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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바다같이 넓은 마음을]]></title>
<description><![CDATA[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며,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랬으니오늘도 내일도 내게 주어진 길을 따라 힘차게 걷고 또 걷자.]]></description>
<link>http://kr.blog.yahoo.com/han1592</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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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바다같이 넓은 마음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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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토요인터뷰] 최승호 시인 “내 시가 출제됐는데, 나도 모두 틀렸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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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span style=&quot;FONT-SIZE:11pt;COLOR:#000000;LINE-HEIGHT:23px;FONT-FAMILY:'굴림';LETTER-SPACING:0px;TEXT-ALIGN:justify;&quot;&gt;&lt;br /&gt; &lt;b&gt;&lt;br /&gt; ‘모의수능에 단골로 등장하는 작가’ 문학교육에 쓴소리 &lt;/b&gt;&lt;br /&gt; &lt;br /&gt; [중앙일보]2009.11.21 03:23 입력 / 2009.11.21 05:35  &lt;br /&gt;  &lt;br /&gt; 최승호(55·숭실대 문예창작과 교수·사진) 시인이 “내가 쓴 시가 나온 대입 문제를 풀어 봤는데 작가인 내가 모두 틀렸다”고 18일 말했다. 그가 풀어 본 문제는 2004년 출제된 수능 모의고사 문제였다. 최씨의 작품 ‘북어’ ‘아마존 수족관’ ‘대설주의보’ 등은 수능 모의고사 등에 단골로 출제돼 왔다. 그는 “작가의 의도를 묻는 문제를 진짜 작가가 모른다면 누가 아는 건지 참 미스터리”라며 쓴소리를 했다. 최 시인은 올 8월 서울시교육청 교육연수원에서 국어교사 400명을 대상으로 ‘시의 이해’를 강의했다. 이 자리에서 수능 시험과 고교 시 교육에 대해 직격탄을 날려 화제를 모은 그를 만났다.&lt;br /&gt; &lt;br /&gt; -자신이 쓴 시가 나온 문제를 틀린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lt;br /&gt; &lt;br /&gt; “언젠가부터 내 시가 교과서나 각종 수능 모의고사에서 나오고 있다더라. 그런데 나는 다 틀린다. 그래서 지금은 안 풀어 본다. 시를 몸에 비유해 보자. 시의 이미지는 살이고 리듬은 피요, 의미는 뼈다. 그런데 수능 시험은 학생들에게 살과 피는 빼고 숨겨진 뼈만 보라는 것이다. 그러니 틀리는 게 아닌가 싶다.”&lt;br /&gt; &lt;br /&gt; -무슨 말인지.&lt;br /&gt; &lt;br /&gt; “예를 들어 내가 쓴 ‘너구리, 너 구려. 너 구린 거 알아’라는 시를 보자. 이게 모국어의 맛과 멋이다. 그런데 이 시의 주제가 뭐냐. 시의 사조(思潮)가 뭐냐. 시인은 어느 동인 출신이냐 묻는 게 수능 시험이다. 그런 가르침은 ‘가래침’ 같은 거다.”&lt;br /&gt; &lt;br /&gt; -시인의 시 ‘북어’에 대해 고교 참고서는 ‘시인은 부당한 독재 권력에 대해 한마디 비판도 못 하는 굴종의 삶을 비판한다’고 풀이했다. 이건 맞나.&lt;br /&gt; &lt;br /&gt; “그것 봐, 또 한정한다. 1979년 사북에서 전두환 정권 계엄령이 내려졌을 때 쓴 것은 맞다. 하지만 이 시는 죽음의 탐구로 볼 수도 있다. 작품은 프리즘과 같아서 눈 밝은 독자를 만나면 분광하며 스펙트럼을 일으킨다. 이런 해석은 노을을 보고 허무·열정의 이중성을 느끼는 사람에게 ‘빛의 산란’이 정답이라고 못 박는 꼴이다.”&lt;br /&gt; &lt;br /&gt; -객관식 시험이라는 한계가 있지 않은가.&lt;br /&gt; &lt;br /&gt; “사람 사이의 대화나 교류가 일어나는 곳은 산과 산 사이의 골짜기다. 그런 골짜기에서 나오는 메아리가 중요하다. ‘나는 이 산꼭대기에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지만 저쪽에도 또 나름의 산맥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면 산과 산 사이에 골짜기가 생겨난다. 오지선다 시험은 골짜기를, 골짜기 사이에서 나오는 메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lt;br /&gt; &lt;br /&gt; -현행 교육의 문제가 뭐라고 보는가.&lt;br /&gt; &lt;br /&gt; “요즘 국회가 하는 일을 보자. 골짜기가 없다. ‘사이가 좋다’는 말처럼 사이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이가 없는 거다. 여당과 야당, 중앙과 지방이 대립하는 세종시 문제도 그런 거 아닌가. 참 답답하다.”&lt;br /&gt; &lt;br /&gt; -그렇지만 수능은 15년이 넘은 시험이고, 아주 엄밀한 과정을 거쳐 출제된다. 이의 신청을 해 볼 수도 있을 텐데.&lt;br /&gt; &lt;br /&gt; “그냥 미스터리로 남겨 두고 싶다. 나도 생각하지 못한 정답이 어떻게 나오는지 정말 궁금하다. 내가 바보라서 모르는 건지…. 그렇지만 문제가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거 같다. 나는 감정과 예술의 자리에서 얘기하고, 수능은 이론과 논리의 자리에서 얘기하는 것일 뿐이다.”&lt;br /&gt; &lt;br /&gt; -그럼 시 교육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하나.&lt;br /&gt; &lt;br /&gt; “웃는 것, 안목을 높여 주는 것이다. 더 좋은 작품을 감상해 나갈 수 있는 능력, 그래서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안목을 길러 주는 것이다. 그리스 철학자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했다. 