자들이 왔는데 그들은 어떠했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약간은 그들의 어깨가 으쓱했지요. 얼마나 신납니까? 하나님의 선지자로 와서 많은 사람을 지도하는 것이 말입니다. 그리고 왕으로 와서 얼마나 좋습니까? 암행어사가 되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암행어사가 섬기려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벌주고 잘못된 것을 지적하러 온 사람입니까? 예수님은 결코 암행어사로 오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고 있나 보고 잘못을 찾아서 벌을 주러 오셨다면, 또한 그것을 지적만 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기만 했다면 그 전에 왔던 선지자들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lt;br&gt;하나님이 아들이 친히 말씀하신 것은 우리를 섬기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lt;p&gt;&lt;/p&gt;&lt;d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 color=&quot;#339999&quot;&gt;3. 예수님이 전한 말씀의 핵심&lt;/font&gt;&lt;/font&gt; &lt;dd&gt;&lt;p&gt;예수님이 전한 말씀이 왜 복음입니까? 한마디로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소망이 없는 구제불능의 우리들이 아닙니까? 이런 우리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특히 우리민족은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습니까? 힘들고 어려운 고통의 세월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lt;br&gt;&lt;br&gt;그런 연유에서일까요. 어느 나라에서나 꽃과 풀은 아름다운 전설과 이름을 따기 마련인데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생활에 여유가 없었던 우리는 밤에 피는 ‘달맞이꽃’을 토속어로는 ‘도둑놈꽃’이라고 했습니다. 모두 잠든 밤에 피는 것이 아무래도 좀 수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레서 ‘도둑놈’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한자식 이름을 딴 ‘봉선화’나 ‘옥잠화’ 같은 것은 그런 대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순 우리말로 된 꽃 이름은 ‘며느리밑씻개’, ‘며느리배꼽’, ‘여우오줌’, ‘쥐오줌풀’, ‘코딱지나물’ 이것도 모자라 ‘개불알꽃’, ‘홀아비X&amp;#39; 등이다. 외국 사람에게 이것이 우리의 꽃 이름이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렇게 한스러운 세월을 보내면서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할 정도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애꿎은 ‘꽃’에게 욕을 퍼부으며 마음을 삭였던 것입니다. &lt;br&gt;v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사람은 이렇게 자포자기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길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주님께서 내셨습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부모에게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고 하셨습니다. 망설이는 자에게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7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8)고 하셨습니다. &lt;br&gt;“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섬기러 오셨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까지 주셨습니다. 저는 하도 못하는 집에서 살아서 조금 잘사는 집 사람의 아이들만 봐도 왜 그렇게 부러웠던지요. 옛날에 시골에서 잔칫집, 초상집, 제사지내는 집에서 어머니가 일하고 계시거나 아는 분이 있으면 떡을 하나 더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대단한 권세입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이 없을 때 옆에서 떡 하나 더 가져가는 것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lt;br&gt;이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있습니다. 세상에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무엇에도 낙심할 이유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lt;p&gt;&lt;/p&gt;&lt;d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 color=&quot;#339999&quot;&gt;4. 하나님의 말씀은 전파해야 합니다.&lt;/font&gt;&lt;/font&gt; &lt;dd&gt;&lt;p&gt;예수님이 우리를 섬기러 왔다는 이 말씀을 전파하지 않으면 무엇을 전파합니까? 죄송합니다만 아줌마들이 모이면 전파하는 것이 있습니다. 대개는 누구누구는 어땠드라 하면서 안 좋은 일들을 들추어 내어 전파합니다. &lt;br&gt;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셨던 것은 그들을 통하여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께 이 말씀을 전파할 것을 받고 오신 분입니다. “주의 &lt;a href=&quot;http://kcm.co.kr/bible/kor/Luk1.html#luk01_4&quot;&gt;은혜&lt;/a&gt;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9) 그리고 이 명령을 실행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온 &lt;a href=&quot;http://kcm.co.kr/ency/place/0036.html&quot;&gt;갈릴리&lt;/a&gt;에 두루 다니사 저희 &lt;a href=&quot;http://kcm.co.kr/bible/kor/Luk4.html#luk04_3&quot;&gt;회당&lt;/a&gt;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마 4:23)했습니다. &lt;br&gt;&lt;br&gt;또한 &lt;a href=&quot;http://kcm.co.kr/bible/new/12disciples.html&quot;&gt;제자들&lt;/a&gt;에게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마 10:27)고 하셨습니다. &lt;br&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509.html&quot;&gt;바울&lt;/a&gt;도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순종하여 우리도 예수님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lt;/p&gt;&lt;/dd&gt;&lt;dd&gt;&lt;br&gt;&lt;/dd&gt;&lt;/dt&gt;&amp;nbsp;&lt;/dd&gt;&lt;/dt&gt;&lt;/font&gt;&lt;/fon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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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9 Jan 2010 23:49:4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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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예수님은 누구신가?제28과 나의 임마누엘이신 예수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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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예수님은 누구신가?제28과 나의 임마누엘이신 예수님&lt;br&gt;&lt;br&gt;&amp;nbsp;마태복음 1:23&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9pt;FONT-FAMILY:궁서체;&quot;&gt;&lt;dd&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1035.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임마누엘&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lt;/font&gt;&lt;p&gt;&lt;/p&gt;&lt;dd&gt;&lt;a href=&quot;http://kcm.co.kr/glp/ce/4/4-020.gif&quo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lt;img style=&quot;WIDTH:412px;HEIGHT:273px;&quot; height=&quot;210&quot; hspace=&quot;5&quot;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73/26/yydeokk196/folder/6/img_6_12735_0?1262862192.gif&quot; width=&quot;306&quot; vspace=&quot;5&quot; border=&quot;0&quot;&gt;&amp;nbsp;&lt;br&gt;&lt;br&gt;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421.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모세&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를 통해서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bible/exo/Ten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성막&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을 만들게 하시고 하나님이 그곳에 임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직접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lt;br&gt;&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1035.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임마누엘&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의 뜻은 히브리어 ‘임’(함께:with)과 ‘마누’(우리와:us)와 ‘엘’(하나님:God)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lt;br&gt;&lt;br&gt;왜 하나님은 우리와 이토록 함께 하시기를 원하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bible/kor/joh3.html#joh03_3&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사랑&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있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1035.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임마누엘&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결혼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lt;br&gt;구약에 하나님과 동행한 인물은 창5:21-24 “에녹은 육십오세에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430.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므두셀라&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를 낳았고,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 하였더라,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855.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에녹&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lt;br&gt;창 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155.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노아&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lt;br&gt;우리는 무드셀라와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855.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에녹&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보다도 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동행할 때는 인간의 죄의 문제는 그대로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죄의 문제도 해결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lt;/font&gt;&lt;p&gt;&lt;/p&gt;&lt;d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 color=&quot;#339999&quot;&gt;1. 예언된 것이었습니다.&lt;/font&gt; &lt;/font&gt;&lt;/font&gt;&lt;/font&gt;&lt;/font&gt;&lt;dd&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은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713.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아담&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이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857.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에덴&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동산을 쫓겨나던 그 때에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700년 전에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1021.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이사야&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를 통해서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1035.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임마누엘&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이라 하리라”(사 7:14)고 다시 예언해 주셨습니다. &lt;br&gt;&lt;br&gt;힌두교의 본산인 인도에 젊은 선교사가 파송되어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는 그곳에서 힌두교 승려한 사람을 알게되어 함께 길을 걷던 중 선교사가 그만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animal/005.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개미&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굴을 건드려 본의 아니게 많은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animal/005.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개미&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를 밟아 죽였습니다.&lt;br&gt;이를 본 승려가 깜짝 놀라며 무슨 큰 일이라도 일어난 듯이 말했습니다.&lt;br&gt;“아니 어쩌다 이렇게 많은 생명을 죽였소. 참으로 답답합니다. 이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animal/005.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개미&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들이 우리조상이었는지도 모르는데...”&lt;br&gt;선교사도 난감했습니다. “어떻게 하죠 모르고 저지른 실수인데...” 그래서 승려에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 해결책을 물었습니다. &lt;br&gt;승려는 한참을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animal/005.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개미&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굴만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습니다.&lt;br&gt;“음... 한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당신이 죽은 다음에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animal/005.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개미&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가 되는 겁니다.”&lt;br&gt;이 말을 들은 선교사는 어리벙벙하여 있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맞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고 오신 까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직접 이야기 하시기 위해서 우리와 같이 되셔서 오신 것입니다.” &lt;br&gt;&lt;/font&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lt;/font&gt;&lt;/p&gt;&lt;d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 color=&quot;#339999&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2.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1035.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임마누엘&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로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lt;/font&gt;&lt;/font&gt;&lt;/fon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 &lt;/font&gt;&lt;dd&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육신을 지니신 예수님은 구원자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요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지금 마음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십시다. 이것만이 우리의 살길입니다. &lt;br&gt;&lt;br&gt;육신을 지니고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은 치료자로 오셨습니다. 마 4:24 “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lt;br&gt;또한 육신을 지니고 오신 예수님은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마11:28-29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lt;br&gt;&lt;br&gt;세상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지금 당장 당신에게로 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십니다(히 11:6).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이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릅니다(요 14:27).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5:1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지금 하나님께로 나아오셔서 참 평안을 받으십시다. 그리고 참 평안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lt;/font&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lt;/font&gt;&lt;/p&gt;&lt;d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 color=&quot;#339999&quot;&gt;3. 세상 끝까지 함께 하십니다.&lt;/font&gt; &lt;/font&gt;&lt;/font&gt;&lt;/font&gt;&lt;/font&gt;&lt;dd&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시다 그만두신 적이 없으십니다. 모든 일은 끝까지 할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해서 결혼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중간에 헤어진다면 그 사랑을 끝까지 한 것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study/cross/&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십자가&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를 지신 것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 결론입니다. &lt;br&gt;&lt;br&gt;사랑도 끝까지 해야 합니다.&lt;br&gt;복음도 끝까지 전해야 합니다.&lt;br&gt;믿음도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lt;br&gt;&lt;br&gt;“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lt;br&gt;임마누엘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aster/&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부활&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 후에도 보혜사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bible/kor/joh3.html#joh03_2&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성령&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을 우리에게 보내시어 늘 함께하십니다. 요 14:16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언제까지 함께하신다구요? ‘영원토록’입니다. 할렐루야! &lt;/font&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lt;/font&gt;&lt;/p&gt;&lt;d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 color=&quot;#339999&quot;&gt;4.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잘 아십니다.&lt;/font&gt; &lt;/font&gt;&lt;/font&gt;&lt;/font&gt;&lt;/font&gt;&lt;dd&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분입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시기에는 어떤 때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 같지 않을 때가 있지요. 오히려 반대로 이야기하면 특별할 때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느끼지요. 보통 때에는 하나님을 잃고 살다가 특별할 때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으로 느끼지는 않는지요. &lt;br&gt;&lt;br&gt;유치원을 다니고 있는 귀여운 딸이 퇴근하여 집에 돌아온 아빠에게 다짜고짜 물었습니다. &lt;br&gt;“아빠, 나 오늘 에버랜드에 놀러 갔게, 안 갔게?” &lt;br&gt;“갔지!” &lt;br&gt;“어 아빠! 어떻게 알았어?”라며 딸을 신기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습니다.&lt;br&gt;“그럼 아빠! 나랑 엄마랑, 그리고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bible/kor/Luk12.html#luk12_2&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친구&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 엄마 두 명이랑, 친구 둘하고 같이 갔게, 안 갔게?” &lt;br&gt;“같이 갔지! 여섯명이” &lt;br&gt;아이는 “우리아빠 천재다 천재... 어떻게 6명이 갔다 온 것을 정확히 알 수 있었을까? 존경스러운 눈초리로 다시 물었습니다.&lt;br&gt;“그런데 아빠, 그 에버랜드에서 5월이 어린이 달이라고 어린이들에게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animal/010.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곰&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 인형을 선물로 주었게, 안주었게?” “주었지!” 그러자 딸이 희한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lt;br&gt;“아빠도 이건 못 맞출 거야. 그러면 그 인형이 검은색이게 아니게?” &lt;br&gt;“검은색이지!” &lt;br&gt;그러자 이제는 아빠가 아니라 신처럼 생각하고는 “아빠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에버랜드가 용인에 있게? 다른 곳에 있게?” &lt;br&gt;“용인에 있지!” “아빠는 어떻게 모든 것을 다 알지” 아이는 눈물까지 흘렸다는 것입니다.&lt;br&gt;&lt;br&gt;아빠가 이 딸의 질문을 맞히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는 것은 더 쉬운 일입니다. &lt;br&gt;이 어린아이처럼 질문을 해 볼까요? 맞혀보세요. &lt;br&gt;“우리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게 아니게?” &lt;br&gt;“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게 안주셨게?” &lt;br&gt;“참세를 하나님이 기르시게 안기르시게?” &lt;br&gt;“하나님이 우리의 머리카락이 몇 개인지 아시게 모르시게?” &lt;br&gt;더 이상 무엇을 더 물어볼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lt;br&gt;&lt;br&gt;사도바울은 분명히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 ‘임마누엘’은 주님과 同苦同樂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결단을 미루지 마십시오. 주님을 진심으로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냥 교회에 다닌 것하고 주님을 영접한 성도하고는 다릅니다. &lt;br&gt;&lt;br&gt;&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mission/map/europe/Germany/&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독일&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의 철학자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1035.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임마누엘&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 칸트는 매우 논리적이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매사에 신속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칸트는 한 여인과 사귀고 있었는데 도무지 구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견디다 못해 칸트에게 청혼했습니다. &lt;br&gt;“저와 결혼해주세요.” 칸트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칸트는 그때부터 결혼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도서관에 가서 결혼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결혼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글을 읽으며 연구에 몰입했습니다. 그리고 여인과 결혼하기로 최종결론을 내리고 칸트는 여인의 집에 찾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때 여인의 아버지가나와 말했습니다. &lt;br&gt;“너무 늦었소. 내 딸은 이미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됐다오”라고 했습니다.&lt;br&gt;&lt;br&gt;“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되는 것, 이것이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1035.html&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임마누엘&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입니다. &lt;br&gt;&lt;br&gt;청소년 집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헌금바구니에 예쁜 십대 소녀의 사진 한 장이 들어있었습니다. 가끔 장난기 있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사진을 빼내려고 보다 사진 뒤에 이렇게 쓰여있는 글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주님께 드릴 것이 없으나, 나 자신을 드립니다.” &lt;br&gt;&lt;br&gt;출저:kcm&lt;/font&gt;&lt;/p&gt;&lt;/dd&gt;&lt;/dt&gt;&lt;/dd&gt;&lt;/font&gt;&lt;/fon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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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9 Jan 2010 23:49:1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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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예수님은 누구신가? 제29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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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예수님은 누구신가? 제29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lt;br&gt;&lt;br&gt;&amp;nbsp;&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gt;마태복음 1:1&lt;br&gt;&lt;/font&gt;&lt;/font&gt;&lt;font style=&quot;FONT-SIZE:9pt;FONT-FAMILY:궁서체;&quot;&gt;&lt;dd&gt;&lt;font style=&quot;FONT-FAMILY:굴림;&quot; color=&quot;#000000&quot;&gt;“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lt;/font&gt;&lt;/dd&gt;&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lt;/font&gt;&lt;/p&gt;&lt;dd&gt;&lt;a href=&quot;http://kcm.co.kr/glp/ce/14/14-015.gif&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lt;/font&gt;&lt;/a&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lt;img hspace=&quot;5&quot;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73/26/yydeokk196/folder/6/img_6_12773_0?1263902870.gif&quot; vspace=&quot;5&quot; border=&quot;0&quot;&gt;&lt;br&gt;&amp;nbsp;마태는 예수님에 대해서 소개할 때 그 시작을 “아브라함과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201.html&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다윗&lt;/font&gt;&lt;/a&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1:1)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사람도 족보를 잘 따지는 편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place/0686.html&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유대&lt;/font&gt;&lt;/a&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민족을 따라가지는 못합니다. 유대민족은 선민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place/0697.html&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이스라엘&lt;/font&gt;&lt;/a&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 사상이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자신들만의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412.html&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메시야&lt;/font&gt;&lt;/a&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가 올 것이라고 믿고 초림하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가 증거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과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bible/kor/Mar12.html#mar12_6&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다윗의 자손&lt;/font&gt;&lt;/a&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자신이 구원자이심을 말하고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754.html&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아브라함&lt;/font&gt;&lt;/a&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과 다윗을 통해서 예언된 바로 그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sermon/jesus/jesus019.html&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메시야&lt;/font&gt;&lt;/a&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 라는 것입니다. &lt;/font&gt;&lt;p&gt;&lt;/p&gt;&lt;d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1. 본서와 이를 기록한 마태에 대해서 좀더 살펴보겠습니다.&lt;/font&gt; &lt;/font&gt;&lt;dd&gt;&lt;p&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372.html&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마태&lt;/font&gt;&lt;/a&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복음은 시간적으로 신약에서 제일 처음 기록된 성경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위치한 것은 구역성경의 성취와 신약의 시작을 제일 잘 알리고 있어서입니다. 특히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372.html&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마태&lt;/font&gt;&lt;/a&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의 주요 사상의 주제는 ‘① 예수는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이다. ② 예수의 교훈은 새로운 것이다. ③ 하늘 나라는 이 땅 뿐만이 아니라 새 하늘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④ 교회는 구약을 계승하나 이방인까지 포함된 신앙 공동체이다.’라는 것입니다.&lt;br&gt;&lt;br&gt;그러나 정작 마태는 잘 알려진 제자도 아니었으며 죄인으로 낙인찍힌 세리에 불과했습니다(막2:14, 눅5:27). 그는 유대정통사회로부터 소외된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sermon/jesus/href=http://kcm.co.kr/sermon/jesus/jesus042.html&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죄인&lt;/font&gt;&lt;/a&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부르시어 제자 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다’(마19:11, 눅7:34)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습니다.&lt;br&gt;&lt;br&gt;마태는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place/0017.html&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가버나움&lt;/font&gt;&lt;/a&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에서 세리를 지냈는데 이 지역은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place/0253.html&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로마&lt;/font&gt;&lt;/a&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제국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1078.html&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헤롯&lt;/font&gt;&lt;/a&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 안티바스의 통치지역으로 헬라어와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아야 세리를 지낼 수 있었습니다. 마태는 헬라어를 구사할 줄 알았고 다른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bible/new/12disciples.html&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제자들&lt;/font&gt;&lt;/a&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이 경제적으로 빈곤했다면 마태는 상당한 자산가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의 직업 때문에 가지고 있었던 속기술과 회계에 밝은 마태는 화폐에 대한 언급과 수치를 밝히는데 뛰어났습니다. &lt;br&gt;이런 죄인 마태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에 대해서 증거하십니다. 마태는 예수께서 인류구원의 대속사역을 이루신 분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구약성경 16권에서 90번이나 구절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천국 복음을 전파하러 오신 분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늘나라’에 대해서 32번을 언급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분에 대한 소개 첫 번째 입니다. &lt;/font&gt;&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lt;/font&gt;&lt;/p&gt;&lt;d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2. 약속된 메시야&lt;/font&gt; &lt;/font&gt;&lt;dd&gt;&lt;p&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400년 동안 선지자의 가르침이 없었던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place/0697.html&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이스라엘&lt;/font&gt;&lt;/a&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의 축복의 예언자로(창12:3) 믿음의 조상인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754.html&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아브라함&lt;/font&gt;&lt;/a&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의 자손이며 성군 다윗의 직계후손임을 밝혀줌으로 왕의 출현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분은 이스라엘의 왕만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었습니다. &lt;br&gt;&lt;br&gt;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그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18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 22:17-18)고 하셨습니다. 즉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754.html&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아브라함&lt;/font&gt;&lt;/a&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의 씨에서 메시야가 나올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lt;br&gt;이 말씀을 하신 것은 독자 이삭을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place/0314.html&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모리아&lt;/font&gt;&lt;/a&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산에 바칠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의 머리카락 하나도 상치말게 할 것이라”고 하신 후에 수양을 가시나무에 메여있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준비해 주신(여호와이래) 수양으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해 주신 말씀입니다. 마태는 오늘 이 말씀의 예언이 이루진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lt;br&gt;그러나 사실 당시의 아브라함은 오늘날 예수그리스도가 자신의 혈통에 나실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는 못했을지 모릅니다. 다만 자신의 앞에 있는 ‘복’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lt;br&gt;&lt;br&gt;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이 무엇입니까? “약속의 땅으로 가라 내가 너에게 씨를 줄 것이다 그에게서 복의 근원자가 날 것이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십 년이 지나기까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다른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lt;br&gt;그때 하나님이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밖에 불러내어 하늘의 별을 세게 했습니다. 하나 둘 셋 ..., 새로 다시 하나 둘 셋 넷 ... 도무지 셀 수가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내가 그처럼 많은 자식을 네게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늘의 별같이 많은 자식을 주시겠다는 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일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 많은 자식을 주면 ‘약 속의 땅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place/0001a.html&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가나안&lt;/font&gt;&lt;/a&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은 협소한 곳인데 어디서 살 것인가?’하는 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lt;br&gt;그때 하나님이 주신 기업은 이러합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place/0608.html&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애굽&lt;/font&gt;&lt;/a&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15:18)라고 했습니다.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place/0608.html&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애굽&lt;/font&gt;&lt;/a&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에서 유브라데까지는 당시 세계의 범위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온 세계 천하를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육적인 이스라엘의 백성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영적인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인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lt;br&gt;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왜 이렇게 큰복을 주시고, 택하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lt;br&gt;&lt;br&gt;한마디로 ‘순종의 믿음’ 때문입니다. &lt;br&gt;&lt;br&gt;아브라함은 “떠나라” 하니까 그냥 떠났고, “이삭을 바치라” 하시니까 그냥 아들을 칼로 칠 정도의 순종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순종을 보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을 이제야 알았노라” 하셨습니다(창22장). &lt;br&gt;뿐만이 아닙니다. 롬 4: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죽은 것 같음”의 뜻은 “이미 죽었다”로 현재 완료형입니다. “이미 죽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포기해야 될 때가 된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lt;br&gt;롬4: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다시 말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lt;br&gt;이 순종과 믿음은 예수그리스도의 성품이십니다. 자신을 내어 주시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예수님의 본을 받아 우리도 순종해야 합니다. 아닌 말로 순종을 안 하시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과 대적하여 싸우시겠다는 말입니까? &lt;br&gt;&lt;br&gt;“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렘 7:23)고 하셨습니다.&lt;br&gt;“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만일 순종치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머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쏟아질 수 있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머리 위에 있는 것입니다. &lt;br&gt;&lt;br&gt;다윗에 대해서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삼하 7:16)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122.html&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나단&lt;/font&gt;&lt;/a&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의 뿌리에서 영원한 왕국이 세워질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lt;br&gt;다윗 왕권은 B.C. 586년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place/0671.html&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예루살렘&lt;/font&gt;&lt;/a&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 함락 이후 약 6세기가 흐르는 동안 왕통이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기 때문에 아무도 예수께서 그의 왕통을 계승받았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태만이 그 사실을 처음부터 지적하고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또 그 후손을 영구케 하여 그 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시 89:29)고 하신 말씀을 이루신 것입니다.&lt;br&gt;다윗이 왜 이러한 축복을 받았습니까? 다윗도 따지고 보면 죄가 많은 사람입니다. 다윗은 용맹도 했고, 성실하기도 했고, 부지런하기도 했습니다. &lt;br&gt;&lt;br&gt;그러나 다윗의 장점은 ‘기도와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위기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위기 때만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시편의 대부분이 다윗의 지은 기도 시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찾았습니다. 시편3편은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ency/names/0819.html&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압살롬&lt;/font&gt;&lt;/a&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을 피할 때 지은 시입니다. 시편18편은 사울의 손에서 구원한 날에 지은 것입니다. 한 절만 보면 이렇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계속해서 더 읽고싶지 않습니까? &lt;br&gt;&lt;br&gt;“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bible/kor/Luk11.html#luk11_1&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아버지&lt;/font&gt;&lt;/a&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9-10)고 하셨습니다.&lt;br&gt;예수님이 “아브라함과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bible/kor/Mar12.html#mar12_6&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다윗의 자손&lt;/font&gt;&lt;/a&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이라고 할 때 ‘아브라함의 순종의 믿음과 다윗의 기도와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다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러한 성품을 본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능력이요 이것이 &lt;/font&gt;&lt;a href=&quot;http://kcm.co.kr/HolySpirit/&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성령&lt;/font&gt;&lt;/a&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입니다. 이와 같은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lt;br&gt;&lt;br&gt;출저:kcm&lt;/font&gt;&lt;/p&gt;&lt;/dd&gt;&lt;/dt&gt;&lt;/font&gt;&lt;/fon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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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9 Jan 2010 23:48:50 +0900</pubDate>