이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인생은 지금 여기 경험의 총체이니 그 경험을 최대한 느끼도록 도와주는 것이면 좋겠다. 어린이가 덜 자란 어른인 게 아니라 어른이 계속 자라나는 어린이일 뿐이다.”&lt;br /&gt; &lt;br /&gt; -학생들도 시를 쉽게 쓸 수 있나.&lt;br /&gt; &lt;br /&gt; “시인은 언어의 요리사고 작품은 음식이다. 독자는 미식가고, 맛을 음미하면 된다. 나는 쉽게 언어를 물감처럼, 음표처럼 사용한다. 시 ‘숫소’는 증기기관차처럼 콧김을 뿜는 수소가 빼빼 마른 백정에게 맞아 쓰러지는 얘기다. 의미에 연연하지 말고 더 많은 작품을 즉물적으로 감상하고, 생각을 많이 하면 누구든지 쓸 수 있다.”　 &lt;br /&gt; &lt;br /&gt; 이원진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lt;br /&gt; &lt;br /&gt; &lt;img src=&quot;http://news.joins.com/component/htmlphoto_mmdata/200911/htm_2009112103444930003010-001.JPG&quot;&gt;&lt;br /&gt; &lt;br /&gt; ◆최승호 시인은=1983년 출간된 첫 시집 『대설주의보』 이후 『세속도시의 즐거움』 『그로테스크』 『고비』 등 문제작들을 내놓으며 오늘의 작가상과 김수영문학상·이산문학상·현대문학상·미당문학상 등을 받았다.&lt;br /&gt;  &lt;/span&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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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1 Nov 2009 07:37:50 +0900</pubDate>
    <category><![CDATA[마음가는 대로]]></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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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quot;독도, 일본(日本)땅 아니다&quot; 1946년 대장성 법령 발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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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ul id=&quot;author&quot;&gt;&lt;li&gt;&lt;img alt=&quot;&quot; src=&quot;http://image.chosun.com/cs/article/ctrl_bar.gif&quot;&gt; &lt;/li&gt;&lt;/ul&gt;&lt;div class=&quot;date_ctrl&quot;&gt;&lt;p id=&quot;date_text&quot;&gt;입력 : 2009.11.16 03:03 / 수정 : 2009.11.16 08:41&lt;/p&gt;&lt;/div&gt;&lt;!-- article --&gt;&lt;div class=&quot;article&quot; id=&quot;article&quot; style=&quot;FONT-SIZE:14px;LINE-HEIGHT:23px;&quot;&gt;&lt;h3&gt;박선영 의원 &lt;dl class=&quot;left_img&quot; style=&quot;WIDTH:240px;&quot;&gt;&lt;dd&gt;&lt;img id=&quot;artImg0&quot; height=&quot;261&quot; alt=&quot;&quot; src=&quot;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0911/16/2009111600062_0.jpg&quot; width=&quot;240&quot;&gt; &lt;dt&gt;&lt;span&gt;▲&lt;/span&gt; 독도(일본명 죽도·竹島)를 조선, 대만 등과 함께 외국으로 규정한 1946년 8월 일본 대장성 고시 654호. &lt;/dt&gt;&lt;/dd&gt;문건 입수&lt;/dl&gt;&lt;a href=&quot;http://focus.chosun.com/nation/nationView.jsp?id=142&quot; name=&quot;focus_link&quot;&gt;일본&lt;/a&gt;이 대한민국 광복 다음해인 1946년에 스스로 &amp;#39;독도(獨島)는 일본 땅이 아니다&amp;#39;라고 인정한 사실을 담은 법령 자료가 발견됐다.&lt;br&gt;&lt;br&gt;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소속 &lt;a href=&quot;http://focus.chosun.com/org/orgView.jsp?id=406&quot; name=&quot;focus_link&quot;&gt;자유선진당&lt;/a&gt; &lt;a href=&quot;http://focus.chosun.com/people/peopleView.jsp?id=3004&quot; name=&quot;focus_link&quot;&gt;박선영&lt;/a&gt; 의원실이 익명의 일본 고위관료를 통해 15일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1946년 8월 15일 일본 대장성(大藏省)이 발표한 고시(告示) 654호에서 독도(竹島로 표기)는 조선, &lt;a href=&quot;http://focus.chosun.com/nation/nationView.jsp?id=174&quot; name=&quot;focus_link&quot;&gt;대만&lt;/a&gt;, 사할린, 쿠릴열도, 남양군도 등과 함께 외국(外國)으로 규정되어 있었다.&lt;br&gt;&lt;br&gt;박 의원실에 따르면 &amp;quot;일본은 패전 직후인 1946년에 일본 기업들이 부담할 배상 및 노무자들에 대한 미지급 임금 채무 등의 해결을 위해 &amp;#39;회사경리응급조치법&amp;#39;을 제정해 회사가 실행 중인 사업 및 전후 산업 회복에 필요한 동산, 부동산, 기타 재산 등을 정했다&amp;quot;며 &amp;quot;이 법의 칙령에서 &amp;#39;재외(在外) 자산&amp;#39;의 범위를 규정하고, 대장성 고시에선 패전 전 점령했던 영토 중 외국으로 분류한 지역을 규정했는데 여기에 독도가 포함돼 있다&amp;quot;고 했다.&lt;br&gt;&lt;br&gt;신용하 &lt;a href=&quot;http://focus.chosun.com/school/schView.jsp?id=409&quot; name=&quot;focus_link&quot;&gt;서울대&lt;/a&gt; 명예교수(독도학회장)는 &amp;quot;1946년 1월 일본 도쿄에 설치된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지령(SCAPIN) 제677호에서 독도가 일본의 영토에서 제외되는 곳으로 명시했다&amp;quot;며 &amp;quot;이번에 발견된 1946년 대장성 고시는 당시 군정하에 있었던 일본이 연합국 방침을 추인하고 실행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史料)&amp;quot;라고 했다.&lt;br&gt;&lt;br&gt;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 광복 이후에 독도를 자국(自國) 영토가 아니란 것을 처음으로 인정한 법령 자료로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은 정부출연 연구기관인 한국해양수산개발원이 지난해 12월 청와대에 보고한 ▲1951년 6월 6일 공포된 ‘총리 부령(府令) 24호’와 ▲1951년 2월 13일 공포된 ‘대장성령(大藏省令) 4호’ 등 두 개의 일본 법령이었지만, 이번 자료는 이보다도 5년 앞선 것이다. ‘총리 부령 24호’는 일본이 옛 조선총독부의 소유 재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대장성령 4호’는 공제조합 등에서 연금을 받는 자를 위한 부속 도서에서 ‘울릉도, 독도, 제주도’ 등을 일본의 섬에서 제외했다.&lt;br&gt;&lt;br&gt;박선영 의원은 “이 자료는 일본 정부가 패전 직후에 영토의 서쪽 경계로 독도를 주장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독도 영유권 논쟁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법령 자료”라며 “정부는 적극적으로 이런 법령·역사적 자료를 발굴하고 활용해서 일본과 독도 영유권 분쟁의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했다.&lt;br&gt;&lt;br&gt;독도 전문가인 귀화 일본인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일본이 패전 이후 독도를 자국 영토에서 제외시킨 최초의 법령 자료로 보인다”고 했다. 호사카 교수는 “일본은 연합국과의 종전 협정을 통해 자치권을 회복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2년) 이후부터는 태평양 전쟁 패배에 따라 반환해야 할 영토목록에서 독도를 삭제했는데, 그 시점 이후에도 독도를 자국영토에서 제외한 일본 정부 법령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도 필요하다”고 했다.&lt;br&gt;&lt;/h3&gt;&lt;/div&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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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1 Nov 2009 07:06:02 +0900</pubDate>
    <category><![CDATA[생생 역사]]></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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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사람과 이야기] &quot;1년 더 삶이 허락된다면 평생 연구 끝낼텐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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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span style=&quot;FONT-SIZE:11pt;COLOR:#000000;LINE-HEIGHT:23px;FONT-FAMILY:'굴림';LETTER-SPACING:0px;TEXT-ALIGN:justify;&quot;&gt;&lt;br /&gt; &lt;br /&gt; &lt;b&gt;&lt;br /&gt; 最古 금속활자본 &amp;#39;직지심경&amp;#39; 발견한 &lt;br /&gt; 在佛 박병선 박사 암투병 중&lt;br /&gt; 直指·외규장각도서 297권… 佛도서관 취직해 발굴해내&lt;br /&gt; &amp;quot;호랑이잡으러 호랑이굴 갔죠&amp;quot;&lt;br /&gt; 병인양요 연구 수십년째&lt;br /&gt; &amp;quot;왜 이걸 찾아 문제 만드나&lt;br /&gt; 정부, 처음엔 냉담한 반응&lt;br /&gt; 반환운동 일자 태도 바꿔&amp;quot;&lt;/b&gt;&lt;br /&gt; &lt;br /&gt; &lt;img src=&quot;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0911/03/2009110300054_0.jpg&quot;&gt;&lt;br /&gt; &lt;font size=&quot;1&quot;&gt;▲ 지난해 9월 충북 청주시에서 열린‘직지축제’에 참가했던 박병선 박사. 세번이나 인터뷰를 거절했던 그는“아픈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다”며 끝내 사진 촬영을 거부했다./김선옥씨 제공 &lt;br /&gt; &lt;/font&gt;&lt;br /&gt; &lt;br /&gt; &amp;quot;오늘도 안 됩니까?(Aujourd&amp;#39;hui, on ne peut pas?)&amp;quot;&lt;br /&gt; &lt;br /&gt; 1980년 봄, 프랑스 파리 리슐리외가(街) 프랑스국립도서관. 소년처럼 머리칼을 짧게 친 52세의 한국 여성이 또박또박 물었다. 도서관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여성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amp;quot;내일 다시 오겠다&amp;quot;고 말하고 돌아섰다.&lt;br /&gt; &lt;br /&gt; 그는 몇달 전까지 이 도서관에 근무하던 재불(在佛) 서지학자 박병선(朴炳善·81)씨였다. 박씨는 서울에서 태어나 1955년 홀로 프랑스에 건너갔다. 소르본대학과 프랑스고등교육원에서 각각 역사학과 종교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7년부터 13년간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근무하면서 3000만종이 넘는 장서를 뒤져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amp;#39;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amp;#39;과 외규장각 도서 297권을 찾아내 주불 한국대사관에 알렸다.