    <category><![CDATA[나의 관심 정보]]></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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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마태복음의 맥락으로 본 천국비유와 이적의 관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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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gt;마태복음의 맥락으로 본 천국비유와 이적의 관계 &lt;BR&gt;I. 서&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론&lt;P&gt;A. 문제 제기&lt;BR&gt;신약성서에 관한 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예수의 교훈과 삶에 대한 지식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견해의 일치가 없는 혼란 속에 있다.&amp;nbsp; 19C의 자유주의에서 작금의 편집비평에 이르기까지, 그간의 연구들이 신약성서 이해에 발전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나 한편으로는 성서의 진정성과 역사성에 관한 회의와 불확실성은 더욱 심화되었다.&amp;nbsp;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 나라'가 공관복음서의 주제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대다수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amp;nbsp; 그러나 그 나라의 개념과 성격에 있어서는 일치된 견해가 없는 상태이다.&lt;BR&gt;하나님 나라에 관한 연구는 주로 예수의 비유를 주된 자료로 취급한다.&amp;nbsp; 그러나 비유는 접근방법에 따라 동일한 본문에 대해서도 상이한 해석이 가능하므로 비유에만 의존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데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amp;nbsp; 따라서 본고에서는 비유와 함께 또 하나의 자료로서 이적기사를 살피고자 한다.&amp;nbsp; 이적기사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기독론적 접근이 대부분이고 하나님 나라와 관련시켜 이해한 경우는 많지 않다.&amp;nbsp; 그러나 이적기사가 복음서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복음서 저자들이 이적기사를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음을 볼 때, 이적기사와 공관복음서의 주제인 '하나님 나라'와는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amp;nbsp; 복음서 안의 자료들을 예수의 말씀(sayings)과 기사(narratives)로 나눌수 있다.&amp;nbsp; 예수의 교훈과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에서 드러나는 언어적 선포와 행위적 선포의 상응성은&amp;nbsp; 어적 교훈과 예시적 행위라는 두 방향에서 하나님 나라를 조명할 때 보다 포괄적인 이해가 가능함을 의미한다.&lt;BR&gt;이 작업의 범위를 마태복음으로 한정시킨 것은 다음의 이유에서이다.&lt;BR&gt;첫째,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은 마태복음에서 가장 결정적인 주제이며 타 공관서보다 강조되어 있다.&lt;BR&gt;둘째, 마태복음은 말씀과 기사를 주제별로 정리하여 균등하게 배열하고 있다.&amp;nbsp; 이는 저자가 예수의 언어적 선포와 행위적 예시를 포괄적으로 살피려는 의도를 갖고 있음을 시사한다.&amp;nbsp; 마태복음의 천국비유와 이적기사는 상응적 관계 속에서 '천국'을 제시하고 있다.&lt;BR&gt;셋째, 네 권의 복음서는 각기 두 가지 차원에서 예수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다.&amp;nbsp; 하나는 예수의 말씀과 행위에 대한 순수한 역사적 관심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 당시의 유대적 농경사회의 상황이 아닌 도회지의 이교적 상황에서 새롭게 형성된 공동체의 요구가 반영된 실존적인 관심이라 할 것이다.&amp;nbsp;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교훈과 사역을 통하여 자신들이 경험한 하나님 나라를 각각 증거하였다.&amp;nbsp; 그렇다면 공관복음서 전체를 통괄하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확정하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각 복음서의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amp;nbsp; 본고는 이를 전제로 역사적 관심으로서의 비유와 이적을 실존적 관심이 담긴 마태복음의 맥락 속에서 살피고자 한다.&lt;/P&gt;&lt;P&gt;B. 연구의 범위 및 방법&lt;BR&gt;마태복음 전체의 구조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매우 조직적으로 구성되어 있음이 드러난다.&amp;nbsp; 13장의 천국비유를 중심으로 전반부는 주제별로 정리하고 있는 반면 후반부는 마가복음의 순서에 준하여 사건의 시간적 흐름에 따라 내용을 전개하는 경향이 나타난다.&amp;nbsp; 전반부는 산상수훈, 이적기사, 천국비유, 제자훈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적기사나 비유가 본 복음서의 다른 곳에도 있긴 하나 전반부에 특별히 한 곳에 수록되어있는 것은 저자의 의도에 의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amp;nbsp;&amp;nbsp;&amp;nbsp; 따라서 비유는 13장을 중심으로하고, 이적기사는 8장과 9장에 있는 10개의 이적기사를 중심으로 하여 본고를 전개하고자 한다.&lt;BR&gt;우선 II장에서 천국비유에 대한 주석적 접근을 통하여 마태복음의 천국사상을 살펴본 다음, III장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8장과 9장의 이적기사에 대한 주석을 시도하여 이적에 나타난 천국사상을정리하게 될 것이다.&amp;nbsp; IV장에서는 마태복음의 천국개념을 형성하는데 있어 비유와 이적이 갖는 관계성을 정리함으로써 마태복음의 천국사상을 밝히고자 한다.&amp;nbsp; 이상의 작업으로 언어적 선포와 행위적 예시의&amp;nbsp; 상응성은 현재에서의 역동적인 성취와 미래의 영광스러운 완성을 동시에 강조하는 마태복음의 천국사상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원리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lt;/P&gt;&lt;P&gt;II. 천국비유의 이해&lt;/P&gt;&lt;P&gt;비유는 예수가 자신의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서 사용한 독특하고도 친밀한 교육방법이다.&amp;nbsp; 그의 사실적이고 실제적인 비유들은 청중에게 순간적인 깨달음의 빛을 주어 그의 부름에 응답하게 한다.&amp;nbsp; 정확한 관찰과 시적 영상에 기초한 함축성 및 일상성은 유대문학이나 바울서신 또는 랍비문학 등 그 어느것에도 견줄 수 없는 예수 자신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특별한 감동을 선사한다.&amp;nbsp;&amp;nbsp; 장에서는 비유가 단순한 예화가 아닌 천국선포를 위한 사역도구라는 관점에서 마태복음 13장의 천국비유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lt;/P&gt;&lt;P&gt;&lt;BR&gt;A. 비유의 정의&lt;BR&gt;비유를 의미하는 헬라어&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는 '도덕적 혹은 영적 진리를 나타내기 위하여 일상생활의 보통사건들과&amp;nbsp; 일을 사용한, 대개 이야기 형식으로 된 예화, 비교 또는 유추(analogy)'라는 사전적 정의를 갖는다.&amp;nbsp;&amp;nbsp; 러나 이는 예수의 언어인 아람어의 'mashal'을 번역한 것으로서 이 단어는 비유, 직유, 우화, 속담, 묵시문학적 계시, 수수께끼, 상징, 논증, 재담 등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다.&amp;nbsp;&amp;nbsp; 관복음에서는&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란 단어가 48회 사용되는데 (마태;17회, 마가;13회, 누가;18회) 학자들은&amp;nbsp; mashal과 마찬가지로 유사한 문학적 유형들에 대해 폭넓게 적용되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본다.&amp;nbsp; 비유의 양식구분은 학자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어 일치된 기준과 한계가 없다.&amp;nbsp; 이는 전술한 바와같이 히브리어의 mashal 자체가 복합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데 기인한다.&lt;BR&gt;비유의 정의에 대한 견해도 학자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메르켈(H. Merkel)은 비유란 '하나의 실상을 다른 영역에 속한 다른 실상에 대비시켜 표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amp;nbsp; 트렌취(R.C. Trench)는 비유란 '우화와는 달리 진리를 제시하기 위한 것으로서 신화와 달리 보다 깊은 의미와 외계의 상징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격언과 달리 우연적이고 필연적인 상징을 가지며, 풍유와 달리 하나를 다른 것에 비교하면서도 하나의 속성을 다른 것에 예속시키지 않는다'고 정의한다.&amp;nbsp; 도드(C.H. Dodd)에 의하면 비유는 '진리를 구체적인 모습으로 보는 마음의 자연스러운 표현'을 말한다.&amp;nbsp; 도드(G.E. Ladd)는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진리를 전달할 목적으로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이끌어낸 이야기'라고 비유를 정의한다.&amp;nbsp; 헌터(A.M. Hunter)는 '한 영역에서 명백한 것은 다른 영역에서도 명백하다는 가정 위에서 어떤 영적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자연과 생활로부터 끄집어 낸 비교'가 비유라고 설명한다.&amp;nbsp; 이상과 같은 다양한 견해들을 정리해보면 비유란 '일상생활에서 친숙한 구체적 상황을 통하여 영적진리를 예증함으로써 화자가 전달하려는 내용의 요점을 명료하게 하는 말 또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lt;/P&gt;&lt;P&gt;&lt;BR&gt;B. 비유해석의 제 유형&lt;BR&gt;해석학적인 견지에서 예수의 모든 비유는 기본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관련이 있다.&amp;nbsp; 그러나 비유는&amp;nbsp; 해석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므로 접근방법의 선택이 매우 중요하다.&amp;nbsp; 여기서는 비유의 해석방법에 관하여 간단히 살피고자 한다.&amp;nbsp; 비유의 해석방법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으므로 해석유형에 대한 고찰은 해석사에 대한 이해를 의미한다.&lt;/P&gt;&lt;P&gt;1. 알레고리(Allegory)적 해석&lt;BR&gt;비유에 담긴 각각의 사물들이 실제적 의미를 갖는 다른 사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알레고리적 해석은 헬라문학에서 기원한 것으로서 구 과 헬라철학과의 접목을 시도했던 필로(Philo, B.C.25 - A.D.40)이래 유대교 해석전통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초대교회 이후에도 중요한 비유해석법으로 취급되었다.&amp;nbsp; 이레고리적 해석은 이레네우스(Ireneus, 약A.D.130-200), 터툴리안(Tertulian, 약A.D.160-220), 오리겐(Origen, 약A.D.185-254) 등 알렉산드리아 학파 교부들에게서 두드러지는데 오리겐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학문으로까지 발전하였다.&amp;nbsp; 이후의 교부들도 이를 계승하였으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치밀하고 세련된 해석을 보여준 어거스틴(Augustine, A.D.354-430)에게서 그 정점에 이른다.&amp;nbsp; 체리소스톰(Chrysostom, A.D.349-407)등을 비롯한 일단의 안디옥 학파 학자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알레고리적 해석에 반대하여 문자적 의미에 근거한 해석을 주장하였으나 이들의 견해는 주류를 이루지 못하였다.&lt;BR&gt;종교개혁자들은 중세시대에도 줄곧 중요한 해석원리로서 자리를 지키던 알레고리적 해석을 강하게 비판하였다.&amp;nbsp; 루터(M. Luther)는&amp;nbsp; 알레고리적 해석을 '원숭이 재주부림'(monkey trick)이라고 하면서 문자적 의미와 문법적 해석을 강조하였다.&amp;nbsp; 그러나 그 역시 실제의 해석에서는 알레고리에서 탈피하지 못했다.&amp;nbsp; 칼빈(John Calvin)은 교부들의 해석을 '게으른 바보짓'으로 혹평하고 비유 속의 짧고 명백한 단일 문장에서 그 비유의 원초적인 의미(natural meaning)를 발견하고자 하였다.&amp;nbsp;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알레고리적 해석의 절대적인 영향력은 이후에도 수그러들지 않았다.&amp;nbsp; 알레고리가 예수의 해석방법이며 사도 바울도 알레고리적 해석을 사용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갈4:21ff) 알레고리적 해석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은 정당한 태도가 아니다.&amp;nbsp; 그러나 비유가 갖는 원래의 배경과 주제와는 무관하게 지나치게 세부적인 내용에까지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성서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해석자의 생각을 성서에 주입시키는 오류는 피해야 할 것이다.&lt;/P&gt;&lt;P&gt;2. 역사비평적 해석&lt;BR&gt;a) 단일주제(one point)에 의한 접근&lt;BR&gt;율리허(A. J licher)는 그의 저서 'Die Gleichnisreden Jesu'(1888)에서 알레고리적 해석을 초대교회의 것으로 보고 그 진정성을 전적으로 부인함으로써&amp;nbsp; 비유해석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왔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적 원리에 기초하여 공관복음서에 수록된 비유들은 직유(similistude)로서 오직 하나의 비교점만을 갖고 있으며 비유연구는 이를 규명하는 것이 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amp;nbsp;&amp;nbsp; 러나 헬라의 고전에 의존한 해석원리는 예수 자신과는 거리가 멀다. 예수 비유는 구약적 배경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amp;nbsp; 율리허의 접근방법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으며, 결국 알레고리를 전적으로 배제한 것도 유대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amp;nbsp; 또한 그가 비유의 윤리적 의미만을 강조할 뿐 거기에 담긴 종말론적 기조를 간과한 점은 복 서 전체의 맥락과는 무관한 이해임을 의미한다.&lt;/P&gt;&lt;P&gt;b) 양식비평적 접근&lt;BR&gt;다드(Dodd)는 양식사적 시각을 적용하여 비유를 본래적인 삶의 정황(Sitz im Leben) 속에서 해석함으로써 원래의 의도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amp;nbsp; 이는 예수의 정황과 초대교회의 정황을 구분하고 옳바른 해석은 전자의 맥락에서 얻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amp;nbsp; 이에 의하면 예수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정황 중에 나타난 것으로서 그 주제는 '실현된 하나님 나라'이며 그의목적은 그 나라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므로 예수의 비유는 전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비유라는 것이다.&lt;BR&gt;예레미아스(J. Jeremias)는 율리허와 다드의 견해에서 더 나아가 비유에 작용한 교회의 정황, 즉 초대교회의 개작, 첨삭, 알레고리화 한 해석을 제거함으로써 예수의 육성(ipsissima vox Jesu)에 도달하고자 하였다.&amp;nbsp; 이는 교회의 정황을 제거하는 작업을 위한 기준으로서 10가지 변형원리를 제시하였으며, 이에 근거하여 비유가 변화되는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그 원래의 역사적 자리를 찾고자 하였다.&lt;BR&gt;양식비평은 예수의 역사적 정황 속에서 비유를 이해 함으로써 극단적인 알레고리를 극복하였다. 그러나 복음서는 예수의 메세지가 교회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연속적인 작용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것이므로 그 속에서 예수의 정황을 분명하게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또 비유를 예수의 정황 만으로 조명한다는 것은 복음서의 맥락을 무시한 부분적인 이해에 그치는 것이다.&amp;nbsp; 따라서&amp;nbsp; 알레고리적 요소를 모두 초대교회의 첨가로 단정하는 것은 다소 편협한 시각이라고 하겠다.&lt;/P&gt;&lt;P&gt;c)&amp;nbsp; 편집비평적 접근&lt;BR&gt;보른캄(G nter Bornkamn), 콘첼만(Hans Conzelmann), 막센(Willi Marxsen) 등으로 대표되는 편집비평은 복음서 저자들을 교회의 정황에 부응하는 신학자로 간주하는 입장을 비유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한다.&amp;nbsp; 예로써 보른캄은 마22:1-24과 눅14:16-24의 비유에 대해서 각 저자가 동일한 비유를 자신들의 정황에 맞추어 개작한 것으로 본다.&amp;nbsp; 때문에 이들은 제3의 삶의 자리(the third Sitz im Leben), 즉 복음서 기자들의 삶의 정황을 비유해석의 관건으로 본다. 이러한 접근은 복음서 저자의 의도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고 오늘날 독자의 상황에 이 비유들을 적용하는데도 도움을 준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amp;nbsp; 그러나 복음서의 비유들을 예수와는 무관한 복음서 저자들의 것으로 전락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lt;/P&gt;&lt;P&gt;3. 최근의 논의&lt;BR&gt;a) 신해석학 (The New Hermeneutic)&lt;BR&gt;역사비평적 비유해석은 비유의 정황과 목적을 주로 예수의 역사적 사역에만 집중시키는 반면 비유 속의 인간이해의 실존적 차원과 문학적 요소를 이해하는데 다소 소홀한 것이 사실이다.&amp;nbsp; 신해석학은 역사비평이 미처 취급하지 못한 실존적 차원과 문학적 차원에서 비유를 이해하고자 하였다.&amp;nbsp; 신해석학파는 푹스(E. Fuchs)를 중심으로한 불트만(Bultmann)의 제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이들의 방법론은 하이데거(M. Heidegger)의 언어에 대한 실존론적 이해와 불트만의 성서해석에 근거한 것이다.&amp;nbsp; 하이데거는 '언어란 인간이 아닌 근원존재(being)에 의하여 존재하므로 그 자체가 근원존재를 드러내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근원존재 혹은 세계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하여 언어의 실존적 차원을 강조하였다.&amp;nbsp; 푹스는 '언어는 인간의 표현이 아니라 존재의 출현 또는 현상'이라고 함으로써 하이데거의 관점을 수용하고 있으며, 언어를 통하여 존재가 사건으로 나타난다는 의미에서 근원존재의 언어화를 '언어사건'(language-event)라고 칭하였다.&amp;nbsp; 이에 의하면 비유는 하나의 언어사건으로서 예수가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를 언어화 함으로써 청중득과 그 상황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amp;nbsp; 해석학의 언어이해에 대한 불트만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amp;nbsp; 불트만은 언어자체의 실존적 차원보다는 본질적으로 실존이해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본다.&amp;nbsp;&amp;nbsp; 는 과거 구속사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행위가 신화적 언어로 표현된 것이므로 역사가 아닌 구원사건(heilsreignis)으로 보아야 하며, 이 구원사건은 케리그마를 통하여 계속적으로 현재화된다고 하였다.&amp;nbsp; 신해석학은 불트만의 언어이해 중 언어의 사건적 특성을 수용하여 불트만의 구원사건의 개념을 '언어사건'으로 변화시킨 것이다.&lt;BR&gt;불트만의 '비신화화'는 신해석학에 또 다른 영향을 주었는데 신해석학파는 비신화화가 전제하고 있는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 사이의 비연속성을 극복하고자 하였다.&amp;nbsp; 푹스의 언어이해, 즉 비유가 역사적 예수과 그 상황에 대한 예수 자신의 이해를 반영한다고 하는 견해는 분명 불트만의 이해를 넘어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lt;BR&gt;신해석학이 언어의 실존적인 힘에 착안하여 비유를 하나님 나라의 언어화라는 '언어사건'으로 본 점은 타당한 것이다.&amp;nbsp; 성경은 말씀 자체의 능력을 말하고 있다.&amp;nbsp; 그러나 비유의 실존적인 차원은 사건자체가 아니라 예수의 인격에 근거한 것이다.&amp;nbsp; 언어사건은 언어로서 나타난 상황만을 강조함으로써 양식비평적 접근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해석학이 역사비평의 성서해석에서 더 나아가 비유의 현재적 적용의 중요성을 일깨운 공로는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lt;BR&gt;&lt;/P&gt;&lt;P&gt;b) 구조분석(Structural Analysis) 및 심미적 비평(Aesthetic Criticism)&lt;BR&gt;가장 최근의 비유연구 경향으로 구조분석과 심미적 비평을 들 수 있다.&amp;nbsp; 구조분석은 이야기의 표면 아래 놓여 있는 의미의 '심층구조'에 관심을 갖는다.&amp;nbsp; 구조주의는 과거 실존주의나 현상학의 사변적이고 주체적인 사고를 거부하고 이 세계가 언어활동과(language)와 기호체계(le code)의 법칙으로 이루어진 상징으로 가득차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amp;nbsp; 비유에 대한 구조분석도 '의미는 문법이며 문장론은 의미론'이라는 가정하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문장을 구성하는 각 단위들의 상호관련성이 그 문장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으로 본다.&amp;nbsp; 즉 구조분석은 비유의 자료들을 그것이 분석되고 있는 단위들 속에서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언어학적 단위들이 문장 속에서 갖는 상관적인 관계와 동류적인(paradigmatic) 관계들을 추적한다.&amp;nbsp; 따라서 구조분석이 발견하려고 하는 것은 역사적인 실재와는 무관한, 문법적 실재들에 의하여 결정되는 의미인 것이다.&lt;BR&gt;이에 반하여 심미적 비평은 비유를 미학의 대상으로 보고 비유를 비극이나 희극 등의 문학형식이나 패러다임(paradigm)으로 이해한다.&amp;nbsp; 때문에 비유는 다른 미학 작품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의 미학적이고 자기 목적적인 속성 때문에 하나의 목적(end)으로 간주되어야 하고 자신의 목적을 스스로 수행하는 것이된다.&amp;nbsp; 비유를 미적 예술작품으로 보는 심미적 비평은 비유를 과거의 산물로 간주하는 역사비평적 입장과는 달리 오늘날 독자에게 참된 실존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언어사건으로 본다는 점에서 비유의 생명력을 전달하여 준다고 하겠다.&amp;nbsp; 그러나 인간실존에 도전하여 변화를 가져오는 능력을 문학적 요소에서 발견하려는 시도는 성서의 영감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접근방법이라 할 것이다.&amp;nbsp; 또한 비유를 외적인 사건과 분리하고 역사적 정황을 간과한채 문학적 구조로만 파악함으로써 예수 자신의 의도가 무었이었는가를 간과하고 있다.&lt;/P&gt;&lt;P&gt;&lt;BR&gt;C. 마태복음의 천국비유 해석&lt;/P&gt;&lt;P&gt;1. 비유해석을 위한 전제&lt;BR&gt;정확한 비유이해는 건전한 해석방법을 전제로 한다.&amp;nbsp; 건전한 접근이라함은 극단을 피하고 여러가지 측면을 동시에 고려하는 해석법이 될 것이다.&amp;nbsp; 따라서 개별적인 천국비유를 다루기 전에 먼저 바람직한 해석의 기준이라고 생각되는 몇 가지 사항을 정리하고자 한다.&lt;BR&gt;첫째, 원칙적으로 비유의 의미는 단일주제에 의한 접근방식으로 조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amp;nbsp;&amp;nbsp; 이렇게 함으로써 세부적인 요소에까지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하는 무절제를 피할 수 있다.&lt;BR&gt;둘째, 비유와 관련된 종교, 사회 정치 및 지리적 여건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록 당시의 상황 속에서 비유가 생성되는 문제나 의문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lt;BR&gt;세째, 기본적으로 비유는 현재 주어져 있는 성서의 맥락 속에서 보아야 한다.&amp;nbsp; 비유를 수록된 맥락과 분리시켜 이해하려는 시도는 주관적인 가정에 충실한 해석을 가져올 뿐이며 의미의 현재적 적용을 결여하고 있다.&amp;nbsp; 비유의 생생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정황 속에서 화자와 청중 사이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접촉접을 찾아야 하며, 그런 후에 그 의미를 오늘의 맥락 안으로 전의하여야 할 것이다.&lt;BR&gt;네째, 예수의 비유는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역사 안으로 들어온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시켜 이해해야 한다.&amp;nbsp; 예수의 교훈들 가운데 약 1/3을 차지하는 비유가 그의교훈의 중심주제인 하나님 나라와 무관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lt;/P&gt;&lt;P&gt;이제 이상의 사항들에 유념하면서 마태복음 13 장의 천국비유를 해석하고자 한다.&amp;nbsp; 근래의 학자들은 마태가 7이라는 숫자를 애용하는 점을 들어 마태가 13장에서 의도한 비유는 마지막의 '서기관 비유'(52절)을 제외한 일곱 개라고 생각해왔다.&amp;nbsp; 이에 반하여 52절 뒤에 나오는 문구가 마태복음에서 다섯 설교묶음의 끝을 알리는 종결어구로 되어 있으므로 이를 천국비유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으나 앞의 비유들이 보여주는 '천국은 마치..'라는 전형적인 표현으로 시작되지 않으므로 본고에서는 제외하기로 한다.&lt;/P&gt;&lt;P&gt;2. 완성을 향한 천국의 확장&lt;BR&gt;a) 씨뿌리는 자의 비유 ( 1 - 9, 해석 18 - 23 )&lt;BR&gt;실제로 10월경 가까운 들판에서 농부들이 파종하는 모습을 익히 보아온 당시 청중들에게&amp;nbsp; 본 비유는 매우 친숙한 것이었다.&amp;nbsp; 길고 무더운 여름철이 끝날 무렵 농부는 밭에 나가 밀이나 보리 씨앗을 굳은 땅 위에 뿌리고 씨앗을 덮기 위하여 쟁기로 갈아 젖힌후에 겨울비가 와서 싹이 나기를 기다린다.&amp;nbsp; 이러한 파종법은 잡초들을 제거하고 부족한 습기를 충분히 이용하기 위한 것으로서 그로 인해서 씨앗은 돌짝밭이나 가시덤불에도 떨어지게 된다.&amp;nbsp; 또한 밭의 경계가 길에 의해서 구분되기 때문에 길가에 떨어지는 것도 피할 수 없다.&lt;BR&gt;이 비유에 대한 예수의 해석이 이미 제시되어 있으나 비유의 강조점을 찿는 작업이 남아있다. 본 비유의 강조점에 대한 견해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lt;BR&gt;첫째는 비유의 중심을 씨앗 및 씨뿌리는 자에게 두는 해석이다. 다드(Dodd)는 팔레스틴의 재배법을 고려하여 농부의 노동 중 일부가 허사로 돌아가나 결과적으로는 만족한 추수가 있음을 말하려는 것으로 해석한다.&amp;nbsp; 즉 이 비유는 천국의 현재적 활동을 강조한 것으로서 헛된 수고가 있음을 인지시키는 한편 풍성한 열매에 대한 소망을 준다는 것이다.&lt;BR&gt;두번째는 본 비유의 제목을 '흙의 비유'로 부르는 견해로서 비유의 강조점이 흙에 있다고 생각한다.&amp;nbsp; 이 때 비유의 의미는 변화된 삶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며 청중의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된다. 펜테코스트&amp;nbsp; (Pentecost)는 그 결실이 씨뿌리는 자에 의해 좌우는 되는 것이 아니라 밭, 즉 청중에게 달려있음에 주목해야 한다고 하였다.&lt;BR&gt;세번째 입장은 비유의 요점이 '풍작'에 있는 것으로 본다.&amp;nbsp; 많은 유실에도 불구하고 경이적인 수확이 있을 것을 말하려는 것이 본 비유의 의도라는 주장이다.&amp;nbsp; 퀸스베리(Kingsbury)는 이와 유사하게 비유의 요점을 '결실'로 본다.&amp;nbsp; 예수의 선포에 대한 유대인들의 거부와 예수의 선포를 수용한 제자 및 교회의 결실을 대비시키려는 것이 예수의 의도였다는 것이다.&amp;nbsp; 그는 이 대비가 시간성을 포함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비유에서 천국의 시간성을 논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이라고 주장한다.&lt;BR&gt;이상의 견해들은 나름대로의 근거를 가지고 있으나 씨앗과 씨뿌리는 자와 밭은 하나의 작업 속에서 따로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으므로어느 한 면만을 절대적으로 강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비유의 특징은 의외적인 결과, 즉 많은 유실에도 불구하고 종국에는 경이적인 수확을 거둔다는 점에 있다.&amp;nbsp; 씨가 이미 뿌려졌으므로 천국은 이미 현재한다.&amp;nbsp; 그리고 그 나라의 확장은 많은 난관에 부딪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만족한 결실을 볼 것이다.&amp;nbsp; 이 비유는 현재의 역경과 미래의 영광을 대비시키고 있다. 이 대비의 궁극적인 의도는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려는데 있으므로&amp;nbsp; 본 비유의 천국사상은 만족스러운 미래적 완성에 촛점을 두고 있다.&lt;/P&gt;&lt;P&gt;b) 겨자씨의 비유 ( 31 - 32 )&lt;BR&gt;바늘귀만한 크기의 겨자씨는 예수 당시 팔레스틴의 농부가 뿌리는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였다.&amp;nbsp; 겨자씨는 새들이 좋아하는 먹이감이었으며 다 자라면 약 2 - 3m의 높이에 달한다고 한다.&amp;nbsp; 이러한 크기를 과장되게 나무라고 표현한 것은 마태의 의도적인 표현이라고 보는 학자들은 '나무가지에 새 떼가 깃든다'는 표현을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예레미아스(Jeremias)는 '깃들다'와 '가지에 앉는다'는 의미는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종말론적인 전문용어로 본다.&amp;nbsp; 헌터(Hunter) 역시 '공중의 새'들은 랍비들이 이방인들에게 붙인 이름 가운데 하나로서 에스겔17:22ff, 31:6과 다니엘4:10ff에서와 동일한 의미로 본다.&amp;nbsp; 도드(Dodd)는 새들이 깃드는 나무는 그 지배국가들을 정치적으로 보호하는 강대국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amp;nbsp; 페린(Perrin)은 새들이 나무에 깃드는 장면은 세상 나라들이 마지막 때에 유대인과 합류하기 위해 회개하고 오는 것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amp;nbsp;&amp;nbsp; 약적 배경에서 출발한 이러한 상징주의적 해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어떤 면에서는 알레고리적 해석과 매우 흡사하다.&lt;BR&gt;이 비유는 당시의 자연스러운 상황에 근거하여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amp;nbsp; 이 비유의 핵심은 겨자씨 크기와&amp;nbsp; 성장한 후의 나무의 크기가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는데 있다.&amp;nbsp;&amp;nbsp; 비유는 우선 천국이 예수의 사역 안에서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amp;nbsp; 제자들이나 군중들을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그의 사역은 매우 미미한 것이다.&amp;nbsp; 눈에 띄지 않는 사역이었지만 천국은 점진적으로 확장되어 장대하게 성장할 것이다.&lt;BR&gt;이 비유는 천국의 시작과 완성 사이의 커다란 격차를 연속성 속에서 보여준다.&amp;nbsp; 비록 보잘 것 없는 시작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천국은 신속히 성장하여 종국에는 장대한 나라를 이룰 것이다.&amp;nbsp; 이 비유도 역시 '작은 시작'과 '큰 결말'을 대비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로운&amp;nbsp; 성장에 대한 기대를 강조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lt;/P&gt;&lt;P&gt;c) 누룩의 비유 ( 33 )&lt;BR&gt;이 비유의 소재 역시 팔레스타인의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정황이다.&amp;nbsp; 서 말은 약 160명분의 빵을 만들 수 있는 양으로서 한 명의 여인이 한 번의 작업으로 구울 수 있는 분량에 해당한다.&amp;nbsp; 이 비유 역시 앞의 것과 마찬가지로 시작과 결과의 현격한 차이를 대비시키고 있으나 그 확장의 내적인 영향력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다르다.&amp;nbsp; 천국의 외형은 불가시적이나 그것은 모든 것에 침투하여 변화를 일으키는 방식으로 확장된다.&amp;nbsp; '갖다 넣었다' 라는 표현을 '누룩이 반죽 속에 숨겨져 있다'로 보는 다드(Dodd)의 해석이나 '숨김' 또는 '비밀' 등의 뉘앙스를 갖고 있다고 보는 펑크(R.W. Funk)의 해석은 이점을 지적하고 있다.&lt;BR&gt;누룩이 악한 영향력을 상징하는 용례를 들어(마16:5-12; 고전5:8; 갈5:9 등) 다르게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으나 여기서는 누룩의 파급효과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뿐 누룩 자체의 의미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서 말'의 3이란 수에 대해서 종말론적 의미를 부여하거나 몸 마음, 영혼을 가리킨다고 하여 알레고리적 해석을 하기도 하나 단순히 소량의 누룩에 대조되는 많은 양의 밀가루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amp;nbsp; 사람들은 천국이 가까왔다는 예수의 선포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제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amp;nbsp; 이렇게 그 시작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내부에서의 조용한 활동에 의하여 처음과는 비교할 수 없는 풍성한 결과가 이루어지는 것이다.&amp;nbsp; 이 비유 역시 천국의 시작과 내적인 확장이라는 현재와 그 변화의 결과라는 미래를 동시에 언급하고 있으며. 변화시키는 능력과 풍성한 결과를 모두 강조하고 있다.&lt;BR&gt;천국의 확장에 대한 비유들은 씨가 뿌리워지고, 누룩을 넣었다는 점에서 천국의 임재를, 씨가 자라나고 누룩이 퍼진다는 점에서 현재적 천국의 확장을, 의외의 큰 완성을 이룬다는 점에서 천국의 궁극적인 성취에 대한 미래적 전망을 담고 있다.&amp;nbsp; 이상에 의하면 천국은 이미 시작되어 현존하며 동시에 미래의 완성을 바라보고 있다. 그 현존은 단순한 임재가 아니라 완성을 향해 진행하고 있는 역동적인 것이다. 또한 그 진행은 미소한 시작과는 현격한 대조를 보이는경이로운 완성을 향한 것으로서 바로 이러한 미래적 전망이 이 비유의 강조점인 것이다.&amp;nbsp; 현재적 천국에서의 삶은 미래에 대한 기대라는 동기에 의하여 결정되기 때문이다.&lt;/P&gt;&lt;P&gt;2. 응답을 요구하는 천국&lt;BR&gt;a) 감추인 보화의 비유 ( 44 )&lt;BR&gt;팔레스틴에서 밭에 보화를 묻는 것은 도난을 방지하는 가장 안전한 대비책이었으며 잦은 전쟁에서 약탈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amp;nbsp; 보화는 주인이 죽거나 포로로 잡혀갔을 경우 수세기 동안 묻혀있다가 우연히 발견되곤 하였다.&amp;nbsp; 보화를 발견한 자가 본 비유에서와 같이 행동하였을 때 그 행위의 법적, 도덕적 정당성이 문제가 된다.&amp;nbsp; 이 경우 율법은 그 원주인이 보화를 획득한 일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토지주인이 소유권을 가질 수 없는 것으로 본다.&amp;nbsp; 또한 주인공은 일하는 중에 발견한 보물을 자기가 가질 수 있는 &quot;일일고용자&quot;였을 것이다.&lt;BR&gt;이 비유의 핵심은 우연히 보화를 발견한 기쁨과 그것을 정당하게 소유하기 위하여 자신의 전부를 포기하는 태도에 있다.&amp;nbsp; 천국은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연한 발견으로 주어지는 것이다.&amp;nbsp; 다만 그 가치를 인식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여 천국을 소유하려는 결단이 필요하다.&amp;nbsp; 천국 자체가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 전체로 응답할 것을 촉구하는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다.&lt;/P&gt;&lt;P&gt;b) 진주의 비유 ( 45, 46 )&lt;BR&gt;감추인 보화의 비유에서의 인물은 가난한 날품팔이인데 비해 진주의 비유에서는 부유한 상인이 등장한다.&amp;nbsp; 근동에서는 진주를 매우 값진 귀금속으로 여겼다.&amp;nbsp; 최상급의 진주는 인도양에서 생산되었는데 주로 유대인, 수리아인, 아랍인 등의 무역업자들이 중개업을 하였다.&lt;BR&gt;전통적으로 이 비유는 감추인 보화의 비유와 짝을 이루는 비유로 취급되어 왔는데 '우연한 발견'과 '탐색의 결과'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서로 동일한 강조점을 갖는다.예레미아스(Jeremias)는 도마복음에 실린 이 비유의 병행구절에서는 '상품을 가지고 있다가 진주 한 알을 발견한 어떤 상인'으로 나오는 점에 근거하여 이 장사가 진주를 우연히 발견한 것으로 보고 비유의 중심점은 값진 진주를 우연히 만난 기쁨에 있다고 보았다.&amp;nbsp; 그러나 마태의 본문에서는 부유한 상인이 오랫동안 진지하게 값진 진주를 찾은 결과 발견한 것이므로 우연한 발견을 말하는 감추인 보화의 비유와는 차이가 있다.&lt;BR&gt;두 비유는 지금 여기에서의 즉각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현재적 천국의 성격을 보여준다.이 비유는 시간성의 측면보다는 그 나라의 절대적가치에 부응하는 응답이라는 수용성의 측면이 보다 중요하다.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하여 회개하고 자신의 삶 전체를 포기하고서 지금 여기에 온 천국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한다.&amp;nbsp; 천국은 '전적인 투자'에 의한 결단을 통하여 개인에게 현재화 되는 것이다.&lt;/P&gt;&lt;P&gt;3. 천국과 종말심판&lt;BR&gt;a) 가라지의 비유 ( 본문 24 - 30, 해석 36 - 43 )&lt;BR&gt;가라지(&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는 일종의 독보리(Lolium temulentum)로서 밀과 유사하여 구분이 어려우므로 추수 때까지 같이 자라곤 한다.&amp;nbsp;&amp;nbsp;&amp;nbsp; 뿌리가 밀의 뿌리를 감고 있어 뽑으면 밀이 함께 뽑히는데 그 어의는 '간음' 또는 '연애'를 뜻한다.&lt;BR&gt;이 비유는 예수의 해석이 첨부되어 있으며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고 은밀히 자라는 씨의 비유(막4:26 - 29)와 유사하다는 이유로&amp;nbsp; 그 진정성을 의심하는 학자들도 있다.&amp;nbsp; 예레미아스(Jeremais)는 비유의 진정성은 인정하나 해석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한다.&amp;nbsp; 그는 예수의 알레고리적 해석이 도마복음의 병행구에는 없다는 점, 양식비평에 의하면&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39절)가 후기 전승층에 속한다는 점 등을 들어 그 진정성을 부인한다.&amp;nbsp; 그러나 알레고리적인 해석이라는 이유로 그 진정성을 부인하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다. 또한 편집비평이 주장하는 마태적이라는 표현도 극히 일부분에만 나타나는 것으로서 해석본문 전체를 마태의 것으로 볼만한 결정적인 단서가 되지 못한다.&lt;BR&gt;비유가 묘사하는 장면은 교훈을 위하여 만들어낸 가상적 상황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 이 비유의 핵심은 그 당시 청중에게 분명하게 전달되었을 것이다.&amp;nbsp; 밀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시기가 끝나면 추수꾼이 와서 밀과 가라지를 구분하는 결정적인 최후심판의 때가 온다.&amp;nbsp; 심판 전까지는 '참'과 '거짓'의 분리가 불가능하지만 천국이 임할 때 최종적인 분리가 있게 될 것이다.&amp;nbsp; 여기서의 관건적 개념은 '세상의 끝'인데 이 개념은 본 복음서에만 발견되는 것으로서 마태에게는 현존질서의 종식과 최종적인 대심판이 있은 후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있으리라는 종말에 대한 전망이 분명하였다.&amp;nbsp;&amp;nbsp; 비유는 현재적 천국 속에서의 선과 악의 공존, 심판까지의 인내들을 담고 있으나 그 강조점은 심판을 통한 천국의 극적인 도래를 바라보는 종말적인 전망에 있다.&lt;BR&gt;&lt;/P&gt;&lt;P&gt;b) 그물의 비유 ( 47 - 50 )&lt;BR&gt;이 비유는 대다수가 과거 어부였던 예수의 제자들에게 매우 실감나는 교훈이었을 것이다.&amp;nbsp; 팔레스틴에서는 고기를 잡을 때 두 배 사이에 그물을 치는 방법,&amp;nbsp; 배 한 척으로 바다에서 그물을 치면 뭍에서 끌어 당기는 방법 또는 그물의 한 쪽을 고정시킨 다음&amp;nbsp; 다른 쪽을&amp;nbsp; 잡고 반원을 그리며 배를 몰아 육지에 닫게 하는 방법 등을 사용한다.&amp;nbsp;&amp;nbsp;&amp;nbsp; 때 레위기 11장에서의 정결의식에 따라 그물에 걸려든 고기들을&amp;nbsp; 정한 고기와 부정한 고기를 선별하는데 본 비유는 이러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lt;BR&gt;가라지 비유에서 처럼 그물 비유 역시 의인과 악인의 최종적인 구별을 말하고 있다.&amp;nbsp; 또한 '세상 끝'에 '천사들'에 의하여 이 일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도 서로 일치므로 이 둘은 한 쌍의 비유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amp;nbsp; 도드(Dodd)나 맨슨(T.W. Manson)은 이 비유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한 마4:19과 연관시켜 선교에 관한 내용으로 해석한다.&amp;nbsp; 그러나 비유의 핵심이 그물 자체가 아니라 잡은 고기를 그물에서 구별해 내는 것이기 때문에 최후심판의 비유로 보아야 할 것이다.&amp;nbsp; 또한 '그릇'은 가라지 비유의 '곳간'과 동일한 것으로서 성도들에게 예비된 하늘나라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amp;nbsp; 무엇보다도 49, 50 절의 해석은 이 비유의 종말론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amp;nbsp; 그물은 한정적인 범위를 뜻한다 하여 종말사건의 적용대상을 교회로 한정짓기도 한다.&amp;nbsp; 그러나 예수는 보편적 진리의 묘사를 위하여 한정적 유추를 여러 번 사용하였다.&amp;nbsp;&amp;nbsp; 물의 비유는 가라지 비유에 비해서 심판 때까지의 인내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 있지 않다는 차이점을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앞의 비유와 동일한 강조점을 갖는다.&lt;/P&gt;&lt;P&gt;지금까지 천국비유에 관하여 살펴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lt;BR&gt;첫째, 천국비유는 천국의 현재와 미래를 모두 언급하고 있다;&lt;BR&gt;둘째, 현재적 천국과 미래적 천국은 연속성을 갖는다.&amp;nbsp; 현재적 천국은 역경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완성을 향하여 활발하게 확장되고 있으며 장래의 영광스러운 완성이 보장되어 있다.&lt;BR&gt;셋째, 천국비유는 천국의 현재보다는 미래에 대한 기대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amp;nbsp; 현재적 천국의 모든 활동은 만족한 수확, 놀라운 성장, 풍성한 결실, 극적인 심판 등을 특징으로하는 미래의 완성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내포하고 있다.&lt;/P&gt;&lt;P&gt;&amp;nbsp; II. 이적기사에 대한 이해&lt;/P&gt;&lt;P&gt;공관복음의 이적에 대한 이해는 대부분 기독론적 접근이 대부분이다.&amp;nbsp; 마가복음의 이적은 메시야의 비밀을 소개하는 기능을 갖거나 인자로서의 권위를 표출하는 행위를 의미한다.&amp;nbsp;&amp;nbsp; 모세유형론은 마태복음의 이적을 제 2모세의 메시야적 행위&amp;nbsp; 또는 '야웨의 종'의 관점에서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듯이 예수가 사람들을 질병과 속박에서 인도해내는 사건으로 설명한다.&amp;nbsp; 누가복음 역시 저자의 역사적 관심과 관련하여 이적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메시야의 표징적 행위를 의미한다.&amp;nbsp;&amp;nbsp;&amp;nbsp; 그러나 공관복음의 이적은 예수의 메세지의 주제인 '하나님 나라'의 예시라는 차원에서 설명할 수 있다.&amp;nbsp;&amp;nbsp; 그 중에서도 천국을 중심축으로 하여 예수의 메세지를 전개하는 마태에게 있어서 이적은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타공관서에 비해 이 둘은 더욱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amp;nbsp; 본장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마태복음의 이적기사를 살피고자 한다.&lt;/P&gt;&lt;P&gt;A. 이적에 관한 용어&lt;BR&gt;일반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이적(&amp;nbsp;&amp;nbsp;&amp;nbsp;&amp;nbsp; )이라는 용어는 공관복음서에 나타나지 않는다.&amp;nbsp; 대신&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등이 사용되는데 이 중&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가 총37회로 가장 많이 사용된다.&amp;nbsp; 제 4 복음서에서는&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에 저자의 신학적 해석을 부여하여 공관복음서에서의 이적에 해당하는 사건을 지칭하는데 사용한다.&lt;/P&gt;&lt;P&gt;1.&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lt;BR&gt;이 용어는 원래 세속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것이 신학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하나님의 능력(막5:30; 마14:2)이나 그 행위(막6:2; 마7:22; 10:20; 눅10:13 등)'를 뜻하게 되었다.&amp;nbsp; 마가복음 5:30은 예수가 병고침을 행하셨을 때 자신의 능력이 나가는 것을 느꼈다고 설명한다.&amp;nbsp;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세계로 들어옴을 의미한다.&amp;nbsp;&amp;nbsp; 마가복음 6:5에서 예수는 사람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어떠한 권능도 행할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는&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가 행위 자체를 의미한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의 이적들을 대부분&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로 지칭했으며 역사 속에서 구원을 수행하고 구원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해하였다.&lt;/P&gt;&lt;P&gt;2.&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 는 사복음서 중에서 마태(24:24)와 마가(13:22) 그리고 요한(4:48)에 한 번씩만 나타난다.&amp;nbsp; 이 용어는 원래 신들의 경고 또는 격려의 표지를 의미하였다.&amp;nbsp;&amp;nbsp; 칠십인역에서는&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과&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를 결부시켜 사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용법은 하나님의 이례적인 활동을 지칭하고 있다.(출7:3; 신4:34)&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이상의 진리를 상징하는 기능을 갖는데 비해&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는 사람의 시선을 끄는 외적인 면이 강조 된 용어이다.&amp;nbsp;&amp;nbsp; 여기서 이적의 외적인 면만 강조된다면 그것은 예수가 행한 이적의 본질적인 의미를 충분히 나타낸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amp;nbsp; 때문에 신약에서&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만 단독으로 사용되는 예는 많지 않고 표적과 기사(마24:24; 행4:40; 14:3; 롬5:19; 히2:4)라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lt;/P&gt;&lt;P&gt;3.&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lt;BR&gt;칠십인역에서&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사건, 특히 하나님이 도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사건을 지칭하여 사용되었다.&amp;nbsp;&amp;nbsp;&amp;nbsp; 이 용어는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이적을 가리키는 고정적인 명칭으로 사용되었다.&amp;nbsp; 여기서의 표적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됨을 알리는 신성한 징표이며 하나님이 임재와 사역에 대한 증거이다.&amp;nbsp;&amp;nbsp; 제 4복음서의 저자는 예수가 행한 이적을 철저하게 기독론적 인 관점에서 이해한다.&lt;BR&gt;공관복음에서의&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은 약간 차이가 있다. 첫째, 누가복음 2:12은 이적이 아닌 평상적인 일의 증거를 지칭한다.&amp;nbsp; 둘째, 마태복음 24: 3, 30에서는&amp;nbsp; 종말론적 상황을 의미하는 마지막 때 또는 재림 등과 관련되어 나타난다.&amp;nbsp;&amp;nbsp; 마지막으로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요구했던 표적, 예수의 출신을 결정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표적을 지칭한다.(막8:11-13; 마12:38; 눅23:8)&lt;/P&gt;&lt;P&gt;&lt;BR&gt;B. 이적기사에 대한 제 견해&lt;BR&gt;이적은 예수의 사역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부분이다.&amp;nbsp; 만일 복음서에서 이적기사를 제거하면 약 절반 정도의 내용이 사라진다.&amp;nbsp; 복음서의 이적기사가 수적인 면에서도 다른 기사에 비해 압도적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신학은 그것을 거의 전적으로 무시하여 예수가 선포한 메세지의 중요한 일면을 놓치는 심각한 실수를 범하였다.&lt;BR&gt;이적에 대한 회의는 18세기 계몽주의와 합리주의가 성서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시도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amp;nbsp; 합리주의적 신학은 현재의 합리적인 관점에서 발생이 불가능한 사건은 역사적으로도 발생할 수 없다는 전제 하에 전통적인 기적에 대한 신앙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 그 후로 성서신학은 이적에 대하여 정당한 신학적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였다.&amp;nbsp; 이후에서는 이적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들을 살펴보면서 복음적인 시각을 정리하고자 한다.&lt;/P&gt;&lt;P&gt;1. 합리주의적인 해석&lt;BR&gt;합리주의 신학은 이적기사란 원래 전적으로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한 사건들이었으나 제자들이 자신들이 받았던 주관적인 인상들, 다시말해서 착각에 의해 기록한 것이라고 보았다.&amp;nbsp; 예를 들어 예수가 물위를 걸은 사건의 경우 실제로 예수는 해변가를 걷고 있었으나 배 위에 있던 제자들은 안개 때문에 착시현상을 일으켜 물위를 걷고 있는 듯한 착각을 했다는 것이다.&amp;nbsp; 죽은 사람을 소생시킨 이적기사에 대해서는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은 사람을 실수로 매장할뻔 한것을 예수가 극적으로 막았다고 설명한다.&amp;nbsp; 이들은 이적기사들의 역사성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면서 그 안의 초자연적 요소들을 합리적인 해석이 가능한 범위안에서 설명하고자 하였다.&lt;BR&gt;합리주의적인 해석의 효시는 스피노자의 'A theological-Political Treatise'(1970)에서 찾을 수 있다.&amp;nbsp;&amp;nbsp; 그는 이 세계가 엄격한 자연법칙에 의하여 지배된다고 믿었으며, 그 자연법칙은 하나님의 섭리로서 고정적이고 불변적이라고 생각하였다.&amp;nbsp; 때문에 자연법칙과 모순되는 이적은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리는 결과를 가져오므로 이적은 실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amp;nbsp; 그의 입장은 이신론(Deism)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이적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들은 이와 유사한 사상적 배경을 갖고 있다.&lt;BR&gt;19세기에 들어 다수의 역사비평적 학자들은 이적에 대한 합리주의적 해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amp;nbsp;&amp;nbsp; 라이마루스(H.S. Reimarus, 1694 - 1768)를 필두로 한 독일의 합리주의는 이적기사를 초자연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자연계 안에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비역사적일 수 밖에 없다고 보았다.&amp;nbsp; 결국 예수가 조작해낸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amp;nbsp;&amp;nbsp; 이와는 달리 파울루스(H.E.G. Paulus, 1761 - 1851)는 기적을 사람들에 의해 기적이라고 풀이되어진 일상적인 사건들이나 또는 극히 드문 어떤 사건들로 간주하였다.&amp;nbsp; 그는 이적이라고 믿는 사건 중 많은 것이 사실 이적이 아니기 때문에 이적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 요소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amp;nbsp;&amp;nbsp; 예를 들어 오병이어의 기적은 제자들이 한 소년을 설득시켜 그의 음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먹게 하였는데 이에 나머지 사람들도 그들의 음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먹음으로써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amp;nbsp;&amp;nbsp; 이성의 범주 내에서 이적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초월적인 것을 제거하고 인간적인 것만을 정당화하였다.