&lt;br /&gt; &lt;br /&gt; 프랑스 상사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박씨는 뜻을 꺾는 대신 사표를 냈다. 이후 매일 도서관에 찾아가 &amp;#39;개인&amp;#39; 자격으로 외규장각 도서 열람을 신청했다. 옛 동료들의 냉대를 견디며 매일 같은 질문을 던졌다. &amp;quot;오늘도 안 됩니까?&amp;quot; 한 달 만에 간신히 열람 허가가 떨어졌다.&lt;br /&gt; &lt;br /&gt; 지난달 30일 수원 가톨릭의대 성빈센트병원에서 만난 박씨는 &amp;quot;이후 10년 넘게 매일 도서관에 가서 외규장각 도서의 목차를 베끼고 내용을 요약했다&amp;quot;며 &amp;quot;점심시간에 자리를 비우면 책을 일찍 반환하라고 할까 봐 밥도 안 먹었다&amp;quot;고 했다.&lt;br /&gt; &lt;br /&gt; 1980년대 주불 한국문화원장을 지낸 인사는 &amp;quot;파리의 한인들 사이에 박씨가 밥도 안 먹고 외규장각 도서를 베끼고 있다는 소식이 파다했다&amp;quot;며 &amp;quot;도서관 바깥으로 그를 불러내 억지로 도시락을 먹이며 &amp;#39;이걸 다 먹어야 도로 들여보내주겠다&amp;#39;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기도 했다&amp;quot;고 말했다.&lt;br /&gt; &lt;br /&gt; 성빈센트병원에서 만난 박씨는 암 투병 중이었다. 병인양요에 대한 한국 사료를 모으러 지난 9월 서울에 날아왔다가 격렬한 복통으로 병원에 갔다. 의료진이 직장암 4기를 선고했다. 그는 무너지거나 흐트러지는 대신 또렷하게 말했다. &amp;quot;내 연구를 정리하려면 아직 1년 정도 시간이 더 필요해요. 그 1년만 주어진다면 하느님께 정말 감사할 것 같아요.&amp;quot;&lt;br /&gt; &lt;br /&gt; 그는 인터뷰를 세 번 거절했다. &amp;quot;아픈 걸 보여주는 게 싫다&amp;quot;고 했다. 간병인이 그런 뜻을 전하며 병실문을 닫았다. 문틈으로 흰 시트에 놓인 노인의 야윈 발이 보였다. 네 번째 찾아갔을 때 그는 비로소 마음을 열었다. 그는 &amp;quot;내가 평생 병인양요 연구에 골몰한 것은 설명이 필요없는 당연한 이치&amp;quot;라고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5남매 중 셋째다. 경기여고와 서울대 사범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민간인 여성 가운데 최초로 프랑스 유학 비자를 받은 사람이었다.&lt;br /&gt; &lt;br /&gt; &amp;quot;나는 6·25전쟁 직후에 프랑스에 건너갔어요. 한국사람이면 당연히 병인양요에 관심을 가지지 않겠어요? 애초에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취직한 것도 외규장각 도서를 찾기 위해서였어요. 프랑스 함대가 가져간 책이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있다는 풍문을 들었거든요. 호랑이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죠.&amp;quot;&lt;br /&gt; &lt;br /&gt; 도서관에 근무하던 시절, 박씨는 틈만 나면 서고를 뒤졌다. 서고를 나설 때면 먼지 때문에 목이 칼칼했다. 동료들은 일에 미친 박씨를 &amp;#39;참 이상한 사람&amp;#39;이라고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프랑스국립도서관을 그만둔 뒤에는 연금으로 생계를 꾸리며 누구도 보상하지 않는 연구를 계속했다. 그는 10권 넘는 학술서를 썼다.&lt;br /&gt; &lt;br /&gt; &amp;quot;연구하고 또 연구하는 것이 평생 내 일이었어요. 결혼을 하지 않은 것도 내가 너무 에고이스트(이기주의자)라 그랬나 봐요. 좋은 아내, 좋은 어머니가 될 자신이 없었던 거지요.&amp;quot;&lt;br /&gt; &lt;br /&gt; 학자로서 그는 남들이 평생 한 번 이루기 힘든 업적을 여러 번 이뤘다. 그는 단순히 직지심체요절을 찾아낸 사람이 아니라, 이 책이 1455년에 나온 &amp;#39;구텐베르크 성서&amp;#39;보다 78년이나 빠른 금속활자본임을 증명한 사람이다.&lt;br /&gt; &lt;br /&gt; 그는 &amp;quot;처음부터 이건 우리 불경이고, 나아가 금속활자본이 맞다고 확신했다&amp;quot;고 말했다. 그는 자기 감(感)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해, 파리의 인쇄소와 신문사에서 금속활자 주형을 얻어다 집에서 직접 찍어봤다. 납활자를 만들어 찍어보느라 세 번이나 집에 불을 낼 뻔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불교의 게송(偈頌·부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찬탄하는 노래)을 적은 오래된 종이 위에서 미세한 금속 부스러기를 찾아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amp;#39;개인 박병선&amp;#39;의 일상은 고독했다. 그는 &amp;quot;프랑스 사람들이 나를 미워한 건 이해한다&amp;quot;고 했다. &amp;quot;내가 놀란 건 한국 정부의 반응이었어요. 처음에는 &amp;#39;뭐하러 이런 걸 찾아내서 귀찮게 하냐&amp;#39;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거든요. 마음고생을 많이 했지요. 나중에 전 국민적인 반환운동이 일어나자 정부가 태도를 바꿨어요.&amp;quot;&lt;br /&gt; &lt;br /&gt;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에 대한 사료를 찾아내는 작업도 했다. 그는 &amp;quot;임정(臨政)이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租界·외국인이 자유롭게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에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에 임정과 관련된 사료가 굉장히 많다&amp;quot;며 &amp;quot;우리 세대가 죽고 그 모든 사료가 흩어지기 전에 모든 걸 찾아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amp;quot;고 했다. 그는 관련 자료를 모아 총 다섯 권짜리 책을 낼 계획이었지만, 1권이 나온 뒤 우리 정부의 지원이 끊겨 중단했다.&lt;br /&gt; &lt;br /&gt; 인터뷰를 거절했을 때나, 수락하고 마주 앉았을 때나 그는 변함없이 꼬장꼬장했다. 은발은 정갈하고 얼굴은 맑았다. 의료진은 &amp;quot;통증이 극심할 텐데 내색을 안 한다&amp;quot;고 했다. 간병인은 &amp;quot;내게 뭘 부탁하거나 시키는 경우가 거의 없다&amp;quot;며 &amp;quot;암 환자를 오래 돌봤지만 이런 분은 처음 본다&amp;quot;고 했다.&lt;br /&gt; &lt;br /&gt; 그는 프랑스 공무원 신분으로 한국 문화재를 찾아냈다. 이후 프랑스 공무원 연금으로 생계를 꾸리며 우리 역사를 연구했다. 우리 정부는 그에게 훈장을 줬다. 지인들은 &amp;quot;평생 프랑스 연금으로 생활하면서 돈이 안 되는 연구를 계속한 분이라 재산이 없다&amp;quot;고 발을 굴렀다.&lt;br /&gt; &lt;br /&gt; 청주성모병원의 이현로 원장신부는 &amp;quot;간병인 비용은 우리 병원에서 대고 있지만, 입원비와 치료비가 대책이 없다&amp;quot;며 &amp;quot;한평생 자기 재산을 털어 우리나라를 위한 일을 한 분이라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뜻있는 지인들이 백방으로 뛰고 있다&amp;quot;고 했다.&lt;br /&gt; &lt;br /&gt; 이런 말이 귀에 들어가면, 그는 크게 화를 냈다. 인터뷰를 여러 번 거절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amp;#39;개인의 병&amp;#39;보다는 &amp;#39;국가의 일&amp;#39;을 얘기하고 싶어했다. 집필 중인 역사서 얘기가 나오면 병상에서도 신이 나서 몸을 들썩거렸다.&lt;br /&gt; &lt;br /&gt; &amp;quot;병인양요가 일어나게 된 사회적·정치적 배경을 밝힌 책이에요. 당시의 일기·편지 등을 갖고 있는 사람이 나타났으면 좋겠어요. 한국에 온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직지심체요절을 찾아낸 것도, 외규장각 도서를 연구한 것도 다 내가 좋아서, 나를 위해서 한 일이에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걸 연구해서 제대로 알리는 일이 얼마나 짜릿한지 안 해본 사람은 몰라요.&amp;quot;&lt;br /&gt; &lt;br /&gt; 그는 옛날 얘기, 학문 얘기를 하다 재미난 대목이 나오면 한국식으로 &amp;quot;어머!&amp;quot; 하는 대신 프랑스 여자처럼 &amp;quot;올랄라!&amp;quot; 했다.&lt;br /&gt; &lt;br /&gt; 27살에 한국을 떠난 박씨는 &amp;#39;지금 제일 하고 싶은 일&amp;#39;로 &amp;quot;기운을 차리고 파리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 프랑스 음식을 먹는 것, 병인양요에 대한 책을 마치는 것&amp;quot;을 꼽았다. 프랑스국립도서관 직원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외규장각 도서를 펼쳐놓고 있는 박씨를 보고 &amp;#39;파란 책에 파묻힌 여자(la femme cachee derrie relelivrebleu)&amp;#39;라고 했다. 외규장각 도서 표지가 파란색이었다. &lt;br&gt;&lt;br&gt;&lt;br&gt;&lt;br&gt;&lt;br /&gt; &lt;br /&gt; &lt;br /&gt; &lt;b&gt;[사람과 이야기] &amp;quot;박병선 기금·학술상 만들자&amp;quot;… 온정 쏟아져 &lt;/b&gt;&lt;br&gt;&lt;br /&gt; &lt;br /&gt; [정정내용 있음]변희원 기자 nastyb82@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lt;br /&gt; 기사 100자평(0)             입력 : 2009.11.10 03:29 / 수정 : 2009.11.10 11:53&lt;br&gt;&lt;br&gt;&lt;br&gt;&lt;br /&gt; &lt;br /&gt; &lt;br /&gt; 기업들·청주시 모금 운동 직장암 투병 박병선 박사 &amp;quot;빨리 일어나겠다&amp;quot; 강한 의지&lt;br /&gt; &lt;br /&gt;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amp;#39;직지심체요절(직지심경)&amp;#39;과 외규장각 도서를 찾아낸 재불(在佛) 학자 박병선(81) 박사가 사료 수집차 한국을 찾았다가 암으로 쓰러졌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각계에서 뜨거운 성원이 쏟아지고 있다. &lt;br /&gt; &lt;br /&gt; 박씨가 한평생 문화재 연구에 전념하느라 재산이 없어 지인들이 발을 구르고 있다는 사연이 보도된 뒤, 기업과 일반인 사이에서 &amp;quot;박씨의 치료비를 마련하고 연구를 지원하자&amp;quot;는 움직임이 속속 가시화되고 있다.&lt;br /&gt; &lt;br /&gt; 웅진코웨이(사장 홍준기)는 회사 차원에서 &amp;#39;박병선 기금&amp;#39;을 마련해 박씨의 치료비를 대고, 앞으로 박씨의 연구를 잇는 데 기여할 계획이라고 9일 밝혔다. 웅진코웨이 관계자는 &amp;quot;직지심체요절과 외규장각 도서를 찾아내고 해석하는 데 평생을 바친 박씨의 정신을 기리는 뜻에서 &amp;#39;박병선 학술상&amp;#39;(가칭)을 제정해 후학들에게 수여하는 방안을 추진 중&amp;quot;이라고 했다.&lt;br /&gt; &lt;br /&gt; 삼성화재, 신한은행, 한독약품 등은 문화재청과 협약을 맺고 &amp;#39;문화재 지킴이&amp;#39;로 활동해온 8개 기업도 자체적으로 모금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박씨의 투병과 연구를 돕기 위해서다. &amp;#39;문화재 지킴이&amp;#39;는 문화재청 주선으로 기업 특정 문화재를 정해 각종 보호사업을 후원하게 하는 제도다. 문화재청 직원들도 협약 기업들과 발맞춰 자체적으로 모금에 들어갔다.&lt;br /&gt; &lt;br /&gt;  &lt;img src=&quot;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0911/09/2009110901611_0.jpg&quot;&gt;&lt;font size=&quot;1&quot; face=&quot;&amp;#x00ad74;&amp;#x00b9bc;&quot;&gt;&lt;br /&gt; ▲ 9일 오전 11시쯤 경기도 수원 성빈센트병원에서 재불 서지학자 박병선 박사가 지인 이 선물한 규장각 관련 도서를 읽고 있다. 박씨는 암 투병 중에도 역사서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변희원 기자&lt;br /&gt; &lt;/font&gt;&lt;br&gt;&lt;br /&gt;  &lt;br /&gt; 청주시도 박씨를 돕기 위해 공식 모금 운동에 나섰다. 청주시는 직지심체요절이 인쇄된 흥덕사가 있는 곳으로, 2006년부터 매년 &amp;#39;청주직지축제&amp;#39;를 열고 있다. 