&amp;nbsp; 결과적으로 성서저자들의 정직함과 신빙성은 남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는 이적을 행하는 분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세상에 없었던 선의 최고 모범으로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lt;BR&gt;슐라이어마허(F. Schleiermacher, 1768 - 1834)는 또 다른 측면에서 이적에 대한 합리주의적 해석을 시도하였다.&amp;nbsp; 합리주의와 주관주의를 결합시킨 그의 시각은 상대적 이적관이라고 할 수 있다.&amp;nbsp; 이적은 자연을 거스리는 것이 아니고 그 원인이 자연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인데 예수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자연 법칙들을 활용함으로써 발생한 것이라고 보았다.&amp;nbsp;&amp;nbsp;&amp;nbsp; 이와 같이 합리적 사고와 계시의 적절한 조화를 시도하는 노력은 오늘날에도 종종 발견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를 이성의 틀 안에서 분해해보려는 시도는 예수의 역사적 사역을 이해하는데 있어 정당한 접근이라고 할 수 없다.&lt;/P&gt;&lt;P&gt;2. 신화적인 해석&lt;BR&gt;슈트라우스(D.F. Strau )는 초기 기독교 사고 속에는&amp;nbsp; 신화적인 요소가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적기사의 역사성 자체를 부인하였다.&amp;nbsp; 그는 이적이란 후대 교회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머리에 둘려진 영광스러운 후광과도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amp;nbsp; 그는 자연법칙은 유일하고도 필연적인 하나님의 법칙이라는 스피노자의 전제에 입각하여 이적의 역사적 발생가능성을 부인하고 복음서 이적사화 전승자들이 당시 시대의 이적 모티브들을 예수전승에 삽입시킴으로써 예수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하였다.&amp;nbsp;&amp;nbsp; 그의 입장은 후에 양식비평의&amp;nbsp; 케리그마 신학과 연결되어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lt;BR&gt;양식비평은 신화적 요소들이 복음서의 이적기사에 섞여 있는 것으로 본다.&amp;nbsp;&amp;nbsp; 양식비평은 이적기삭가 초자연적으로 채색되었다고 보고, 이 기사들이 원래의 형태로부터 변형되어 현재의 복음서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추적하였다. 그 결과 복음서에 있는 상당수의 단편적 자료들은 역사성이 없는 것으로서 기독교 공동체의 생활이나 독특한 삶의 정황에서 나온 신앙의 소산물이라는 결론을 얻었다.&amp;nbsp;&amp;nbsp;&amp;nbsp; 불트만(Bultmann)은 공관복음서의 이적기사와 유대적 및 헬레니즘적 기원의 기적설화를 비교하여 복음서의 기사들이 헬레니즘적 이적설화들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문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amp;nbsp;&amp;nbsp; 즉 복음서의 이적기사들은 헬레니즘의 기적설화를 모방하였다는 것이다. 불트만은 거의 대부분의 이적기사들에 대해 예수 당시 이미 존재하고 있던 이적의 모티브들을 초대교회가 예수에게 적용시켰다고 본다.&amp;nbsp; 때문에 복음서의 초자연적인 사건들은 고대종교가 갖고 있는 신화의 유산으로 보아야 하며,&amp;nbsp;&amp;nbsp; 비신화화를 통하여 그 의미를 추출해내야 한다는 것이다.&lt;BR&gt;&amp;nbsp;역시 양식비평학자인 디벨리우스(M. Dibelius)는 이적기사는 설교자가 아닌 설화가들이나 교사들에 의하여 생겨난 것으로서 문학적인 문체와 기교를 가지고 있다고 함으로써 역사적 사실이 아닌 창작으로 보고 있다.&amp;nbsp;&amp;nbsp; 풀러(Fuller)도 불트만의 입장을 따라 이적전승의 기원은 원시 기독교회가 그들의 구체화된 기독론과 구약적 모티브를 토대로 이적신화의 해석과 양식을 틀을 제공한데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amp;nbsp;&amp;nbsp; 예레미아스(Jeremias)같은 경우는&amp;nbsp; 양식비평을 적용하여 복음서의 이적기사는 후기의 헬레니즘 전승 층에 속한다고 보지만&amp;nbsp; 부분적으로는 진정성을 인정한다.&lt;BR&gt;양식비평이 이적기사의 케리그마를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나름대로의 기여를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의 이적기사를 신화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 창작물로 이해하여 이적기사를 역사적 사건으로 보지않고 그 의미만을 추출하려는 태도는 성경의 영감에 심각한 손상을 입히고 말았다.&lt;/P&gt;&lt;P&gt;&lt;BR&gt;3. 자연과학적 관점의 해석&lt;BR&gt;이 관점은 자연과학적 입장에서 가능하지 않은 것은 역사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는 원칙이 전적으로 성립할 수 없음을 주장한다.&amp;nbsp;&amp;nbsp; 이러한 견해는 기적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의 초자연성을 부인한다.&amp;nbsp; 기적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는 알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용할 수 없었던 자연법칙의 활동에 의하여 나타난 단순한 현상인 것이다.&amp;nbsp; 따라서 앞으로 과학이 그러한 현상들을 완전히 밝힌다면 모든 기적들은 다른 자연적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범상한 현상이 될 것이라는 입장이다.&amp;nbsp;&amp;nbsp; 고펠트(Goppelt)는 이러한 입장에 대하여 복음서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자연과학적 접근이 아닌 신학적, 철학적 관점에서 고찰되어야 함을 주장한다.&amp;nbsp;&amp;nbsp;&amp;nbsp; 이 지적도 옳은 것이나 신학적 또는 철학적 관점이 항상 정당한 것은 아니다.&amp;nbsp; 신학적이든 자연과학적이든 어떤 전제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해석이 결정되는 것이다.&amp;nbsp; 자연과학적 관점은 인간의 이성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전제를 갖는데서 문제가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신학에서의 합리주의적 관점과 별 차이가 없다.&amp;nbsp; 자연과학적 관점은 이적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을 제거하는 것이므로 이신론의 입장에 서있다고 하겠다.&lt;BR&gt;위에서 살펴 본 견해들의 공통점은 이적기사가 자연계의 질서 속에서 성립될 수 없음을 강조하는데 있다.&amp;nbsp; 합리적 이성의 기준에 의하면 이적기사가 자연계의 법칙에 위배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amp;nbsp;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이적기사가 이성적으로 납득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사실성 여부에 있는 것이다.&amp;nbsp; 이적기사의 초월적 요소가 사건의 역사성을 부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은 인과관계의 질서가 세계를 움직인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하다.&amp;nbsp; 이 전제를 떠나서는 절대적인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amp;nbsp; 이적의 초자연성은 오히려 초월적인 신성을 드러낸다.&amp;nbsp;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논하면서 역사 속으로 돌입한 하나님의 초월적 행위를 부인하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다.&lt;BR&gt;C. 마태복음 이적기사에 대한 이해&lt;BR&gt;마태복음의 이적기사는 세 곳에 집중적으로 수록되어 있다.&amp;nbsp; 첫 번째는 8, 9장에 실린 10개의 이적이 그것이고, 두 번째는 12장의 2 개의 이적을, 마지막으로&amp;nbsp; 14장과 15장에 수록되어 있는 6개의 이적기사를 들 수 있다. 이 중 첫째묶음을 제외한 나머지 이적기사들은&amp;nbsp; 첫 번째에 비해 그 수도 적고 다소 개별적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이 이적기사들은 타공관복음서의 병행구에 비해서 상당히 축소되어 있다.&amp;nbsp; 이는 마태가 8장과 9장에 실린 이적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두었음을 시사한다.&amp;nbsp; 이 10개의 이적기사는 앞의 산상수훈에 연결되어 나오는데 전술한 바와 같이 기독론적 시각에서 보면 산상수훈은 메시야의 교훈이며&amp;nbsp; 이적기사는 '메시야의 일들'(11:2)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amp;nbsp; 또한 모세유형론은 모세의 시내산 율법과 산상수훈을,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과 10 개의 이적기사를 연관시켜 예수를 제 2의 모세로 부각시키기 위한 저자의 의도로 해석한다.&lt;BR&gt;이러한 기독론적 관점과 별도로 마태복음의 천국사상과 관련하여 보면&amp;nbsp; 천국에 대한 예수의 언어적 교훈인 산상수훈에 뒤이어 천국에 관한 예수의 행위적 교훈을 제시하는 마태의 배려를 엿볼 수 있다.&amp;nbsp; 마태복음은 예수의 설교와 행위를 번갈아 소개하고 있는데&amp;nbsp; 이는 저자가 예수의 사역을 언어에 의한 복음선포와 행위에 의한 복음선포를 균형있게 소개하고자 하였음을 암시한다.&amp;nbsp; 따라서 여기서는 행위에 의한 천국복음 선포라는 관점에서 이 10 가지 이적기사를 유형별로 살피고자 한다.&lt;/P&gt;&lt;P&gt;1. 치유이적&lt;BR&gt;치유이적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일부로서 또한 복음 전달자에게 부여되는 능력으로서 그 복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확증하는 표적으로 주어진다.&amp;nbsp;&amp;nbsp; 예수의 사역에서 치유이적과 복음선포는 거의 항상 동시에 행하여졌다.(눅4:40; 마1:21ff)&amp;nbsp; 본문에는 여섯 개의 치유이적이 소개되어 있는데&amp;nbsp; 이중 백부장 하인의 치유와 두 소경치유를 제외한 나머지는 마가복음에도 실려 있다.&amp;nbsp; 마가복음에서는 이 이적기사 뒤에 이적을 본 사람들의 놀라워 하는 반응을 상대적으로 강조한다.&amp;nbsp;&amp;nbsp; 그에 비해 마태는 사건 자체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예로서 문둥병자의 치유에서 마태는 문둥병자가 그의 치유사실 퍼뜨린 사실을 설명하는 마가의 본문과는 달리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릴 것에 대한 당부로 끝맺고 있다.&amp;nbsp; 이것은 사건의 정황보다는 사건의 의미에 치중하고 있음을 말한다.&lt;BR&gt;치유이적은 특히 이적과 믿음과의 상관관계를 보여준다.&amp;nbsp; 치유이적기사에는 거의 대부분 믿음에 대한 확인이 내용의 중요한 부분으로 서술된다.&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믿음)과&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믿는다), 이 두 낱말은 대부분 치유이적과 관련된 기사 가운데 나타나며, 대개 그 내용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예수의 확인으로 끝을 맺는다.&amp;nbsp;&amp;nbsp; 본문에서도 문둥병자의 치유와 베드로 장모 치유를 제외하고는 믿음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amp;nbsp;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치유하실 때에도 예수는 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인정하신다.(9:2)&amp;nbsp; 혈루병 여인에 대해서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며 치유가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를 밝히신다.&amp;nbsp;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신 사건에서는 믿음과 천국의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amp;nbsp; 누가복음에 있는 병행구절과는 달리(눅7:2-10) 본문에는 천국에 관한 예수의 부가적인 언급이 첨가되어 있다.(8:11, 12)&amp;nbsp; 여기서 믿음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자격요건으로 제시된다.&amp;nbsp; 본문에 나타난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의 절대주권에 대한 이해와 신뢰였으며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인식하고 절대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말한다.&amp;nbsp;&amp;nbsp;&amp;nbsp; 환언하면 치유이적은 하나님의 통치를 전제로 할 때 가능한 것이며, 동시에 치유이적은 천국이 성립된 결과로서 가능한 것이다.&lt;BR&gt;둘째, 치유이적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일부로서 죄의 사유를 확증하는 기능을 갖는다.&lt;BR&gt;셋째, 치유이적은 바리새인과의 논쟁적인 분위기를 표출하고 있다.&amp;nbsp; 중풍병자의 치유에서는 그의 사죄행위와 치유행위에 대해 공개적인 반박이 나타난다. 백부장의 하인을 치유하신 후에 한 예수의 언급은 나라의 본 자손, 곧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경고의 성격을 띈다.&amp;nbsp; 이 대립적 상황은 축귀사역을 통하여 한층 더 심화되고,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의 책망도 한층 더 강화된다.&lt;BR&gt;. 축귀이적&lt;BR&gt;본문에는 두 번의 축귀사역이 기록되어 있다.&lt;BR&gt;첫째, 가다라 지방에서 귀신들린 자 둘을 고쳐주신 사건에서는 무엇보다도 귀신들을 제어하는 예수의 절대적 능력이 드러난다.&amp;nbsp; 귀신들은 예수의 신적 권위와 신분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의 능력과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한다.&amp;nbsp; 자신들의 권세가 매우 제한적인 것임을 인정하는 귀신의 자세는 사탄의 권세를 결박하고 능력으로 임한 현재적 천국에 대한 예수의 선포(마12:22ff)와 일치한다.&lt;BR&gt;둘째, 귀신들려 벙어리된 자를 고친 이적은 그와 유사한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마12:22ff)를 고친 이적과 연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amp;nbsp; 두 경우 모두 예수가 귀신의 왕을 힘입어 병을 고친다는 바리새인의 비난이 뒤따르는데 9장에서와는 달리 12장에서는 천국의 현재적 도래를 선언하는 예수의 설명이 이어진다.&amp;nbsp; &quot;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 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quot;(마12:28)라는 예수의 선언은 이적의 의미에 대해 직접 언급한 유일한 구절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amp;nbsp; 앞의 두 개의 이적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사탄의 세력은 예수의 초림으로 이미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하나님의 통치 하에서 매우 위축된 활동을 하고 있다.&amp;nbsp; 예수는 질병을 통하여 나타난 사탄의 압제적 통치를 발견한다.&amp;nbsp;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질서의 일부가 아니었다.&amp;nbsp; 때문에 혈루병 여인의 치유의 경우에서 처럼 예수나 마태에게 있어서 '구원받았다'는 것은 오늘날처럼 내적인 또는 사법적인 의미로 이해되는 관념화된 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를 통하여 나타난 사탄의 속박에서 실제적인 해방의 의미도 담고 있었던 것이다.&lt;BR&gt;&amp;nbsp;따라서 축귀는 예수의 구속사역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며 사탄의 세력은 오직 천국의 통치자이신 메시야의 왕권에 의해서만 분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천국도래의 표징이 된다.&amp;nbsp;&amp;nbsp; 또한 이 권세는 제자들과 모든 믿는 자들에게 부여됨으로써 천국의 확장작업이 계속 이어진다.&amp;nbsp;&amp;nbsp; 가서 천국복음을 선포하라는 예수의 위임령과 함께 병을 치료하고 귀신을 쫓아내라는 명령이 반드시 뒤따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lt;/P&gt;&lt;P&gt;3. 소생이적&lt;BR&gt;공관복음에는 두 번의 소생사건이 나온다.&amp;nbsp; 회당장 야이로의 딸 소생사건(막5장, 마9장, 눅8장)과 나인성 과부의 아들 소생 사건(눅7장)이 그것인데 마태복음에는 '한 직원'의 딸로서 전자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amp;nbsp; 이 사건은 구약에서 엘리야가 행한 소생이적을 연상시킨다.(왕상17장)&amp;nbsp; 예수 당시의 유대교는 엘리야가 이 세상에 다시 와서 종말을 알리는 표징적 역할을 할 예언자로 기대하였다.&amp;nbsp; 따라서 예수의 소생이적은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고 종말에 죽은 자에게 소생의 길이 열리게 됨을 알리는 표징으로서 이해되는 것이다.&lt;BR&gt;이 이적기사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소녀가 자고있다'고 한 예수의 표현에 집중된다.&amp;nbsp; 마가의 본문에 근거하여 그 소녀가 혼수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합리주의적 해석도 있으나&amp;nbsp; 마태의 본문은 '방장 죽었다'(9:18)고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누가는 '죽은 것을 알고'라고 첨언하였다.&amp;nbsp; 합리주의적 해석은 사람들이 그 소녀가 아직 숨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때 예수는 이를 알아차리고 하마터면 생매장 될 뻔한 소녀를 죽음으로부터 구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amp;nbsp; 물론 이러한 상황이 실제로 발생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amp;nbsp; 그러나 그것을 본문의 상황에 적용한다면 예수는 단지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비범한 인물이며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돕는 두터운 인간애를 가진 인물일뿐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역사의 한 가운데로 하나님의 나라를 몰아오는 메시야가 될 수 없다.&amp;nbsp; '소녀가 잔다'고 했을 때 예수는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통찰력으로 소녀의 상태를 파악한 것이 아니라 죽음 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amp;nbsp;&amp;nbsp; 천국의 능력은 죽음조차도 무위로 돌리는 것이며 그 생명력은 예수의 사역을 통하여 현세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적이 보여주는 천국의 역동성을 통하여 우리는 천국복음 전하는 예수의 사역의 절정을 발견한다.&lt;/P&gt;&lt;P&gt;4. 자연이적&lt;BR&gt;일반적으로 8:23 - 27의 광풍진압 이적은 앞에 있는 두개의 제자직에 관한 교훈과 연관시켜 이해한다.&amp;nbsp;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는 예수가 어떤 분이지를 잘 알아야 하고,&amp;nbsp; 위험한 순간에도 예수와 동해할 각오가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amp;nbsp;&amp;nbsp; 그러나 광풍 자체는 예수를 따르기 위한 개인의 실존적 결단에 방해가 되는 직접적인 요소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여타 이적과 같이 천국사상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할 것이다.&amp;nbsp; 그러나 풍랑에 대한 침묵명령이 축귀이적에 나타나는 장면과 유사하다고 해서 이를 직결시켜 설명하는 것은 무리이다.&amp;nbsp;&amp;nbsp;&amp;nbsp; 풍랑을 잠잠케 한 사건, 오병이어 사건 또는 무화과 나무를 고사시킨 사건 등의 자연이적들은 구약에서의 '하나님 현현'과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는 바, 이 이적들은 일종의 여호와의 현현의 표식이 된다.&amp;nbsp;&amp;nbsp; 환언하면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이 현세에 적용됨을 증거한다.&lt;BR&gt;본문에서도 치유이적에서와 같이 '믿음'에 대한 강조가 나타난다.&amp;nbsp; 전술한 바와 같이 믿음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요건이 된다는 점에서 제자들은 예수가 자신들의 배에 동승하였으므로 예수를 통하여 역사하는 창조주의 권능이 자신들을 보호하리라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다.&amp;nbsp;&amp;nbsp; 본문은 피조물인 자연계를 다스리는 창조주의 통치가 역사 속에서 실현되는 천국의 현재를 보여준다.&lt;BR&gt;&lt;/P&gt;&lt;P&gt;D. 이적과 천국&lt;/P&gt;&lt;P&gt;1. 천국복음 선포와 이적사역&lt;BR&gt;이적은 '하나님의 종말적인 징조(proxy)로서의 행위'이며 '마지막 날의 빛이 어두운 세상 위에 비친 사건'이다.&amp;nbsp;&amp;nbsp; '오실 그 분이 당신입니까'라는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해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는 예수의 구약인용은(사35:5-6; 61:1)그가 자신의 이적을 구원시대의 징표로서 이해하였음을 말해준다.&amp;nbsp;&amp;nbsp; 종말의 사건이 예수의 사역을 통하여 현재에 나타나는 것이다.&lt;BR&gt;따라서 이적은 단순히 예수의 정체에 대한 증거로서 그 기능을 다하는 것이 아니며, 그의 말에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의도된 신비한 사건도 아니다.&amp;nbsp; 역사비평적 해석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이적은 설화에 의하여 표현된 영적인 진리도 아니며, 예수의 위대성을 선양하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여 선의로 신화적 요소를 첨가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amp;nbsp; 그것은 천국의 모습을 보여준다.&amp;nbsp; 언어적 선포에 동반된 행동적 예시로서 천국의 현존을 가시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amp;nbsp;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4:23)라고 한 마태의 묘사는 이러한 관계를 전제하여 천국복음와 이적이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amp;nbsp; 이 불가분의 관계는 천국의 도래가 필연적으로 사탄통치의 종결을 가져온다는 사실에서 설명된다.&amp;nbsp; 이적의 본질적인 의미는 이 갈등의 상황 속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lt;/P&gt;&lt;P&gt;2. 이적에 나타난 사탄왕국의 파멸&lt;BR&gt;이적은&amp;nbsp; 사탄통치의 종식을 의미한다.&amp;nbsp; 반대로 사탄의 통치 안에서는 예수의 이적은 불가능하다.&amp;nbsp; 급식이적은 우리에게 빈곤과 육체적 한계에 종속되어 있어야 하는 곤고함과의 결별을, 치유이적과 축귀이적은 모든 죄로 인한 탄식, 고난과 슬픔이 제거됨을 예고한다.&amp;nbsp; 또한 소생이적은 사탄통치의 결말인 사망이 철폐됨으로써 영원한 하나님의 승리가 보장되어 있음을 보여준다.&amp;nbsp;&amp;nbsp; 마태복음의 천국개념에는 이와 같이 사탄의 통치를 분쇄하여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난다.&lt;BR&gt;마12:28의 선포는 축귀이적이 천국의 현재적 실재가 사탄의 왕국과의 대립하는 상태를 보여준다.&amp;nbsp; 예수의 공생애는 &quot;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quot;(막1:15)라는 선포와 함께 시작되는데, 여기서 '때가 찼다'는 것은 사탄 시대의 종말을 의미한다.&amp;nbsp; 사탄의 종말을 예고하는 예수의 위대한 사역은 처음부터 사탄의&amp;nbsp; 도전을 받는다.(마4:1 - 11)&amp;nbsp; 그러나 예수는 귀신들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고 그 영향력을 철저하게 봉쇄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증명한다.&lt;BR&gt;하나님 자신의 직접적인 행위로 인하여 사탄의 왕국은 무너졌다.&amp;nbsp; 축귀이적은 천국을 입증하기 위한 증거라기 보다는 하나님 통치가 역사 속으로 돌입해온 천국의 일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amp;nbsp; 그것들은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진입한 천국의 실재인 것이다.&amp;nbsp;&amp;nbsp; 천국의 임재는 영적으로 악한 나라와의 투쟁 및 그 나라에 대한 정복을 내포한다.&amp;nbsp; 따라서 사탄통치의 종식을 위하여 축귀이적은 필연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lt;BR&gt;모든 이적은 사탄의 세력이 패배하고 천국이 도래함을 증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amp;nbsp;&amp;nbsp; 사탄통치의 섬멸은 질병치유에서도 나타난다.&amp;nbsp; 질병은 죄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며, 치유이적은 죄사함을 전제로 한다.&amp;nbsp; 때문에 치유이적 역시 죄의 권세, 즉 사탄의 영향력의 분쇄를 의미한다.&amp;nbsp; 새로운 생명력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통치 하에서는 질병을 통하여 행사되던 사탄의 영향력은 근절되어야 하는 것이다.&amp;nbsp; 한 직원의 딸을 소생시킨 이적은 사탄의 사망권세에 결정적인 제동을 건 사건이다.&amp;nbsp; 단지 소녀의 손을 잡는 행위만으로도 '사망'은 떠나가고 '생명'이 역동한다.&amp;nbsp; 하나님의 통치 앞에서 사탄의 영향력은 전적으로 무위로 돌아간다.&amp;nbsp; 더 나아가 소생이적은 종말에 있을 부활사건의 예시하는 점에서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확증한다.&amp;nbsp;&amp;nbsp; 광풍을 잔잔케 한 사건은 사탄의 직접적인 공격으로 간주할 필요는 없다 할 지라도 예수의 사역을 방해하는 어떤 작용이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amp;nbsp;&amp;nbsp;&amp;nbsp; 예수가 이해하는한 이 세상은 '신에 의해 지배되는 자연질서'&amp;nbsp; 속에 있지 않다.&amp;nbsp; 사탄의 통치권을 박탈하는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초월적인 행위로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예수의 이적은 천국의 도래를 위하여 필연적인 사건이 되며 천국의 표징이자 천국의 가시적 실재가 되는 것이다.&lt;BR&gt;예수는 사탄을 결박하고 그의 세간을 늑탈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나(12:28, 29) 사탄의 왕국의 완전히 파멸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종말에는 인자가 사탄을 심판하고 그의 졸개들까지 영원한 불에 처넣을 것이다.&lt;BR&gt;이적의 역사성 또는 진정성에 대한 회의는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왕국과의 대립이 요구하는 이적사건의 필연성을 간과하고 있다.&amp;nbsp; 예수의 이적을 부인한다면 그의 메세지의 중요한 일면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과 현재의 가시적 성취를 놓치는 것이다.&lt;BR&gt;이상에서 마태복음 8장과 9장을 중심으로 이적기사를 살펴보았다.&amp;nbsp; 마태복음의 이적기사는 첫째, 천국의 현재적 도래를 강력하게 증거하며, 그 나라의 가시적 실재로서 제시된다.&amp;nbsp; 둘째, 마태복음의 천국은 하나님의 왕국과 사탄의 왕국이 대립하는 이원론적 요소를 담고 있으며, 이 구조 속에서 사탄의 왕국을 무너뜨리고 저지할 수 없는 권능으로 진입해오는 천국의 역동성이 표출된다.&lt;BR&gt;&lt;BR&gt;&lt;/P&gt;&lt;P&gt;IV. 천국비유와 이적기사의 결합을 통하여 이해한 저자의 의도&lt;/P&gt;&lt;P&gt;A. 마태복음에서의 천국비유와 이적기사의 위치&lt;BR&gt;복음서가 예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서 기술되었다는 점, 그리고 네 편의 복음서가 있다는 점, 이 두 가지는 복음서 해석을 위한 중요한 전제이다.&amp;nbsp; 복음서는 네 명의 각기 다른 인물이 예수에 관하여 쓴 책이다.&amp;nbsp; 여기서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계적인 증언이 아니라 다양한 복음서의 저자들의 자율적인 인격에 따른 증언이 되도록 하셨다는 사실이다.&amp;nbsp; 이러한 관점에서 본절에서는 마태복음의 구조 속에서 천국비유와 이적의 위치를 살펴봄으로써 본 복음서 맥락의 일면을 살피고자 한다.&lt;/P&gt;&lt;P&gt;1. 교차대칭구조 속에서의 천국비유와 이적기사&lt;BR&gt;일반적으로 마태복음의 구조로는 오경구조(The Pentateuchal Sturcture)가 가장 많이 언급되며, 그 밖에는 교차대칭구조와 교체편집구조 또한 기독론적 구조 등이 있다.&amp;nbsp; 이것은 일종의 가설이라고 하겠으나 마태복음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amp;nbsp; 교차대칭구조와 교체편집구조는 크게 보아 오경구조의 틀 속에서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amp;nbsp; 이 중 교차대칭구조는&amp;nbsp; 마태복음의 구조에 대한 여러가지 제안에 거의 무리 없이 이중적으로 성립된다는 점에서 저자가 의도한 구조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amp;nbsp; 마태복음 전체의 구조를&amp;nbsp; 교차대칭구조에 입각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lt;/P&gt;&lt;P&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amp;lt; 마태의 교차대칭구조 &amp;gt;&lt;/P&gt;&lt;P&gt;&amp;nbsp;+------ 1&amp;nbsp; -&amp;nbsp; 4 : 예수의 탄생과 출현&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5&amp;nbsp; -&amp;nbsp; 7 : 산상설교&amp;nbsp;---------------+&lt;BR&gt;&amp;nbsp;|&amp;nbsp;+---- 8&amp;nbsp; -&amp;nbsp; 9 : 예수의 이적&amp;nbsp;|&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10&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 사도들에게 준 설교&amp;nbsp;--+&amp;nbsp;|&lt;BR&gt;&amp;nbsp;|&amp;nbsp;|&amp;nbsp;+-- 11 - 12 : 유대인들의 예수배척&amp;nbsp;|&amp;nbsp;|&lt;BR&gt;&amp;nbsp;|&amp;nbsp;|&amp;nbsp;+-- 13&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 천국비유설교&amp;nbsp;--------+&amp;nbsp;|&lt;BR&gt;&amp;nbsp;|&amp;nbsp;|&amp;nbsp;+-- 14 - 17 : 제자들의 예수 환영&amp;nbsp;|&amp;nbsp;|&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18&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 교회설교&amp;nbsp;-----------+&amp;nbsp;|&lt;BR&gt;&amp;nbsp;|&amp;nbsp;+---&amp;nbsp; 19 - 22 : 예수의 권위와 초대&amp;nbsp;|&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23 - 25 : 종말설교----------------+&lt;BR&gt;&amp;nbsp;+-----&amp;nbsp; 26 - 28 : 수난설화&lt;/P&gt;&lt;P&gt;&lt;BR&gt;교차대칭 또는 교차대구(Chiasm)란 고전학자들에게 익숙한 문학기법이었던 '순환구성'(ring composition)의 발전된 형태로서, 순환구성은 저자가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단어 또는 내용을 글의 말미에서 다시 사용하는 방법이다.&amp;nbsp; 교차대구는 여기서 더 나아가 하나의 맥락에서 시작과 종결을 갖추도록 할 뿐 아니라 그러한 맥락의 중간부에서 두번째와 준종결이 역시 같은 모양을 갖추도록 균형을 잡는다.&amp;nbsp; 이상의 구조분석은&amp;nbsp; 천국비유가 전체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amp;nbsp; 이는 마태복음의 신학적 원리는 천국사상이라는 많은 학자들의 지적과 일치한다.&amp;nbsp;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고 제자들의 설교가 '천국의 임박'(마3:2; 4;17; 10:7)을 선포하는 통일성을 갖고 있는 만큼, 천국비유를 집중적으로 수록한 부분이라는 점 하나로도 13장의 중요성은 충분히 입증된다.&lt;BR&gt;예수가 이 비유들을 한 장소에서 일시에 말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13장은 천국의 본질과 원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자 한 저자의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amp;nbsp; 전체의 내용전개를 보면, 13장을 중심으로 후반은 마가복음의 사건 순서에 준하여 시간적 진행에 충실한 반면, 전반에는 마태 특유의 조직적인 배열로 자료들을 주제별로 정리하고 있다.&amp;nbsp; 이중에서도 산상수훈과 이적기사, 천국비유가 두드러진다.&amp;nbsp; 이에 저자의 관점과 의도가 전반부에 주로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그 중심사상인 천국의 개념을 살피기 위한 자료로서 천국비유와 이적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lt;/P&gt;&lt;P&gt;2. 교체편집구조 속에서의 천국비유와 이적기사&lt;BR&gt;본 복음서는 기사와 교훈이 번갈아 나오는&amp;nbsp; 교체구조를 갖고 있다.&amp;nbsp; 선행되는 사건기사는 뒤따르는 설교를 위한 준비과정으로서 각 기사의 마지막 본문은 설교와 연관시키기 위한 내용을 담고 있다.&amp;nbsp; 각 설교의 마지막 본문도 그 설교의 중심사상을 간단히 요약한 것이다.&lt;BR&gt;예수는 그의 메세지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고 동시에 그 자신이 메세지이기도 했다.&amp;nbsp; 예수의 언어, 행위, 인격은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선포인 것이다.&amp;nbsp; 예수의 교훈은 순수이론이 아니다.&amp;nbsp; 예수의 언어적 선포 일체는 그의 삶과 결부되어 실천을 지향한다.&amp;nbsp; 그의 선포는 행위를 밑받침하고 정당화하는 한편, 행위는 선포를 실천적으로 증명함으로써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제시하였다.&lt;BR&gt;예수의 행위는 천국비유와 같이 그 속에 천국을 예시하는 요소를 담고 있었다.&amp;nbsp; 때문에 그것은 윤리도덕적 규범체계가 아니라 천국도래라는 미래의 결정적인 사건을 그의 삶과 인격으로 구현한 것이다.&amp;nbsp;&amp;nbsp; 태복음에의 천국비유와 이적기사는 바로 이러한 언어와 행위의 상응적 관계에 해당한다.&lt;BR&gt;물론 천국에 관한 행위적 선포가 이적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amp;nbsp; 그러나 여러가지 예수의 행위 중에서 이적기사만을 별도로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적기사가 천국비유의 언어적 선포에 상응하는 행위적 선포의 위치에 놓이는 것이다.&amp;nbsp; 마태복음은 예수의 복음선포의 두 가지 방식을 균형있게 재현하고 있다.&amp;nbsp; 이후에서는 앞에서 고찰한 내용들을 중심으로 천국비유와 이적의 관계성을 정리하면서 마태복음의 천국개념을 이해하고자 한다.&lt;/P&gt;&lt;P&gt;B. 그 나라의 임재에 대한 시간성의 측면에서&lt;/P&gt;&lt;P&gt;1. 천국의 시간성&lt;BR&gt;천국의 시간성에 관한 다양한 견해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정당한 이해가 해석학적 난제라는 점을 잘 반영해준다.&amp;nbsp; 천국 도래의 임박성에 관한 선포는 예수의 교훈의 중심이었으며, 그의 모든 언어와 행위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는 그의 긴박한 확신을 표출하고 있다.&amp;nbsp; 분명 그는 구약의 하나님 나라가 갖고 있는 미래면을 현재화하였다.&amp;nbsp; 그러나 예수는 여전히 하나님 나라를 미래적인 것으로 봄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갖는 시간적 이중성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amp;nbsp;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예수의 가르침 중심에 하나님 나라의 사상이 있었다는 점에서는 일치하면서도 그 나라의 시간성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을 제시하고 있다.&lt;BR&gt;첫째, 하나님 나라의 시간성을 현재에만 국한 시키는 해석으로서 리츨(Albert Ritschl)의 비종말론적 해석에서 그 전형을 발견할 수 있다.&amp;nbsp; 그는 하나님 나라를 '사랑으로 감동된 호혜적 공동체를 위한 인류의 협동체로 이해하였다.&amp;nbsp;&amp;nbsp; 이해는 하나님 나라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활동에 의한 것으로서 인간적 상호작용의 산물이 아니라는 성경적 관점을 결여한 것이다.&amp;nbsp; 리츨의 견해를 발전시킨 하르낙(A. Harnack)은 형제애, 영혼의 소중한 가치, 사랑의 윤리적 교훈 등을 하나님 나라로 보았다.&amp;nbsp; 그는 하나님 나라를 개개인의 마음에 적용되는 하나님의 통치로 보았다.&amp;nbsp;&amp;nbsp; 비종말론적인 해석은 결국 하나님 나라를 지상의 도덕적인 나라로 파악함으로써 그 나라의 시간성을 현재적인 것으로만 한정시켰다.&lt;BR&gt;두 번째 견해는 시간성을 미래적인 것에 국한시키는 입장으로서 바이스(Johannes Weiss)와 슈바이처(A. Schweitzer)의 철저 종말론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amp;nbsp; 바이스는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승리는 이미 하늘 나라에서 이루어졌으며, 예수는 그 나라가 이 땅에 임재할 것을 선포한다고 하여 미래적 완성에 촛점을 맞추었다.&amp;nbsp; 바이처는 여기서 더 나아가 '철저 종말론'을 주장하였다.&amp;nbsp; 그는 예수의 교훈은 종말 직전의 짧은 기간을 위하여 주어진 것일 뿐, 현세적 윤리 사회 안에서의 적용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 하여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미래적인 것임을 주장하였다.&amp;nbsp; 그들의 주장은, 예수는 종말을 향한 묵시적인 전망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임박한 종말을 준비하는 것만이 중요했었다고 본다.&amp;nbsp; 부트만(R. Bultmannn)의 실존론적 종말론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묵시적 전망에서부터 현재적인 의미를 추론한다는 점에서 슈바이처와 유사하다. 그는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는 시간의 과정 속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결단을 통하여 임한다고 함으로써 시 성 자체를 부인하는 것처럼 보인다.&lt;BR&gt;마지막으로 최근의 논의는 그 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공유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인다.&amp;nbsp; 다드(Dodd)의 '실현된 종말론'이 제시된 이래 학자들은 그의 견해를 연구하면서 거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에는 미래성이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amp;nbsp; 각각의 차이가 있으나 헌터(A.M. Hunter), 카두(C.J. Cadoux), 테일러(V. Taylor), 풀러(R.H. Fuller), 예레미아스(J.Jeremias), 큄멜(W.G. Kummel), 쿨만(O. Culmann) 등 다수의 학자들이 양면성을 주장한다.&amp;nbsp; 태태복음이 천국의 시간을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음은 이미 살펴본 바이다.&lt;/P&gt;&lt;P&gt;2. 천국비유에 나타난 그 나라의 시간성&lt;BR&gt;'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라는 세례 요한의 질문에 사35:5, 6; 26:19; 61:1 등을 인용한 예수의 답변은 예수 자신의 행위와 언어 속에서 이미 천국이 임하였음을 분명하게 밝혀준다.&amp;nbsp; 마태복음의 천국비유는 이러한 전제 하에서 전개된다.&lt;BR&gt;우선 세 개의 확장의 비유를 보면, '씨를 뿌렸다',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또는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이라는 표현은 예수의 초림으로 이미 새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amp;nbsp; '천국이 가까왔다'는 예수의 선언은 하나님 나라가 공간적으로 이 지상에 임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적인 사건으로 확인된 사실에 관한 인식을 전제로 하는데, 이것은 메시야의 임재와 함께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의미한다.&amp;nbsp; 이는 예수의 사역, 곧 그의 말씀과 행동이 천국의 현존임을 뜻한다.&lt;BR&gt;또한 이 비유들은 그 나라의 시작과 함께&amp;nbsp; 현세에서 그 영향력을 행사하며 그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amp;nbsp; 그 과정에는 많은 역경과 난관이 있다.&amp;nbsp;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뿌린 씨의 약 3/4이 유실되고 만다.&amp;nbsp; 천국의 확장을 도모하는 그 나라의 백성들은 이러한 난관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amp;nbsp; 그러나 놀라운 수확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그 역경은 그 나라의 현재적 활동을 위축시키지 못한다 그 나라의 현재성은 그 강력한 영향력에 의해서도 입증된다.&amp;nbsp; 반죽 속의 누룩은 보이지 않지만 전체를 부풀리는 놀라운 힘을 가졌다.&amp;nbsp; 마찬가지로 이미 시작된 천국은 불가시적이지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확장되어 나간다.&amp;nbsp; 이러한 현재성은 사람들에게 '지금 여기에서의 현재적 결단'으로 인도한다.&amp;nbsp; 감추인 보화가 발견되었고 간절히 찾던 극히 값진 진주를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amp;nbsp; 솔로몬이나 요나보다 더 위대한, 율법과 성전보다 더 위대한 분이 나타났다.&amp;nbsp; 과거의 모든 사람들이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했던 그 날이 온 것이다.&amp;nbsp; 때문에 즉시 모든 것을 다 팔아 그 부름에 대해 즉각 응답을 해야 하는 것이다.&lt;BR&gt;마태복음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나라가 이 세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미래에도 존속된다고 말한다.(16:28) 미래의 왕국을 묘사함에 있어 마태는 그것이 현재하는 하나님 통치의 연속임을 강조한다.&amp;nbsp;&amp;nbsp;&amp;nbsp; 나라의 확장에 대한 비유들은 한결 같이 보잘것 없는 시작과 장대한 결과를 대비시키며 엄청난 결실이 있을 것에 대한 미래적 전망을 제시한다.&amp;nbsp; 그 변화는 너무나 기적적이고 우주적이며 동시에 거대한 것이어서 겨자씨가 새들이 깃들 정도의 크기로 자라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amp;nbsp; 또한 미래에 있을 완성에 대한 기대는 현재의 난관과 역경 속에서도 최종적인 성취를 향한 강한 소망을 불러일으킨다.&amp;nbsp; 무엇보다도 천국의 시간성이 갖는 미래적 국면은 종말의 심판에 대한 비유에서 나타난다.&amp;nbsp; 현재의 천국은 완전하지 못하여 가라지가 섞여 있고 나쁜 고기들이 섞여 있다.&amp;nbsp; 그 완성을 위해서는 이들을 구별해 내야 하며, 그 때까지 인내하며 궁극적인 성취를 바라보며 기다려야 한다.&lt;BR&gt;세분하여보면 천국비유는 그 나라의 시작과 진행 그리고 궁극적인 완성이라는 세 가지 시간을 보여준다.&amp;nbsp; 시작과 진행을 현재로 보면 마태복음에 나타난 천국의 시간은 현재와 미래를 공유하고 있으며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완성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다.&amp;nbsp; 두 개의 시간 중 어떤 것에 보다 강조를 두는냐 하는 논의에서 단정적인 결론을 얻기는 쉽지 않지만 마태복음의 천국비유는 그 나라의 현재적인 국면을 미래적 전망과 연결시키며 종국적 성취를 고무시킨다는 점에서 미래성을 상대적으로 강조한다.&lt;BR&gt;3. 이적기사에 나타난 천국의 시간성&lt;BR&gt;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그 대부분이 예수의 이적을 말하고 있다.&amp;nbsp; 모든 희망과 기대와 약속을 성취하는 구속사의 새로운 국면이 예수 안에서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적은 천국의 현재성과 직결된다.&amp;nbsp; 사탄의 통치를 분쇄함으로써 천국의 임재가 증명되었다고 하는 예수의 선언은(12:28) 이적사역이 왕되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증거임을 선포한 것이며, 천국이 예수의 사역 안에서 현재적 실제로 나타남을 강하게 증거한다.&amp;nbsp; 하나님의 왕적인 행위에 접촉한 개인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개입을 현재적인 것으로 확증하는 것이다.&amp;nbsp;&amp;nbsp; 국의 권세는 지금 여기에서&amp;nbsp;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며 그들을 사탄의 사슬에서 구해내고 있는 현재적 활동력이다.&amp;nbsp; 그 나라의 임재는 바리새인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예수의 자기증명을 위한 표적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역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권능에 의하여 증거되는 것이다.&lt;BR&gt;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치력의 확립이 수반되어야 한다.&amp;nbsp; 때문에 사탄의 통치를 분쇄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이적은 하나님 통치의 확립과 그에 상응하는 사탄 통치의 파멸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승리가 이미 확정되었음을 나타내는 결과적인 사건들로서 천국의 현재적 임재에 대한 결정적 징표가 되는 것이다.&lt;BR&gt;마태복음은 천국비유와 이적기사를 통하여 천국이 갖는 시간의 양면성을 설명하고 있다.&amp;nbsp; 천국비유에서는 현재성과 미래성이, 이적기사에서는 절대적인 현재성이 나타난다.&amp;nbsp; 그 중에서도 천국비유는 천국의 현재적 국면을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 연결시켜 그 미래성을 부각시키는 반면, 이적은 철저하게 권능으로 임한 현재적 시간 속에서의 천국을 보여주고 있다.&lt;/P&gt;&lt;P&gt;C. 그 나라의 존재를 가시화하는 역동성의 측면&lt;BR&gt;천국의 가시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적은 예수 사역의 동적인 면, 그리고 논쟁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며 그 과정에서 현존하는 천국의 실재를 가시화한다.&amp;nbsp; 이적기사에서 드러난 예수의 상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연설을 하는 정신적 교사가 아니다.&amp;nbsp; 이적을 행하는 예수의 모습은 천국의 권세로 무장하고 사탄의 권세를 분쇄함으로써 천국의 현재적 실체를 사람들의 눈 앞에서 생생하게 펼쳐보이며, 그들에게 그 전쟁의 어느 편에 가담할 것인가를 결단하도록 촉구하는 강력한 행동가이자 논쟁가이다.&lt;BR&gt;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수립하기 위한 이적은 하나님 자신의 직접적인 행위가 예수의 사역을 통하여 나타난 것이며, 그 역동성, 즉 행동하시는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통치는 질병의 치유에서 악한 세력의 축출에서, 죽은 자의 소생에서 구체화된다.&amp;nbsp;&amp;nbsp; 역동성은 구원에 대한 구체적인 확증이라는 점에서&amp;nbsp; 천국의 가시화라고 말할 수 있다.&amp;nbsp; 결국 이적기사는 천국의 실재를 증명하기 위한 징표로서라기 보다는 하나님 권능을 통하여 가시화된 천국의 실제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lt;BR&gt;이에 반하여 천국비유를 가르키는 예수의 모습은 친절하고 지혜로운 교사로서의 면모를 보인다.&amp;nbsp; 그는 예리한 통찰력으로 일상생활에서 추출한 비유를 통하여 천국의 본질과 활동원리를 설명하며, 아직 성취되지 않은 완성에 대한 희망을 사람들에게 심어준다.&amp;nbsp; 예수의 비유에는 팔레스틴의 전원풍경과 그 속에서 발견되는 일상의 모습들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amp;nbsp; &quot;파피루스에 나온 애굽 생활의 묘사를 제외하고는 로마제국의 어느 지역에서도 하증계급과 농민생활에 대한 묘사를 이보다 더 완벽하게 해놓은 것은 없다.&quot;고한다드(Dodd)의 찬사는 다소 과장된 감이 없지 않으나 그의 설명은 예수의 비유가 그 당시 청중들에게 얼마나 생동감 있고 설득력 있는 교훈이었는지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는 셈이다.&lt;BR&gt;천국비유에 대한 개별적인 고찰과정에서 그 배경을 이미 살펴본 바지만, 예수는 팔레스틴의 전원생활과 자연적인 환경에서 비롯되는 특유의 정서를 그의 비유에 담아냄으로써 불가시적이고 초월적인 천국의 개념을 가시적 세계로 끌어내어 청중들의 눈 앞에 펼쳐 보이는 것이다.&amp;nbsp; 예수는 비유의 소재를 선택함에 있어서 자연과 인간관계 유대적 풍습 등 실제적인 것을 사용할 뿐 결코 상상에 근거한 소재를 이용하지 않는다.&lt;BR&gt;결국 비유는 이적으로 가시화된 천국의 현재적 국면을 설명하여 주며, 아직 가시화되지 않은 미래적 국면에 대한 이해와 기대를 제시한다.&amp;nbsp; 예를 들어 '씨뿌리는 자의 비유'와 '가라지의 비유'는 이적기사에 나타난 현재적 천국의 특징인 '사탄과의 투쟁'을 묘사하고 있다.&amp;nbsp; 예수는 그의 대적인 사탄을 이겼으나 그 승리는 아직 결정적인 것이 아니며 악한 자의 세력이 완전히 근절되지 않았기 때문에 갈등의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amp;nbsp;&amp;nbsp; 상황은 최종적인 승리 때까지 지속될 것이며, 오히려 최후에는 그 역공격이 더욱 강화될 것이다.&amp;nbsp; 가라지 비유는 밀에 대한 가라지의 해악과 그 처리 방법에 대한 설명을 통하여 천국의 현재적 국면이 갖는 이원론적 상황을 청중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lt;BR&gt;예수의&amp;nbsp; 이야기는 평범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amp;nbsp; 그러나 그 속에는 하늘의 음성이 실려있었고 천국의 비밀이 담겨 있었다.&amp;nbsp; 마태는 이러한 예수의 비유를 한 부분에 집중적으로 정리하여 전체의 중심이 되는 위치에 놓음으로써 천국의 개념과 본질 내지는 그 원리에 대해서 일목요연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amp;nbsp; 결론적으로 이적은 그 나라의 가시적 역동성을 비유는 그 나라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을 각기 제시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amp;nbsp; 마태의 의도는 개념과 실제에서 천국복음에 대한&amp;nbsp; 완전한 이해를 형성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lt;/P&gt;&lt;P&gt;D. 그 나라에 대한 변증을 의도한 교회교육적 측면&lt;BR&gt;네 복음서에 나타난 다양성은 초대교회 이후에 각기 개별적으로 발전한 공동체가 개별적으로 예수에 대한 문서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는 가정하에서 가장 실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현상이다.&amp;nbsp; 최근에는 마태복음에서 발견되는 교회에 관한 관심을 이러한 관점에서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소개되고 있다.&amp;nbsp;&amp;nbsp; 마태복음서가 예수를 묘사하는 지배적 전망은 신적인 권위를 부각시키려는데 있으며 산상수훈은 그러한 예수의 면모가 잘 반영되어 있다.&amp;nbsp; 여기서 예수는 모세의 권위를 능가하는 권위로서 율법의 본질적인 차원에 대해&amp;nbsp; 새로운 해석으로 교훈한다.&amp;nbsp; 여기서 본 복음서가 교회교육을 의도한 것임을 감지할 수 있다.&amp;nbsp; 이러한 일면은 마태복음이 교회밖의 긴장상태로 말미암아 기독교에 대한 변증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는 배경설명과도 다소 상관이 있다.&lt;BR&gt;일단의 학자들은 마태복음이 마태의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유대회당과의 직접적인 대결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amp;nbsp;&amp;nbsp; A.D.70년 예루살렘 함락 이후 성전중심의 제의적 유대교는 바리새파를 주축으로하는 회당중심의 랍비적 유대교로 전환되었다.&amp;nbsp; 이 과정에서 그들은 기독교의 세력확장에 대응하기 위하여 율법준수 및 경전연구를 강화하였으며, 유대기독교인들을 회당에서 축출하였다.&amp;nbsp; 마태의 공동체는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에게 맞서 예수의 진정성과 권위를 명확하게 하기위한 교회교육의 필요성을 느꼈고 그 결과 마태복음이 집필되었다는 것이다.&amp;nbsp; 다른 학자들은 마태가 처한 상황이 유대교와의 갈등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에서 율법을 거부하는 이방기독교인들과의 갈등이라고 주장한다.