청주시는 충북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지정계좌(농협 301-0034-9322-11)를 개설하고, 공무원과 민간인의 자발적인 성금을 받고 있다. 청주시는 지난 7월부터 위기 가정을 돕기 위해 매월 일정액을 적립해온 &amp;#39;천사(1004) 나눔운동&amp;#39; 기금에서도 치료비를 지원할 방침이다.&lt;br /&gt; &lt;br /&gt; 본지에도 학생, 가정주부, 회사원 등 일반인 50여명이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성금을 전하겠다는 뜻을 밝혀왔다. 한 대기업 계열사 임원은 &amp;quot;지금까지 돈이나 명예에 급급해 살아왔는데, 옳다고 생각한 일에 한평생을 던진 박씨의 삶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amp;quot;며 &amp;quot;박씨를 돕는 것을 시작으로 앞으로 다른 사람과 사회에 관심을 갖겠다&amp;quot;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내왔다. 박민재(6)군은 부모의 도움을 받아 &amp;quot;할머니가 빨리 나아서 역사책을 많이 많이 쓰길 기도하고 있다&amp;quot;는 이메일을 보내왔다.&lt;br /&gt; &lt;br /&gt; 박씨가 입원 중인 수원 가톨릭의대 성빈센트병원에는 지인들의 문병이 이어졌다. 해외 유력 언론에서 활동하는 원로 언론인 피터 현(72)씨는 &amp;quot;프랑스 음식이 먹고 싶다&amp;quot;는 박씨를 위해 치즈와 바게뜨 등을 가져왔다. 2003~2007년 주불(駐佛) 한국대사를 지낸 외교관 주철기(63)씨도 부인과 함께 박씨의 병실을 찾았다. 주씨는 한평생 연구실도 없이 집과 도서관을 전전하며 외롭게 외규장각 도서 해석 작업을 해온 박씨를 위해 한국대사관의 사무실 한 칸을 내줬던 사람이다. 재불 화가 이성자(1918~2009) 화백의 아들 신용극(64) 유로통상 회장, 유인촌(58)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도 쾌유를 비는 꽃을 보냈다.&lt;br /&gt; &lt;br /&gt; 박씨는 &amp;quot;이렇게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격려해 주실 줄 몰랐다&amp;quot;며 &amp;quot;빨리 일어나서 병인양요 연구를 마무리하고, 독립운동사 연구도 정리하고 싶다&amp;quot;고 했다.&lt;br /&gt; &lt;br /&gt; 박씨는 1967~1980년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근무하면서 3000만 종 이상의 장서를 뒤져 직지심체요절과 외규장각 도서 297권을 찾아내 문화재 반환 운동에 불씨를 댕겼다. 지난 9월 초 병인양요 관련 사료를 수집하기 위해 방한한 박씨는 복통으로 병원을 찾았다가 직장암 4기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다. &lt;br /&gt; &lt;br /&gt; ♣ 바로잡습니다&lt;br /&gt; ▲10일자 A11면 &amp;#39;&amp;quot;박병선 기금·학술상 만들자&amp;quot; 온정 쏟아져&amp;#39; 기사에서 &amp;#39;신용석(68) 유로통상 회장&amp;#39;을 &amp;#39;신용극(64) 유로통상 회장&amp;#39;으로 바로잡습니다. 독자 여러분과 유로통상 관계자들께 사과드립니다. &lt;br&gt;&lt;br&gt;&lt;br&gt;&lt;br&gt;&lt;br /&gt; &lt;br /&gt;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심경’을 찾은 재불(在佛) 서지학자 박병선(81) 박사가 외롭게 암투병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본지 3일자 보도) 박씨를 돕고 싶다는 네티즌들의 성원이 이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1955년 프랑스로 유학간 박병선 박사는 박사 학위를 받은 후 1967년부터 13년 동안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근무하면서 서고를 뒤져 소문으로만 돌던 ‘직지심체요절’과 외규장각 도서 297권을 찾아내 한국 측에 그 존재를 알렸다. 이후 임시정부와 병인양요 관련 사료 수집을 계속해온 박 박사는 지난 9월 한국에 왔다가 심한 복통으로 병원을 찾았다가 직장암 4기라는 판정을 받아 성빈센트 병원에 입원 치료 중이다.&lt;br /&gt; &lt;br /&gt; 네티즌들은 박병선 박사의 쾌유를 빌면서 금전적으로 돕고 싶다는 의사도 밝히고 있다. 조모씨는 “박사님 치료비라도 보탤 수 있도록 계좌번호를 알려주었으면 좋겠다”며 “정말 고귀한 인생이다. 부디 쾌차하십시오”라는 반응을 보였다. 김모씨는 “박 박사가 완치될 수 있도록 다 함께 정성을 모으자”고 제안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박 박사는 평생 독신으로 프랑스 정부의 연금으로 살아와 현재 입원비와 치료비도 부족한 것으로 알려졌다. 병원 관계자는 “암 선고 때에도 ‘내 연구를 정리하는데 1년이 더 필요하다’고 의연한 모습이었다‘”며 &amp;quot;뜻있는 지인들이 백방으로 뛰고 있다&amp;quot;고 전했다. &lt;/span&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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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1 Nov 2009 06:58:53 +0900</pubDate>
    <category><![CDATA[생생 역사]]></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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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아이폰 내달 출시 ‘스마트폰 대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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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 color=&quot;#6b6b6b&quot;&gt;&lt;strong&gt;ㆍ아~이폰이다!… 당신의 선택은?