&amp;nbsp; 그들은 마태의 교회교육에 대한 관심이 헬라적 방종자들을 염려하여 그의 교회에 대해 무도덕성과 무법성을 경고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한다.&amp;nbsp; 마태의 교회적 관심에 대한 또 다른 설명으로서는 마태복음이 교회의 예전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집필된 것이라는 견해나 당시의 서기관 학파의 교리문답학교에서 유래했다는 견해 등이 있으나 마 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 대한 만족할 만한 답변은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다.&amp;nbsp; 때문에 공동체의 상황에 대한 추론을 복음서의 내용과 직결시키려는 시도는 신중을 요하는 작업이다.&amp;nbsp; 하여튼 마태복음은 유독 교회라는 말을 두 번(16:18; 18:16)언급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가지 면에서 교회교육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 사실이다.&amp;nbsp; 그리고 이러한 관심은 회당과 바리새인들에 대해 회의적인 마태의 묘사로 인해 앞에서 언급한 유대회당과의 갈등상황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amp;nbsp; 그러나 내부적인 갈등에 대한 설명은 마태복음의 보편주의적인 성격으로 미루어 다른 성급한 해석으로 보인다.&lt;BR&gt;대외적으로 유대인들과의 대립적인 상황에 대한 묘사는 특히 이적기사 속에서 자주 발견된다.&amp;nbsp; 8장과 9장은 예수의 능력과 함께 천국의 현재적 실재를 보여주는 가운데 제자도의 대가와 위임 그리고 동시대의 이스라엘로부터 그들이 구별되는 방법 등이(8:18-22; 23-27; 9:1-17)이 섞여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의 이적에 대한 유대인들의 비난이 이적기사와 연결되어 있다.&amp;nbsp; 백부장의 믿음에 대해서는 누가복음의 병행구에는 없는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와 연결시켜 예수의 권능에 대한 신뢰가 천국과 직결되는 문제임을 지적하면서 유대인의 불신앙을 지적한다.&amp;nbsp; 치유이적에 대한 바리새인의 비난은 매우 집요하다.&amp;nbsp; 중풍병자의 치유에서는 죄사하는 권세를 문제삼아 비난하였으며, 귀신들려 벙어리된 자를 고쳐주자 그 능력의 출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다.&amp;nbsp; 12:22ff에서의 논쟁적 상황은 예수가 축귀사역을 비유로 설명하고 귀신축출이 천국의 실재를 증명하는 것임을 선언함으로써 마무리 된다.&amp;nbsp; 이적기사, 특히 축귀이적에 관한 기사들은 천국을 거부하는 유대인들과 그것을 가시적으로 증명하는 예수의 사역이 대립되는 상황 가운데 천국의 현재적 실재를 강력하게 변증한다.&amp;nbsp; 이적을 통하여 천국의 실재를 제시하는 것은 예수의 분명한 의도 가운데 하나였으며, 마태복음은 그러한 예수의 의도를 공동체의 상황에 연결시키고 있다.&amp;nbsp; 이렇게 함으로써 마태복음은 대외적으로는 유대인들의 비난에 대해서 천국의 실재를 변증하고 대내적으로는 비난에 당면한 공동체에게 천국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었을 것이다.&lt;BR&gt;이에 반하여 천국비유는 공동체를 향한 교육을 의도하고 있다.&amp;nbsp; 13장의 비유들 사이에 예수가 비유를 사용하는 목적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들이 있다.&amp;nbsp; 13:11-17은 비유사용의 목적이 천국의비밀을 감추기 위한것이라고 말하여, 13:34-35은 그 비밀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말한다.&amp;nbsp; 여기서도 교회 밖의 유대인들과 교회 공도체가 구별되고 있음을 본다.&amp;nbsp; 13:11은 특히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각별히 선택된 무리라는 인식을 주었을 것이며 각별한 배려가 있음을 암시한다.&amp;nbsp; 반면에 '저희들'에게는 비밀이 가리워져 있다.&amp;nbsp; 교회를 향하여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놓은 듯한 예수의 말씀이 담겨져 있는 34, 35절은 이러한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amp;nbsp; 따라서 천국비유는 교회에 천국을 가르키기위하여 특별히 동원된 전달방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amp;nbsp; 이것은 천국 자체가 그 본질적인 성격상 특수한 전달언어를 요구하기 때문이기도 하나 여 서는 그것이 교회만을 위한 전달방법이라는 사실이 부각되어 있다.&amp;nbsp; 결국 천국비유와 이적기사가 마태가 속했던 공동체의 일원들에게 천국을 설명하고 증명하는 도구로서 사용될 때, 전자는 교회교육을 위하여 특별히 고안된 전달방법으로서 천국의 비밀을 쉽게 풀어서 이해하도록 하였으며, 후자는 유대종교지도자들과의대립에서 천국을 가시화하며 자신의 사역을 승리로 이끈 예수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가 속한 공동체에 지금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에 대한 강한 확신과 함께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lt;/P&gt;&lt;P&gt;V. 결&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론&lt;/P&gt;&lt;P&gt;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의 교훈과 사역을 통하여 역사 안으로 돌입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제를 경험하였다.&amp;nbsp; 각 복음서는 녹음을 재생하는 기계적인 증언이 아니라 저자들의 예수에 대한 이해 내지는 경험를 표시하는 것이다.&amp;nbsp; 지금까지의 논의는 마태복음의 천국개념을 해석하기 위한 실마리로서 바로 이 '예수의 사역에 관한 저자의 이해'를 살펴본 것이라 하겠다.&amp;nbsp; 다음은 본 연구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lt;BR&gt;첫째, 마태복음은 예수의 사역에 나타난 언어적 선포와 행위적 선포의 상응성을 명시하고 있다.&amp;nbsp; 예수의 사역은 언어와 행위를 포괄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amp;nbsp; 그러므로 저자는 그의 복음서에 이 두 가지를 균형있게 수록하였다.&amp;nbsp; 예수의 행위는 언어로 선포된 하나님의&amp;nbsp; 현재적 통치를 증명한다.&amp;nbsp; 이적기사는 언어적 선포가 미처 표현하지 못한 천국의 도래를 실증하는 강렬한 수단이다.&amp;nbsp; 마태는 언어와 행위를 포괄하여 천국을 증언하고 있으며, 상응적 관계 속에서 천국비유는 그 나라에 대한 개념적 제시를, 이적기사는 실제적 제시를 담당한다.&amp;nbsp; 물론 양자의 관계가 배타적으로 성립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lt;BR&gt;둘째, 현존하는 천국은 과거 언약의 성취이며, 미래의 천국은 현재의 완성이라는 마태의 관점에서 보면 현재는 '이미' 성취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긴장된 시간을 의미한다.&amp;nbsp;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라고 질문한 세례 요한에게 대답하기 위하여 예수가 인용한 이사야35:5f과 61:1은 이적적으로 가시화된 천국의 성취에 관한 구약적 근거이다.&amp;nbsp; 이적행위가 예언의 성취임을 제시하기 위해 원래의 맥락인 대속적 고난과는 다소 무관하게 이사야53:4을 인용한 마8:17도 이러한 저자의 관점을 보여준다.&amp;nbsp; 천국의 현재적 실재와 관련된 이적은 '구약의 성취로서의 천국도래'인 것이다.&lt;BR&gt;그러나 현재의 성취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미래의 궁극적인 완성을 기다려야만 한다.&amp;nbsp; 천국비유는 이 점을 지적하는 좋은 예로서 현재와 함께 완성을 향한 연속성을 제시한다.&amp;nbsp; 천국비유가 제시하는 바 현재적 미완성은 완성을 지향하여 경이적으로 확장되는 역동적인 것이다.&amp;nbsp; 그 과정에는 적대세력의 방해와 역경이 있으나, 방해세력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권능으로 일소되며 영광스러운 완성이 도래할 것이다.&amp;nbsp; 그 나라의 성장을 비유로 설명한 이야기들은 모두 미래의 경이로운 완성을 제시하고 있다.&amp;nbsp; 비유는 천국의 시간성에서 미래와 더욱 관련이 있고, 이적기사는 천국의 시간성에서 현재와 더욱 관련이 있다.&amp;nbsp;&amp;nbsp; 이러한 의미에서 천국비유와 이적기사는 서로 연관되어 현존하는 천국이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된 시간 속에 있음을 말해준다.&lt;BR&gt;셋째, 마태복음의 천국개념은 '현재의 가시적 역동성'과 '미래의 경이로운 완성'을 동등하게 강조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amp;nbsp; 예수와 유대지도자들 간의 첨예한 대립을 강조하는 마태의 맥락에서 이적은 우선적으로 '하나님 통치의 역동적 가시화'를 의미한다.&amp;nbsp; 이에 반하여 천국의 성장을 설명하는 비유들은 많은 유실에도 불구하고 만족할 만한 수확이 있으리라는 것, 시작과 비교할 수 없는 경이로운 성장, 적은 시작이 가져올 풍성한 결과를 강조한다.&amp;nbsp; 천국비유와 이적기사는 각각 마태가 증거한 천국의 양대 특징을 제시하고 있다.&amp;nbsp; 미래에 대한 강한 기대와 현재적 역동성을 동등하게 중요시하는 마태의 태도는 유대회당과의 갈등에 처해 있던 그의 공동체에 현재에 대한 확신과 함께 미래에 대한 소망을 심어주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lt;BR&gt;&amp;nbsp;네째, 마태복음은 천국의 임재에 관하여 두 가지 차원을 보여준다.&amp;nbsp; 천국은 개인의 적극적인 응답을 촉구한다.&amp;nbsp; 천국비유는 이 점을 강조하여 그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서는&amp;nbsp;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기꺼이 지불하는 결단이 필요함을 말한다.&amp;nbsp; 그러나 이적기사에 의하면 하니님 나라는 개인의 응답을 통한 인격적 관계 속에서 성립되는 것으로만 볼 수 없다.&amp;nbsp; 천국은 사탄의 통치를 분쇄하며&amp;nbsp; 임재한다.&amp;nbsp; 이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amp;nbsp; 이적기사가 제시하는 바 천국의 임재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행위에 의하여 이루어지므로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천국을 거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도 역시 천국은 이미 임하였다.(12:28)&amp;nbsp; 이것은 천국의 현재적 임재가 단순히 하나님 통치의 개인적 적용으로만 설명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lt;BR&gt;천국비유와 이적기사는 마태복음의 천국에 관한 핵심적인 내용을 전부 포함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amp;nbsp; 그러므로 마태는 천국비유와 이적기사의 상응적 관계를 통하여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된 시간 속에서 역동적으로 확장되어 만족스럽고 경이로운 완성에 도달하는 천국을 포괄적으로 균형있게 증거할 수 있었다.&amp;nbsp; 예수의 사역을 통하여 종말의 사건에 대한 예언이 현재에 성취됨으로써 구원의 새 시대가 열렸으며, 현재의 역경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승리가 예비되었다는 마태복음의 확신있는 선포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 천국백성으로서의 삶을 위한 지표를 제시하여 주고 있다 할 것이다.&lt;/P&gt;&lt;P&gt;II. 번 역 서 적&lt;BR&gt;Barclay, William. [예수의 치유이적 해석] 김득중, 김영봉 역, 서울: 컨콜디아사, 1984.&amp;nbsp;[예수의 사상과 생애] 정용섭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amp;nbsp;1979&lt;BR&gt;[예수의 비유] 최세창 역, 서울: 신망애, 1987.&lt;BR&gt;Bornkamn, G nter. [나사렛 예수]&amp;nbsp; 강한표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1.&lt;BR&gt;Bultmann, R. [공관복음전승사] 허 혁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8.&lt;/P&gt;&lt;P&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 [신약성서신학] 허 혁 역, 서울: 성광문화사, 1976.&lt;BR&gt;Donald Sr., C.P. [최근 마태신학의 동향] 홍찬혁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1992.&lt;BR&gt;Drane, John. [예수와 4복음서] 이중수 역, 서울: 두란노, 1984.&lt;BR&gt;Fuller, Reginald H. [이적: 성서적 이해] 진연섭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1983.&lt;BR&gt;Goppelt, L. [신약신학 I] 박문재 역,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2.&lt;/P&gt;&lt;P&gt;Grant, R.M. [성서해석의 역사] 이상훈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5.&lt;/P&gt;&lt;P&gt;Guthrie, D. [신약신학] 정원태, 김근수 공역, 서울: 상동, 1988.&lt;/P&gt;&lt;P&gt;Jeremias, J. [예수의 비유] 허 혁 역. 대구: 분도출판사, 1974.&lt;/P&gt;&lt;P&gt;___________. [신약신학] 정충하 역, 서울: 새순출판사, 1991.&lt;/P&gt;&lt;P&gt;Kasper, Walter. [예수 그리스도] 박 상래 역, 왜관: 분도출판사, 1991.&lt;/P&gt;&lt;P&gt;Kallas, James. [공관복음서 기적의 의미] 김득중, 김영봉 역. 서울: 대한기독&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교출판사, 1985.&lt;/P&gt;&lt;P&gt;Kingsbury, J. Dean. [마태복음 13 장에 나타난 예수의 비유] 김근수 역. 서울:&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나단, 1991.&lt;/P&gt;&lt;P&gt;__________________. [마태복음서 연구] 김근수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1990.&lt;/P&gt;&lt;P&gt;Kistemaker, S. J. [예수님의 비유] 김근수, 최갑종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회, 1989.&lt;/P&gt;&lt;P&gt;________________. [현대의 복음서 연구] 신성종, 최갑종 역, 서울: 엠마오,&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1987.&lt;/P&gt;&lt;P&gt;K mmel, W.G. [신약정경개론] 박익수 역,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8.&lt;/P&gt;&lt;P&gt;Ladd, George E. [하나님 나라에 관한 중요한 문제들] 신성종 역, 서울: 성광문&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화사, 1982.&lt;/P&gt;&lt;P&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 [신약신학] 신성종, 이한수 역,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1990.&lt;/P&gt;&lt;P&gt;______________. [예수와 하나님 나라] 이태훈 역, 서울: 엠마오, 1988.&lt;/P&gt;&lt;P&gt;______________. [신약과 비평] 김만우 역,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lt;/P&gt;&lt;P&gt;Morgan, G.C. [하나님 나라의 비유] 오광만 역, 서울: 풍만, 1987.&lt;/P&gt;&lt;P&gt;Merkel, H. [신약성서연구입문] 박창건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9.&lt;/P&gt;&lt;P&gt;Via, O.D. [聖書硏究方法論] 황성규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3.&lt;/P&gt;&lt;P&gt;Pentecost, J. Dwight. [예수의 비유] 서울서적출판부 역. 서울: 서울서적,&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1985.&lt;/P&gt;&lt;P&gt;Perrin, Norman. [예수의 가르침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이 훈영, 조&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호연 역. 서울: 무림출판사, 1992.&lt;/P&gt;&lt;P&gt;Pixley, George, [하느님 나라] 정호진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lt;/P&gt;&lt;P&gt;Ridderbos, Herman N. [마태복음강해] 지상우 역, 서울: 성서유니온, 1988.&lt;/P&gt;&lt;P&gt;_________________. [하나님 나라] 오광만 역, 서울: 엠마오, 1987.&lt;/P&gt;&lt;P&gt;_________________. [마태복음(상)] 오광만 역, 서울: 여수룬, 1990.&lt;/P&gt;&lt;P&gt;Shilling, S.P. [무신론 시대의 하나님] 조 만 역, 서울: 현대사상사, 1985.&lt;/P&gt;&lt;P&gt;Schweizer, Eduard. [마태오복음] 한국신학연구소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1986.&lt;/P&gt;&lt;P&gt;Stein, R. H. [예수님의 비유] 명종남 역, 서울: 새순출판사, 1988.&lt;/P&gt;&lt;P&gt;Thiselton, A.C. [두 지평: 신해석학과 철학적 기술] 권성수 역, 서울: 총신대&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학출판부, 1990.&lt;/P&gt;&lt;P&gt;Trench, R.C. [주님의 비유] 이장림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5.&lt;/P&gt;&lt;P&gt;___________. [예수님의 이적] 윤종애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78.&lt;/P&gt;&lt;P&gt;Weiser, A. [성경은 무엇을 기적이라 부르는가] 김원주 역, 왜관: 분도출판사,&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1987.&lt;/P&gt;&lt;P&gt;III. 국 내 서 적&lt;/P&gt;&lt;P&gt;간 하배. [신약학 서설] 서울: 총신대출판사, 1976.&lt;/P&gt;&lt;P&gt;김 득중. [복음서 신학] 서울: 컨콜디아사, 1990.&lt;/P&gt;&lt;P&gt;_______. [복음서의 비유들] 서울: 컨콜디아사, 1988.&lt;/P&gt;&lt;P&gt;_______. [마태복음] 서울: 성서교지간행사, 1987.&lt;/P&gt;&lt;P&gt;金 炯孝. [構造主義의 思性體係와 思想] 서울: 인간사랑, 1989.&lt;/P&gt;&lt;P&gt;서 중석. [예수] 서울: 동아출판사, 1992.&lt;/P&gt;&lt;P&gt;성 종현. [신약총론] 서울: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92.&lt;/P&gt;&lt;P&gt;신 성종. [신약총론]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0.&lt;/P&gt;&lt;P&gt;이 상근. [신약주해 요한복음] 서울: 예장총회교육부, 1968.&lt;/P&gt;&lt;P&gt;이 상훈. [신약개설] 서울: 종로서적, 1987.&lt;/P&gt;&lt;P&gt;_______. [해석학적 성서이해]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2.&lt;/P&gt;&lt;P&gt;이 창근 편. [성경의 배경] 인천: 엘멘, 1990.&lt;/P&gt;&lt;P&gt;이 한수. [비유와 해석학] 서울: 한국로고스연구원, 1989.&lt;/P&gt;&lt;P&gt;전 경연. [예수의 비유] 서울: 종로서적, 1984.&lt;/P&gt;&lt;P&gt;&amp;nbsp;&lt;/P&gt;&lt;P&gt;출저:주와동행&lt;BR&gt;&lt;BR&gt;&lt;/P&gt;&lt;/FON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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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9 Jan 2010 23:34:1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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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고대 유대교의 형성과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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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gt;고대 유대교의 형성과정&lt;BR&gt;&lt;BR&gt;박정수(안양대학교 교수)신약논단 제11권 제1호(2004년 봄)&lt;BR&gt;&lt;BR&gt;1. 서론&lt;BR&gt;&lt;BR&gt;(1) 관점과 위상&lt;BR&gt;유대교를 연구하는 기독교 신학도로서, 나는 먼저 나 자신과 내가 속한 종교적 전통이 유대교에 대한 배타적이고도 공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성찰하는 것이 옳은 자세라고 생각한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유대교와 기독교 뿐만 아니라, 모든 개개의 종교적 전통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도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성찰이 자신과 자신이 서있는 전통의 위치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속의 한 개체의 자기 정체성의 표현이야 말로 다원화된 세계의 진정한 가치가 될 수 있다. 거기에서 비로소 우리는 상호간의 대화와 이해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lt;BR&gt;&lt;BR&gt;기독교인으로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조차 말할 수 없다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앙의 고백이 없다면, 그리고 유대교인으로서 유일신 하나님에 대해서나 토라의 본질조차 말할 수 없다면, 둘의 대화나 서로의 관계성에 대한 논의는 무의미하다.&lt;BR&gt;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는 한국과 같은 이천년 기독교 역사의 끝자락에 서있는 극동 아시아의 ‘젊은 기독교’에서는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미국의 기독교에서 조차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는 사회적으로는 몰라도, 종교적으로 그리 큰 이슈가 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천년 기독교 역사를 그대로 품고 있는 유럽은 상황이 다르다. 유럽인 들에게 유대교라고 하면, 단지 저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나오는 유대인 수전노나, 늘 그들의 사회 한 구석에서 매우 독특한 삶의 방식을 취했던 “종교적 민족”을 떠올리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에서는 오히려 좀 히스테릭한 차원이 더 부각된다. 그들은 유럽역사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반셈족주의(Antisemitism)2)와, 무엇보다도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오래되지 않은 과거 유럽 의 아픈 자화상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근대시대의 기독교의 유대교에 대한 적대적인 관계는 중세 이후 유럽에서, 유대교인들이 무역업을 통한 부의 축적과 그것을 기초로 한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의 유지의 노력이라는 전역사(前歷史)를 가진다.&lt;BR&gt;유대교인들은 중세 이후 유럽에서 기독교도들의 끊임없는 박해를 견뎌내며 자신들의 공동체를 유지해 나가는데 정말 많은 대가(代價)를 지불해야 했다. 중세의 기독교는 이슬람 세력의 성장으로 그들과의 세력다툼이 번져 십자군 전쟁까지 이르게 되는 와중에, 유대교는 그야말로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이었다. 중세 이후의 유대교의 양대 산맥으로 아슈케나짐과 스파라딤이 존재하는데, 아슈케나짐은 동유럽의 비교적 안정된 유대교 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스파라딤은 스페인에 뿌리를 둔 유대인들이었다. 이들은 스페인에서 기독교도의 영토회복 운동으로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추방과 함께, 이교도들로 낙인찍혀 이단재판과 추방으로 내몰려 북아프리카와 중동 터키 일대로 이주했고, 더 나아가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중남미에 까지 퍼지게 되었다.3) 왜 유럽에서는 미국이나 아시아의 기독교와는 달리 유대교와 그토록 기나긴 종교적 논쟁의 시기와 사회적 갈등을 경험해야 했을까? 그것은 단지 기독교의 역사가 그만큼 길었다거나, 기&lt;BR&gt;독교인으로서 국가에 종교세를 내었던 유럽이 가질 수 있는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성이라고 간단히 치부해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lt;BR&gt;&lt;BR&gt;그것은 역설적이게도 기독교와 유대교가 가지는 동질성 때문일 수 있다. 두 종교는 같은 뿌리, 즉 고대 이스라엘 종교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유일한 한 하나님이신 야웨를 함께 섬기고, 고대의 종교적 유형 가운데에서는 매우 독특했던 이스라엘의 예언자적 전통에 함께 서 있다. 둘은 모두 고대에서는 처음으로 경전을 갖는 종교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게다가 기독교적 가치는 유대교적 가치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이 둘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역사에 대한 종말론적 이해, 공동체에 있어서의 정의와 사랑과 같은 삶의 가치의 근본을 공유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를 자신들의 삶의 영원한 패러다임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유대교와 기독교는 서로 평행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인가?&lt;BR&gt;&lt;BR&gt;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중세 이후의 유대교나 기독교의 역사도, 근대 이후 그들의 정치적 역학 관계나 반셈족주의도 아니다. 내게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기독교적 전통에 속하여 신학과 신앙을 실천하고 있는 우리가 유대교와 공유하고 있는 고대 이스라엘종교를 어떻게 해석하고 실천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기독교는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와 삶을 내용으로 하는 구약성서와 함께, 예수의 생애를 그것의 성취로 이해한 초기 기독교의 해석과 삶이 담긴 신약 성서를 경전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대교는 히브리 성서와 함께 그것에 대한 해석과 실천의 집대성인 미쉬나와 탈무드를 가지고 있다. 고대의 유대교와 기독교는 이스라엘 종교라는 그들의 공통의 유산에 대한 각자의 해석과 실천이라는 틀에 형성되었다. 그 만큼 양자의 가장 초기의 형성기는 매우 역동적으로 연관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넓게는 포로기 이후에 등장하는 귀환 공동체가 이룩한 페르시아 시대의 원시적 형태의 유대교를 포함해서, 알렉산더 대제에 의한 인류의 최초의 거대한 동서양 문명의 복합체로서 드러난 헬레니즘 시대의 유대교와, 유대전쟁(C.E. 66-70) 이후에 본격화된 초기기독교와 ‘랍비유대교’의 형성기를 포괄한다. 고대 이스라엘 종교&lt;BR&gt;가 재형성되는 거대한 용광로서, 본인은 고대 유대교의 형성과정을 내적으로는 포로기 이후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의 확립으로, 그리고 외적으로는 이 시기의 이스라엘의 이민족과의 상호교류를 통한 사회문화적 정체성의 확립으로 파악하려 한다.&lt;BR&gt;&lt;BR&gt;초기기독교에 관하여 말하고자 할 때는, 적어도 그것이 헬레니즘 시대의 유대교 내부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유대교 내부의 종파운동 가운데 하나로 시작하였음을 전제로 하여야 할 것이다.4) 이시기 종파운동의 본질은 이방인과 이방의 문화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후예인 자신들이 누구이고, 그들의 신앙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그 안에는 여려 형태의 힘의 스펙트럼이 존재하였지만, 궁극적으로 이시기의 유대교는 이스라엘 전통을 전적으로 유일신에 대한 신앙과 토라의 준수로 수용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유대교가 고대 이스라엘의 전통을 종교적 사회적 차원의 새로운 틀로 형성함으로써 완성해 가는 것이었다. 유대교안의 힘의 프리즘에서 볼 때, 초기기독교가 갖는 의미는 민족종교와 보편종교의 긴장을 보편종교로 이전하고자 하는 내적인 활력을 의미한다. 이것은 ‘토라의 종교’인 유대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한 ‘은총의 종교’인 기독교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우리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이러한 매트릭스에서 어떠한 요인을 발견하고, 또 거기에서 “예수 운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예수는 유대교 내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 그의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또 그를 따르는 일군의 무리들로부터 시작된 초기기독교 운동은 거대한 고대 유대교의 형성의 용광로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인가?&lt;BR&gt;&lt;BR&gt;(2) 옛 언약과 새 언약&lt;BR&gt;유대교의 정경인 히브리 성서를 기독교가 자신의 정경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기독교는 히브리 성서를 ‘구약’으로 규정한다. 이 말은 본래 예레미야 31:31에 나오는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diaqh,khn kainh,n) 세우리라”라는 “새 언약”(New Testament) 사상에 대응되는 용어로 사용된 “옛 언약”(Old Testament)에서 유래한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새로운 언약을 수여하였다는 것과 자신들이 이 새로운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파트너로 부름을 받았다는 확신에서 시작되었다. 예수는 그의 피로 제자&lt;BR&gt;들과 “새 언약”을 세웠고(눅 22:20), 그들에게 사랑의 “새 계명”을 주었다(요 13:34). 또한 바울은 자신을 이 “새 언약의 일군”임을 확신했으며(고후 3:6), 좀 더 후대에 히브리서 저자는 예레미야의 새 언약을 인용하며(히 8:8), 옛것은 사라져 없어질 것으로 여겼다(히 8:13). 일반적으로 고대의 시대에는 옛것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을 생각하면, 기독교가 자신의 신앙의 내용을 “새로운 것”으로 내세웠던 것은, 고대인들에게 ‘유대교와는 유사하나 그 보다는 하등한 종교’로 인식될 수 있었다. 반면 유대교는 자신의 “옛것”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옛 조상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수여한 율법이야 말로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계약의 근거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옛 언약”을 버린 것은 결코 아니었다. 또한 그것이 변한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기독교는 새 것이 옛것에 뿌리하고 있으며, 나아가서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주신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하는 것이라는 확신에 넘쳐있었다. 초기기독교 공동체에 유포된 이러한 신념을 우리는 이른바 “성취인용구”라는 말씀의 전승양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 ...을 이루려 함이라.”5) 여기서 지시되는 사건은 대부분이 예수의 생애와 사역에, 그리고 선지자의 말씀은 거의 70%이상이 이사야서에 집중되어 있다. 이를테면 예수의 치유사역을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라고 해석하는 것이다.&lt;BR&gt;&lt;BR&gt;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 사건’을 초기기독교가 유대교의 경전인 히브리 성서가 성취되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기독교의 이 성취의 관점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에서 확장되어, 예수를 당시 유대교의 사활이 걸린 율법, 그 율법의 성취자로서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lt;BR&gt;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 5:17).&lt;BR&gt;그러나 유대교는 자신이 전수한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와 그 안에 담긴 율법과 전통들, 그리고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요구한 야웨신앙의 참된 전수자로 확신하고 있다. 만일 유대교에 ‘새것’과 “새 언약”이란 사상이 유효하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율법과 예언”6) 안에서,다시 말해서 “옛 언약”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유대인으로서 누구도 그 옛 언약 넘어서는 새로운 성취를 말할 수는 없다. 이것은 기독교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옛 언약”을 무효화시키는 그런 “새 언약”은 기독교에도 없다. 구약은 여전히 기독교의 정경이 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초기기독교와 유대교가 공통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일반적인 명제는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화된 명제로는 2000여년의 역사에서 진행된 유대교와 기독교의 뿌리 깊은 반목과 갈등을 이해할 수 없다. 두 종교는 한 하나님 야웨를 섬기고, “율법과 예언”을 그들의 경전으로 읽는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언자들이 수백년간 그토록 수호해 왔던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야웨 신앙을 예수그리스도에 연관시켰다. 그것도 유일신 신앙을 훼손하지 않고서 말이다. 또한 저 “옛 언약” 이외에도 “새 언약”을 구약이외의 또 다른 경전으로 채택한다. 구약을 훼손하지 않고서도 말이다. 물론 여기에&lt;BR&gt;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항상 따라다닌다. 기독교는 유대교에서는 낯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을 통하여 예수와 하나님을 “한 분 하나님”으로 믿는다. 아마도 그리스도(o` cristo,j)라는 직책은 인간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되는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에 자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기독교에서 유일한 하나님은 예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이 내용은 기독교의 종교 예식의 핵심에 서게 된다.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종교적 의식인 할례와 성전의 속죄제의를 기독교에서는 세례와 성만찬이 대신하게 된다. 초기기독교의 이러한 일련의 발전은 유대교가 자신의 “거룩한 책”에 대한 척도(canon)를 마련한 것과 같이,7) 기독교는 이 “새 언약”에 대해 선포한 기록물들에 대한 척도를 마련하게 됨으로써 그 발전의 끝 지점에 오게 된다. 유대교 신앙의 가장 본질에 속하는 유일한 하나님 야웨 신앙에 이어, 종교적 상징과 그 제의의 변경, 그리고 다시 유대교적 삶의 초석이 되는 “거룩한 책”에 새로운 관점을 도입한 ‘새로운 책’을 첨가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적 유산을 유대교와 공유했던 기독교가 자신의 모태와도 같은 유대교에서 출생하게 된 과정이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역사적으로 이미 기틀을 마련한 유대종교로부터 독립한 기독교의 역사이기도 하다.&lt;BR&gt;&lt;BR&gt;후기 고대의 시기(late antiquity), 더 구체적으로 기원전후 1세기의 유대교를 구조적으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종파화” 현상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것이다. 요세퍼스가 언급했던 당시 유대교의 4개의 “종파들”(ai`re,seij&lt;BR&gt;유대전쟁사 2,119-166; 유대고대사 18,11-25)은 그들의 길(ways of belief and life)은 서로 다를지 모르지만, 모두 자신들의 독자적인 방법으로 토라연구와 실천을 통해 이스라엘의 유산에 대한 정통성을 주장했다. 그러므로 이 시기 유대교의 내적인 갈등의 대의명분은“누가 참 이스라엘인가?”라는 정통성의 문제로 요약된다.8) 요세퍼스가 아직까지 기독교를 하나의 종파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후 사마리아를 통해 시리아까지 진출한 초기기독교 공동체도 유대교의 한 종파로 남아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바울이 믿는 사상을 “나사렛인들의 종파”(h` tw/n Nazwrai,wn&lt;BR&gt;ai`re,sij 행 24:5)9)의 것으로 여겼다. 다만 그 규모가 어떠했는가 만이 논쟁의 대상이 된다. 어쨌든 유대교는 기독교를 유대교 내부의 새로운 한 종파(ai`re,sij)로 생각했다. 이 파에 속한 사람들은 유대교의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파”였다(행 28:22). 이들 역시 적어도 유대전쟁 이전까지는 자신들이 유대교 밖의 사람들이었다는 의식은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고뇌어린 대화를 바울의“이스라엘의 구원”에 관한 담론(롬 9-11장)에서 발견한다：“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lt;BR&gt;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1-3) 역사의 아이러니는 종종 다수와 소수, 그리고 역사의 중앙(the C.E.ntral)과 주변의 사람들(the marginal)의 역할이 정반대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가장 극단적인 예를 예전에는 박해자 사울이었다가, 지금은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바울에게서 본다.&lt;BR&gt;&lt;BR&gt;(3) 용어의 정의&lt;BR&gt;우선 유대교10)라는 명칭에 대해서 살펴보자. 유대교라는 어휘가&amp;nbsp; 처음 등장하는 곳은 마카비하 2:21과 8:1과 14:38이다. “그들은 유대적인 것( vIoudaismo,j)을 위해 용감히 싸웠다”(2:21). 여기서 “유대적인것”은 무엇인가. 이 말은 히브리어로 옮긴다면 예후도트 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 종교의 변화와 깊이 연관된다. “유대적인 것”은 그 어근이 보여주듯이 유다( ????? ), 그리스어로 유다스(VIou,daj)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원래 지역적 명칭으로 유다의 통치의 관할권이 지배하는 “유다의 땅” 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유다인( vIoudai/oj)은 그곳에 거주하는 거주민을 의미한다. K. G.&lt;BR&gt;Kuhn은 이 말이 팔레스타인의 랍비 문헌에서는 극히 드물게 사용되었지만, 바빌론의 유대인 랍비들의 문헌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율법의 준수를 중심으로 하는 “유대적인 것”을 매우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11) 그러므로 James D. G. Dunn이 랍비 문헌들의 사용례를 통해서 잘 지적하였듯이, 유대인이 자신들의 보편적인 칭호를 표현할 때, ‘이스라엘’이라고 하지 결코 ‘유대인’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들에게 유대인이라는 용어는 비유대인과 자신을 구별하려 할 때만 사용하는 배타적인 의미의 용어이다. 다시 말해서,“유대인”은 (유대인을 포함한) 관찰자의 관점을, “이스라엘”은 참여&lt;BR&gt;자의 관점을 나타내는 것이다.”12)&lt;BR&gt;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유대적인 것”의 형성과정에서 ‘유다’는 유대교 신앙의 주체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종교적으로는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의 전승에 대한 주도권 경쟁과 연관되고, 사회정치적으로는 바빌론에&lt;BR&gt;포로로 끌려간 유다인들과 팔레스타인에 잔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른바 “ ?? ???? &quot;(“땅의 사람들”)과의 갈등관계로 해석될 수 있다.&lt;BR&gt;&lt;BR&gt;이 갈등은 귀환 공동체의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그 승리는 단지 정치적인 권력의 획득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고대 이스라엘 종교의 유산 전체에 대한 점유권을 의미했다. 남왕국 유다의 예언자들조차 자신들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예언자로 인식하였던, 이스라엘 종교의 유산은 이제 유다의 것이 되고 만다. 그것은 바빌론으로 유배된 유대인을 중심으로 반성된 신앙과 삶의 규범을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를 새롭게 해석한 귀환공동체의 종교적 사회적 승리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에 대한 신앙은 이제 바빌론에서 야훼 신앙을 보존했던 귀환공동체의 신학과 삶의 형태에서 그 정통성&lt;BR&gt;이 부여된 것이다.&lt;BR&gt;그러나 이 “유대적인 것”은 역사적으로 페르시아 제국시대를 넘어 헬레니즘 시대에 비로소 구체적인 형태를 가지고 역사 속에 자신을 규정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유대적인 것”은 앞에서 설명한 팔레스타인 공동체와 귀환 공동체의 내적인 갈등을 통과하고, 헬레니즘이라는 범세계적인 문화의 혼합주의와의 투쟁을 통해서 비로소 유대교로 완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마카비후서 4:13에서는 “유대적인것”( vIoudaismo,j)이 “헬라적인 것”( `Hllhnismo,j)의 대립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은 마카비서의 배경이 되는 “유대적인 것을 위해 용감히 싸우는”(2:21) 마카비 형제들의 행동이 본질적으로 “유대적인 것에 머무는 자들”을 대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카비서가 보도하고 있는 에피파네스의 칙령, “모든 자들은 자신의 규범을 포기하라”(마카비전서 1:41ff. cf. 마카비 4서 4:26)은 유대적인 것들을 따라사는 자들이 범세계화의 요구에서 커다란 위협 속에 처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유대교”는 비유대적인 외부의 힘의 강제에 대한 ‘저항적 의미’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 저항의 단초는 마카비 가문의 봉기(B.C.E. 167년)와 하스몬 가문을 주축으로 한 독립국가 형성(B.C.E. 132년)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들은 포로기 이후 처음으로 외세의 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것을 넘어 자신의 힘으로 유다의 영토를 남으로는 이두매인들의 지역까지, 그리고 북으로는사마리아와 갈릴리 지역까지 확장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단지 정치적 군사적인 정복에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정복지의 주민들에게 물리적 강제를 통하여 “유대적인 것”을 따르게 했다. 역사상 처음으&lt;BR&gt;로 행해졌던 이 시기의 강제 할례13)는 “유대적인 것”이 ‘비 유대적인것’에 대한 저항의 힘으로 역류하여 그것을 “유대화”(ivoudai,zein)하는 동력으로까지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유대교는“유대적인 것”으로서 비유대적인 것에 대한 저항을 넘어, 유대 민족의 강력한 민족주의적 “열심”(zh,loj)으로 한껏 부풀어 오른 민족적&lt;BR&gt;“자존심”14)의 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유대인의 이 민족적 자긍 심은 로마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가 시작된 B.C.E. 63년 이후에도 지속되어왔으며, 그것은 유대전쟁(C.E. 66-70)을 통해서 매우 큰 타격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계속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트라야누스의 헬레니즘적 강요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제2차 유대인 봉기(C.E. 115-&lt;BR&gt;117)를 지나, 결정적으로 하드리아누스의 계속된 강요로 일어난 바코흐바의 제 3차 유대인 봉기(C.E. 132-135)15)에서는 이제 더 이상 하나의 영토를 가진 민족으로서 존립하기가 불가능해졌다.&lt;BR&gt;&lt;BR&gt;여기서 유대교에 대한 학문적 명칭에 대하여 좀 더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 유대교는 역사적 변천과정에 따라 여러 가지로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고, 이에 따른 유대교에 대한 명칭은 상당히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우선 19세기 종교사학파는 헬레니즘 시대 이후에 발전된 유대교를 에스라-느헤미야에 의해 추진된 원시적 형태의 유대교와 구분하여 “후기 유대교”(Spa¨tjudentum=late Judaism)라는 다소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다. 사실 이 표현은 G. F. Moore, C. Klein,J. Wellhausen, E. Schu¨rer, W. Bousset, M. Smith, J. Jeremias, L. Goppelt 같은 기독교 학자들에 의해 주로 사용되었는데, 포로기 이후의 유대교는 그 이전의 예언자적 종교의 활력과 역동성을 상실한 “뻣뻣한”&lt;BR&gt;돌출물 같은 것으로 여겼다. 이 포로기 이후의 “후기 유대교”의 정신과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바리새적 유대교”이고, 이 바리새주의야 말로 “자기 의”를 주장하는 종교의 본질보다 외연을 치장하는 위선적인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유대교의 밑그림은 물론 신약성경의 “반유대주의”(Anti-Judaism)의 영향아래서 진행되었다. 적어도 19세기 초반부터 2차대전까지의 유대교 연구는 이러한 경향이 지배적&amp;nbsp; 이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유대교 연구 자료는 거의 신약성서와 기독교적 자료를 원천으로 삼고 있다.16) 그러나 쿰란과 같은 고고학적 자료들과 비문들의 연구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했고, 무엇보다&lt;BR&gt;도 이전에 사용되었던 유대교의 외경과 위경들을 역사적으로 해석하게 됨으로 이러한 해석은 기독교적으로 “편향된” 것으로 판명되었다.17) 또 다른 표현은 이 시기의 유대교를 “성경과 미쉬나” 사이의 시기라고 규정하여, 이른바 “Post-Biblical Judaism”이라고 쓰기도 한다. 이것도 정경으로서의 히브리 성서가 묘사하고 있는 시대이후, 그러니까 최대한으로 늦추어 잡아 에스라 느헤미야의 귀환과 개혁시기(대략 B.C.E. 458년) 이후의 유대교를 지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시기의 유대교를 외적으로 상징하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성전중심의 유대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시기의 유대교를 “제2성전기의 유대교”(Second Temple Judaism)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성전재건(B.C.E. 515)에서 파멸(C.E. 66)까지 대략 550년간의 유대교를 지칭한다.&lt;BR&gt;&lt;BR&gt;포로기 이후 형성된 유대교의 명칭에 대한 이러한 모호성은 이 시기에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된 유대교의 역사적 상황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본인이 이해하는 한 유대교의 명칭은 적어도 다음과 같이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고대 유대교-헬레니즘 시대의 유대교(초기 유대교 - 형성기의 유대교) - 랍비 유대교 - 근대 유대교. 우선 그 변천을 일반적인 연대기로 나눈다면, 고대 유대교(Ancient Judaism),그리고 중세와 근대의 유대교(Middle Age &amp;amp; Modern Judaism)로 구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연대기적 구분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고대 유대교의 말기에 형성된 랍비 유대교(Rabbinic Judaism)가 중세와 근대의 유대교의 근본 틀을 유지하며,현대까지 정통 유대교로서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고대 유대교를 지칭할 때 그것은 랍비 유대교가 형성되기 이전까지를 의미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학도들조차 이 구분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종종 본다. 그것&lt;BR&gt;은 랍비 유대교의 형성을 어느 시점으로 잡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lt;BR&gt;랍비 유대교의 기원에 대하여 이제까지 알려졌던 것은 요한난 벤자카이(Johanan ben Jakkai)의 활동을 들 수 있다. 바리새파의 지도자로 알려졌던, 그는 70년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과 예루살렘 성의 함락직전에 이 성을 빠져나와 야브네18)에서 종교와 학문 활동을 하면서,이 곳을 유대교의 입법, 사법, 행정의 기능을 하는 산헤드린의 중심지로 세워나갔다. 그에 대한 많은 랍비문헌들이 전하는 전설들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19) 다만 분명한 것은 90년 이 곳에서 토라, 예언서 그리고 성문서로 구성된 39권의 구약성서, 즉 “타낙”(Tanak)을 최종적으로 확정했다는 것이다. 고대의 대인의 삶과 신앙의 핵심이 되는 정경의 확정은 결코 사적인 차원에서 규정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협의를 이끌어 가면서 탄생한 것 이 “랍비 위원(Rabbinate)였다. 이 랍비위원회는 팔레스타인 중심으로 일어났던 유대교의 마지막 저항이었던 바 코흐바(Bar Kokhba)의 봉기(C.E. 132-135) 이후, 본토와 디아스포라의 유대교 전체는 랍비들을 심으로 한 제도적 협의체로 자리잡아갔다. 이른바 “랍비유대교”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한다. 그런데 이 “랍비”20)들은 미쉬나의 편집시기인 약 200년경부터 팔레스타인의 탈무드(약 400년경 완성)에 이어 완성된 바빌론 탈무드가 완성된 500년경에 이르기 까지, 유&lt;BR&gt;대교의 방대한 문헌 형성의 주체가 된다.21) 이것은 후기 고대시대의 유대교의 본질인 이른바 “책의 종교”22)가 랍비 유대교의 특징임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lt;BR&gt;그러나 고대의 세계에서 “랍비 유대교”의 형성은 주후 1세기 말까지는 아직도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랍비 유대교의 중심에 서 있는 “타낙”의 해석에 결정적인 길을 연 미쉬나의 편찬시기를 랍비 유대교 형성의 결정적인 단계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23) 미쉬나는 대략 B.C.E. 50년 이후부터 행해진 랍비들의 재판 기록과 율법에 대한 해석을 담은 것인데, 학자들은 미쉬나가 약 C.E. 200년경 당시 유대교의 최고 지도자(ha-Nasi=patriarch)격이었던 “랍비” 유다(“Rabbi” Judah)가 셋포리스에서 편찬하였다고 본다.24) 그러므로 유대전쟁으로 인한 성전의 파괴이후 미쉬나의 편집시기까지의 고대 유대교는 근대 이후까지 유대교의 골&lt;BR&gt;격을 이루게 된 시기로서, 랍비 유대교가 형성되는 과도기의 유대교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유대전쟁 이후 유대교에 있어서 또 한번의 대대적인 반로마 봉기가 일어났던 바 코흐바의 반란까지, 즉C.E. 70-135년 까지는 유대전쟁으로 인한 성전 파괴가 유대교 전체의 구조에 대한 심각한 위기를 만났던 것은 틀림이 없었다. 이 시기의 특징에 대하여 이제까지 널리 퍼져왔던 일반적인 설명은 이런 것이다.&lt;BR&gt;&lt;BR&gt;기원전 2세기 중엽 하스몬 왕조의 팔레스타인 지배부터 구체화된 유대교의 “종파화”는 기원 후 1세기 가 유대전쟁으로 인한 유대교의 성전의 멸망과 함께, 바리새파의 주도권 하에서 새로운 형태의 유대교로 재편되는 과정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요새퍼스가 언급했던 당시의 유대교의 4개의 “종파들”(ai`re,seij 유대전쟁사 2,119-166; 유대&lt;BR&gt;고대사 18,11-25)가운데서 바리새파를 제외한 다른 모든 종파들은 모두 유대교의 주류(main stream)에서 멀어져 갔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쿰란-엣센 종파는 결정적으로 마사다에서 로마인들의 공격에 죽음으로 저항한 이후 역사에서 점차 사라져갔고, 제2성 전기 초기부터 성전을 중심으로 한 대제사장의 권력을 독점하였던 사독계열의 후예인 사두개파는 그 성전의 소실로 몰락의 길을 걸어 감으로서 유일하게 바리새파만이 유대교의 재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이후 성립되었던 랍비 유대교는 결국 이들 바리새적 유대교가 기초를 놓은 것이라는 주장이다.25)&lt;BR&gt;그러나 19세기 종교사학파 이래에 구축된 이러한 관점과는 대립되는 관점이 그 이후에 제시될 수 있었다. 