&lt;br&gt;ㆍ&lt;/strong&gt;&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BE%D6%C7%C3+%BE%C6%C0%CC%C6%F9&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lt;strong&gt;애플 아이폰&lt;/strong&gt;&lt;/font&gt;&lt;/a&gt;&lt;strong&gt;, 다양한 유·무료 애플리케이션… 한글 콘텐츠 미비·충전 불편&lt;br&gt;ㆍ삼성 옴니아 2, 활용 가능 애플리케이션 많아 가격 강점… 터치감은 떨어져 &lt;br&gt;&lt;/strong&gt;&lt;br&gt;&lt;br&gt;&lt;/font&gt;아이폰의 국내 상륙이 초읽기에 들어갔다.&lt;br&gt;&lt;br&gt;&lt;!--imgtbl_start_4--&gt;&lt;/font&gt;&lt;/font&gt;&lt;div class=&quot;article_photo_right&quot;&gt;&lt;div class=&quot;article_photo&quot; style=&quot;WIDTH:268px;&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img src=&quot;http://img.khan.co.kr/news/2009/11/18/20091119.01100117000007.04M.jpg&quot;&gt;&lt;/font&gt;&lt;/div&gt;&lt;br&gt;&lt;br&gt;&lt;br&gt;&lt;/div&gt;&lt;!--imgtbl_end_4--&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18일 국내 판매에 필요한 정부의 정식 허가를 받았다. 세계 정보기술(IT) 업계 ‘태풍의 눈’으로 등장한 아이폰의 성공신화가 한국에서도 이어질지가 최대 관심사다.&lt;br&gt;&lt;br&gt;&lt;font class=&quot;article_txt&quot;&gt;아이폰 제조사인 애플(애플코리아)은 이날 방송통신위원회의 &lt;font style=&quot;CURSOR:hand;COLOR:#3d46a8;TEXT-DECORATION:underline;&quot;&gt;위치정보&lt;/font&gt;사업 허가를 정식으로 받았다.&lt;/font&gt;&lt;br&gt;&lt;br&gt;&lt;font class=&quot;article_txt&quot;&gt;아이폰을 들여오는 &lt;font style=&quot;CURSOR:hand;COLOR:#3d46a8;TEXT-DECORATION:underline;&quot;&gt;KT&lt;/font&gt;는 28일 선착순 판매 행사를 시작으로 12월부터 대대적인 마케팅 공세를 펼 계획이다.&lt;/font&gt;&lt;br&gt;&lt;br&gt;KT는 아이폰이 세계 시장에서 3500만대가 팔린 히트상품인 데다 국내에도 마니아층이 많아 최대 50만대 이상은 팔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삼성전자가 SK텔레콤을 통해 지난달 16일 내놓은 ‘T옴니아2’도 하루 1200대의 개통 실적을 올리며 수성작전에 나서 승부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lt;br&gt;&lt;br&gt;◇아이폰이 뭐기에=아이폰의 경쟁력은 다양한 애플리케이션과 이를 사고 파는 장터인 앱스토어에 있다. 애플리케이션은 휴대전화에서 다양한 기능을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일종의 응용 프로그램이다. 이를 통해 게임이나 MP3는 물론 음악 편곡·포토샵·동영상·지도찾기 기능을 사용할 수 있다.&lt;br&gt;&lt;br&gt;&lt;!--imgtbl_start_2--&gt;&lt;/font&gt;&lt;/font&gt;&lt;div class=&quot;article_photo_right&quot;&gt;&lt;div class=&quot;article_photo&quot; style=&quot;WIDTH:171px;&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img src=&quot;http://img.khan.co.kr/news/2009/11/18/20091119.01100117000007.02S.jpg&quot;&gt; &lt;/font&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애플 아이폰&lt;/font&gt;&lt;/p&gt;&lt;/div&gt;&lt;/div&gt;&lt;!--imgtbl_end_2--&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애플이 운영하는 앱스토어에는 10만건 이상의 애플리케이션이 올라와 있다. 아이폰 사용자는 이를 대부분 무료로 내려받아 사용할 수 있다. 아직까지 한글 콘텐츠는 많지 않지만 아이폰이 국내에 보급될 경우 애플리케이션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lt;br&gt;&lt;br&gt;터치감이 부드럽고 빠른 것도 아이폰의 강점이다. 손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자기를 이용하는 정전식 터치스크린을 사용해 어느 제품보다 터치감이 좋다. &lt;br&gt;&lt;br&gt;미끈한 디자인을 강조하다 보니 배터리가 내장돼 갈아낄 수 없다는 게 큰 흠이다. 배터리를 따로 충전해서 사용할 수 없다. &lt;br&gt;&lt;br&gt;DMB나 영상통화, 장문메시지(MMS) 기능이 지원되지 않는 것도 단점이다. 애프터서비스(AS)망도 약해 골치를 썩일 가능성이 높다. 애플은 제품이 고장나면 수리해주는 대신 새 제품을 30~40% 할인된 가격에 사도록 하는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lt;br&gt;&lt;br&gt;&lt;font class=&quot;article_txt&quot;&gt;국내 출고가는 아직 미정이다. 그러나 99달러(3G), 199달러(3&lt;font style=&quot;CURSOR:hand;COLOR:#3d46a8;TEXT-DECORATION:underline;&quot;&gt;GS&lt;/font&gt; 16GB), 299달러(3GS 32GB)에 맞춰져 있는 애플의 전 세계 판매가격 정책에 따라 국내에서도 비슷한 수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3GS 16GB 제품의 경우 약정·요금제에 따라 보조금 40만~50만원을 받으면 30만원대에 구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lt;/font&gt;&lt;br&gt;&lt;br&gt;&lt;!--imgtbl_start_3--&gt;&lt;/font&gt;&lt;/font&gt;&lt;div class=&quot;article_photo_right&quot;&gt;&lt;div class=&quot;article_photo&quot; style=&quot;WIDTH:115px;&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img src=&quot;http://img.khan.co.kr/news/2009/11/18/20091119.01100117000007.03S.jpg&quot;&gt; &lt;/font&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삼성 옴니아 2&lt;/font&gt;&lt;/p&gt;&lt;/div&gt;&lt;/div&gt;&lt;!