그것은 성전파괴로 인한 유대교의 재편성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유대교의 여러 종파가 심각한 변화를 경험했다할 지라도, 그것이 바리새파를 제외한 모든 종파의 소멸과 바리새파의 전저거인 승리로 끝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lt;BR&gt;전쟁 후 적어도 유대교에는 아직도 다음 세 가지 흐름을 가정해야한다는 것이다26)：a) 성전의 파괴를 깊이 탄식해야 했던 에스라 2서와 바룩 2서와 같은 그룹, b) “내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마 9:13=호 6:6 e;leoj qe,lw kai. ouv qusi,an\)를 주장한 Johanan ben Zakkai와 같이, 성전 없이도 가능한 유대교의 “실용주의”적인 노선,&lt;BR&gt;c) 그리고 요세퍼스가 언급한 혁명적 세력인 이른바, “제4의 종파”는 유대전쟁 이후에도 여전히 팔레스타인의 주변부에 남아있어 132년의 바 코흐바의 봉기에까지 연관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유대 전쟁 이후 디아스포라를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해 온 초기기 독교 공동체를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lt;BR&gt;이러한 상반된 논의가 진행된 것은, 무엇보다 유대전쟁 이전의 자료들과는 달리 이 시기의 역사적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로마의 역사가나 기독교 역사가들의 글을 단편적으로 재구성하여 추론된 가설의 역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7)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기(C.E. 70-135년)를 유대전쟁 이후 바 코흐바 봉기로 더 이상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민족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되었던 팔레스타인에서, 유대민족이 이른바 “후기 종파시대”로서 여러 종파들의 재형 성기로 존재하였던 시기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는 아직 랍비 유대교라는 정형적인 틀이 구축되기 이전의 유대교로서 이른바 “형성기의 유대교”(Formative Judaism)이라고 명해도 좋겠다.28) 이 “형성기의 유대교”는 무엇보다도 초기 기독교의 형성기와 정확히 대면하고 있기에 기독교와는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즉,이 시기에 복음서가 기록되었고, 후기 바울서신과 그 밖의 신약성서&lt;BR&gt;가 기록되었으며, 고대 교부들의 저작은 모두 이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좀 더 정확히 다루어야 할 몫으로 남겨두자.&amp;nbsp;&amp;nbsp; &lt;BR&gt;&lt;BR&gt;2. 유대교의 틀&lt;BR&gt;(1) 외세 통치하의 독립종교의 길29)&lt;BR&gt;1) “이스라엘의 회복”과 유대 공동체의 건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유대교의 출현은 이스라엘의 국가체제의 완전한 멸망과 대 회복이라는 역사적 전환기에 일어나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가 분열된 후,이스라엘이 먼저 멸망하고(B.C.E. 722년) 유다마저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다(B.C.E. 586년). 이 사건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신앙에 극심한 위기를 가져오게 된다. 그러나 남왕국 유다는 포로로 려간 후 약 50년이 되는 B.C.E. 538년, 즉 페르시아의 고레스 대왕 원년에 극적인 귀환의 포고령(역하 36:22f 에 1:1-4)으로 대회복의 계기를 맞게 된다. 페르시아 제국내의 각 민족의 종교의 독립성을 장려하는 이 고레스의 정책은 초기의 대왕들에 의해 일관 되게 추진되지는 않았지만, 스룹바벨과 에스라, 그리고 느헤미야의 귀환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귀환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땅(Eretz Israel)의 회복”이 중심에서있는 시오니즘30)의 원시적인 형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어떤 독립된 정부의 건설이라는 권리는 주어지지 않았고,단지 이방인의 지배하의 자치권만이 주어졌다. 그러기에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 땅의 회복”은 독립된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현대의 시오니즘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lt;BR&gt;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를 규정하는 하나의 모토(motto)는“이스라엘의 회복”이었다.31) 이 시기 바빌론으로부터 귀환한 공동체는 자신들만이 고대 이스라엘의 유산의 합법적 후계자라는 확신과 유일신 야웨에 대한 신앙을 중심으로 한 유다인 공동체의 건설이라는 목표가 자리하고 있었다. 귀환은 일시적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고레스 왕의 포고이후 100여 년간 비정규적으로 귀환은 계속되었다. 귀환한 사람들의 인구를 약 5만명(에 2:68f; cf. 느 7:69-71)으로 본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기록은 1차 귀환(B.C.E. 538)때의 숫자만은아니라, 당시의 귀환한 사람들 전체라고 보는 관점이 우세하다.32) 우&lt;BR&gt;리가 아는 바와 같이 바빌론으로 유배되었던 사람들의 신분은 유다인 가운데서도 상층 귀족 계층이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 기록되어있는 바와 같이 이들이 귀환하여서 새로운 유다인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포로기 이후의 구약성서의 문헌들은 유다의 멸망이후 팔레스타인에 남은 자들(&amp;nbsp; )과&lt;BR&gt;귀환공동체(; ???? ?? &quot; ? =“유다백성” “ ????????? ”)간의 종교적 사회적 대립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보여준다.&lt;BR&gt;&lt;BR&gt;우선 사회적으로는 팔레스타인 공동체와 귀환 공동체 사이의 땅의 소유권 문제에 대한 갈등이 일어난다.33) 귀환 공동체의 땅의 소유권에 대한 주장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유배에 대한 신학적인 재해석에 근거하고 있다. 이른바 “땅 오염론”이다. 즉, 유다의 죄악으로 인해 그 땅이 오염되었다고(렘 3:1-5; 16:18; 23:15 cf. 창 15:16), 지금은 이방인들에 의해 더럽혀져 있다는 것이다：“전에 주께서 주의 종 선지자들로 명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얻으려 하는 땅은 더러운 땅이니 이는 이방 백성들이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여 이 가에서 저 가까지 그 더러움으로 채웠음이라”(스 9:11). 그러므로 유다 백성의 바빌론으로의 유배는 그 백성을 정결하게 유지하기 위한 야웨의 한시적 심판과 동시에 구원행위가 된다. 야웨는 그들을 “뽑아”내었으나, 이제 돌이켜 각 사람을 그 고유의 기업과 땅으로 보내 다시 옮기어 심고자 하신다(렘 12:15; 30:3). 그러나 여기에서 귀환공동체가 팔&lt;BR&gt;레스타인 공동체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뿌리 깊은 반목이 초래된다.&lt;BR&gt;왜냐하면 그들은 오염된 땅에 거주하며 야웨신앙을 알지 못하는 부정한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레미야에 의하면 “저들은 비천하고 어리석을 뿐 아니라, 야웨의 길, 야웨의 법을 알지 못한다”(렘 5:4; cf.&lt;BR&gt;12:14-15; 24:8-10; 사 42:24f) 그것은 팔레스타인에 남은 사람들의 신앙이 혼합주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슥 6:21f; cf. 겔 11:15-18; 단 11:31;12:11) 돌아온 백성들은 팔레스타인 땅에 있는 야웨가 “미워하는 그물건”(렘 16:18)과 “가증한 것”(겔 11:18)을 그 가운데서 없애야 한다.34)&lt;BR&gt;이러한 갈등은 성전재건에서 고조된다. 에스라 4:1-4에서는 성전 재건을 중심으로 한 귀환공동체와 팔레스타인 공동체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들”은 앗시리아에 의해 북왕국이 멸망한 이후 자신들도 이곳에 정착하여 지금까지도 야웨를 예배&lt;BR&gt;하였다고 한다：“우리도 너희같이 너희 하나님을 구하노라”(스 4:2).그러나 귀환공동체는 그들이 성전 건설에는 참여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이러한 갈들의 국면에서 이 시기의 예언자들은 야웨의 우주적 통치를 성전 재건과 결합함으로써 사회통합의 이념을 제시 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노력은 어느 정도의 열매를 거두었다. 우리는 학개와 스가랴의 활동에서 이러한 결과를 보게 된다. 예를 들면, 에스라 4:4에서 유다 백성의 대적자로 나타났던 “암 하아레츠”는 이제 학개 2:4과 스가랴 7:5에서 성전 재건에 참여한 사람들을 부르는 호칭으로 나타나고 있다.35) 이렇게 성전의 재건으로 두 집단의 갈등은 사회적으로 점차 통합된다(에 6:19-22). 그러나 두 공동체의 갈등에서 신학적으로 귀환 공동체가 개혁의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했고, 결국 그들은 승리를 거둔다. 앞에서 설명한 포로기 이후의 문헌과 전승들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다른 전승들(역대기, 제사문서,&lt;BR&gt;에스겔서 예레미야, 후기의 이사야 등) 대부분 귀환 공동체의 신학과 정치적 경향을 대변한다.36) 결국, 귀환공동체의 야웨 신앙과 성전 회복 이라는 결실은 이후 나타날 유대교라는 새로운 이스라엘 종교의 형태의 주축을 이루게 된다.&lt;BR&gt;그렇지만 성전이 회복된 후에도 야웨신앙은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은 시기적으로 성전재건 이후의 팔레스타인에서의 이스라엘 공동체의 상황을 반영한다. 개혁은 두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한편에서는 귀환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개혁으로서 이방인과의 혼인을 금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단지 참된 “이스라엘인”이 되기 위한 혈통적 순수성을 추구하는 것으로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포로기 이전에는 족내혼(族內婚)이 일반적이었으나,그렇다고 족외혼(族外婚)이나 외국인 여자와의 결혼이 전적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37) 신명기 7:1-4에 나오는 가나안 일곱 부족과 23:2-9에 나오는 암몬과 모압 부족을 제외하면, 결혼을 통한 이스라엘로의 편입은 일반적으로 열려져 있었다. 에스라 느헤미야시대의 그러한 혈통적 자기정체성의 추구는 오직 마카비 시대의 혈통주의적 민족주의의 등에서 가장 고조 되지만,38) 그 이후 유대교에&lt;BR&gt;자리 잡은 개종(改宗)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무너지는데, 개종은 이방인에게 이스라엘인의 정체성을 획득하는 제도화된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39) 그러므로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의 이방인과의 혼인 금 지는 주로 범세계적인 문화에 다시 젖어든 제사장 귀족 계급들에 대한 개혁의 일환이었을 뿐이다. 이것은 느헤미야 13:7f에는 암몬 사람&lt;BR&gt;도비야가 성전 경내의 대제사장의 방에 거주한 것을 축출하는 것과 연관될 수 있다. 즉, 이방인과의 결혼금지는 결정적으로 당시의 성전을 담당하던 귀족 제사장 계급에 대한 견제의 기능을 하였던 것이다.&lt;BR&gt;&lt;BR&gt;이것은 성전과 토라를 중심으로 한 개혁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생각&lt;BR&gt;할 수 있다.&lt;BR&gt;또 다른 방향의 개혁은 성전 재건 이후 통합된 “온 이스라엘” 공동체의 종교적 실천과 사회적 규범에 대한 것이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팔레스타인 땅에 남아있던 “그 땅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혼합주의적 신앙에 대한 비판과 그에 대한 귀환공동체의 야웨 신앙을&lt;BR&gt;세우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상 숭배를 상징하는 것으로 귀환공동체가 가져온 야웨 신앙의 “표준”(canon)에 어긋나는 것이다. 에스라를 중심으로 귀환공동체가 주도한 팔레스타인에서의 개혁 프로그램은 이 “표준”에 의해 진행된다. 에스라가 공동체에서 모세의 “토라의 책”을 읽어 선포한 것은(느 8장) 귀환 이후 이스라엘 백성의 삶 전체를 규정했던 토라를 형성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토라는 이제 모세의 율법만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조상들의 삶의 경험인 학가다와 그것을 주행하는 방법을 제시한 토라의 해석인 할라카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토라는 “율법의 가르침”(“토라”의 원래 의미) 전체를 지칭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후로 유대교의 모든 성전에서의 하나님 예배와 의식, 그리고 개인의 삶을 규정하는 살아있는 실체가 되었다.&lt;BR&gt;이것은 귀환 공동체의 삶의 기초를 토라위에 놓아, 이른바 “율법의 백성”을 만들어 가는 것이었다.&lt;BR&gt;&lt;BR&gt;2)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유대교&lt;BR&gt;우리는 여기서 에스라 느헤미야의 개혁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들의 개혁 프로그램의 핵심은 옛 이스라엘 지파 공동체의 회복을 통한 민족적이고 혈통적인 동질성이 아니라, 종교적인“표준”의 실행에 의해 걸러지는 “참 이스라엘” 공동체의 건설에 있&lt;BR&gt;었다. 적어도 이 고대의 유대교에서 우리는 혈통적이거나 민족적 요소를 중심에 두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최소한 마카비 독립 전쟁 이후의 유대교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포로기 이후의 역대기나 에스라에 나오는 족보나 “자손”의 이름들은 무엇인가? 역대기 사가(대상 1-9장)와 에스라(2, 8, 10장)와 느헤미야(7, 12장)에게 족보가 중요했던 것은 그들이 “거룩한 자손”(에스라 9:2)으로 자신들을 “이스라엘”의 종교적 유산의 수용과 새로운 해석의 주체로 내세우는 것이었지, 결코 혈통적인 정체성의 구현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포로기 이전처럼 국가적 정체성으로 유지될&lt;BR&gt;수 없었고, 오직 종교적 정체성으로서만 유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외세 치하의 독립 종교로서의 길이야 말로 포로기 이후 유대교의 현실적인 선택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lt;BR&gt;이스라엘의 회복의 상징으로 간주된 성전의 재건으로 이스라엘 공동체의 종교적 삶의 한 복판에 성전예배가 자리하게 되었다.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성전은 여전히 그들의 삶의 중심이었다.&lt;BR&gt;디아스포라인들은 늘 이스라엘의 고토에 있는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모였던 회당은 “기도하는 집”이었지,40)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이스라 엘에게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었다. 거기서 이스라엘의 속죄가 이루어지고, 공동체에 속한 백성들의 부정(不淨)이 실제적으로 제거되어 이스라엘의 회복이 구현되는 거룩한 곳이다. 그러므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도 성도(聖都)로서 이 모든 종교적 상징의 중심에 존재한다. 성전의 이러한 외연적 확장은 “거룩한 땅”에까지 이른다. 귀환공동체는 야웨가 이스라엘의 조상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우상숭배와 음행의 죄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야웨의 이스라엘 회복은 거룩한 땅의 회복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레 18:24-28;cf. 창 15:16; 신 9:5). 그러므로 성전의 지성소에서 이스라엘의 땅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거룩한 것과 부정한 한 것과의 “분리”에 대한 유대교적 신앙의 중심에는 철저한 종교적 상징주의가 자리하고 있다.41)&lt;BR&gt;그리고 성전 예배와 속죄를 담당하는 계층으로서 제사장들이 존재했다. 제사장들이 속죄를 위한 신적인 대리자로 등장하게 된다. 포로기 이후 제사문서에 나타나는 이른바 속죄 공식이 나타난다42)：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레 4:20, 26, 31,35; 5:10, 13, 16, 18; 6:7…). 이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의 이상에 담겨진 거룩한 구별을 표현하는 종교적 문법이 된다.&lt;BR&gt;“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또 다른 추구는 그러한 종교적 상징을 일상적 삶에서 구현하는 것에 집중되었다. 그것이 토라의 연구이다.&lt;BR&gt;토라에 대한 연구는 이스라엘 땅에서의 성전 예배가 가능하지 않았던 유배지에서, 그것에 대한 대안이 되는 종교적 실천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토라의 연구가 성전 자체를 대치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제2성전의 파멸이후에나 가능했지만, 회당을 중심으로 한 토라 연구는 포로기 이후 유대교적 삶을 구현하는 매우 중요하고도 현실적인 수단이 되었다. 토라는 성전 예배 자체를 규정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성전 제의가 추구하는 이스라엘의 삶의 정결을 구체화하는 삶의 규범이기도 했었다.43) 그러기에 이제 토라는 이스라엘의 삶의 전통적인 방법을 표현하는 지혜와 만나게 된다. 토라와 지혜의 만남은 이 시대의 토라의 성격을 문서화된 율법 만으로서가 아닌, 살아있는 실체로 규정될 수 있게 하였다. 그것은 마치 지혜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존재와 인격으로 변화된 원리와도 같았다(잠 8:1ff). 이러한 토라의 존재론적 변화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미쉬나 Aboth 3:2을 발견하게 된다：“두 세 사람이 모여 토라를 연구하는 곳에 쉐키나가 함께 한다.” 이렇게 성전과 토라는 고대 이스라엘의 유산을 물려받은 “참 이스라엘”의 민족적 정체성을 종교적으로 구현하는 핵심에 서게 된다. 이제 이스라엘 종교는 새로운 민족종교로의 길을 간다. 이것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정치적이 독립이 아닌 종교적 독립으로 방향을 전환함을 의미하기도 한다.&lt;BR&gt;&lt;BR&gt;(2) 이스라엘 종교의 변화와 유대교&lt;BR&gt;구약 이스라엘의 종교는 포로기 이후 고대 유대교의 형성과정에서 매우 괄목할만한 변화를 경험한다. 이러한 변화의 시초는, 이미 포로기에 이방인을 통한 이스라엘의 역사 패망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성을 신학화한 이른바 “신명기 신학”에 의해 제기되었다.44) 이스&lt;BR&gt;라엘은 야웨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북왕국과 남왕국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는 선언이다. 신명기 역사가에게서 이스라엘의 회복의 비전은 제시되고 있지 않기에 하나님의 계약의 유효성과 선택에 대한 질문은 중요하였다. 하나님이 그의 선택한 백성을 버리심으로 자신의 은총을 폐기하셨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가 이 세계의 하나님인가? 그렇지 않다면 이제 “선택된 백성”의 삶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유일한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그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신념, 그리고 종교의 개인화라는 길을 추구하게 된다. 포로기 이 후 이스라엘은 이제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해 나간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유일하신 한 하나님”이시다. 그는 민족주의와 보편주의의 긴장 속에서 이제 유일한 한 공동체 속에서 한 민족사를 넘어 세계를 통치하시는 경륜을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 다만 연단하실 뿐이다. 그의 은총은 자신이 정하신 도구인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유지하신다. 속죄와성전(聖殿)은 하나님의 용서와 종말론적 임재로서의 그의 통치를 구현하는 가장 상징적 언어이다. 이스라엘에 제사장이 그것을 매개하&lt;BR&gt;듯이, 세계에 대하여 이스라엘은 그의 구원을 매개한다. 이제 이스라엘은 명실상부한 “거룩한 민족”으로 서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삶은 율법을 따르는 삶이다. 율법은 이제 더 이상 하나의 법과 규범이 아니라, 종말의 질서로 살아가는 온 이스라엘의 유일한 삶의 형태로 서의 “토라”이다. 이 삶의 형태는 그대로 모든 인간들에게 하나의 예표가 된다.&lt;BR&gt;&lt;BR&gt;1) 예언에서 묵시로&lt;BR&gt;계약신학으로 구약신학을 서술하려는 Bernhard W. Anderson는 그의 최근 저작에서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종교의 변화의 한 줄기를“예언에서 묵시로” 파악하였다. 묵시는 “새로운 어법으로서의 예언”이라는 것이다.45) Paul D. Hanson은 이에 대해 매우 중요한 테제를 세웠다. 그는 묵시문학의 기원을 다니엘서나 에녹1서 그리고 에스라 4서와 같은 지혜에서 찾았던 von Rad와는 다르게 그 기원을 예언에서 찾는다. 즉, 지혜에서 묵시문학이 나온 것이 아니라, 3-2세기 경에 묵시문학에 지혜의 요소가 첨가되었다는 것이다. Hanson에 의하면 이사야는 예언이 묵시로 변형되는 과정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전통적인 예언인 이사야 1-39장과 40-55장까지의 회복의 예언과 56-66장의 묵시적 예언은 이러한 변화의 상황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 안에서 인식되어야할 매우 중요한 것은 예언의 성격이다. 이사야의 두 번째 예언은 포로기 이후에 야웨의 통치하심에 대한 우주적 환상을 정치적 현실에서 해석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주의는 그 예언자가 처한 사회적 상황, 이를테면 야웨의 영광스런 약속들이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고, 도리어 귀환공동체 내에서 그러한 비전의 담지 자들이 억압을 받는 현실은 결국 비관적인 역사에 대한 인식을 초래한다. 이것은 원시적 묵시의(protoapocalyptic) 형태로서 이사야의 세번째 예언과 같은 묵시적 종말론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46) 결 국 전통적인 예언과 묵시의 차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신탁이 세계와 현실에서 어떠한 작용하는가에 있다. 예언은 세계와 이스라엘의 정치적 사회적인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현존 질서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종교적 비전이 구체적으로 실현될 현실을 지향하게 된다. 그러나 묵시는 그러한 정치적 현실과 멀어지는 경향을 가진다.&lt;BR&gt;묵시는 그 현실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야웨의 주권에 대한 우주적인 상징을 통해서 현실을 이해한다. 다시 말해서, 예언은 역사를 묵시는 신화를 지향한다. 이렇게 해서 묵시는 역사를 넘어서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예언의 비전과 묵시의 비전이 동일하게 야웨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을 다루로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lt;BR&gt;&lt;BR&gt;묵시문학에서의 종말론역시 회복의 종말론이 되는 것이다.47)그렇지만 예언과 묵시의 내용으로 이제 예언자들과 묵시가들의 기능은 차별화된다. 즉, 예언자들은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신탁의 대언자( ???? )이었지만, 이제 묵시가들은 역사를 넘어서는 신화적 상징에 대한 해석자들이다. 전통적인 예언자들의 기능은 “야웨가 말씀하셨다”라는 야웨의 신탁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묵시의 특징은 그것을 받는 자들에게 아직 닫혀 있다는 것이다.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사 29:11).묵시가의 기능은 오히려 그것을 ‘닫는’ 일이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12:4). &lt;BR&gt;&lt;BR&gt;고대 이스라엘 종교의 대표적인 특징인 예언의 기능이 이와 같이 변형되고 있는 것은, 분명 고대 이스라엘 종교의 변화 가운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헬레니즘 시대의 유대교를 특징짓는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세계를 역사 안에서가 아니라 신화안에서 파악하고, 이스라엘의 구원자 야웨는 이제 창조주 하나님으로 이해된다. 구원은 이제 이 역사 안에서가 아니라, 역사 밖으로 이전되는 어떤 것이 된다. 예언자들은 더 이상 이 땅의 일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신탁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들은 좀 더 환상적인(visionary)상징 언어로 보편적인 구원과 세계질서를 말한다. 그 상징 언어는 묵시가들에 의해서만 해독될 수 있는 암호(code)화 되어 있다. 비록 그들이 한 개인으로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들 배후에는 이 세상에서는 이룰 수 없는 묵시로 살아가는 어떤 동질의 집단이 존재한다. 그들의 묵시는 현실과의 긴장(구심력과 원심력)에서 해체되어 지속적으로 종말을 향해 뻗어나간다.&lt;BR&gt;&lt;BR&gt;2) 토라와 지혜의 만남&lt;BR&gt;고대 이스라엘 종교의 내적인 변화를 파악하는 또 다른 한 가지 전승의 분야는 토라와 지혜이다. 토라는 이미 포로기 이전에 성문화 되었다. 요시아의 시대에 성전에서 “모세가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이 발견되었고(대하 34:14), 그것은 “모세의 책들”(대하 25:4)로서 인정되어 있었다.48) 에스라는 이러한 성문화된 토라를 사용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여 백성들이 지켜야할 길을 제시하였다.&lt;BR&gt;이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토라가 모세의 율법책 자체만이 아니라, 율법으로 살아왔던 이스라엘 조상들의 삶의 이야기 전승(학가다)과 그것에 대한 해석(할라카)를 포함하는 ‘율법의 가르침 전체’를 지칭하 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Anderson에 의하면 구약성서 특히 시편은 토라를 지혜의 근원으로 여기고, 토라와 지혜가 밀접히 연관되고 있으며(시 119:97-110), 신명기(4:6) 역시 토라의 준수와 지혜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49)&lt;BR&gt;“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신 4:6).&lt;BR&gt;토라가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이념과 성전중심의 제도적 종교화에 매우 중요하게 관계하고 있었던 것은 포로기 이후의 일반적 정황이었음을 앞서도 말했다. 이스라엘의 삶에 있어서 ‘무엇을’이라는 질문에서 이러한 토라의 우위성이 맞추어 졌다면, ‘어떻게’라는&lt;BR&gt;질문은 토라의 올바른 실천에 대한 질문과 연관되었다. 그리고 이 두 질문은 ‘야웨를 경외함’에서 합류되고 있었다. 이제 토라는 지혜의 원천이 되고, 그 핵심에 ‘야웨 경외’가 서 있게 된다.&lt;BR&gt;이제 지혜는 토라와 함께 ‘제도화’의 길을 걷게 된다. M. Noth는 이스라엘의 지혜전승의 흐름을 제도적 차원의 다양성에 따라 “씨족 지혜,” “궁중 지혜,” 그리고 “율법 지혜”로 분류한다. 이들 지혜의 삶의 자리는 각각 가족과 부족, 국가, 그리고 포로기로부터 본격화 된 토라 해석 및 적용이었으며, 그 전승자들은 부모 와 장로, 국가 서기관, 그리고 율법 서기관이라는 것이다.50) 여기서 율법 서기관의 등장은 시기적으로 포로기 직전의 신명기적 서기관에 기원을 두었으나,에스라나 느헤미야 시대에 귀환공동체의 이스라엘의 회복 프로그램 과 연관될 것이다. M. Noth는 이들 신명기적 서기관들은 지혜전승에 대해 호감을 갖는 자들로서 지혜와 토라를 동등하게 다루려는 경향을 가졌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리고 이 경향은 지혜의 삶의 자리와 전승자들을 정치적 서기관들에게서 종교적 법률적 서기관들에게로 이전시키는 계기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이다.51) 이들은 국가가&lt;BR&gt;임명한 공식부문에서 율법을 다루는 서기관들이 아니라, 새로운 종교적(유대교적) 틀 속에서 토라를 다루는 이른바 “완성된 토라 서기관”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lt;BR&gt;&lt;BR&gt;더 나아가 지혜는 세계의 모든 영역에서 매우 경험적인 사색을 통하여 한 개인이 세계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를 추구하는 삶의 방식의 문제와 직결되었다. 그래서 지혜는 율법이나 예언과 같은 전통적인 하나님의 계시와는 다른 형태로 사회적 관계와 정치질서, 그리고 가정 등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 관계되었다.52) 그것은 이스라엘의 집단적 정체성에 대한 회의와 ‘개인’의 부각, 이유 없는 고난에 대한 질문, 인간의 궁극적 한계와 운명에 대한 질문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을 아우르게 된다. 이제 지혜는 토라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유산을 전수하려는 모든 유대교적 삶과 연관된다. 우리는 다음 절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시락서에서 바로 이러한 토라와 지혜의 합류된 전승을 보게 된다. 벤 시라는 그의 선조들과 같이 토라의 중심에 서 있는 ‘하나님 경외’를 지혜의 본질로 이해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지혜를 갈망한다면 계명을 지키라. 주께서 그것을 네게 주셨다”(시 1:26 cf. 1:16; 19:20; 21:11: 23:27)53) 말하자면 그는 기나 긴 토라의 전통을 지혜자로서 수용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lt;BR&gt;&lt;BR&gt;3) 이스라엘 종교의 새로운 길&lt;BR&gt;가. 집단에서 개인으로&lt;BR&gt;앞에서 설명했듯이 포로기 이후 정치적 단위로서의 국가 이스라엘은 유대인에게 큰 의미를 부여할 수가 없었다. 포로에서 돌아온 귀환공동체는 실제로 지파(tribes)단위가 아닌 씨족(clans)으로서 돌아왔다. 지파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의 국가적 형태는 포로기 이후 파괴되었다. 이것은 이미 북왕국의 멸망이후에 시작되었고, 귀환 후 이스라엘의 회복을 주도했던 “유다인” 공동체의 특성에서 가시화된다.&lt;BR&gt;외국 왕의 통치하의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국가가 아닌, 종교로서 그 정체성으로서만 유지 될 수 있었던 포로기 이후의 상황에서 유대교의 현실적인 선택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유다인 공동체가 자신들을 “이스라엘”의 종교적 유산의 수용과 새로운 해석의 주체로 내세웠다 할지라도, 야웨 하나님의 계약의 파트너로서의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결코 혈통적 근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었다(앞의 II. 1. 1)참조)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토라에 대한 전적인 순종이야말로 “참 이스라엘”이 되는 유일한 척도가 되었다. 제2성전기 후기로 갈수록 토라의 실천이 점점 더 강화된 배경에는, 창조주&lt;BR&gt;야웨가 이방인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은 토라에의 순종이이라는 유대인들이 세계관과 신앙이 자리하고 있었다.54)&lt;BR&gt;&lt;BR&gt;종교적 무게 중심이 토라 실천으로 이전되면서, 고대 이스라엘 종교는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유대교적 신앙은 성전 예배이외에도 토라의 연구, 안식일의 준수, 기도와 주기적인 금식을 통하여 실천되어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유대교적 세계관과 신앙의 중심인 토라에 대한 실천과 연구는 이 모든 것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토라의 연구는 모든 유대인들의 삶에서 야웨를 체험하는 경건의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 19:f). 이 율법 연구에 헌신된 사람들은 물론 제사장이다. 그러나 점차 지혜의 전수자였던 서기관들이 전문적으로 토라 연구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것이 토라와 지혜가 밀접하게 연관된 직접적인 원인이다. 이로써 유대교에서 서기관이라는 제도화된 토라 연구가들은 본격적인 활동과 기능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든 유대인들이 “행해야할” 토라 연구를 대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참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실천해야할 모든 개개의 유대인들에게 길과 방법을 제시하는 제도화된 기능인이었다. 그들 자신과 개개의 유대인들 모두는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종교적 개인’으로 서 있다.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시 119:15f).&lt;BR&gt;지혜가 제시하는 이러한 개인화된 삶의 형태는 토라가 가르쳐주는 종교적이고 도덕적 요구, 즉 ‘하나님 경외’로 집약된다. 이것은 변화된 ‘세계에의 순응’이라는 개인 처한 삶의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지혜로운 삶의 집약이다. 왜냐하면 지혜는 단순히 토라와 연관 될뿐만 아니라, 이제 창조된 세계의 질서를 ‘이해’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대 유대교에서 “창조 지혜”의 형성과정에서 이러한 지혜의 변천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다. 일찍이 Westermann은 창세기1:1-2:4에 대한 그의 주석에서 사제학파가 가지고 있는 창조세계에 대한 “학적”이해를 발견하려 하였다. 이른바 종(種)과 유(類)를 통한 자연에 대한 분석적 사고의 맹아가 창조의 날의 분류에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55)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전통에서는 매우 낯선 이러한 합리적 이성의 맹아를 욥기와 창조시편(특히 104장)들 속에서 발견한다. 시편 19장은 이러한 창조 지혜와 토라가 어떻게 결합되고 있는가를 가장 분명히 드러내어 준다. 시인은 하늘과 태양의 현상들 배후에 있는 “지식”이 어떻게 “세계 끝가지” 이해가능하게 전달되는가를 노래한다(19:2-4). 그리고 시의 2번째 부분에서 이렇게 선포한다：“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19:7f). 이것은 “토라를 준수함으로써 얻어지는 삶의 질서는 전체로서 하나님의 질서에 근거한 창조질서와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56)&lt;BR&gt;이 “창조 지혜”가 추구하는 우주의 질서와 잠언의 지혜가 추구하는 사회적 안정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왕에게 필요한 정의의 수호와 가난한 자들에 대한 보호는 야웨의 법을 따르는 사회적 규범이 되고(잠29:4, 14; 29:7), 탐심에 대한 경고(23:20f; 5:8), 사회적 성실(6:6-11), 가족의 지속(5:18-20)은 교훈의 중요한 내용이 되고, 아비와 어미는 이것을 자녀에게 훈계하여야 한다(23:13f, 22). 지혜는 결국 토라를 통하여 개인을 종교적 도덕적 요구에 세운다. 욥기 역시 이러한 종교적 합리적 사색을 회의주로 치우치지도 않고, 인과응보라는 이스라엘의 집단적 사고에 머물지 않고, 비평적이면서 개인적인 사색이 주를 이룬다.57)&lt;BR&gt;&lt;BR&gt;나. 종교적 리더십의 변화&lt;BR&gt;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종교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신정통치의 강화이다. 그것은 정치적 현실로는 가능하지 않은 하나님의 통치를 우주적 구원의 임재로 이해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예언에서 묵시로의 변화에 담겨진 것인데, 이것의 가시적 제도화가 급속히 강화되어 이른바 제사장적 신정통치로 정립된다. 고대 이스라엘 종교를&lt;BR&gt;이끌었던 왕, 예언자, 제사장, 그리고 현자(賢者)이라는 주요한 기능58)은 포로기 이후 고대 유대교의 형성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변형을 겪는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앞에서 설명한 종교의 내적인 변화에 기인한다. 그 내적인 변화의 요체는 전승이지만, 외적인 변화는 그 전승의 담지자이 살았던 사회학적 삶의 자리의 변화로 제도화된다.&lt;BR&gt;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에서 예언자에게는 역사 속에 계시하는 하나님 신탁의 전달이, 제사장에게는 율법을 가르치는 것이, 그리고 현자에게는 그러한 계시의 실천 방법을 전달하는 기능이 요청되었다.59)그러나 유대교의 형성과정에서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한 지배체제가 확립해 나간다. 그들의 기능은 점점 성전업무를 중심으로 되었고, 경&lt;BR&gt;제적 정치적 관료화의 길을 걷게 된다. 이들은 야웨를 섬기는 기능에 서 이제 백성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 반면 예언자들은 점차 현실에서 유리되어, 예언 자체가 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에 매여 있지 않고, 세계의 모든 통치자들을 대상으로 한 하나님의 보편적 통치와 구원을 꿈꾼다.&lt;BR&gt;이러한 사회적 삶의 자리의 급격한 변화는 Hanson에 의하면, 묵시의 담당자들이었던 예언자들이 처하게 된 혹독한 정치적 현실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예언자 집단은 제사장 집단에게 ‘시온의 회&lt;BR&gt;복’의 주도권 경쟁에서 밀리고, 그들은 성전 예배에서 배제되고 묵시적 집단으로 밀려나게 되었다는 것이다.60) 그들은 이미 레위지파와의 성전 주도권 경쟁에서 승리한 사독계열의 제사장들이다. 그 이후 175B.C.E. 헬레니즘의 과격파 메넬라오스가 비합법 대사제로 다스리던 때와 “불경한 대사제”(요나단?)이 다스리던 때를 제외한다면 예수 시대와 유대전쟁까지 제사장 반열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어떤 형식으로든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의 다수당이었던 사두개파와 관련이 되었을 것이다. 이에 반해 예언자들은 현재는 악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그 질서는 심판 앞에 서 있고, 그 심판 너머 의로운 자들을 위한&lt;BR&gt;새 세계가 준비되고 있다는 묵시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심판으로 분절된 두 시대(aeon) 가운데, 현재의 악의 세력은 다가 올 하나님의 필연적인 승리의 압박아래 놓여있다. 그 때는 멀지 않다. 이 세대에 있는 의로운 종이요 고난 받는 종(사 63; 65; 53)은 악에게 굴복하지 않는 신실한 자들이다. 구약성서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죽은 자의 부활(단 12:2)에 대한 신앙은 이러한 의로운 자의 순교라는 맥락 가운데서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묵시문학적 ‘프로그램’은 필연적으로 이 묵시를 받은 그룹을 구원받은 자들로 인식하게 한다.&lt;BR&gt;이로써 이스라엘 종교의 핵심적 기능이요 특징이었던 예언자와 왕의 긴장은 제사장적 종교 안에서 해소되어간다. 예언은 묵시로, 이스라엘의 삶은 토라에 의해 개인화된 경건을 추구하게 되고, 왕의 통치는 종교 공동체의 이상을 상징화하는 제사장적 신정통치로 대치된다. 이스라엘의 삶은 이제 이 토라와 성전의 종교적 상징의 조합내에서 종말의 통치로 향하게 되었던 것이다.&lt;BR&gt;&lt;BR&gt;&lt;BR&gt;신약논단 원문 서비스&lt;BR&gt;&lt;BR&gt;&lt;/FON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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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30 Dec 2009 10:00:1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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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그리스도교란 무엇인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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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P&gt;&lt;FONT style=&quot;FONT-SIZE: 18pt&quot; color=#3d3a76&gt;&lt;STRONG&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lt;FONT style=&quot;FONT-SIZE: 12pt&quot;&gt;그리스도교란 무엇인가&lt;/FONT&gt;&lt;BR&gt;&lt;/STRONG&gt;&lt;/P&gt;&lt;UL&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 color=blue&gt;&lt;STRONG&gt;빌립보서 3 장&lt;/STRONG&gt;&lt;BR&gt;&lt;/FON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gt;우리는 모든 시대와 모든 나라와 모든 환경 가운데서 성경이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최고의 교회 안내자임을 증명하였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빌립보서 3 장(章)이 예증하는 대로 기독교의 신성한 아름다움과 도덕적 뛰어남을 증명하고자 합니다.&lt;BR&gt;&lt;/FON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gt;우리가 독자들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성경 그 자체이지 성경으로부터 추론된 어떤 특별한 신학체계가 아니듯이, 이제 독자들 앞에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이지 인간이 가지는 종교성의 어떤 특유한 형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감히 인간이나 인간의 체계를 변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신학에서 오류를 범하며 윤리학에서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과 기독교는 흔들리지 않으며 흔들 수 없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큰 긍휼입니다. 누가 이것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신성과 도덕의 완전한 표준을 받는 것은 이루 다 감사드릴 수 없는 우리의 특권입니다. 감사하옵게도 우리는 그러한 표준을 성경 안에, 그리고 성경이 밝히는 기독교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신조에서 오류를 범하며 그들의 행위에서 실패할 수 있지만, 성경은 변함이 없으며, 기독교는 변함이 없습니다.&lt;BR&gt;&lt;BR&gt;&lt;/FON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gt;빌립보서 3장은 우리에게 모든 그리스도인이 닮아야 할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델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이 장(章)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사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quot;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따르는 자가 되라&quot;고 말합니다. 그는 이 장(章)에서 사도로서, 비범한 은사를 받은 자로서, 놀라운 비전을 본 특권을 가진 자로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빌립보서 3:17에서 듣는 것은 사도인 바울이나 또는 은사를 담은 그릇인 바울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인 바울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로서 바울의 화려한 경력을 따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이 셋째 하늘로 채워올림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가 걸었던 행로를 따를 수 있습니다. 이 장(章)에서 우리는 그 행로의 완전한 모습 뿐 아니라 출발점과 목적지를 볼 수 있습니다. 즉, &lt;FONT color=purple&gt;먼저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둘째로 그리스도인의 목표를, 셋째로 그리스도인의 소망&lt;/FONT&gt;을 깊이 생각하고자 합니다. 부디 중요하고 주의를 끄는 이 세 가지 항목을 고찰하는 동안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교사가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amp;nbsp;먼저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lt;BR&gt;&lt;/FON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FONT color=navy&gt;빌립보서 3장은 그리스도인의 신분&lt;/FONT&gt;을 두 방면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인의 신분이 무엇인가를 보여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신분이 아닌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自己義)를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quot;만일 누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한다면, 나는 더욱 그러하니, 내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줄기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에 관하여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에 있는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quot;&lt;BR&gt;&lt;BR&gt;&lt;/FONT&gt;&lt;/FON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gt;이것은 매우 주목할만한 목록으로서, 육체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신분에 관한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구도 다소의 사울보다 뛰어날 수 없습니다. 그는 유대인이었으며, 훌륭한 가문 출신이었으며, 규율 있는 지파에 속했으며, 행실에서 흠이 없었으며, 뜨거운 열심과 굽히지 않는 헌신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조에 따라 교회를 박해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그는 유대주의의 기초가 하나님의 교회라는 새로운 경륜에 의해 공격당하는 것을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유대주의와 기독교가 동일한 단(壇) 위에서 존속하거나, 동일한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였습니다. 유대주의 체계의 한 가지 특성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엄격한 분리였습니다. 기독교의 특성은 한 몸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친밀한 연합이었습니다. 유대주의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나누는 중간 벽을 세우고 고수하였으나, 기독교는 그 벽을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lt;BR&gt;&lt;/FON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gt;그러므로 성실한 유대인으로서 사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열심히 핍박하는 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믿는 종교의 본분이었습니다. &quot;그의 민족 중 많은 동년배들보다 더 잘 신봉하던&quot; 종교의 본분이었으며, 그가 심히 열심이었던 전통의 본분이었습니다. 사울은 종교적인 모양을 띤 것으로서 가지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가지려고 했습니다. 도달해야 할 정상은 무엇이든지 도달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의(自己義) - 육체 안에 있는 의(義) - 옛 창조 안에 있는 의(義) - 라는 건축물을 세우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 구하였습니다. 그가 모든 율법의 의(義)라는 매력에 사로잡혔던 것은 하나님의 의(義)라는 더욱 밝은 영광 가운데로 그 매력들을 던져버리기 위해서였습니다. &quot;그러나 내게 이득이 되던 것들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손실로 여길 뿐 아니라, 당연히 모든 것을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나의 주님을 아는 지식이 월등함으로 인함이라.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게 있는 의(義)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 곧 믿음에 의해 하나님에게서 난 의(義)라&quot; &lt;BR&gt;&lt;BR&gt;&lt;/FON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gt;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위의 구절 가운데 있는 두드러진 중요한 사상이 용서를 받기 위하여 자신을 예수님의 피에 바친 죄인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더 좋은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자기의(自己義)를 배설물 같이 버린 율법주의자에 관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새삼스레 바울이 죄인 - &quot;죄인 중의 괴수&quot;였으며, 자신을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에 바쳐서 용서와 화평을 얻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신약의 많은 구절에서 쉽게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빌립보서 3장의 주요한 사상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죄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quot;이득&quot;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죄인으로서 자신의 곤경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 육체 안에 있는 사람 - 옛 창조 안에 있는 사람 - 유대인 - 율법주의자로서 자신의 이익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lt;BR&gt;&lt;/FON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gt;다행스럽게도 바울은 자신의 모든 죄를 십자가로 가져가서 신성한 속죄헌물의 구속하는 피로 씻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우리는 다른 점을 봅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자신으로부터 자기의(自己義)를 멀리 내던져 버리고, 그 의(義)를 그리스도인의 의(義), 새창조에 속한 의(義)인 부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와 대조를 이루는 가치 없고 추한 것으로 여기는 율법주의자를 봅니다. 바울은 슬퍼해야할 죄를 가졌으며, 자랑해야 할 의(義)를 가졌습니다. 그는 자기 양심에 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마에 월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부끄러워해야 할 많은 것들과 자랑해야 할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서 3:4∼8이 특별히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죄를 용서받고, 범한 죄를 씻고, 수치를 가린 죄인이 아니라, 승리하시고 높여지신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참된 영광과 불멸의 영예와 영존하는 의(義)를 보았기 때문에 자기의(自己義)를 버린 율법주의자요, 명예를 던져버린 학자요, 헛된 영광을 버린 사람입니다. &amp;nbsp;그것은 실제로 자기의(自己義)를 전혀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의(義)가 필요했던 죄인 바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에게 계시된 의(義)를 더 선호한 바리새인 바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의(義)가 다른 것보다 훨씬 뛰어나며 더욱 영광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lt;BR&gt;&lt;/FON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gt;의심할 여지없이 죄인으로서 바울은 다른 모든 죄인들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서기 위해 의(義)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바울이 이 장(章)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심히 원하는 바는 독자들이 이 점을 분명하게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죄가 나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뛰어남이 나를 그분께로 이끄는 것입니다. 참으로 나는 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비록 내가 의(義)를 가졌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던져 버리고 기꺼이 &quot;그분 안에&quot; 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롭게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한 영광스러운 의(義)를 주셨다는 점을 볼 때, 자기의(自己義)를 갖는 것이 내게는 분명한 &quot;손실&quot;입니다. 에덴동산의 아담은 벌거벗었고, 그 결과 그는 자기를 위해 앞치마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겉옷을 만들어 주신 후 앞치마를 계속해서 착용하는 것은 그에게 &quot;손실&quot;이었을 것입니다. 분명히 사람이 만든 앞치마 보다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겉옷을 입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아담도 그와 같이 생각했고, 바울도 그와 같이 생각하고, 신성한 책에 이름이 기록된 하나님의 성도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사람의 의(義)로 서있는 것보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義)로 서 있는 것이 낫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할 길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제거하는 것도 긍휼이지만, 우리의 의(義)를 제거하고 대신에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의(義)를 받아들이는 것도 긍휼입니다. &lt;BR&gt;&lt;/FON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gt;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quot;그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quot;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분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일부는 그리스도 안에 일부는 율법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일부는 규례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quot;그분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입니다. &quot;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주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입니다. 만약 다른 것이 조금이라도 더해진다면 그것은 결코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마도 어떤 고대의 &quot; 주의(ism)&quot;이거나, 어떤 중세의 &quot; 주의&quot;이거나, 근대의 &quot; 주의&quot;일 것입니다. 그러나 매우 분명한 사실은 만약 &quot;그분 안에서 발견되는&quot;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신약의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lt;BR&gt;&lt;/FON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gt;그러므로 &quot;우리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다&quot;는 첫 번째 항목을 주목할 것을 독자들에게 진지하게 권면하는 바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의(義)이십니다. 그분은 친히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시고 높여지시고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의(義)이십니다. 그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고유의 바른 신분입니다. 그것은 유대주의, 카톨릭주의, 기타 어떤 &quot;주의&quot;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 교회, 저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실제적인 기독교의 위대한 기초입니다. 요컨대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분입니다.&lt;BR&gt;&lt;BR&gt;&lt;/FON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gt;이제 &lt;FONT color=navy&gt;두 번째 항목인 그리스도인의 목표&lt;/FONT&gt;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lt;BR&gt;&lt;/FON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gt;여기서 다시 기독교는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게 합니다. &quot;내가 그분을 알려 하여&quot;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호흡입니다. &quot;그분 안에서 발견되려함&quot;이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구성하는 것이라면, &quot;그분을 아는 것&quot;은 그리스도인의 본연의 목표입니다. 고대 철학은 지지자들의 귀에 끊임없이 어떤 금언(金言)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금언은 &quot;너 자신을 알라&quot;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기독교는 고상한 목표를 가리키는 더 높은 금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금언은 우리에게 &quot;그리스도를 알라 - 그분을 우리의 목표로 삼으라 - 오직 그분만을 진지하게 바라보라&quot; - 고 말합니다. &lt;BR&gt;&lt;/FON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gt;이것이, 오직 이것만이, 그리스도인의 목표입니다. 다른 목표를 갖는 것은 결코 기독교가 아닙니다. 슬프게도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글의 서두에서 우리가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 기독교이지 그리스도인들의 길이 아니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기독교는 목표가 무엇인가에 좌우합니다. 만약 목표가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원하는 바는 항상 &quot;또 내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권능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분의 죽으심과 같은 모습이 되어&quot;라는 말씀 안에 구체화될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것, 돈을 벌고자 하는 것, 높은 지위를 얻고자 하는 것, 가족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것, 명성을 떨치고자 하는 것, 명사(名士)나 부자나 인기인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그리스도인의 목표가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보다 더 좋은 것을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이러한 것들을 목표로 삼는 것은 괜찮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가졌습니다. 따라서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를 자신의 의(義)로 알지 못하는 자가 스스로 의(義)를 이루어내는데 있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충분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분이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의(義)가 실제로는 손실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목표에 관한 문제에서도 정확히 동일합니다. 문제는 &quot;그것에 어떤 해(害)가 있느냐&quot;가 아니라 &quot;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목표이냐&quot;입니다.&lt;BR&gt;&lt;BR&gt;&lt;/FON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gt;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천한 풍조가 유행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리스도에게서 시선을 떼어 어떤 천한 목표에 시선을 고정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속한 단순한 사람, 곧 본성 안에서 또는 옛 창조 안에서 단순히 자기의 지위를 보는 자에게는 매우 훌륭한 목표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결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세상 안에 있지만, 그러나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quot;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quot;(요 17:14) &quot;우리의 생활방식은 하늘에 있는지라.&quot; 우리는 절대로 그리스도보다 천한 어떤 목표에 자신을 드리는데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지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청소부이거나 군주이거나, 아니면 이 둘 사이에 있는 많은 계층 중에 하나에 속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께서 참된 유일한 목표라면 모두는 같습니다. 그에게 성품을 주는 것은 지위가 아니라 사람의 목표입니다. &lt;BR&gt;&lt;/FON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gt;바울의 목표는 그리스도였습니다. 그가 한 곳에 머물러 있든, 여행을 하든, 복음을 선포하든, 불을 지피기 위하여 나무 조각들을 모으든, 교회를 세우든 아니면 장막을 만들든, 그의 목표는 오직 그리스도였습니다. 밤이든 낮이든, 집이든 밖이든, 바다이든 육지이든, 혼자든 동료와 함께 하든, 공적이든 사적이든, 그는 &quot;한 가지 일을 행하나니&quot;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열심히 일하는 사도인 바울이거나 또는 셋째하늘로 채워올림 받은 성도인 바울이 아니라, 살아있고 활동하며 행하는 그리스도인이며, 우리에게 &quot;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따르는 자가 되라&quot;고 말하는 바울이었습니다. 우리는 결코 이 보다 못한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슬프게도 우리는 실패를 거듭합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있는 참된 목표를 절대로 잃지 말아야 합니다. 필사(筆寫)를 하는 학생과 같이, 눈을 표제에 고정할 때만이 필사를 잘할 수 있습니다. 그는 본성적으로 바로 앞에 쓴 줄을 보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매번 다음 줄이 앞줄보다 나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복되고 완전한 표제에서 눈을 떼어 차츰 자신과, 자신의 작품, 자신의 성품, 자신의 이익, 자신의 명성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기독교가 제시하는 한 목표, 곧 그리스도를 향하여 계속해서 시선을 고정하는 대신에, 차츰 자신의 원칙, 자신의 고백, 자기 입장과 일치하는 것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합니다.&lt;BR&gt;&lt;/FON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gt;그러나 어떤 이는 &quot;어디서 목표를 발견할 수 있는가?&quot; 라고 말할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계층 가운데서 목표를 발견해야 한다면, 실로 매우 어려울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빌립보서 3장에 가지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이면 충분합니다. 우리는 이 장(章)에서 참된 기독교의 모델을 봅니다. 우리 모두 오직 그곳을 목표로 삼읍시다. 우리의 마음이 다른 것들을 따를 경우, 그것들을 심판합시다. 표제와 우리의 줄을 비교하고, 열심히 원본에 충실한 복사본을 만듭시다. 비록 계속되는 실패에 슬퍼해야만 할지라도, 계속해서 우리의 바른 목표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하며, 우리의 성품을 형성해야 합니다. 성품을 형성하는 것은 목표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돈이 나의 목표라면, 나의 성품은 탐욕스러울 것입니다. 만약 권력이 나의 목표라면, 나는 야망에 차 있을 것입니다. 만약 책이 나의 목표라면, 나는 문학적일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나의 목표라면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은 생명과 구원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오직 실제적인 기독교에 관한 문제입니다. 만약 누가 그리스도인에 관한 단순한 정의를 묻는다면, 즉시 &quot;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목표로 삼는 사람입니다&quot;라고 답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단순한 것입니다. 오늘날 슬프게도 수많은 이들이 세상적인 일들을 마음에 두는 때에, 부디 우리가 그 권능 안으로 들어가서, 보다 건전하고 활기 있는 제자도를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lt;BR&gt;&lt;/FON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FONT color=navy&gt;이제 그리스도의 소망&lt;/FONT&gt;에 관하여 좀 더 언급한 후 이 광범위하고 중대한 주제에 관한 대요(大要)를 마치고자 합니다. &lt;BR&gt;&lt;BR&gt;&lt;/FONT&gt;&lt;/FON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gt;빌립보서 3장은 다른 두 가지 특성과 마찬가지로 세 번째이자 마지막 항목을 매우 독특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이들 세 가지 사이의 관계는 얼마나 아름답게 완전한가요! 나의 의(義)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나의 목표로서 그분을 알기를 애타게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을 알면 알수록 더욱 더 열심히 그분과 같이 되기를 애타게 바랍니다. 그리고 이 소망은 내가 그분이 계신 것 같이 그분을 볼 때에야 비로소 실현될 수 있습니다. 완전한 의(義)와 완전한 목표를 가지고 있기에 단지 한 가지만 더 필요할 뿐입니다. 그것은 이 목표를 누리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끝내는 것입니다. &quot;우리의 생활방식은 하늘에 있는지라. 우리가 또한 하늘로부터 구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분께서 능히 모든 것을 자신에게 복종케 하시는 그 일하심에 따라, 우리의 천한 몸을 변화시키사 자신의 영광스런 몸과 같게 하시리라.&quot;&lt;BR&gt;&lt;/FON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gt;이 세 가지 항목을 함께 놓으면 참된 기독교에 대한 완전한 견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항목 가운데 한 항목도 상세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각 항목은 그것을 완전히 다루기 위해서 많은 분량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독자에게 각자 이 놀라운 주제를 추구하기를 요구하는 바입니다. 부디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불완전함과 불일치를 딛고 일어서서, 이 장(章)에서 모델로 제시된 사람의 삶과 성품 안에 구현된 기독교의 도덕적 위엄을 응시하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quot;다른 이들로 하여금 원하는 대로 하게 하라. 내게는 아무 부족함이 없이 이 사랑스러운 모델이 항상 내 마음을 만족시키고 있다. 나는 내 눈을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돌이켜서 오로지 그리스도만 바라보겠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나의 의(義), 나의 목표, 나의 소망인 나의 모든 기쁨을 발견하겠다.&quot; 부디 예수님을 위하여 필자와 동일한 마음을 갖는 독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amp;nbsp;&lt;/FONT&gt;&amp;nbsp;&lt;BR&gt;&lt;BR&gt;C. H. 메킨토시 &lt;/FONT&gt;&lt;/P&gt;&lt;/UL&gt;&lt;P&gt;&amp;nbsp;&lt;/P&gt;&lt;P align=center&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gt;- C. H. Mackintosh 箸 &quot;Christianity &lt;STRONG&gt;: What is it?&quot; - &lt;/STRONG&gt;&lt;/FONT&gt;&lt;/P&gt;&lt;/FON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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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19 Dec 2009 03:32:3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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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유대교와 기독교]]></title>
    <description>
        이 글의 첫째 단락에서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규정하기 위한 세 가지 모델이 제시될 것이다. 즉 초기 기독교(Urchristentum)는 유대교와 유사(Parallele), 유대교의 확장(Entschrnkung) 그리고 유대교의 변형(Transformation)으로 각각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단락에서 우리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관계에 대한 바울의 신학적 해석을 다룰 것이다. 이 세 가지 모델 모두는 (신학적 표현 양식으로) 바울에게서 나타난다. 세 번째 단락에서 우리는 각각의 모델에 대한 사회사적 가설을 세우게 될 것이다. 요컨대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관계에 대한 바울의 신학적 해석은 그가 처했던 사회적 현실에서 ‘개연성의 근거’(Plausibilitaetsbasis)를 가진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I.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설정에 대한 세 가지 모델&lt;br /&gt; &lt;br /&gt; 1. 첫째 모델: 유대교와 유사한 기독교&lt;br /&gt; &lt;br /&gt; 이 모델과 상당히 동떨어진 관점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로마제국에로의 유입은 전적으로 동양제의의 확장의 한 부분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원후 역사에서 사회와 문화의 ‘동양화’(東洋化)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볼케슈타인(H. Wolkestein)은『기독교 이전 고대시대의 자선과 가난한 자 구제』(1939)라는 그의 저서에서 동양의 자비의 에토스를 예로 들어 그러한 동양화의 과정을 사회사적으로 밝혀냈다. 그의 주장은 서양이 동등한 자들 사이의 사회적 상호성에 강조를 두었다면, 동양은 약한 자들에 대한 강한 자들의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즉, 서양의 평등의 에토스는 동등한 권리를 가진 시민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공화정 도시국가 구조와 연관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동양의 자비의 에토스는 사회적 약자가 강자에게 의존하는 동양의 전제적 사회구조로 규정된다. 유대교와 기독교를 통해서 이 동양의 자비의 에토스가 서양에서 확산되었다면, 이것은 그리스와 로마의 사회구조가 동양화된 것과 연관된다. 그리스의 폴리스 제도는 그 중요성을 잃고 로마의 군사적 전제왕정의 강력한 위계구조에 의해서 점점 그 가치가 하락된다. 기원 후 3세기까지 오랫동안 정체된 로마사회의 위기 가운데 사회변화를 불러왔던 일련의 과정이 진행되는데, 이 결말은 기독교화로 맺어진다. 달리 말하면 역사적 전환기를 중심으로 시작된 위계적 사회로의 전환은 ‘인간의 연대’라는 새로운 모델을 요구하게 되었고, 유대교와 기독교는 그것을 제시하였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었을 것이다. 그의 은총론은 신학적으로 표현된 새로운 가치를 제공한다. 강한 자에게 요구된 약한 자를 향한 자비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에서 더욱 급진적으로 표현되고, 그 은총에 상응하는 인간의 행동이 요청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유대교와 기독교는 고대 동양의 신념 세계와 유사한 변수를 갖는 개념으로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과 주변 종교 간의 차이가 상쇄되는 것같이 두 종교 간의 차이도 소멸된다. 물론 비록 유대교와 기독교가 그 주변세계의 종교와 분명히 구별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말이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다신론적 세계에서 유일신론적 교의에 서 있다. 그들은 구성원들에게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주변 세계와 구별된 삶을 요구했다. 또한 이 두 종교는 당시 로마제국으로 유입된 동양적 문화 중에서도 양자 모두가 특별한 위치를 점하였다. 바로 그러하기에 그들은 ‘유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lt;br /&gt; &lt;br /&gt; 2. 둘째 모델: 기독교는 유대교의 확장&lt;br /&gt; &lt;br /&gt; 그러면 두 그룹을 구분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기독교만이 그 사회를 정복했고 유대교는 할 수 없었는가? 유대교는 사회의 주변에 위치했기 때문인가? 슐리히터(W. Schlichter)는 고대 유대교에 대한 관점과 아울러, 고대사회에서 유대인의 “주변적 위치”로 이것을 설명하려 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다양한 역사적 전환기에서나 여러 다른 나라가 유대민족의 내부적 성향을 비난하는 것과 같이, 외부적 환경에서 볼 때 유대인들은 넓은 의미로 귀속적(askriptiv)으로, 다시 말해 출생을 통하여 소집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제의적 틀을 통하여 외부와 폐쇄된’ 이 특수한 공동체는－정치적인 자치기구가 없었다 해도－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아니지만 집단적인 차원에서는 외부에 대하여 낯설게 되었고, 또 스스로에 의해 부과된 주변적 위치에 머물렀다.” 그는 유대인들을 주변적 위치에 있게 한 것은 “디아스포라 유대교의 수준 높은 혁신능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그들의 융합능력과 연결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사실 기독교만이 전 사회를 관통할 만큼 이 ‘융화력’을 충분히 발전시켰다. 그들은 유대교와는 달리 할례나 음식규율 같은 분리주의적인 규범을 포기했다. 이것은 인간의 수평적 연대를 파괴할 수 있는 (혼인관계나 식탁공동체의) 규범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기독교가 유대교와 같이 주변세계의 위치에 남아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고대세계에서 기독교는 ‘비유대인들도 들어갈 수 있는 유대교’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양자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분리적인 사회 규범의 철폐를 통한 사회 개방의 여부였다.&lt;br /&gt; &lt;br /&gt; 바울의 역사적 의미를 이러한 관련에서 규정할 수 있다면, 그는 비유대인을 위한 또 하나의 유대교를 구상하였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는 분리주의적 규범 포기를 신학적으로 기초하고, 교회적 지도력으로 그것을 관철시켰다. 유대교의 이러한 사회적 개방은 좀더 깊은 유대교의 내적인 변화를 설명하고 있지 않았을까? 또 바로 바울이 유대교의 이 변화를 기독교로 추진하지 않았을까?&lt;br /&gt; &lt;br /&gt; 3. 셋째 모델: 기독교는 유대교의 변형&lt;br /&gt; &lt;br /&gt; 이제 우리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한 셋째 모델을 규정하려 한다. 이것은 기독교는 ‘비유대인을 위한 개방’을 통해서 그 내적인 구조가 변화된 유대교라는 것이다. 맨슁(G. Mensching)은 그의 종교사회학적 연구를 통해서 이 변형을 ‘민족종교에서 보편종교로의 길’이라고 묘사했다. 이 과정에서 단지 종교의 사회적 작용범위만이 아니라, 구원의 개념도 변화되었다. 즉, 민족종교에서 구원은 태어나면서 획득된 공동체성에 소속됨으로 주어진다. 문제는 그 구원을 어떻게 보존하고 정당화하는가이다. 반면 보편종교는 개인이 공동체와 자연에 대해 민족종교보다 더 크게 독립되어 있음을 전제한다. 구원은 미리 주어진 사회적 소속으로 획득되지 않는다. 도리어 인간에게는 구원받지 못한 상태가 주어진다. 인간은 이 상태에서 기본적인 변화와 갱신을 통해서만 구원의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므로 보편종교의 특성은 구원사상에 있다.&lt;br /&gt; &lt;br /&gt; 바울의 신학에서 바로 이 민족종교에서 보편종교로 넘어가는 길목이 발견된다. 그가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에 대한 유대교적 신앙을 이방인에게 표현하려 하였을 때, 그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어떤 긍정적인 관계에 서 있다는 것을 전제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여러 신들로부터 떠나 유일한 한 하나님에게로 돌아와야 했다. 그들은 구원을 필요로 하고, 그 구원을 얻기 위해 믿음과 성례전으로 말미암은 변화를 통해서 깊은 변화를 체험해야 했다. 성례전을 통해 일어난 인간의 변화에 대한 사상은 동시에 전 우주의 변화를 예시하는데, 그것이 바울의 기독교를 유대교와 구별해준다. 그 사상은 맨슁이 말하는 보편종교에 필수적인 바, 그 구원사상에 연관된 하나의 형태가 된다.&lt;br /&gt; &lt;br /&gt; II.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관계에 대한 바울의 신학적 해석&lt;br /&gt; &lt;br /&gt; 우리는 이제 이 두 번째 단락에서 바울이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의 관계를 도대체 어떻게 보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앞에서 묘사했던 세 가지 모델에 기초해야 한다. 우리는 바울에게서도 그것이 변형된 관계형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이 바울에게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해석하려 했다 하더라도 말이다.&lt;br /&gt; &lt;br /&gt; 1. 유대교와 기독교의 유사성: 동일한 역할&lt;br /&gt; &lt;br /&gt; 바울에게서 자주 발견될 수 있는 유대교적 믿음과 기독교적 믿음의 대립적 성격은, 이미 그러한 반대명제가 양자의 어떤 관계를 전제할 때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갈라디아서에서조차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적대적인 ‘형제들’로 해석된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하갈의 자녀들은 두 종교의 모형이다. 여기서 하갈은 알레고리적 위력을 통해서만 유대교로 이해될 수 있다. &lt;br /&gt; &lt;br /&gt; 이러한 유사성은 로마서 9-11장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서 바울은 유대 기독교인과 이방 기독교인을 경쟁관계로 보고 있다. 이방기독교인들은 이방인으로서 그들이 추구하지 않았던 의에 도달해 있는 반면, 유대인은 의식적으로 이것을 추구하였으나 그 의에 도달하지 못했다(롬 9:30f). 게다가 “그들은 부딪힐 돌에 부딪혔다”(롬 9:32f). 여기서 암시하고 있는 “경주”라는 상징어는 바울이 이미 9: 16f에서 사용하였던 것인데, 그는 11:11에서 이 긍정적인 언급을 위해 다시 한 번 이것을 거론한다. 유대인들은 경주를 하다가 부딪쳤을 수는 있지만 결코 실족해버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유대인과 이방기독교인의 긍정적인 경쟁관계를 묘사하는데 더 일반적인(혹은 경제적인?) 표상인 “부족”과 “부요”를 사용함으로써 그 메타포를 바꾼다. 유대인의 넘어짐은 이방인의 부요가 된다. 왜냐하면 유대인이 복음에 부딪침으로써만 그 복음은 이방인에게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롬 11:12ff). 또한 이방인의 돌아옴은 유대인으로 하여금 시기하게 하여 이들이 다시 돌아오게 할 것이다(롬 11:11-15).&lt;br /&gt; &lt;br /&gt; 이 변화되고 있는 “경쟁관계”의 의미는 11장 끝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은총의 하나님 앞에서 마침내 동등하게 된다고 결론지어진다. 양자 모두는 불순종의 단계를 통과한다. 그 둘은 불순종에서는 어떠한 차이도 없다. 하나님은 그의 자비하심에 있어서도 그들에게 차이를 두지 않는다.&lt;br /&gt; &lt;br /&gt;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관계에 대한 바울의 (아마도) 마지막 말은 그들이 동일한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차례로 같은 역할을 감당한다. 그들은 비록 너무 다른 가지일지라도 같은 줄기에서 갈라진 가지일 수 있다. 이들의 길은 하나님 안에서야 비로소 만나게 될 이 ‘평행’한 길이 있다는 것은 바울이 어렵게 도달한 관점이었다. 이것은 이제 다음 단락에서 보이게 될 더 머나먼 발전의 끝이었다.&lt;br /&gt; &lt;br /&gt; 2. 기독교는 확장된 유대교: 유대인의 역할을 하는 이방기독교인&lt;br /&gt; &lt;br /&gt; 유대인과 이방인(이방 기독교인)이 유사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은, 갈라디아서 2:15에서 자신을 “죄인들과 이방인들”과 자랑스럽게 차별하였던 바울과 같은 한 유대인에게는 하나의 혁명적인 통찰이었다. 바울은 이 관점을 그가 소명을 체험할 때에 얻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이방인 역시, 유대인이 되지 않고도 하나님의 역사에 이스라엘과 함께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고, 할례 없이도 유대인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이스라엘의 모든 특권(롬 9:4)을 표현하며, 그 특권이 단지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기독교인들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볼 수 있다. 그 특권은 아들 됨, 영광, 언약 체결, 율법 수여, 예배, 축복의 조상과 같은 것들이다.&lt;br /&gt; &lt;br /&gt; 아들 됨은 모든 인간에게 영을 통하여 수여되거나(롬 8:14f), 영을 통하여 매개된다(갈 4:6). 그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들에게 비추인다(고후 3:18, 4:4). 성만찬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언약이 세워지고, 모든 사람이 하나의 법을 갖게 되어 이방인도 마음에 그 법을 갖는다(롬 2:14ff).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합당한 예배”를 드린다(롬 12:1ff).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롬 4:16)이고, 이방 기독교인들은 이제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0)에 속한다. 그들은 예전에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롬 9:25=호 2:25). 이 중심 사상에 있어서 유대인으로부터 이방인으로의 전이는 바울 복음의 핵심에 속한다.&lt;br /&gt; &lt;br /&gt; 3. 기독교는 유대교의 변형: 이방인의 역할을 하는 유대인&lt;br /&gt; &lt;br /&gt;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확장되었다는 주장은 그 구원의 이해를 필연적으로 변경시킨다. 그것은 이방인들은 여러 신으로부터 참된 하나님에게로 돌이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복음의 수용은 유대인보다 더 근본적인 변화였다. 유대인들에게 그것은 태고적 축복의 증거였다. 이방인들에게 “구원”이었던 것이 그들에게는 “성취”였다. 유대인은 머나먼 길의 종점에 도달했으나, 이방인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향해 목표를 수정해야 했다.&lt;br /&gt; &lt;br /&gt; 이제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이방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차별 없이 모든 인간들에게 구원사상을 피력한다.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인간은 심판 아래 살아간다. 이 구원사상의 보편화는 다음과 같은 하나의 ‘역할교환’(Rollentausch)을 통해서 일어난다. 유대인은 그들이 복음을 영접하지 않는 한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의 역할을 한다. 반면 이방인은 그들이 복음을 믿는다면 유대인의 역할을 한다. 이 역할 교환의 예를 들어보자.&lt;br /&gt; &lt;br /&gt; 데살로니가전서 1:9-11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말한다. 이 진노는 만일 인간이 참된 하나님에게 돌이키지 아니하면 모든 이에게 임할 것이고, 그의 아들을 통해서 그것으로부터 구원받을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이방인도 해당한다. 바로 뒤 데살로니가전서 2:16에서 바울은 유대인에게도 이 진노의 심판에 대한 위협을 표명한다. 유대인들은 복음에 대한 적대감으로 인해 그들도 (믿지 않는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종말의 심판(ovrgh. eivj te,loj)에 떨어진다.&lt;br /&gt; &lt;br /&gt; 또 갈라디아서 4장에서 바울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의 관계를 사라－하갈 유형론으로 설명한다. 필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적대적 공존’의 필요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아브라함이 두 여자와 혼인한 것을 내세웠다. 그러나 바울은 비유대인 하갈을 유대교의 모형으로, 또한 사라는 기독교인의 모형으로 삼았다. 그는 그들의 관계를 단지 ‘적대적인 공존’만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둘의 긴장으로 해석했다.&lt;br /&gt; &lt;br /&gt; 이와 유사하게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도 이것을 다룬다. 여기서는 사라와 하갈, 야곱과 에서, 모세와 바로와 같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의 쌍들이 나타난다. 전통적으로 하갈이나 에서, 그리고 바로는 이방인을 대변한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그들은 믿지 않는 이스라엘을 대변한다. 무엇보다도 대대로 이스라엘의 적대자였던 완고한 바로는 이스라엘의 완고함을 대변하는 인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가는 것”에서 민족들의 순례에 대한 회고를 전제할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는 로마서 11:25f에서 그러한 역할 변경을 다시 한번 발견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관념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구원이 비로소 이방민족들의 유입을 시작하게 한다고 보았으나, 여기서는 그것이 뒤바뀌기 때문이다. 즉, “민족들이 들어가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것의 전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서 11:25에서 과연 유대인과 이방인의 역할 변경이 정말 전제되고 있는 것인가? 이것은 다음과 같은 문맥에서 분명히 표현할 수 있다: “너희(이방인)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그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함에 가두어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0-32).&lt;br /&gt; &lt;br /&gt; 이렇게 이방인의 역할이 유대인에게 전이되고 있다는 사상은 바울이 정말 그러한 사고의 진전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는가를 의심해야 할 만큼 매우 대담한 진보였다. 원래 바울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새로운 복음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만일 그렇다면 이방인들에게서도 요청되었던 심판에서 구원으로의 변화를 유대인들도 경험해야만 했다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사고의 변화는 다음과 같은 것일 수 있다. 바울은 원래 이방인들만을 위해 그의 구원론을 구상했을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에서야 비로소 그것을 일반화해서 유대인에게도 적용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보편적인 구원론을 처음부터 가졌을 것이고, 그것을 이 두 번째 시기에서 더 분명하게 표현했을 것이다. 여기에는 그렇게 발전되고 있는 두 가지 요소가 명확히 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비기독교적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바울의 이방인 선교에 대한 적대감, 그리고 이방인 선교에서 바울과 기독교적 유대주의자들과의 경쟁이다.&lt;br /&gt; &lt;br /&gt; 50년대 이방인 선교는 유대인 선교보다 더 성공적이었을 뿐 아니라, 유대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결정적인 저항에 부딪쳤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방인 선교는 유대인과 그들 주변세계가 어렵게 유지한 긴장을 깨트렸다. 이것은 이방인 선교가 한편으로는 유대교의 중요한 동조자들(“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유대공동체 안으로 흡수했기 때문이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공동체 안에서 기독교 설교로 인해 부각된 긴장이 국가와 행정장관들의 간섭을 초래했기 때문이었다－예를 들면, 49년의 클라우디우스 포고가 그것이다. 그리하여 유대공동체들이 바울의 이방인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경쟁적인 적대자들이 되었다면, 유대인들도 이방인과 같이 심판을 거쳐야 한다는 생각은 바울에게는 개연성을 가졌을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이 생각은 더욱 구체화되는데, 그것은 유대인이 이방인 선교를 방해하기에 그들이 믿지 않는 이방인과 똑같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살전 2:16).&lt;br /&gt; &lt;br /&gt; 바울에게 이 보편화된 구원사상의 개연성은 그가 경쟁하고 있는 유대주의자들의 이방선교를 통해서 다시 한번 부각되었다. 이것은 물론 다음과 같은 주장을 대변하는 것인데, 즉 구원은 오직 이스라엘 민족과의 연결을 통해서만 존재하며, 따라서 만일 이방인들이 완전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이 되려 한다면, 그들이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바울의 기독교는 이방인에게 아직도 “온전하게”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 일종의 유대교의 전 단계에 불과했으리라. 마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방인들”의 위치가 온전한 유대교의 전 단계였듯이 말이다. 이 경쟁자들이 추진했던 이방인 선교에 대한 생각에 맞서 바울은 유대인도 모든 인간들과 똑같이 구원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대응하였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바울은 토라를 평가 절하한다. 그래서 토라는 그 원래적인 목적이 구원이라 할지라도, 이방인의 우상숭배와 동일하게 인간을 예속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비교. 갈 4:1ff).&lt;br /&gt; &lt;br /&gt; 바울의 삶에서 대략 10여 년간 나온 이 주장에서 구원론의 보편화는 이미 유대인과 이방인의 역할 바뀜을 통해서 실행되었다. 그는 이 주장은 분명히 어떤 일관된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나의 견해로 이 요소는 하나의 분명한 변화와 발전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lt;br /&gt; &lt;br /&gt; 바울서신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유대인에게 구원론의 부정적 측면만이 부과될 뿐이다. 즉, 그들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구속적인 의(하나님의 심판을 중지할)가 유효하다는 것은 여기서는 아직도 언급되지 않는다. 더욱이 바울은 이 “심판”이 종국적 심판(ovrgh. eivj te,loj)임을(살전 2:16) 일깨운다.&lt;br /&gt; &lt;br /&gt; 갈라디아서나 고린도서에서 바울의 주장은 중립적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를 근본적으로 상대화해버리는 ‘차별 없음’에 대한 주장(Indifferentzaussagen)은 여러 번 등장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없다”(갈 3:28)거나, “할례나 무할례가 무관하다”(갈 5:6; 6:15; 고전 7:19)는 언급이 그것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동일하게 회개의 기회를 갖는다. 지금은 아직도 유대인의 마음에 너울이 씌워졌지만 말이다. 그러나 바울은 구약에 근거한 소망을 새롭게 해석한다. “만일 그가 (즉, 이스라엘의 대표자로서의 모세가) 주께 돌아간다면, 그 수건은 벗겨질 것입니다”(고후 3:16). 여기서 종국적인 심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lt;br /&gt; &lt;br /&gt; 마지막으로 로마서에 나오는 “바울의 언약”에서 그는 한 단계 더 나아가는데, 여기서 보편화된 구원사상은 철저히 관철된다. 바울은 유대인이 마치 하나님의 보편적 심판의 관점에서 특권을 가진다는 식의 모든 반론을 무시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바울은 모든 면에서 보편적인 구원사상을 유대인의 특권과 조절하고자 한다. “차별 없음”에 대한 언급 이외에도 그는, 올리브나무의 비유에서 분명히 표현되는 바(롬 11:17ff), 유대인의 “우선”을 주장하고 있다. 이 prw/ton은 유대인이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효한 것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바로 그들의 믿지 않음을 통하여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 재림에 오시는 주님은 이스라엘을 해방하게 되고, 모든 이스라엘의 죄, 그리고 이방선교를 대항한 그들의 적대감도 용서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고심 끝에 이러한 긍정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그것은 그가 이방인과 유대인의 ‘역할 교환’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이 역할 교환에서 숨겨진 유사성을 발견하고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는 심판의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그것은 그들 모두를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게 하는 것이다. 양자 모두는 분명 “simul justus et peccator”(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다. 유대인은 이방인 선교를 수용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지만, 동시에 그들의 조상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가 된다(롬 11:28). 바로 이것은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는 바, 모든 사람이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으나(롬 5:10),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랑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서 5-7장은 대략 이와 같이 서술할 수 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만일 내가 옳게 보았다면, 우리는 이러한 ‘발전’을 전제하여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바울은 이제는 구원이 이방인들에게고 열리게 되었다는 소식을 가지고 이방인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복음은 “유대교의 확장”이다. 이에 대한 유대인의 대항은 심판의 보편화를 가져왔고, 최소한 이에 대한 분명한 명제를 성립시켰는데, 그것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든 사람이 심판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이다. 유대교에 의존한 구원사상은 이제 유대교 신앙의 구조를 변형시켰는데, 그것은 유대인도 구원에 이르기 위하여서는 철저히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바울은 분명히 복음을 거절한 유대인에게도 보편적인 구원사상을 새롭게 적용한다. 그들의 거절은 구원으로 향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평행한 길의 한 단계로 보였고, 그 길은 재림에서야 비로소(아니 보다 더 정확하게는 이미 곧) 합류되게 된다. 기독교는 여기서 유대교에 대하여 유사한 어떤 것이다.&lt;br /&gt; &lt;br /&gt; III. 유대교와 기독교의 사회적 현실&lt;br /&gt; &lt;br /&gt; 하나의 그룹과 그들의 사회적 현실에 대한 해석은 항상 서로 연관된다. 하나의 해석이 영향을 미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떤 “개연성의 기초”를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 번째 단락에서는 바울의 해석-유대교와 유사한, 유대교의 확장 그리고 유대교의 변형으로서의 기독교-을 유대교 공동체와 기독교 공동체라는 인식 가능한 사회적 현실로 규범화해보기로 하자. 종교적 신념을 사회적 여건으로 종속시키는 것은 “사회적인 것”으로의 제한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한다.&lt;br /&gt; &lt;br /&gt; 1. 유대교와 기독교의 유사성&lt;br /&gt; &lt;br /&gt; 사회사적 관점에서도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는 “형제”로서 나타난다. 그들의 상관관계는 계층복합적(diastratischem)이고 범지역적(diaspo- ralem) 결합력, 즉 사회계층과 종교를 통한 결합을 통해서 나타난다. 이 양자의 특징들은 종종 초기 기독교의 사회사적 특성으로 불리는데, 이것들은 사실상 유대교적 유산이다.&lt;br /&gt; &lt;br /&gt; 1) 다양한 계층적 결합&lt;br /&gt; &lt;br /&gt; 초기 기독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유대교를 제외한 그 밖의 사회에서 작용했던 통합력보다 더욱 강력하게 통합시켰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는 다양한 사회적 계층을 두루 포함하는 복합 계층적 단일체를 만들게 되었다. 그렇다고 무슨 전체 사회를 대변하는 계층의 다양성을 갖는다는 것은 아니다. 초기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상층부에까지 다다르지도 않았고, 도시와 시골에서 동등하게 분배된 것도 아니었다. 그 지역의 상층민들에게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주로 주변적인 것으로 보였고, 양적으로 어차피 이 공동체의 대부분은 하층민들에게서 유래하게 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고전 1:26ff)과 외부인들은 차별 없이 함께 언급되었다. “복합 계층적 구조의 문제”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분명한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물론 강조점들은 다양하다), 이 점은 여기서 더 이상 전개될 필요는 없겠다.&lt;br /&gt; &lt;br /&gt; 이방 사회에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이러한 계층적 통합은 어떤 새로운 형태였다. 아마 고대의 “협회들”과 신비제의들도 다양한 지위의 인간들을 통합하였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자유인과 종이 함께했던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서로 다른 법적인 지위에도 불구하고 빈번하게 사회적으로 동일한 계층으로 정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독교적 (그리고 유대교적) 공동체만이 그러한 규범과 신념을 일상 전체 속에서 실천하려 했다. 함께 모이는 자리가 일 년에 단지 몇 번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매주 공동식사가 있었다. 공동체는 죽음과 질병이 그 안에 발생한 경우 어린이와 노인들을 돌보고, 여행과 사업에 있어서도 서로 도움을 준 생활공동체였다. 그리하여 초기 기독교는 이방 사회에서 하나의 새로운 “사회적 서비스”인 계층적 연대를 형성시켰던 것이다.&lt;br /&gt; &lt;br /&gt; 그것은 유대교에 대한 발전이자, 유사성이었다. 유대교 공동체도 다양한 시민계층에 속한 사람들을 포괄했는데, 이들은 로마시민과 여러 도시의 시민들, 폴리스에 정착한 보호 대상의 이방인들과 외국인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동시에 개개의 유대 “자치권”(poli,teuma)하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제한적이지만 자치권이 부여되어 로마인들에 의해 인정되고 보호된 사회적 결사체였다. 이러한 법적인 신분 차이에 더하여 경제적 편차로 인한 신분 차이가 생겨난다. 그리하여 유대 공동체에서의 많은 갈등은 공동체 내부에서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들 사이의 대립에서 시작되었다. 요나단이나 키레네이카의 하층민 지지자들의 봉기가 그것인데, 유대 상층부는 그들을 제압하려 했었다(요세푸스,『유대전쟁사』7,43ff). 그러나 그러한 대부분의 대립은 유대 공동체가 그 내적인 갈등을 극복하고 놀라운 통합력을 발휘하는 데 성공했다. 이 통합은 내부로부터 토라를 중심으로 한 ‘결속의 에토스’를 통하여 일어났다. 타키투스도 “유대인들은 모든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적대적 증오심을 표출하는 반면, 자신들 가운데에서는 확고하고 신실한 통합과, 자발적으로 도움을 주고자 하는 자비가 지배하고 있었다”고 말한다(Hist V,5,1). 그러나 여기서도 이른바 유대교 스스로가 부과한 특별 역할(Sonderrolle)을 모든 이방인을 향한 적대적인 비난(adversus omnes alios hostile odium)으로 해석하는 것은 반유대적인 선입견이었다는 것－이것은 곧바로 그리스도인에게도 이전되었다(cf. 타키투스,『연대기』XV, 44,4)－은 그저 부수적으로만 언급되었다.&lt;br /&gt; &lt;br /&gt; 유대교나 기독교 공동체의 계층 통합적 구조는 신분 차이가 상대화되고 있다는 것으로 입증된다. 첫째가 꼴찌의 역할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은 초기 기독교의 기본적인 행동원칙에 속했다(막 10:42-44). 이와 비교될 수 있는 “지위 역전”(Positionswechsel)의 관념은 필로에게서도 표현된다. 그는 토라가 명하는 안식일 준수는 남종이나 여종에게 적용되어 주인과 종의 역할 전환이 일어나는 것으로 해석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그(모세)는 주인들이 스스로 손을 사용하고, 또 종들의 노동이나 도움을 기대하지 않는데 익숙하게 하려 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변화무쌍한 인간의 삶 속에서 불행한 상황에 빠져들었을 때, 자신들의 노동에 익숙하지 못해, 미리부터 지치게 하지 않기 위함이었다…그러나 종들은 선한 소망을 포기해서는 안 되며, 도리어 매 육일마다 돌아오는 안식의 때에 자유의 불꽃과 열망을 품을 수 있기에, 그들이 주인에게 언제나 용감하고 충성되어 보인다면, 온전한 자유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민들이 당분간이라도 종들의 노동을 떠맡고 종들이 안식에 참여하게 한다면 그들의 인간적인 삶은 온전한 덕이라는 의미에서 고귀하다 할 것이다. 이는 높거나 낮거나 그 삶의 지위에 처한 자들 모두가 동등하다는 것을 기억하여 당연히 서로가 그들의 과실을 덜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필로, SpecLeg II, 67f.). &lt;br /&gt; &lt;br /&gt; &lt;br /&gt; 필로도 바울과 같이 주 앞에서는 노예나 자유자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필로는 유대인의 삶에 대한 그의 이상을 엣세네파 가운데 특별한 집단이 구현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그들이 철저하게 모든 노예적인 것들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Prob 75-87). 그러므로 바울이 공동체 내에서 종과 자유자의 차이를 무시하려 했던 것을 아브라함의 언약의 성취로 본 것, 즉 그러한 전통을 유대적 전통으로 본 것(갈 3:28)은 옳았을까? 그러한 경향은 필로나 바울에게서 동일한데, 인간의 실제적 관계에 대한 그러한 유토피아적 주장을 하는 그러한 명백한 특징 또한 그들에게 공통적이다.&lt;br /&gt; &lt;br /&gt; 2) 범지역적 결합&lt;br /&gt; &lt;br /&gt; 이러한 사회적 계층의 통합은 지역적 경계를 넘어선 의사소통을 통하여 활성화되었다. 고대의 종교제의는 많은 곳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대교와 기독교와 같이 지역의 경계를 넘어 조직적 형태로 발전된 것은 아니다.&lt;br /&gt; &lt;br /&gt; 이미 40년대에 예루살렘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다양한 기독교 공동체를 대변하는 범지역적 협의체가 나타나난다. 이른바 사도공의회가 그것이다(갈 2:1ff). 거기에서는 새로운 운동의 통합을 위해 씨름하고 있는 모습이 발견된다. 헌금이 약정되었고, 선교의 장이 나뉘었다. 그 후에는 이방 공동체에 대한 간섭을 하게 되었는데, 안디옥에서는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자들이 나타난다(갈 2:11ff). 50년대의 바울공동체에서는 선교사들이 계속해서 경쟁관계에 있다. 이들로 인해 일어난 갈등은 그들이 자신들의 신념을 범지역적적으로 모든 측면에서 통일성을 확보하려 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와 동시에 그들은 적극적인 여행 활동에 대하여 말한다. 소아시아 감독 아베르키오스(Aberkios)는 2세기 말에 공동체의 이러한 범지역적 통합을 그의 묘비에 새기고 있다. “나는 믿음의 형제들을 도처에서 만났는데, 바울을 나의 마차에서 만났다.” 그는 아마도 바울을 신뢰할 만한 자로 믿게 했던 바울서신을 휴대하고 다녔을 것이다. 아무튼 바울은 피난처를 얻게 되었다. 이 “믿음”은 그를 장막 만드는 자로 일하게 했다. “도처에서 나는 믿음을 따라갔고, 어느 곳에서나 연못에서 얻은 생선을 음식으로 제공받았다. 게다가 이것은 풍부하고 깨끗하였으며, 감금된 자에게 순결한 소녀가…” 그러므로 복음서 이외에도 서신서가 초기 기독교에서 중요한 문헌적 양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서신은 흩어진 자들 간의 의사소통이었다.&lt;br /&gt; &lt;br /&gt; 믹스(W.A. Meeks)는 이 범지역적인 통합을 초기 기독교의 초석으로 여겼다. 그러나 나의 견해로 그것은 유대교적 유산이다. 모든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예루살렘에 있는 중심체와 연결되었다. 신약성서에서는 잘 발견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공동의 축제력이 정해져 있었다고 가정해야 한다. 매년 성전세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왔다. 많은 유대인들은 매년 거룩한 성전을 향해 순례했다. 역으로 예루살렘의 관청은 디아스포라에 있는 유대인을 위하여 개입했다. 성전이 파멸되었을 때 점차로 랍비 위원회(Patriarchat)는 유대교의 새로운 중심으로 발전되었다. 이것은 지역의 범위를 초월한 초기 기독교에서 몇몇의 주교들과 주교회의가 범지역적 기관으로 발전한 것과 유사성을 갖는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유대교와 기독교가 범지역적이었다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범세계적(kumenische) 확산을 “분산”과 “다름”으로 해석하였다는 의미도 있다. 유대교는 로마제국의 여러 도시와 마을에서 놀라울 정도로 내부인에 의한 자치력을 가졌던 하나의 특별집단을 이루었다. 그들은 자체적으로 법과 재판관을 가졌고 세금을 징수했다. 그리고 자치도시에서 자유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게 하여 조상의 율법을 위해 죽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유대교의 순교자 사상은 정치적으로 종속된 상황에서도 그러한 요구를 지켜나갔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상을 유대교인들로부터 전수받았다. 그래서 그들도 지상의 국가에서 다른 도시의 의무를 의식했다.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었다(빌 3:20). 그들도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살았고, 지상과 천국의 도성의 요구 사이에서 갈등해야 할 때를 알았고(Germ sim I), 구성원들에게 자발적 순교를 기대했다.&lt;br /&gt; &lt;br /&gt;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은 고대세계 내에서 분명히 “유사한 현상”으로 이해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일반적인 동양적 신념세계의 한 부분을 대변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양자는 유일신에 대항한 이단에 대하여는 같은 태도를 취했다는 것도 그 한 측면이다. 그러나 그 밖에도 유대교와 기독교 공동체는 사회적 구조에서도 유사한데, 양자는 계층적이고 지역적 연대의 새로운 ‘사회적 서비스’(Angebot)를 구현했다.&lt;br /&gt; &lt;br /&gt; 이러한 인간 사이의 연대에 대한 새로운 범례는 볼케슈타인(H. Bol- kestein)이 말하는 “고대사회의 동양화”에 대한 표현으로 볼 수 있을까? ‘평등한 시민’이라는 이상적 모습이 그 사회적 개연성의 기초를 잃어감으로 비대칭적 사회적 의무가 강조되었을까?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달리 볼 수도 있다. 즉 이상적인 평등한 시민상이 자유민이라는 그 원래적 삶의 자리에서 생겼다면, 그것은 이제 소수의 특권적 계층에서 상실되어 이방인, 노예, 여자들과 같은, 이제까지 그것에서 배제되었던 그룹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이 세 범주를 언급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들은 시민적 삶의 특권을 박탈당하였으나, 공동체에서는 동등한 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유대인과 그리스인, 평등한 이방인들, 노예와 자유자들 그리고 여자와 남자를 언급했던 것이다(갈 3:28). 정치적 공동체인 “에클레시아”에서 그들이 어떤 자리도 없었던 반면, 주님의 “에클레시아”에서 자리를 찾았을 것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천상 예루살렘의 시민으로서의 자유를 갖는다(갈 4:1ff). 여기서 “상층가치의 하향전이”가 일어난다. 즉 이제까지는 단지 특권층에게만 해당되었던 평등과 자유의 이념은 이제 비특권층에게도 해당되고 전이된다. 단지 내향화된 영성으로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사회적 현실로서 말이다. 이것에 대한 모델은 유대교 공동체였다. 자치적으로 뽑힌 역할과 외부에서 부여된 역할이 그들을 그 공동체 안에서 자신들의 신분의 한계를 넘어서 연결시켰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이러한 “상층가치의 하향전이”는 오래된 특권가치의 해소를 통하여 더욱 시너지 효과를 내었는데, 자유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상층계층에 로마제국의 엘리트들이 위치한다면 그 지역의 상층은 이들의 가치로 하층부와 더 밀접히 연결된다. 그렇지만 볼케슈타인에 의해 구상된, 이른바 권위구조 변화에 상응하는 가치 변화의 모델은 계층적 연대와 범지역적 결합을 연결하는 것과는 도무지 맞지 않는다. 이 범지역적 결합 또한 “상층가치의 하향전이”로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의미 이외에도 그것은 제국의 상층부 사람들이 전세계적으로 확장된 접촉망을 가졌다는 표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소수의 원로원과 기사의 가족들을 모집하여 형성된 권력 엘리트들은 도처에서 (역자 주－권력 접수에 대한) 결정적인 전갈을 받아들였고, 그런 의미에서 지인들과 친구들 그리고 가족의 네크워크를 구축했다. 하층민들 사이에서는 아마도 그러한 범지역적인 교류가 농민조합이나 직업적 교역관계에서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는 어디에서도 유대인의 것만큼 분명하지는 않았다. 또 그러한 결합성은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인들과 같은 “작은 자들”에게서와 같이 그렇게 당연시된 곳은 없었다. 이들 말고도 코스모폴리탄적 엘리트들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이러한 행동 유형이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에게서는 하층계층까지 파고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행동 유형은 분명 지역적으로 한정된 전통적 행동보다는 로마제국의 범지역적 구조에 더 잘 부합된다.&lt;br /&gt; &lt;br /&gt; 유대교와 기독교는 이렇게 사회적 변화에 상응하는 연대의 형태를 제공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연대의 동기를 직접 자신들의 믿음의 중심으로부터 도출해냈다. 부활하신 주는 하나님과 같은 자의 위치에서 종으로 강등된 급진적인 신분 포기의 원형이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서 세상의 통치자가 된 모델이 되었다. 세상의 통치자로서 그는 모든 권세와 개개의 “혀”를 가진 인간의 주였다. 즉, 그는 로마제국에서 통일된 모든 나라들과 모든 문화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지배자요 주님이었다. &lt;br /&gt; &lt;br /&gt; 2. 유대교의 확장으로서의 초기 기독교&lt;br /&gt; &lt;br /&gt; 그러나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이 모든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유대인은 하나의 “민족”이었다. 그들의 삶의 형태는 태고적 전통에 서 있었지만, 그리스도인은 “간민족적”(inter-ethnisch)이었다. 이들의 삶의 형태는 기독교적 믿음에 대한 결단, 다시 말해서 다른 전통에 대항해야 하는 결단이었다. 문제는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이러한 차이가 어떻게 사회사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우선 이러한 관점에서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의 역사에 편입될 수 있다. 그것은 유대교의 헬레니즘 및 로마시대로 특징지어지는 이방 세계로부터 문화적 수용(Akkulturation)의 과정에 속한다. 이것은 문화적 동화(Assimilation)는 아니다. 기원전 175년 예루살렘에서의 헬레니즘적 개혁은 문화적 동화를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적대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유대교의 이방세계에 대한 독특성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개혁도 개혁하는 자의 이해에 따르면 차라리 “문화적 수용”일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기서 그냥 그렇게 두자. 중요한 것은 “문화적 수용”은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가 없이 주변세계에로 동화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 기독교가 문화적으로 헬레니즘을 수용하려고 하는 시도가 갖는 독특성은 어디에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필로와 바울을 비교해보면 많은 시사점을 준다.&lt;br /&gt; &lt;br /&gt; 필로는 이방 세계로부터 바울보다 더 많은 것을 전수한다. 우리는 그에게서 스토아주의, 플라톤주의 그리고 피타고라스주의적 사상을 발견한다. 그는 많은 고대 문필가들을 알고 인용한다. 그는 신비종교의 언어에 익숙하다. 바울도 주변세계로부터 분명히 많은 사상을 수용하지만, 그의 결정적인 주장은 유대교의 전통에서 나온다. 그럼에도 필로의 기본 사상은 이방인 선교사 바울보다도 훨씬 더 유대교의 틀에 머문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lt;br /&gt; &lt;br /&gt; 중요한 것은 그가 수용한 전통의 양이 아니라, “문화적 수용 과정”의 구조이다. 필로는 자신의 유대교적 신앙의 틀에서 새로이 해석한 이방적 내용을 주변 세계로부터 선별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방법론은 알레고리적 성서해석이었다. 그는 분명－바울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인간의 변화와 영화(Vergottung)의 신비스런 과정을 묘사한다. 그러나 신적인 본질로 변화된 인간은 이스라엘이다. 필로에게 “신비”는 유대교적인 하나님 경외이다. 이 신비적 언어는 그로 하여금 유대교적 신앙의 요구를 유일하신 한 하나님에 대한 배타적이고 보편타당한 통로로 규정하도록 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바울에게 이 문화적 수용 과정은 또 다른 구조를 갖는다. 바울은 이방적 전통을 상대적으로 덜 수용한다. 아마도 그에게 전해진 이방적 전통은 유대교적－헬레니즘적 전통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익숙한 유대교적 전통 가운데서 선별한다. 이 전통에서 그는 보편화할 수 있는 요소들을 가져오고, 보편화에 대립되는 요소들, 특히 이방인들이 참된 하나님에게로 돌이키는 데 요구되었던 할례와 음식규례는 포기한다. 유대 전통에 대한 이러한 그의 ‘선별’과 ‘새로운 창조’는 유대교 전통을 넘어가는 하나의 관점에서 생긴 것이다. 그것은 다음이 아니라, 예수가 오심으로 새로운 구속사적 상황으로 들어갔다는 믿음이었다. 성서적 언약은 이제 모든 민족을 위해 성취되어간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우리는 필로나 바울의 유대교가 그 주변 세계에 대하여 “선별적 문화수용”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필로는 외적인 내용을, 그리고 바울은 내적인 전승을 선별한다. 필로는 유대교적 관점에서 이방적 전통을 선별하고, 바울은 유대교적 전통을 선별하되, 이것을 넘어서는 하나의 관점(이에 대해서는 우리가 좀 더 자세히 살펴야 한다)으로 선별한다. 이렇게 바울에게서는 신학의 모든 개별적인 요소를 유대교적 전통으로부터 “유출할 수” 있지만, 이방인을 향한 개방성은 필로보다는 훨씬 더 강력한 요소로 작용한다. 비록 필로가 이방적 교육의 내용에 더 깊이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lt;br /&gt; &lt;br /&gt; 이러한 비유대인을 향한 유대교의 사회적 개방은 사회 전체의 관계와 쉽게 연관되었다. 로마제국은 새로이 형성되고 있는 로마사회로 많은 민족들을 통합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로마제국은 물론 우선 다양한 개개의 사회를 넘어서는 범지역적인 “상위구조”(Superstruktur)로서 존재하였다. 그러므로 민족과 문화의 경계를 허무는 데 적합한 종교운동들은 사회의 이러한 객관적 요구에 상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종교적 운동들이, 제국의 통치영역 안에 있는 여러 민족들의 통합에 우선적 관심이 있었다면, 국가를 지탱해주는 상층부와 그 운동들이 더욱 먼 거리에 서 있었다는 것은 납득할 만하게 된다. 그리하여 양자 모두에게 존재했던 범지역성의 요구－이것은 국가에서는 시이저요, 종교에서는 주님과 연관되었는데－가 왜 이 새로운 운동과 제국의 지배층간 갈등을 초래하게 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lt;br /&gt; &lt;br /&gt; 3. 유대교의 변형으로서의 초기 기독교&lt;br /&gt; &lt;br /&gt; 우리는 유대교적 전통 하에서 바울에 의해 선별되었던 관점이, 결국 그 전통을 넘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관점”을 정의해야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교의 확장”이라는 핵심 개념 하에서는 상당히 어렵게 평가될 수밖에 없는 초기 기독교의 관점을 만난다. 이것에 대해 우리는 바울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여 말할 수 있다.&lt;br /&gt; &lt;br /&gt; 바울은 물론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pi,stij(믿음)과 no,moj(율법)의 안티테제를 통해서 하나의 개념으로 확립하려 하였다. 그는 이 안티테제를 이중적으로 상대화하고 있는데, 율법은 문자나 계명과 같아서, 문자로서의 계명뿐만 아니라 믿음을 향하고 있는 언약을 포함한다. 문자로서 율법은 믿음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문자를 증거한다. 다른 한편으로 계명으로서의 율법은 믿음에 대립되지만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율법은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되기 때문이다.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믿음’은 이런 의미에서 율법의 완성이다. 믿음과 율법의 안티테제가 가지고 있는 이 이중적 상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울에게서 믿음과 율법, 혹은 “믿음”과 “공로”의 대립을 항상 발견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우리가 오늘날까지 이 대립의 본질이 무엇인가라고 의아해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율법의 종 됨”－이로부터 예수에 대한 믿음이 자유롭게 되는－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율법의 부정적인 측면은 무엇인가? 그것이 실제로 성취되지 못해서인가? 아니면 원칙적으로 성취되지 못해서인가? 다른 것을 무가치하게 하는 교만함에서인가? 바울은 인간이 범하게 되는 율법이 갖는 살인과 폭력적인 성격에 저항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율법과 연관된 잘못된 태도를 비판하는 것인가? 그러면 여기서 이러한 질문이 생긴다. 이 잘못된 태도는 이미 율법과 함께 주어졌는가? 아니면 그것은 예수의 오심에 대한 응답인가? 아니면 바울은 근본적으로 율법에 대항하여, 율법을 연결시키는 것이 새로운 계시의 인정을 방해하였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인가?&lt;br /&gt; &lt;br /&gt; 나는 이 모든 대답이 어떤 하나의 진리를 내포한다고 생각한다. 어찌하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율법”이 이스라엘에게서 가졌던 역할, 즉 하나님의 선택의 기초 위에 그 신실함을 증거하고, 인간의 신실함을 요구하는 율법의 역할을 이방인에게서는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방인에게 모든 인간의 행위에 앞서 존재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이라는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이방인이 율법을 전수하였다면, 구원의 상태가 율법의 성취를 통하여 확고히 된다는 의미에서 율법은 “구원의 길”로 되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들에게 율법은 유대교에서처럼 구원의 선물, 즉 인간적 행위 앞서 주어진 구원의 표징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의 율법 비판은 그가 이방인을 율법으로부터 지켜내려고 할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강렬하게 나타난다. 율법의 전수를 통해 비록 이방인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정초하지 못하고, 도리어 “완성”한다 할지라도 말이다.&lt;br /&gt; &lt;br /&gt; 그럼 이제 모든 인간적인 행동에 앞서 있는 ‘선민에 속함’의 자리에는 무엇이 오는가? 이 자리에 인간의 믿음과, 성례전에서 명백하게 되는 믿음을 통한 변화의 힘이 온다. 달리 표현하여, 출생을 통하여 선민에 속하게 된다는 유대인의 선언(Indikativs)의 자리에, 이방인에 대하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한 인간 변화의 선언이 대신한다. 그리하여 “믿음”과 “율법”은 안티테제로 정형화된다.&lt;br /&gt; &lt;br /&gt; 이 반명제는 종교사회학적인 고찰의 도움으로 설명될 수 있다. 바울이 여기에서 상호 대립시키는 것들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종교적 정당성이다. 우리는 이것을 막스 베버가 순수이상형으로 분류한, 다음과 같은 권위와 지배의 세 가지의 정당성 형태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lt;br /&gt; &lt;br /&gt; 1. 전통적 정당성: 권위는 출신을 통하여, 즉 태생, 승계된 지위(Sukzession), 전통이나 관습을 통하여 정당화된다.&lt;br /&gt; &lt;br /&gt; 2. 반면 카리스마적 권위는 어떤 한 인물(Person)에게 존재하는 일상화되지 않은 힘(Macht)이 타인에게 유출되지 않는 채로 그에게 현존한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물론 그는 자발적 인정을 얻을 능력을 지닌 자이어야 한다.&lt;br /&gt; &lt;br /&gt; 3. 합법적 권위는 비자발적인 규칙을 근거로 한다. 이 규칙은 인물과는 독립된 유효성을 가지며, 또한 명백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유대교와 기독교는 양자 모두 공통의 전통적 권위, 즉 성서에 기초하고 있다. 이 성서의 해석을 중심으로 유대인과 기독교인들 간에 하나의 “정당성 논쟁”이 야기된다. 양자 모두는 유일하고도 참된 해석을 점유하려 한다. 바울은 유대인의 마음에 있는 성서와 율법의 참다운 이해를 가로막는 “수건”을 본다(고후 3:14). 유대인은 기독교인의 성서 해석을 자의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양자 모두에게 율법은 “성서”(grafh,)로서 논쟁할 수 없는 명백한 권위가 된다.&lt;br /&gt; &lt;br /&gt; 이 공통이 되는 전통적 정당성의 토대위에 로마와 헬레니즘 시대를 통하여 시대에서 두 가지 형태의 종교적 정당성의 구조가 발전한다. 한 측면에서는 랍비적－바리새적 운동(그리스도인 이전의 바울도 여기에 속했다)이 유대교를 관통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서의 토대위에 적법한 권위구조를 유대교에게 부여한다. 이 권위구조는 제의와는 독립된 지식과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가능하게 하며, 성전이 멸망한 후에 제의를 대치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우리는 적절한 해석학적 과정의 도움으로 하나님 앞의 삶에 대한 유대인들의 비자발적인 규정을 탐구해야 한다. 제사장적 성결을 세계의 일상 속에서도 실현할 수 있게 하는 규정 말이다. 우리는 실천적인 규정을 실용적으로 적용할 뿐만 아니라, 그 밖에도 제의를 통해 이룩되는 성결에 참여하는 것 모두를 탐구해야 할 것이다.&lt;br /&gt; &lt;br /&gt; 그러므로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의 분열은 참으로 깊다. 왜냐하면 초기 기독교에서는 성서라는 공동의 토대위에서 다른 ‘정당성의 구조’(Legitimationsstruktur)를 만들어 이와 함께 하나의 종교를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성서 안에서 적법한 해석의 과정을 통하여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인물 카리스마적’(personal- charismatische) 연결과 이 연결을 통하여 경험할 수 있는 성령을 통하여 발견되는 것이다.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기독교적 신념을 기초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과의 연관에 호소해야 한다. 이 인물 카리스마적 연관을 바울은 “믿음”이라고 부른다. 이 믿음은 신비적 연결을 향해 나아가는 예수와의 강력한 내적 결합이다. 바울은 이 연관에서 성서를 읽고, 유대교적이고 구약성서적인 전통에서 보편화될 수 있는 것을 선택한다. 이 인물 카리스마적 연관은 그가 유대교가 “선별적 문화수용”을 추진했던 바로 그 관점이다.&lt;br /&gt; &lt;br /&gt; 이 새로운 종교의 세 가지 특성은 나의 견해로는 이 인물 카리스마적 토대로부터 설명될 수 있다고 본다. 이 토대는 보편종교로서, 회심의 종교로서 그리고 해방의 종교(Universal-, Konversions- und Erloesungs- religion)로서의 성격이다.&lt;br /&gt; &lt;br /&gt; 1. 인간은 어떤 전제조건이나, 전력(Vorleistung) 없이 이 인물 카리스마적 관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한 인물에 대한 “비일상적인” 힘의 인정은 매우 단순한 어떤 것이다. 인간은 이를 위해 어떤 특정한 민족적인 문화에 뿌리를 박아야 할 필요는 없다. 또 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령은 민족과 사회적인 범주와 무관하게 누구나 사로잡을 수 있다. 예수에 대한 이 단순한 인물 카리스마적 관계로 인하여 비유대인도 유대인의 역할에 가담할 수 있다. “믿음”을 통하여 이방인을 하나님의 역사에 그의 백성과 함께 참여한다. 이 인물 카리스마적으로 연관된 믿음은 유대교에 존재하는 보편적 경향의 가장 끝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lt;br /&gt; &lt;br /&gt; 2. 인간은 인물 카리스마적 연관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이 연관은 “회심”, 즉 계시의 매개자를 향한 의지적인 전환을 요구한다. 이것은 물론 이 전환으로 완전히 새로운 믿음의 내용이 받아들여진다는 의미 속에서는－다시 말해서, 만일 이방인이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기로 회심한다면－참으로 단호한 것이다. 이미 유대교에는 회심의 종교의 명제가 존재하는 것이다. 유대교는 그 주변 세계에서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했다. 많은 사람들이 유대교에 연결됐다. 그러나 그럼에도 회심은 단지 유대인으로 태어난다는 일반적 경우에 보완되는 수용규칙일 뿐이었다. 초기 기독교에서 이 보완적 수용규칙은 초기에는 본질적인 것이었다. 바로 이것에서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 안에 있는 보편적 경향성을 발전시킨 것이다.&lt;br /&gt; &lt;br /&gt; 3. 만일 인물 카리스마적 연결이 구원을 가져온다 해도, 인간이 이 연결에서 항상 사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새로운 카리스마적 연결의 수용에 앞서 심판에서 살아가야 한다. “믿음”은 “해방”을 일으킨다. 초기 기독교와 같은 하나의 인물 카리스마적 연관이 중심에 서는 종교는 해방의 종교가 된다. 이 새롭고도 구원하는 관계는 인간의 행동만이 아니라, 그의 전 존재를 변화시킨다. 그(특별히 이방 기독교인들)는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여기에서 또한 강조되어야 할 것은 해방사상이 유대교에서 이미 준비되어 있었던 하나의 경향이 발전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유대교에서는 묵시적 공동체에서 (인간과 함께) 전 세계의 변화를 생생하게 고대하였다. 바울은 이 기대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요약해 보자. 바울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갔던 갈림길에서 결정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기독교는 인물 카리스마적으로 변형된 유대교였다. 반면 랍비유대교는 율법해석에 있어서 더욱 발전된 유대교였다. 이 두 종교는 동일한 전승의 기초에서 다른 권위구조로 믿음의 형태를 발전시켰다. 바울은 그가 “율법”과 “믿음”의 안티테제를 두 종교의 차이로 설정할 때 그 형태를 인식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서 어떤 절대적인 대립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물론 그는 이 대입을 상대화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아마 두 종교의 형태는 다른 것이었지만, 직접적으로 대립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여기서 제안된 바, 기원후 1/2세기의 기독교와 유대교의 차이의 상대성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것은 유대교가 율법 해석적인 종교, 그리고 기독교가 인물 카리스마적 권위구조를 가졌다면 이것으로 독립된 길을 가고 있는 양 종교의 압도적인 “조직원리”가 파악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유대교에 카리스마적 인물이, 혹은 기독교에 율법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대교의 카리스마적 인물은 분명히 토라와 그 해석에 종속된다. 랍비 엘리에젤 벤 히르카노스(R. Eliezer ben Hyrkanos)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이것을 보여준다. 그는 할라카적 결정을 지지하기 위하여 세 가지 기적과 이른바 바쓰－콜(Bath-Qol)이라는 하늘의 음성조차 열거할 수 있었음에도 자신의 서기관 동료들 다수에게 굴복했다. 그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웃었고,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자녀들은 나를 이겼다. 나의 자녀들이 나를 이겼다”(bBM 59b). 여기서는 기적의 카리스마가 아니라 비자발적인 율법해석이 가장 높은 권위로 보였다. 반대로 초기 기독교에서 그 카리스마는 곧바로 공동체의 법적인 체제를 배태시켰다. 클레멘스1서와 고대교회의 공동체 규율이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단순한 믿음의 관계에 있었다. &lt;br /&gt; &lt;br /&gt; 끝으로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유대교가 초기 기독교에서 인물카리스마적으로 변형된 것은 로마 초기인 제정시대(Prinzipats- zeit) 사회 전체의 구조 변화에 속할 수 있는 것일까? 로마제국은 많은 민족문화에 대하여 하향평가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사회에서는 로마문화에 대한 기존의 소속성이 아니라, 아직도 획득하여야 할 헬레니즘－로마 문화에 대한 소속성이 더 긍정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제국 내에서의 상향 이동성(Aufwrtsmobilitt)이란 다수의 민족문화에 소속된 구성원에게는 그들의 민속적이고 문화적인 유산과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것은 인간의 출발 상태는 부정적이었고, 이 상태로부터 해방되는 것에서의 구원을 추구하여야 한다는 종교적 사상에 개연성을 부여하였다. 상향 이동성은 종종 상층엘리트들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에 근거하여 일어난다. 주님에 대한 “인물 카리스마적 결합”이 어떤 긍정적인 작용을 가질 수 있고, 게다가 “구원”까지 일으킨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현실에서 경험될 토대를 갖게 된다. 초기 기독교가 인물 카리스마적으로 변형된 유대교로 이해될 수 있다면, 이 변형으로 초기 기독교는 당시 사회 전체 현실의 몇 가지 측면에 부합하고 있는 것이다.&lt;br /&gt; &lt;br /&gt; 이 변형으로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었다. 유대인들이 당시의 “새로운 사회”(moderne Gesellschaft)에 적응하는 것보다 그들의 전통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는 것은 아마도 기독교인들에게는 오늘에야 비로소 적극적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현대 세계”에 대해 적응하려는 유혹에 대하여 그들의 전통을 더욱 더 지켜나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수백 년 동안 그들이 “극복한” 유대교에 대한 자부심으로 그것을 명백한 “옛 언약”으로 평가 절하하려 했었다면, 그들도 오늘날 자신들의 신념이 “오래되어” “추월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1세기에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걸어온 갈림길을 사회사적이고 종교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본다면 아마도 이 “새로운 종교” (그리고 물론 “더 나은” 종교)를 대변하려는 그리스도인의 자기이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자기이해와 상관없이 역사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이를테면 성서의 종교는 당시에 변화되었고, 그것은 성서적 신앙에 기초한 두 가지의 병존적이고도 동등한 형식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유대교와 기독교이다. 이 역사적 해석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앙 이해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신학적 평가로 기여할 수 있다는 희망도 현재로서는 아마도 약간 유토피아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길을 곧 다시 통합하시리라는 바울의 희망보다는 유토피아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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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0 Dec 2009 23:38:2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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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유대교와 기독교 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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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p class=&quot;&amp;#x00b17c;&amp;#x00bb38;&amp;#x00c81c;&amp;#x00baa9;&quot;&gt;유대교와 기독교 &lt;/p&gt;&lt;p class=&quot;&amp;#x00b17c;&amp;#x00bb38;&amp;#x00c758;&amp;#x00bd80;&amp;#x00c81c;&quot;&gt;-바울에게서 시작된 두 종교의 분열에 대한 사회사적 고찰&lt;br&gt;&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 style=&quot;MARGIN-LEFT:14pt;MARGIN-RIGHT:14pt;TEXT-ALIGN: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2pt;FONT-FAMILY:L;&quot;&gt;게르트 타이센(Gerd Theissen)&lt;/span&gt;&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 style=&quot;TEXT-ALIGN:center;&quot;&gt;박정수(성결대학교 교수) 역&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 style=&quot;TEXT-ALIGN:center;&quot;&gt;&amp;nbsp;&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 style=&quot;TEXT-ALIGN:center;&quot;&gt;&amp;nbsp;&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유대인과 기독교인의 최초의 갈림길은 바울에게서 나타난다. 그가 선교사로서 공동체를 개척했을 때, 그는 거기에 들어오는 조건으로 유대교로의 개종(할례를 통한)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신학자로서 “믿음과 율법” 혹은 “믿음과 행함”과 같은 상반되는 명제를 통해 모(母)종교로부터 하나의 새로운 종교의 경계를 세웠다. 그러나 그는 또한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통합을 시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바울은 하나님이 그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통합시킬 것이라는 희망(롬 9-11장)으로 두 종교의 공존적 의미를 부여했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이와 같이 간명한 신학사적 의의를 갖는 이 주제는 그의 평생 사역에 대한 사회사적 고찰을 가능하게 한다. 그의 삶과 사역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분열의 도화선이었기 때문이다. 이 분열을 사회사적으로 해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고대의 기독교와 유대교 공동체 연구에 대한 더 많은 토대가 필요하다. 따라서 이 논의는 단지 하나의 시험적인 시도가 될 뿐이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이 글의 첫째 단락에서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규정하기 위한 세 가지 모델이 제시될 것이다. 즉 초기 기독교(Urchristentum)는 유대교와 유사(Parallele), 유대교의 확장(Entschrnkung) 그리고 유대교의 변형(Transformation)으로 각각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단락에서 우리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관계에 대한 바울의 신학적 해석을 다룰 것이다. 이 세 가지 모델 모두는 (신학적 표현 양식으로) 바울에게서 나타난다. 세 번째 단락에서 우리는 각각의 모델에 대한 사회사적 가설을 세우게 될 것이다. 요컨대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관계에 대한 바울의 신학적 해석은 그가 처했던 사회적 현실에서 ‘개연성의 근거’(Plausibilitaetsbasis)를 가진다는 것이다.&lt;/p&gt;&lt;p class=&quot;&amp;#x002160;. &amp;#x00c81c;&amp;#x00baa9;&quot;&gt;I.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설정에 대한 세 가지 모델&lt;/p&gt;&lt;p class=&quot;1. &amp;#x00c81c;&amp;#x00baa9;&quot;&gt;1. 첫째 모델: 유대교와 유사한 기독교&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이 모델과 상당히 동떨어진 관점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로마제국에로의 유입은 전적으로 동양제의의 확장의 한 부분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원후 역사에서 사회와 문화의 ‘동양화’(東洋化)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볼케슈타인(H. Wolkestein)은『기독교 이전 고대시대의 자선과 가난한 자 구제』(1939)라는 그의 저서에서 동양의 자비의 에토스를 예로 들어 그러한 동양화의 과정을 사회사적으로 밝혀냈다. 그의 주장은 서양이 동등한 자들 사이의 사회적 상호성에 강조를 두었다면, 동양은 약한 자들에 대한 강한 자들의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즉, 서양의 평등의 에토스는 동등한 권리를 가진 시민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공화정 도시국가 구조와 연관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동양의 자비의 에토스는 사회적 약자가 강자에게 의존하는 동양의 전제적 사회구조로 규정된다. 유대교와 기독교를 통해서 이 동양의 자비의 에토스가 서양에서 확산되었다면, 이것은 그리스와 로마의 사회구조가 동양화된 것과 연관된다. 그리스의 폴리스 제도는 그 중요성을 잃고 로마의 군사적 전제왕정의 강력한 위계구조에 의해서 점점 그 가치가 하락된다. 기원 후 3세기까지 오랫동안 정체된 로마사회의 위기 가운데 사회변화를 불러왔던 일련의 과정이 진행되는데, 이 결말은 기독교화로 맺어진다. 달리 말하면 역사적 전환기를 중심으로 시작된 위계적 사회로의 전환은 ‘인간의 연대’라는 새로운 모델을 요구하게 되었고, 유대교와 기독교는 그것을 제시하였다는 것이다. &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바울은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었을 것이다. 그의 은총론은 신학적으로 표현된 새로운 가치를 제공한다. 강한 자에게 요구된 약한 자를 향한 자비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에서 더욱 급진적으로 표현되고, 그 은총에 상응하는 인간의 행동이 요청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유대교와 기독교는 고대 동양의 신념 세계와 유사한 변수를 갖는 개념으로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과 주변 종교 간의 차이가 상쇄되는 것같이 두 종교 간의 차이도 소멸된다. 물론 비록 유대교와 기독교가 그 주변세계의 종교와 분명히 구별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말이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다신론적 세계에서 유일신론적 교의에 서 있다. 그들은 구성원들에게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주변 세계와 구별된 삶을 요구했다. 또한 이 두 종교는 당시 로마제국으로 유입된 동양적 문화 중에서도 양자 모두가 특별한 위치를 점하였다. 바로 그러하기에 그들은 ‘유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lt;/p&gt;&lt;p class=&quot;1. &amp;#x00c81c;&amp;#x00baa9;&quot;&gt;2. 둘째 모델: 기독교는 유대교의 확장&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그러면 두 그룹을 구분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기독교만이 그 사회를 정복했고 유대교는 할 수 없었는가? 유대교는 사회의 주변에 위치했기 때문인가? 슐리히터(W. Schlichter)는 고대 유대교에 대한 관점과 아울러, 고대사회에서 유대인의 “주변적 위치”로 이것을 설명하려 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다양한 역사적 전환기에서나 여러 다른 나라가 유대민족의 내부적 성향을 비난하는 것과 같이, 외부적 환경에서 볼 때 유대인들은 넓은 의미로 귀속적(askriptiv)으로, 다시 말해 출생을 통하여 소집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제의적 틀을 통하여 외부와 폐쇄된’ 이 특수한 공동체는－정치적인 자치기구가 없었다 해도－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아니지만 집단적인 차원에서는 외부에 대하여 낯설게 되었고, 또 스스로에 의해 부과된 주변적 위치에 머물렀다.” 그는 유대인들을 주변적 위치에 있게 한 것은 “디아스포라 유대교의 수준 높은 혁신능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그들의 융합능력과 연결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사실 기독교만이 전 사회를 관통할 만큼 이 ‘융화력’을 충분히 발전시켰다. 그들은 유대교와는 달리 할례나 음식규율 같은 분리주의적인 규범을 포기했다. 이것은 인간의 수평적 연대를 파괴할 수 있는 (혼인관계나 식탁공동체의) 규범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기독교가 유대교와 같이 주변세계의 위치에 남아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고대세계에서 기독교는 ‘비유대인들도 들어갈 수 있는 유대교’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양자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분리적인 사회 규범의 철폐를 통한 사회 개방의 여부였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바울의 역사적 의미를 이러한 관련에서 규정할 수 있다면, 그는 비유대인을 위한 또 하나의 유대교를 구상하였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는 분리주의적 규범 포기를 신학적으로 기초하고, 교회적 지도력으로 그것을 관철시켰다. 유대교의 이러한 사회적 개방은 좀더 깊은 유대교의 내적인 변화를 설명하고 있지 않았을까? 또 바로 바울이 유대교의 이 변화를 기독교로 추진하지 않았을까?&lt;/p&gt;&lt;p class=&quot;1. &amp;#x00c81c;&amp;#x00baa9;&quot;&gt;3. 셋째 모델: 기독교는 유대교의 변형&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이제 우리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한 셋째 모델을 규정하려 한다. 이것은 기독교는 ‘비유대인을 위한 개방’을 통해서 그 내적인 구조가 변화된 유대교라는 것이다. 맨슁(G. Mensching)은 그의 종교사회학적 연구를 통해서 이 변형을 ‘민족종교에서 보편종교로의 길’이라고 묘사했다. 이 과정에서 단지 종교의 사회적 작용범위만이 아니라, 구원의 개념도 변화되었다. 즉, 민족종교에서 구원은 태어나면서 획득된 공동체성에 소속됨으로 주어진다. 문제는 그 구원을 어떻게 보존하고 정당화하는가이다. 반면 보편종교는 개인이 공동체와 자연에 대해 민족종교보다 더 크게 독립되어 있음을 전제한다. 구원은 미리 주어진 사회적 소속으로 획득되지 않는다. 도리어 인간에게는 구원받지 못한 상태가 주어진다. 인간은 이 상태에서 기본적인 변화와 갱신을 통해서만 구원의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므로 보편종교의 특성은 구원사상에 있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바울의 신학에서 바로 이 민족종교에서 보편종교로 넘어가는 길목이 발견된다. 그가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에 대한 유대교적 신앙을 이방인에게 표현하려 하였을 때, 그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어떤 긍정적인 관계에 서 있다는 것을 전제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여러 신들로부터 떠나 유일한 한 하나님에게로 돌아와야 했다. 그들은 구원을 필요로 하고, 그 구원을 얻기 위해 믿음과 성례전으로 말미암은 변화를 통해서 깊은 변화를 체험해야 했다. 성례전을 통해 일어난 인간의 변화에 대한 사상은 동시에 전 우주의 변화를 예시하는데, 그것이 바울의 기독교를 유대교와 구별해준다. 그 사상은 맨슁이 말하는 보편종교에 필수적인 바, 그 구원사상에 연관된 하나의 형태가 된다.&lt;/p&gt;&lt;p class=&quot;&amp;#x002160;. &amp;#x00c81c;&amp;#x00baa9;&quot;&gt;II.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관계에 대한 바울의 신학적 해석&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우리는 이제 이 두 번째 단락에서 바울이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의 관계를 도대체 어떻게 보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앞에서 묘사했던 세 가지 모델에 기초해야 한다. 우리는 바울에게서도 그것이 변형된 관계형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이 바울에게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해석하려 했다 하더라도 말이다.&lt;/p&gt;&lt;p class=&quot;1. &amp;#x00c81c;&amp;#x00baa9;&quot;&gt;1. 유대교와 기독교의 유사성: 동일한 역할&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바울에게서 자주 발견될 수 있는 유대교적 믿음과 기독교적 믿음의 대립적 성격은, 이미 그러한 반대명제가 양자의 어떤 관계를 전제할 때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갈라디아서에서조차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적대적인 ‘형제들’로 해석된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하갈의 자녀들은 두 종교의 모형이다. 여기서 하갈은 알레고리적 위력을 통해서만 유대교로 이해될 수 있다. &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이러한 유사성은 로마서 9-11장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서 바울은 유대 기독교인과 이방 기독교인을 경쟁관계로 보고 있다. 이방기독교인들은 이방인으로서 그들이 추구하지 않았던 의에 도달해 있는 반면, 유대인은 의식적으로 이것을 추구하였으나 그 의에 도달하지 못했다(롬 9:30f). 게다가 “그들은 부딪힐 돌에 부딪혔다”(롬 9:32f). 여기서 암시하고 있는 “경주”라는 상징어는 바울이 이미 9: 16f에서 사용하였던 것인데, 그는 11:11에서 이 긍정적인 언급을 위해 다시 한 번 이것을 거론한다. 유대인들은 경주를 하다가 부딪쳤을 수는 있지만 결코 실족해버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유대인과 이방기독교인의 긍정적인 경쟁관계를 묘사하는데 더 일반적인(혹은 경제적인?) 표상인 “부족”과 “부요”를 사용함으로써 그 메타포를 바꾼다. 유대인의 넘어짐은 이방인의 부요가 된다. 왜냐하면 유대인이 복음에 부딪침으로써만 그 복음은 이방인에게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롬 11:12ff). 또한 이방인의 돌아옴은 유대인으로 하여금 시기하게 하여 이들이 다시 돌아오게 할 것이다(롬 11:11-15).&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이 변화되고 있는 “경쟁관계”의 의미는 11장 끝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은총의 하나님 앞에서 마침내 동등하게 된다고 결론지어진다. 양자 모두는 불순종의 단계를 통과한다. 그 둘은 불순종에서는 어떠한 차이도 없다. 하나님은 그의 자비하심에 있어서도 그들에게 차이를 두지 않는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관계에 대한 바울의 (아마도) 마지막 말은 그들이 동일한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차례로 같은 역할을 감당한다. 그들은 비록 너무 다른 가지일지라도 같은 줄기에서 갈라진 가지일 수 있다. 이들의 길은 하나님 안에서야 비로소 만나게 될 이 ‘평행’한 길이 있다는 것은 바울이 어렵게 도달한 관점이었다. 이것은 이제 다음 단락에서 보이게 될 더 머나먼 발전의 끝이었다.&lt;/p&gt;&lt;p class=&quot;1. &amp;#x00c81c;&amp;#x00baa9;&quot;&gt;2. 기독교는 확장된 유대교: 유대인의 역할을 하는 이방기독교인&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유대인과 이방인(이방 기독교인)이 유사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은, 갈라디아서 2:15에서 자신을 “죄인들과 이방인들”과 자랑스럽게 차별하였던 바울과 같은 한 유대인에게는 하나의 혁명적인 통찰이었다. 바울은 이 관점을 그가 소명을 체험할 때에 얻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이방인 역시, 유대인이 되지 않고도 하나님의 역사에 이스라엘과 함께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고, 할례 없이도 유대인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이스라엘의 모든 특권(롬 9:4)을 표현하며, 그 특권이 단지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기독교인들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볼 수 있다. 그 특권은 아들 됨, 영광, 언약 체결, 율법 수여, 예배, 축복의 조상과 같은 것들이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아들 됨은 모든 인간에게 영을 통하여 수여되거나(롬 8:14f), 영을 통하여 매개된다(갈 4:6). 그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들에게 비추인다(고후 3:18, 4:4). 성만찬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언약이 세워지고, 모든 사람이 하나의 법을 갖게 되어 이방인도 마음에 그 법을 갖는다(롬 2:14ff).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합당한 예배”를 드린다(롬 12:1ff).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롬 4:16)이고, 이방 기독교인들은 이제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0)에 속한다. 그들은 예전에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롬 9:25=호 2:25). 이 중심 사상에 있어서 유대인으로부터 이방인으로의 전이는 바울 복음의 핵심에 속한다.&lt;/p&gt;&lt;p class=&quot;1. &amp;#x00c81c;&amp;#x00baa9;&quot;&gt;3. 기독교는 유대교의 변형: 이방인의 역할을 하는 유대인&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구원이 이방인에게로 확장되었다는 주장은 그 구원의 이해를 필연적으로 변경시킨다. 그것은 이방인들은 여러 신으로부터 참된 하나님에게로 돌이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복음의 수용은 유대인보다 더 근본적인 변화였다. 유대인들에게 그것은 태고적 축복의 증거였다. 이방인들에게 “구원”이었던 것이 그들에게는 “성취”였다. 유대인은 머나먼 길의 종점에 도달했으나, 이방인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향해 목표를 수정해야 했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이제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이방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차별 없이 모든 인간들에게 구원사상을 피력한다.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인간은 심판 아래 살아간다. 이 구원사상의 보편화는 다음과 같은 하나의 ‘역할교환’(Rollentausch)을 통해서 일어난다. 유대인은 그들이 복음을 영접하지 않는 한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의 역할을 한다. 반면 이방인은 그들이 복음을 믿는다면 유대인의 역할을 한다. 이 역할 교환의 예를 들어보자.&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데살로니가전서 1:9-11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말한다. 이 진노는 만일 인간이 참된 하나님에게 돌이키지 아니하면 모든 이에게 임할 것이고, 그의 아들을 통해서 그것으로부터 구원받을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이방인도 해당한다. 바로 뒤 데살로니가전서 2:16에서 바울은 유대인에게도 이 진노의 심판에 대한 위협을 표명한다. 유대인들은 복음에 대한 적대감으로 인해 그들도 (믿지 않는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종말의 심판(&lt;span lang=&quot;EN-US&quot; style=&quot;FONT-FAMILY:Bwgrkl;&quot;&gt;ovrgh. eivj te,loj&lt;/span&gt;)에 떨어진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또 갈라디아서 4장에서 바울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의 관계를 사라－하갈 유형론으로 설명한다. 필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적대적 공존’의 필요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아브라함이 두 여자와 혼인한 것을 내세웠다. 그러나 바울은 비유대인 하갈을 유대교의 모형으로, 또한 사라는 기독교인의 모형으로 삼았다. 그는 그들의 관계를 단지 ‘적대적인 공존’만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둘의 긴장으로 해석했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이와 유사하게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도 이것을 다룬다. 여기서는 사라와 하갈, 야곱과 에서, 모세와 바로와 같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의 쌍들이 나타난다. 전통적으로 하갈이나 에서, 그리고 바로는 이방인을 대변한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그들은 믿지 않는 이스라엘을 대변한다. 무엇보다도 대대로 이스라엘의 적대자였던 완고한 바로는 이스라엘의 완고함을 대변하는 인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가는 것”에서 민족들의 순례에 대한 회고를 전제할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는 로마서 11:25f에서 그러한 역할 변경을 다시 한번 발견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관념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구원이 비로소 이방민족들의 유입을 시작하게 한다고 보았으나, 여기서는 그것이 뒤바뀌기 때문이다. 즉, “민족들이 들어가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것의 전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서 11:25에서 과연 유대인과 이방인의 역할 변경이 정말 전제되고 있는 것인가? 이것은 다음과 같은 문맥에서 분명히 표현할 수 있다: “너희(이방인)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그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함에 가두어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0-32).&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이렇게 이방인의 역할이 유대인에게 전이되고 있다는 사상은 바울이 정말 그러한 사고의 진전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는가를 의심해야 할 만큼 매우 대담한 진보였다. 원래 바울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새로운 복음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만일 그렇다면 이방인들에게서도 요청되었던 심판에서 구원으로의 변화를 유대인들도 경험해야만 했다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사고의 변화는 다음과 같은 것일 수 있다. 바울은 원래 이방인들만을 위해 그의 구원론을 구상했을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에서야 비로소 그것을 일반화해서 유대인에게도 적용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보편적인 구원론을 처음부터 가졌을 것이고, 그것을 이 두 번째 시기에서 더 분명하게 표현했을 것이다. 여기에는 그렇게 발전되고 있는 두 가지 요소가 명확히 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비기독교적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바울의 이방인 선교에 대한 적대감, 그리고 이방인 선교에서 바울과 기독교적 유대주의자들과의 경쟁이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50년대 이방인 선교는 유대인 선교보다 더 성공적이었을 뿐 아니라, 유대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결정적인 저항에 부딪쳤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방인 선교는 유대인과 그들 주변세계가 어렵게 유지한 긴장을 깨트렸다. 이것은 이방인 선교가 한편으로는 유대교의 중요한 동조자들(“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유대공동체 안으로 흡수했기 때문이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공동체 안에서 기독교 설교로 인해 부각된 긴장이 국가와 행정장관들의 간섭을 초래했기 때문이었다－예를 들면, 49년의 클라우디우스 포고가 그것이다. 그리하여 유대공동체들이 바울의 이방인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경쟁적인 적대자들이 되었다면, 유대인들도 이방인과 같이 심판을 거쳐야 한다는 생각은 바울에게는 개연성을 가졌을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이 생각은 더욱 구체화되는데, 그것은 유대인이 이방인 선교를 방해하기에 그들이 믿지 않는 이방인과 똑같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살전 2:16).&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바울에게 이 보편화된 구원사상의 개연성은 그가 경쟁하고 있는 유대주의자들의 이방선교를 통해서 다시 한번 부각되었다. 이것은 물론 다음과 같은 주장을 대변하는 것인데, 즉 구원은 오직 이스라엘 민족과의 연결을 통해서만 존재하며, 따라서 만일 이방인들이 완전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이 되려 한다면, 그들이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바울의 기독교는 이방인에게 아직도 “온전하게”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 일종의 유대교의 전 단계에 불과했으리라. 마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방인들”의 위치가 온전한 유대교의 전 단계였듯이 말이다. 이 경쟁자들이 추진했던 이방인 선교에 대한 생각에 맞서 바울은 유대인도 모든 인간들과 똑같이 구원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대응하였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바울은 토라를 평가 절하한다. 그래서 토라는 그 원래적인 목적이 구원이라 할지라도, 이방인의 우상숭배와 동일하게 인간을 예속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비교. 갈 4:1ff).&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바울의 삶에서 대략 10여 년간 나온 이 주장에서 구원론의 보편화는 이미 유대인과 이방인의 역할 바뀜을 통해서 실행되었다. 그는 이 주장은 분명히 어떤 일관된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나의 견해로 이 요소는 하나의 분명한 변화와 발전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바울서신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유대인에게 구원론의 부정적 측면만이 부과될 뿐이다. 즉, 그들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구속적인 의(하나님의 심판을 중지할)가 유효하다는 것은 여기서는 아직도 언급되지 않는다. 더욱이 바울은 이 “심판”이 종국적 심판(&lt;span lang=&quot;EN-US&quot; style=&quot;FONT-FAMILY:Bwgrkl;&quot;&gt;ovrgh. eivj te,loj&lt;/span&gt;)임을(살전 2:16) 일깨운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갈라디아서나 고린도서에서 바울의 주장은 중립적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를 근본적으로 상대화해버리는 ‘차별 없음’에 대한 주장(Indifferentzaussagen)은 여러 번 등장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없다”(갈 3:28)거나, “할례나 무할례가 무관하다”(갈 5:6; 6:15; 고전 7:19)는 언급이 그것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동일하게 회개의 기회를 갖는다. 지금은 아직도 유대인의 마음에 너울이 씌워졌지만 말이다. 그러나 바울은 구약에 근거한 소망을 새롭게 해석한다. “만일 그가 (즉, 이스라엘의 대표자로서의 모세가) 주께 돌아간다면, 그 수건은 벗겨질 것입니다”(고후 3:16). 여기서 종국적인 심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마지막으로 로마서에 나오는 “바울의 언약”에서 그는 한 단계 더 나아가는데, 여기서 보편화된 구원사상은 철저히 관철된다. 바울은 유대인이 마치 하나님의 보편적 심판의 관점에서 특권을 가진다는 식의 모든 반론을 무시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바울은 모든 면에서 보편적인 구원사상을 유대인의 특권과 조절하고자 한다. “차별 없음”에 대한 언급 이외에도 그는, 올리브나무의 비유에서 분명히 표현되는 바(롬 11:17ff), 유대인의 “우선”을 주장하고 있다. 이 &lt;span lang=&quot;EN-US&quot; style=&quot;FONT-FAMILY:Bwgrkl;&quot;&gt;prw/ton&lt;/span&gt;은 유대인이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효한 것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바로 그들의 믿지 않음을 통하여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 재림에 오시는 주님은 이스라엘을 해방하게 되고, 모든 이스라엘의 죄, 그리고 이방선교를 대항한 그들의 적대감도 용서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고심 끝에 이러한 긍정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그것은 그가 이방인과 유대인의 ‘역할 교환’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이 역할 교환에서 숨겨진 유사성을 발견하고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는 심판의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그것은 그들 모두를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게 하는 것이다. 양자 모두는 분명 “simul justus et peccator”(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다. 유대인은 이방인 선교를 수용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지만, 동시에 그들의 조상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가 된다(롬 11:28). 바로 이것은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는 바, 모든 사람이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으나(롬 5:10),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랑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서 5-7장은 대략 이와 같이 서술할 수 있을 것이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만일 내가 옳게 보았다면, 우리는 이러한 ‘발전’을 전제하여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바울은 이제는 구원이 이방인들에게고 열리게 되었다는 소식을 가지고 이방인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복음은 “유대교의 확장”이다. 이에 대한 유대인의 대항은 심판의 보편화를 가져왔고, 최소한 이에 대한 분명한 명제를 성립시켰는데, 그것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든 사람이 심판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이다. 유대교에 의존한 구원사상은 이제 유대교 신앙의 구조를 변형시켰는데, 그것은 유대인도 구원에 이르기 위하여서는 철저히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바울은 분명히 복음을 거절한 유대인에게도 보편적인 구원사상을 새롭게 적용한다. 그들의 거절은 구원으로 향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평행한 길의 한 단계로 보였고, 그 길은 재림에서야 비로소(아니 보다 더 정확하게는 이미 곧) 합류되게 된다. 기독교는 여기서 유대교에 대하여 유사한 어떤 것이다.&lt;/p&gt;&lt;p class=&quot;&amp;#x002160;. &amp;#x00c81c;&amp;#x00baa9;&quot;&gt;III. 유대교와 기독교의 사회적 현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하나의 그룹과 그들의 사회적 현실에 대한 해석은 항상 서로 연관된다. 하나의 해석이 영향을 미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떤 “개연성의 기초”를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 번째 단락에서는 바울의 해석-유대교와 유사한, 유대교의 확장 그리고 유대교의 변형으로서의 기독교-을 유대교 공동체와 기독교 공동체라는 인식 가능한 사회적 현실로 규범화해보기로 하자. 종교적 신념을 사회적 여건으로 종속시키는 것은 “사회적인 것”으로의 제한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한다.&lt;/p&gt;&lt;p class=&quot;1. &amp;#x00c81c;&amp;#x00baa9;&quot;&gt;1. 유대교와 기독교의 유사성&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사회사적 관점에서도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는 “형제”로서 나타난다. 그들의 상관관계는 계층복합적(diastratischem)이고 범지역적(diaspo- ralem) 결합력, 즉 사회계층과 종교를 통한 결합을 통해서 나타난다. 이 양자의 특징들은 종종 초기 기독교의 사회사적 특성으로 불리는데, 이것들은 사실상 유대교적 유산이다.&lt;/p&gt;&lt;p class=&quot;&amp;#x00ac00;. &amp;#x00c81c;&amp;#x00baa9;&quot;&gt;1) 다양한 계층적 결합&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초기 기독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유대교를 제외한 그 밖의 사회에서 작용했던 통합력보다 더욱 강력하게 통합시켰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는 다양한 사회적 계층을 두루 포함하는 복합 계층적 단일체를 만들게 되었다. 그렇다고 무슨 전체 사회를 대변하는 계층의 다양성을 갖는다는 것은 아니다. 초기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상층부에까지 다다르지도 않았고, 도시와 시골에서 동등하게 분배된 것도 아니었다. 그 지역의 상층민들에게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주로 주변적인 것으로 보였고, 양적으로 어차피 이 공동체의 대부분은 하층민들에게서 유래하게 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고전 1:26ff)과 외부인들은 차별 없이 함께 언급되었다. “복합 계층적 구조의 문제”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분명한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물론 강조점들은 다양하다), 이 점은 여기서 더 이상 전개될 필요는 없겠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이방 사회에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이러한 계층적 통합은 어떤 새로운 형태였다. 아마 고대의 “협회들”과 신비제의들도 다양한 지위의 인간들을 통합하였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자유인과 종이 함께했던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서로 다른 법적인 지위에도 불구하고 빈번하게 사회적으로 동일한 계층으로 정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독교적 (그리고 유대교적) 공동체만이 그러한 규범과 신념을 일상 전체 속에서 실천하려 했다. 함께 모이는 자리가 일 년에 단지 몇 번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매주 공동식사가 있었다. 공동체는 죽음과 질병이 그 안에 발생한 경우 어린이와 노인들을 돌보고, 여행과 사업에 있어서도 서로 도움을 준 생활공동체였다. 그리하여 초기 기독교는 이방 사회에서 하나의 새로운 “사회적 서비스”인 계층적 연대를 형성시켰던 것이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그것은 유대교에 대한 발전이자, 유사성이었다. 유대교 공동체도 다양한 시민계층에 속한 사람들을 포괄했는데, 이들은 로마시민과 여러 도시의 시민들, 폴리스에 정착한 보호 대상의 이방인들과 외국인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동시에 개개의 유대 “자치권”(&lt;span lang=&quot;EN-US&quot; style=&quot;FONT-FAMILY:Bwgrkl;&quot;&gt;poli,teuma&lt;/span&gt;)하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제한적이지만 자치권이 부여되어 로마인들에 의해 인정되고 보호된 사회적 결사체였다. 이러한 법적인 신분 차이에 더하여 경제적 편차로 인한 신분 차이가 생겨난다. 그리하여 유대 공동체에서의 많은 갈등은 공동체 내부에서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들 사이의 대립에서 시작되었다. 요나단이나 키레네이카의 하층민 지지자들의 봉기가 그것인데, 유대 상층부는 그들을 제압하려 했었다(요세푸스,『유대전쟁사』7,43ff). 그러나 그러한 대부분의 대립은 유대 공동체가 그 내적인 갈등을 극복하고 놀라운 통합력을 발휘하는 데 성공했다. 이 통합은 내부로부터 토라를 중심으로 한 ‘결속의 에토스’를 통하여 일어났다. 타키투스도 “유대인들은 모든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적대적 증오심을 표출하는 반면, 자신들 가운데에서는 확고하고 신실한 통합과, 자발적으로 도움을 주고자 하는 자비가 지배하고 있었다”고 말한다(Hist V,5,1). 그러나 여기서도 이른바 유대교 스스로가 부과한 특별 역할(Sonderrolle)을 모든 이방인을 향한 적대적인 비난(adversus omnes alios hostile odium)으로 해석하는 것은 반유대적인 선입견이었다는 것－이것은 곧바로 그리스도인에게도 이전되었다(cf. 타키투스,『연대기』XV, 44,4)－은 그저 부수적으로만 언급되었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유대교나 기독교 공동체의 계층 통합적 구조는 신분 차이가 상대화되고 있다는 것으로 입증된다. 첫째가 꼴찌의 역할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은 초기 기독교의 기본적인 행동원칙에 속했다(막 10:42-44). 이와 비교될 수 있는 “지위 역전”(Positionswechsel)의 관념은 필로에게서도 표현된다. 그는 토라가 명하는 안식일 준수는 남종이나 여종에게 적용되어 주인과 종의 역할 전환이 일어나는 것으로 해석한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lt;p class=&quot;&amp;#x00c778;&amp;#x00c6a9;&amp;#x00bb38;&quot;&gt;그(모세)는 주인들이 스스로 손을 사용하고, 또 종들의 노동이나 도움을 기대하지 않는데 익숙하게 하려 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변화무쌍한 인간의 삶 속에서 불행한 상황에 빠져들었을 때, 자신들의 노동에 익숙하지 못해, 미리부터 지치게 하지 않기 위함이었다…그러나 종들은 선한 소망을 포기해서는 안 되며, 도리어 매 육일마다 돌아오는 안식의 때에 자유의 불꽃과 열망을 품을 수 있기에, 그들이 주인에게 언제나 용감하고 충성되어 보인다면, 온전한 자유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민들이 당분간이라도 종들의 노동을 떠맡고 종들이 안식에 참여하게 한다면 그들의 인간적인 삶은 온전한 덕이라는 의미에서 고귀하다 할 것이다. 이는 높거나 낮거나 그 삶의 지위에 처한 자들 모두가 동등하다는 것을 기억하여 당연히 서로가 그들의 과실을 덜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필로, SpecLeg II, 67f.). &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필로도 바울과 같이 주 앞에서는 노예나 자유자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필로는 유대인의 삶에 대한 그의 이상을 엣세네파 가운데 특별한 집단이 구현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그들이 철저하게 모든 노예적인 것들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Prob 75-87). 그러므로 바울이 공동체 내에서 종과 자유자의 차이를 무시하려 했던 것을 아브라함의 언약의 성취로 본 것, 즉 그러한 전통을 유대적 전통으로 본 것(갈 3:28)은 옳았을까? 그러한 경향은 필로나 바울에게서 동일한데, 인간의 실제적 관계에 대한 그러한 유토피아적 주장을 하는 그러한 명백한 특징 또한 그들에게 공통적이다.&lt;/p&gt;&lt;p class=&quot;&amp;#x00ac00;. &amp;#x00c81c;&amp;#x00baa9;&quot;&gt;2) 범지역적 결합&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이러한 사회적 계층의 통합은 지역적 경계를 넘어선 의사소통을 통하여 활성화되었다. 고대의 종교제의는 많은 곳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대교와 기독교와 같이 지역의 경계를 넘어 조직적 형태로 발전된 것은 아니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이미 40년대에 예루살렘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다양한 기독교 공동체를 대변하는 범지역적 협의체가 나타나난다. 이른바 사도공의회가 그것이다(갈 2:1ff). 거기에서는 새로운 운동의 통합을 위해 씨름하고 있는 모습이 발견된다. 헌금이 약정되었고, 선교의 장이 나뉘었다. 그 후에는 이방 공동체에 대한 간섭을 하게 되었는데, 안디옥에서는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자들이 나타난다(갈 2:11ff). 50년대의 바울공동체에서는 선교사들이 계속해서 경쟁관계에 있다. 이들로 인해 일어난 갈등은 그들이 자신들의 신념을 범지역적적으로 모든 측면에서 통일성을 확보하려 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와 동시에 그들은 적극적인 여행 활동에 대하여 말한다. 소아시아 감독 아베르키오스(Aberkios)는 2세기 말에 공동체의 이러한 범지역적 통합을 그의 묘비에 새기고 있다. “나는 믿음의 형제들을 도처에서 만났는데, 바울을 나의 마차에서 만났다.” 그는 아마도 바울을 신뢰할 만한 자로 믿게 했던 바울서신을 휴대하고 다녔을 것이다. 아무튼 바울은 피난처를 얻게 되었다. 이 “믿음”은 그를 장막 만드는 자로 일하게 했다. “도처에서 나는 믿음을 따라갔고, 어느 곳에서나 연못에서 얻은 생선을 음식으로 제공받았다. 게다가 이것은 풍부하고 깨끗하였으며, 감금된 자에게 순결한 소녀가…” 그러므로 복음서 이외에도 서신서가 초기 기독교에서 중요한 문헌적 양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서신은 흩어진 자들 간의 의사소통이었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믹스(W.A. Meeks)는 이 범지역적인 통합을 초기 기독교의 초석으로 여겼다. 그러나 나의 견해로 그것은 유대교적 유산이다. 모든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예루살렘에 있는 중심체와 연결되었다. 신약성서에서는 잘 발견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공동의 축제력이 정해져 있었다고 가정해야 한다. 매년 성전세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왔다. 많은 유대인들은 매년 거룩한 성전을 향해 순례했다. 역으로 예루살렘의 관청은 디아스포라에 있는 유대인을 위하여 개입했다. 성전이 파멸되었을 때 점차로 랍비 위원회(Patriarchat)는 유대교의 새로운 중심으로 발전되었다. 이것은 지역의 범위를 초월한 초기 기독교에서 몇몇의 주교들과 주교회의가 범지역적 기관으로 발전한 것과 유사성을 갖는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그러나 유대교와 기독교가 범지역적이었다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범세계적(kumenische) 확산을 “분산”과 “다름”으로 해석하였다는 의미도 있다. 유대교는 로마제국의 여러 도시와 마을에서 놀라울 정도로 내부인에 의한 자치력을 가졌던 하나의 특별집단을 이루었다. 그들은 자체적으로 법과 재판관을 가졌고 세금을 징수했다. 그리고 자치도시에서 자유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게 하여 조상의 율법을 위해 죽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유대교의 순교자 사상은 정치적으로 종속된 상황에서도 그러한 요구를 지켜나갔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상을 유대교인들로부터 전수받았다. 그래서 그들도 지상의 국가에서 다른 도시의 의무를 의식했다.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었다(빌 3:20). 그들도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살았고, 지상과 천국의 도성의 요구 사이에서 갈등해야 할 때를 알았고(Germ sim I), 구성원들에게 자발적 순교를 기대했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은 고대세계 내에서 분명히 “유사한 현상”으로 이해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일반적인 동양적 신념세계의 한 부분을 대변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양자는 유일신에 대항한 이단에 대하여는 같은 태도를 취했다는 것도 그 한 측면이다. 그러나 그 밖에도 유대교와 기독교 공동체는 사회적 구조에서도 유사한데, 양자는 계층적이고 지역적 연대의 새로운 ‘사회적 서비스’(Angebot)를 구현했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이러한 인간 사이의 연대에 대한 새로운 범례는 볼케슈타인(H. Bol- kestein)이 말하는 “고대사회의 동양화”에 대한 표현으로 볼 수 있을까? ‘평등한 시민’이라는 이상적 모습이 그 사회적 개연성의 기초를 잃어감으로 비대칭적 사회적 의무가 강조되었을까?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달리 볼 수도 있다. 즉 이상적인 평등한 시민상이 자유민이라는 그 원래적 삶의 자리에서 생겼다면, 그것은 이제 소수의 특권적 계층에서 상실되어 이방인, 노예, 여자들과 같은, 이제까지 그것에서 배제되었던 그룹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이 세 범주를 언급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들은 시민적 삶의 특권을 박탈당하였으나, 공동체에서는 동등한 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유대인과 그리스인, 평등한 이방인들, 노예와 자유자들 그리고 여자와 남자를 언급했던 것이다(갈 3:28). 정치적 공동체인 “에클레시아”에서 그들이 어떤 자리도 없었던 반면, 주님의 “에클레시아”에서 자리를 찾았을 것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천상 예루살렘의 시민으로서의 자유를 갖는다(갈 4:1ff). 여기서 “상층가치의 하향전이”가 일어난다. 즉 이제까지는 단지 특권층에게만 해당되었던 평등과 자유의 이념은 이제 비특권층에게도 해당되고 전이된다. 단지 내향화된 영성으로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사회적 현실로서 말이다. 이것에 대한 모델은 유대교 공동체였다. 자치적으로 뽑힌 역할과 외부에서 부여된 역할이 그들을 그 공동체 안에서 자신들의 신분의 한계를 넘어서 연결시켰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그러나 이러한 “상층가치의 하향전이”는 오래된 특권가치의 해소를 통하여 더욱 시너지 효과를 내었는데, 자유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상층계층에 로마제국의 엘리트들이 위치한다면 그 지역의 상층은 이들의 가치로 하층부와 더 밀접히 연결된다. 그렇지만 볼케슈타인에 의해 구상된, 이른바 권위구조 변화에 상응하는 가치 변화의 모델은 계층적 연대와 범지역적 결합을 연결하는 것과는 도무지 맞지 않는다. 이 범지역적 결합 또한 “상층가치의 하향전이”로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의미 이외에도 그것은 제국의 상층부 사람들이 전세계적으로 확장된 접촉망을 가졌다는 표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소수의 원로원과 기사의 가족들을 모집하여 형성된 권력 엘리트들은 도처에서 (역자 주－권력 접수에 대한) 결정적인 전갈을 받아들였고, 그런 의미에서 지인들과 친구들 그리고 가족의 네크워크를 구축했다. 하층민들 사이에서는 아마도 그러한 범지역적인 교류가 농민조합이나 직업적 교역관계에서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는 어디에서도 유대인의 것만큼 분명하지는 않았다. 또 그러한 결합성은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인들과 같은 “작은 자들”에게서와 같이 그렇게 당연시된 곳은 없었다. 이들 말고도 코스모폴리탄적 엘리트들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이러한 행동 유형이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에게서는 하층계층까지 파고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행동 유형은 분명 지역적으로 한정된 전통적 행동보다는 로마제국의 범지역적 구조에 더 잘 부합된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유대교와 기독교는 이렇게 사회적 변화에 상응하는 연대의 형태를 제공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연대의 동기를 직접 자신들의 믿음의 중심으로부터 도출해냈다. 부활하신 주는 하나님과 같은 자의 위치에서 종으로 강등된 급진적인 신분 포기의 원형이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서 세상의 통치자가 된 모델이 되었다. 세상의 통치자로서 그는 모든 권세와 개개의 “혀”를 가진 인간의 주였다. 즉, 그는 로마제국에서 통일된 모든 나라들과 모든 문화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지배자요 주님이었다. &lt;/p&gt;&lt;p class=&quot;1. &amp;#x00c81c;&amp;#x00baa9;&quot;&gt;2. 유대교의 확장으로서의 초기 기독교&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그러나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이 모든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유대인은 하나의 “민족”이었다. 그들의 삶의 형태는 태고적 전통에 서 있었지만, 그리스도인은 “간민족적”(inter-ethnisch)이었다. 이들의 삶의 형태는 기독교적 믿음에 대한 결단, 다시 말해서 다른 전통에 대항해야 하는 결단이었다. 문제는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이러한 차이가 어떻게 사회사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우선 이러한 관점에서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의 역사에 편입될 수 있다. 그것은 유대교의 헬레니즘 및 로마시대로 특징지어지는 이방 세계로부터 문화적 수용(Akkulturation)의 과정에 속한다. 이것은 문화적 동화(Assimilation)는 아니다. 기원전 175년 예루살렘에서의 헬레니즘적 개혁은 문화적 동화를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적대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유대교의 이방세계에 대한 독특성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개혁도 개혁하는 자의 이해에 따르면 차라리 “문화적 수용”일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기서 그냥 그렇게 두자. 중요한 것은 “문화적 수용”은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가 없이 주변세계에로 동화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 기독교가 문화적으로 헬레니즘을 수용하려고 하는 시도가 갖는 독특성은 어디에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필로와 바울을 비교해보면 많은 시사점을 준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필로는 이방 세계로부터 바울보다 더 많은 것을 전수한다. 우리는 그에게서 스토아주의, 플라톤주의 그리고 피타고라스주의적 사상을 발견한다. 그는 많은 고대 문필가들을 알고 인용한다. 그는 신비종교의 언어에 익숙하다. 바울도 주변세계로부터 분명히 많은 사상을 수용하지만, 그의 결정적인 주장은 유대교의 전통에서 나온다. 그럼에도 필로의 기본 사상은 이방인 선교사 바울보다도 훨씬 더 유대교의 틀에 머문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중요한 것은 그가 수용한 전통의 양이 아니라, “문화적 수용 과정”의 구조이다. 필로는 자신의 유대교적 신앙의 틀에서 새로이 해석한 이방적 내용을 주변 세계로부터 선별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방법론은 알레고리적 성서해석이었다. 그는 분명－바울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인간의 변화와 영화(Vergottung)의 신비스런 과정을 묘사한다. 그러나 신적인 본질로 변화된 인간은 이스라엘이다. 필로에게 “신비”는 유대교적인 하나님 경외이다. 이 신비적 언어는 그로 하여금 유대교적 신앙의 요구를 유일하신 한 하나님에 대한 배타적이고 보편타당한 통로로 규정하도록 했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그러나 바울에게 이 문화적 수용 과정은 또 다른 구조를 갖는다. 바울은 이방적 전통을 상대적으로 덜 수용한다. 아마도 그에게 전해진 이방적 전통은 유대교적－헬레니즘적 전통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익숙한 유대교적 전통 가운데서 선별한다. 이 전통에서 그는 보편화할 수 있는 요소들을 가져오고, 보편화에 대립되는 요소들, 특히 이방인들이 참된 하나님에게로 돌이키는 데 요구되었던 할례와 음식규례는 포기한다. 유대 전통에 대한 이러한 그의 ‘선별’과 ‘새로운 창조’는 유대교 전통을 넘어가는 하나의 관점에서 생긴 것이다. 그것은 다음이 아니라, 예수가 오심으로 새로운 구속사적 상황으로 들어갔다는 믿음이었다. 성서적 언약은 이제 모든 민족을 위해 성취되어간다는 것이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우리는 필로나 바울의 유대교가 그 주변 세계에 대하여 “선별적 문화수용”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필로는 외적인 내용을, 그리고 바울은 내적인 전승을 선별한다. 필로는 유대교적 관점에서 이방적 전통을 선별하고, 바울은 유대교적 전통을 선별하되, 이것을 넘어서는 하나의 관점(이에 대해서는 우리가 좀 더 자세히 살펴야 한다)으로 선별한다. 이렇게 바울에게서는 신학의 모든 개별적인 요소를 유대교적 전통으로부터 “유출할 수” 있지만, 이방인을 향한 개방성은 필로보다는 훨씬 더 강력한 요소로 작용한다. 비록 필로가 이방적 교육의 내용에 더 깊이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이러한 비유대인을 향한 유대교의 사회적 개방은 사회 전체의 관계와 쉽게 연관되었다. 로마제국은 새로이 형성되고 있는 로마사회로 많은 민족들을 통합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로마제국은 물론 우선 다양한 개개의 사회를 넘어서는 범지역적인 “상위구조”(Superstruktur)로서 존재하였다. 그러므로 민족과 문화의 경계를 허무는 데 적합한 종교운동들은 사회의 이러한 객관적 요구에 상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종교적 운동들이, 제국의 통치영역 안에 있는 여러 민족들의 통합에 우선적 관심이 있었다면, 국가를 지탱해주는 상층부와 그 운동들이 더욱 먼 거리에 서 있었다는 것은 납득할 만하게 된다. 그리하여 양자 모두에게 존재했던 범지역성의 요구－이것은 국가에서는 시이저요, 종교에서는 주님과 연관되었는데－가 왜 이 새로운 운동과 제국의 지배층간 갈등을 초래하게 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lt;/p&gt;&lt;p class=&quot;1. &amp;#x00c81c;&amp;#x00baa9;&quot;&gt;3. 유대교의 변형으로서의 초기 기독교&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우리는 유대교적 전통 하에서 바울에 의해 선별되었던 관점이, 결국 그 전통을 넘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관점”을 정의해야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교의 확장”이라는 핵심 개념 하에서는 상당히 어렵게 평가될 수밖에 없는 초기 기독교의 관점을 만난다. 이것에 대해 우리는 바울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여 말할 수 있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바울은 물론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lt;span lang=&quot;EN-US&quot; style=&quot;FONT-FAMILY:Bwgrkl;&quot;&gt;pi,stij&lt;/span&gt;(믿음)과 &lt;span lang=&quot;EN-US&quot; style=&quot;FONT-FAMILY:Bwgrkl;&quot;&gt;no,moj&lt;/span&gt;(율법)의 안티테제를 통해서 하나의 개념으로 확립하려 하였다. 그는 이 안티테제를 이중적으로 상대화하고 있는데, 율법은 문자나 계명과 같아서, 문자로서의 계명뿐만 아니라 믿음을 향하고 있는 언약을 포함한다. 문자로서 율법은 믿음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문자를 증거한다. 다른 한편으로 계명으로서의 율법은 믿음에 대립되지만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율법은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되기 때문이다.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믿음’은 이런 의미에서 율법의 완성이다. 믿음과 율법의 안티테제가 가지고 있는 이 이중적 상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울에게서 믿음과 율법, 혹은 “믿음”과 “공로”의 대립을 항상 발견하게 된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우리가 오늘날까지 이 대립의 본질이 무엇인가라고 의아해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율법의 종 됨”－이로부터 예수에 대한 믿음이 자유롭게 되는－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율법의 부정적인 측면은 무엇인가? 그것이 실제로 성취되지 못해서인가? 아니면 원칙적으로 성취되지 못해서인가? 다른 것을 무가치하게 하는 교만함에서인가? 바울은 인간이 범하게 되는 율법이 갖는 살인과 폭력적인 성격에 저항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율법과 연관된 잘못된 태도를 비판하는 것인가? 그러면 여기서 이러한 질문이 생긴다. 이 잘못된 태도는 이미 율법과 함께 주어졌는가? 아니면 그것은 예수의 오심에 대한 응답인가? 아니면 바울은 근본적으로 율법에 대항하여, 율법을 연결시키는 것이 새로운 계시의 인정을 방해하였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인가?&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나는 이 모든 대답이 어떤 하나의 진리를 내포한다고 생각한다. 어찌하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율법”이 이스라엘에게서 가졌던 역할, 즉 하나님의 선택의 기초 위에 그 신실함을 증거하고, 인간의 신실함을 요구하는 율법의 역할을 이방인에게서는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방인에게 모든 인간의 행위에 앞서 존재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이라는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이방인이 율법을 전수하였다면, 구원의 상태가 율법의 성취를 통하여 확고히 된다는 의미에서 율법은 “구원의 길”로 되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들에게 율법은 유대교에서처럼 구원의 선물, 즉 인간적 행위 앞서 주어진 구원의 표징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의 율법 비판은 그가 이방인을 율법으로부터 지켜내려고 할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강렬하게 나타난다. 율법의 전수를 통해 비록 이방인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정초하지 못하고, 도리어 “완성”한다 할지라도 말이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그럼 이제 모든 인간적인 행동에 앞서 있는 ‘선민에 속함’의 자리에는 무엇이 오는가? 이 자리에 인간의 믿음과, 성례전에서 명백하게 되는 믿음을 통한 변화의 힘이 온다. 달리 표현하여, 출생을 통하여 선민에 속하게 된다는 유대인의 선언(Indikativs)의 자리에, 이방인에 대하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한 인간 변화의 선언이 대신한다. 그리하여 “믿음”과 “율법”은 안티테제로 정형화된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이 반명제는 종교사회학적인 고찰의 도움으로 설명될 수 있다. 바울이 여기에서 상호 대립시키는 것들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종교적 정당성이다. 우리는 이것을 막스 베버가 순수이상형으로 분류한, 다음과 같은 권위와 지배의 세 가지의 정당성 형태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1. 전통적 정당성: 권위는 출신을 통하여, 즉 태생, 승계된 지위(Sukzession), 전통이나 관습을 통하여 정당화된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2. 반면 카리스마적 권위는 어떤 한 인물(Person)에게 존재하는 일상화되지 않은 힘(Macht)이 타인에게 유출되지 않는 채로 그에게 현존한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물론 그는 자발적 인정을 얻을 능력을 지닌 자이어야 한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3. 합법적 권위는 비자발적인 규칙을 근거로 한다. 이 규칙은 인물과는 독립된 유효성을 가지며, 또한 명백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유대교와 기독교는 양자 모두 공통의 전통적 권위, 즉 성서에 기초하고 있다. 이 성서의 해석을 중심으로 유대인과 기독교인들 간에 하나의 “정당성 논쟁”이 야기된다. 양자 모두는 유일하고도 참된 해석을 점유하려 한다. 바울은 유대인의 마음에 있는 성서와 율법의 참다운 이해를 가로막는 “수건”을 본다(고후 3:14). 유대인은 기독교인의 성서 해석을 자의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양자 모두에게 율법은 “성서”(&lt;span lang=&quot;EN-US&quot; style=&quot;FONT-FAMILY:Bwgrkl;&quot;&gt;grafh,&lt;/span&gt;)로서 논쟁할 수 없는 명백한 권위가 된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이 공통이 되는 전통적 정당성의 토대위에 로마와 헬레니즘 시대를 통하여 시대에서 두 가지 형태의 종교적 정당성의 구조가 발전한다. 한 측면에서는 랍비적－바리새적 운동(그리스도인 이전의 바울도 여기에 속했다)이 유대교를 관통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서의 토대위에 적법한 권위구조를 유대교에게 부여한다. 이 권위구조는 제의와는 독립된 지식과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가능하게 하며, 성전이 멸망한 후에 제의를 대치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우리는 적절한 해석학적 과정의 도움으로 하나님 앞의 삶에 대한 유대인들의 비자발적인 규정을 탐구해야 한다. 제사장적 성결을 세계의 일상 속에서도 실현할 수 있게 하는 규정 말이다. 우리는 실천적인 규정을 실용적으로 적용할 뿐만 아니라, 그 밖에도 제의를 통해 이룩되는 성결에 참여하는 것 모두를 탐구해야 할 것이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그러므로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의 분열은 참으로 깊다. 왜냐하면 초기 기독교에서는 성서라는 공동의 토대위에서 다른 ‘정당성의 구조’(Legitimationsstruktur)를 만들어 이와 함께 하나의 종교를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성서 안에서 적법한 해석의 과정을 통하여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인물 카리스마적’(personal- charismatische) 연결과 이 연결을 통하여 경험할 수 있는 성령을 통하여 발견되는 것이다.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기독교적 신념을 기초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과의 연관에 호소해야 한다. 이 인물 카리스마적 연관을 바울은 “믿음”이라고 부른다. 이 믿음은 신비적 연결을 향해 나아가는 예수와의 강력한 내적 결합이다. 바울은 이 연관에서 성서를 읽고, 유대교적이고 구약성서적인 전통에서 보편화될 수 있는 것을 선택한다. 이 인물 카리스마적 연관은 그가 유대교가 “선별적 문화수용”을 추진했던 바로 그 관점이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이 새로운 종교의 세 가지 특성은 나의 견해로는 이 인물 카리스마적 토대로부터 설명될 수 있다고 본다. 이 토대는 보편종교로서, 회심의 종교로서 그리고 해방의 종교(Universal-, Konversions- und Erloesungs- religion)로서의 성격이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1. 인간은 어떤 전제조건이나, 전력(Vorleistung) 없이 이 인물 카리스마적 관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한 인물에 대한 “비일상적인” 힘의 인정은 매우 단순한 어떤 것이다. 인간은 이를 위해 어떤 특정한 민족적인 문화에 뿌리를 박아야 할 필요는 없다. 또 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령은 민족과 사회적인 범주와 무관하게 누구나 사로잡을 수 있다. 예수에 대한 이 단순한 인물 카리스마적 관계로 인하여 비유대인도 유대인의 역할에 가담할 수 있다. “믿음”을 통하여 이방인을 하나님의 역사에 그의 백성과 함께 참여한다. 이 인물 카리스마적으로 연관된 믿음은 유대교에 존재하는 보편적 경향의 가장 끝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2. 인간은 인물 카리스마적 연관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이 연관은 “회심”, 즉 계시의 매개자를 향한 의지적인 전환을 요구한다. 이것은 물론 이 전환으로 완전히 새로운 믿음의 내용이 받아들여진다는 의미 속에서는－다시 말해서, 만일 이방인이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기로 회심한다면－참으로 단호한 것이다. 이미 유대교에는 회심의 종교의 명제가 존재하는 것이다. 유대교는 그 주변 세계에서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했다. 많은 사람들이 유대교에 연결됐다. 그러나 그럼에도 회심은 단지 유대인으로 태어난다는 일반적 경우에 보완되는 수용규칙일 뿐이었다. 초기 기독교에서 이 보완적 수용규칙은 초기에는 본질적인 것이었다. 바로 이것에서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 안에 있는 보편적 경향성을 발전시킨 것이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3. 만일 인물 카리스마적 연결이 구원을 가져온다 해도, 인간이 이 연결에서 항상 사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새로운 카리스마적 연결의 수용에 앞서 심판에서 살아가야 한다. “믿음”은 “해방”을 일으킨다. 초기 기독교와 같은 하나의 인물 카리스마적 연관이 중심에 서는 종교는 해방의 종교가 된다. 이 새롭고도 구원하는 관계는 인간의 행동만이 아니라, 그의 전 존재를 변화시킨다. 그(특별히 이방 기독교인들)는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여기에서 또한 강조되어야 할 것은 해방사상이 유대교에서 이미 준비되어 있었던 하나의 경향이 발전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유대교에서는 묵시적 공동체에서 (인간과 함께) 전 세계의 변화를 생생하게 고대하였다. 바울은 이 기대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요약해 보자. 바울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갔던 갈림길에서 결정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기독교는 인물 카리스마적으로 변형된 유대교였다. 반면 랍비유대교는 율법해석에 있어서 더욱 발전된 유대교였다. 이 두 종교는 동일한 전승의 기초에서 다른 권위구조로 믿음의 형태를 발전시켰다. 바울은 그가 “율법”과 “믿음”의 안티테제를 두 종교의 차이로 설정할 때 그 형태를 인식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서 어떤 절대적인 대립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물론 그는 이 대입을 상대화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아마 두 종교의 형태는 다른 것이었지만, 직접적으로 대립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여기서 제안된 바, 기원후 1/2세기의 기독교와 유대교의 차이의 상대성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것은 유대교가 율법 해석적인 종교, 그리고 기독교가 인물 카리스마적 권위구조를 가졌다면 이것으로 독립된 길을 가고 있는 양 종교의 압도적인 “조직원리”가 파악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유대교에 카리스마적 인물이, 혹은 기독교에 율법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대교의 카리스마적 인물은 분명히 토라와 그 해석에 종속된다. 랍비 엘리에젤 벤 히르카노스(R. Eliezer ben Hyrkanos)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이것을 보여준다. 그는 할라카적 결정을 지지하기 위하여 세 가지 기적과 이른바 바쓰－콜(Bath-Qol)이라는 하늘의 음성조차 열거할 수 있었음에도 자신의 서기관 동료들 다수에게 굴복했다. 그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웃었고,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자녀들은 나를 이겼다. 나의 자녀들이 나를 이겼다”(bBM 59b). 여기서는 기적의 카리스마가 아니라 비자발적인 율법해석이 가장 높은 권위로 보였다. 반대로 초기 기독교에서 그 카리스마는 곧바로 공동체의 법적인 체제를 배태시켰다. 클레멘스1서와 고대교회의 공동체 규율이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단순한 믿음의 관계에 있었다. &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끝으로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유대교가 초기 기독교에서 인물카리스마적으로 변형된 것은 로마 초기인 제정시대(Prinzipats- zeit) 사회 전체의 구조 변화에 속할 수 있는 것일까? 로마제국은 많은 민족문화에 대하여 하향평가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사회에서는 로마문화에 대한 기존의 소속성이 아니라, 아직도 획득하여야 할 헬레니즘－로마 문화에 대한 소속성이 더 긍정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제국 내에서의 상향 이동성(Aufwrtsmobilitt)이란 다수의 민족문화에 소속된 구성원에게는 그들의 민속적이고 문화적인 유산과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것은 인간의 출발 상태는 부정적이었고, 이 상태로부터 해방되는 것에서의 구원을 추구하여야 한다는 종교적 사상에 개연성을 부여하였다. 상향 이동성은 종종 상층엘리트들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에 근거하여 일어난다. 주님에 대한 “인물 카리스마적 결합”이 어떤 긍정적인 작용을 가질 수 있고, 게다가 “구원”까지 일으킨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현실에서 경험될 토대를 갖게 된다. 초기 기독교가 인물 카리스마적으로 변형된 유대교로 이해될 수 있다면, 이 변형으로 초기 기독교는 당시 사회 전체 현실의 몇 가지 측면에 부합하고 있는 것이다.&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이 변형으로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었다. 유대인들이 당시의 “새로운 사회”(moderne Gesellschaft)에 적응하는 것보다 그들의 전통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는 것은 아마도 기독교인들에게는 오늘에야 비로소 적극적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현대 세계”에 대해 적응하려는 유혹에 대하여 그들의 전통을 더욱 더 지켜나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수백 년 동안 그들이 “극복한” 유대교에 대한 자부심으로 그것을 명백한 “옛 언약”으로 평가 절하하려 했었다면, 그들도 오늘날 자신들의 신념이 “오래되어” “추월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1세기에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걸어온 갈림길을 사회사적이고 종교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본다면 아마도 이 “새로운 종교” (그리고 물론 “더 나은” 종교)를 대변하려는 그리스도인의 자기이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자기이해와 상관없이 역사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이를테면 성서의 종교는 당시에 변화되었고, 그것은 성서적 신앙에 기초한 두 가지의 병존적이고도 동등한 형식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유대교와 기독교이다. 이 역사적 해석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앙 이해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신학적 평가로 기여할 수 있다는 희망도 현재로서는 아마도 약간 유토피아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길을 곧 다시 통합하시리라는 바울의 희망보다는 유토피아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lt;/p&gt;&lt;p class=&quot;&amp;#x00bc14;&amp;#x00d0d5;&amp;#x00ae00;&quot;&gt;&amp;nbsp;&lt;/p&gt;&lt;!--StartFragment--&gt;&lt;p&gt;역자 주. 이 글은 현재 본인이 저술 중인 ‘유대교와 기독교’ 연구의 중요한 관점을 제공하고 있는 타이센 교수의 논문, “Judentum und Christentum bei Paulus: Sozialgeschichtliche Überlegungen zu einem beginnenden Schisma,” M. Hengel/U. Heckel ed.&lt;span lang=&quot;EN-US&quot; style=&quot;FONT-STYLE:italic;&quot;&gt; Paulus und das Antike Judentum&lt;/span&gt;, WUNT 58 (T- bingen: Mohr, 1991), 331-359를 번역한 것이다.&lt;/p&gt;&lt;p&gt;&amp;nbsp;&lt;/p&gt;&lt;!--StartFragment--&gt;&lt;p&gt;이 논문은 튀엔(H. Thyen)의 60회 생신기념(1897. 4. 21)으로 발표되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주석적 작업을 통하여 유대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열어나갔던 몇 안 되는 독일어권 학자 가운데 하나였다. 이 분야나 다른 많은 분야에서 그가 주었던 학문적 자극에 대하여 이 논문은 그저 작은 감사의 보답일 뿐이다. &lt;/p&gt;&lt;!-- end clix_content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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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0 Dec 2009 23:27:1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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