--imgtbl_end_3--&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아이폰의 대항마는 어떤 제품=아이폰의 파괴력이 ‘찻잔 속의 태풍’이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삼성·LG전자가 아이폰의 공세에 맞서 다양한 스마트폰 라인업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lt;br&gt;&lt;br&gt;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삼성전자의 옴니아다. ‘T옴니아2’는 최근 하루 개통 대수가 1200대를 기록하며 판매 순위 1위에 올라있다.&lt;br&gt;&lt;br&gt;800MHz의 CPU와 3.7인치 AMOLED 화면, 500만화소 카메라, DMB 지원 등 하드웨어에 있어 아이폰을 크게 앞선다는 평가다. 국내 스마트폰 시장의 95%를 차지하고 있는 윈도 모바일 운영체계(OS)를 채택해 한글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하는 데도 유리하다. &lt;br&gt;&lt;br&gt;가격 경쟁력도 T옴니아2가 앞설 것으로 보인다. KT와의 가입자 경쟁에 민감한 SK텔레콤이 아이폰에 대응하기 위해 T옴니아2를 밀어줄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T옴니아2는 각종 보조금과 할인혜택을 받으면 20만원대 이하로도 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lt;br&gt;&lt;br&gt;내년에는 삼성과 LG, 팬택 등이 구글의 새로운 OS ‘안드로이드’를 탑재한 구글폰을 선보일 예정이어서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lt;br&gt;&lt;br&gt;&amp;lt;박지희기자 violet@kyunghyang.com&amp;gt;&lt;!-- BODY END --&gt; &lt;br&gt;&lt;/fon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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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9 Nov 2009 07:36:37 +0900</pubDate>
    <category><![CDATA[디지털 세상]]></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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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무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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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embed allowscriptaccess=&quot;never&quot;  type=&quot;video/x-ms-wmv&quot; src=&quot;http://mediafile.paran.com/MEDIA_712329/BLOG/200410/1098294692_largo.wmv&quot; width=&quot;1&quot; height=&quot;1&quot; loop=&quot;-1&quot;&gt;&lt;br /&gt; &lt;br /&gt; &lt;br /&gt; &lt;img src=&quot;http://cfs5.tistory.com/image/6/tistory/2008/03/11/14/14/47d615254f55f&quot;&gt;&lt;br /&gt; 사진 - 최민식 님,&lt;br /&gt; &lt;br /&gt; &lt;br /&gt; 찌그러기만 하는  내 영혼을 한번씩 둥그런 보름달에 빠락빠락 빨아,&lt;br /&gt; 맑은 햇살 아래 말리고 싶더니, 오늘 이 노래에 다시 내 영혼을 푹 담갔다 건지면 &lt;br /&gt; 맨날 허상에 얽매이는  내 본성이 평상심을 찾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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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7 Nov 2009 10:54:13 +0900</pubDate>
    <category><![CDATA[마음의 쉼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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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신종플루 보다 더 치사율 높은 바이러스 동유럽 확산 비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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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div class=&quot;d&quot;&gt;&lt;span class=&quot;d1&quot;&gt;[뉴시스] 2009년 11월 17일(화) 오전 01:40&lt;/span&gt; &lt;span class=&quot;d2&quot; id=&quot;chg_fsize&quot;&gt;가&lt;img id=&quot;fontSizeBig&quot; style=&quot;CURSOR:　pointer;&quot; src=&quot;http://img.yahoo.co.kr/md/2006/news/i_pls.gif&quot; align=&quot;absMiddle&quot;&gt;&lt;/span&gt;&amp;nbsp;&amp;nbsp;가&lt;img id=&quot;fontSizeSmall&quot; style=&quot;CURSOR:　pointer;&quot; src=&quot;http://img.yahoo.co.kr/md/2006/news/i_mns.gif&quot; align=&quot;absMiddle&quot;&gt;&lt;/div&gt;&lt;font color=&quot;#c3c3c3&quot;&gt;|&lt;/font&gt; &lt;a&gt;이메일&lt;/a&gt;&lt;font color=&quot;#c3c3c3&quot;&gt;|&lt;/font&gt; &lt;a&gt;프린트&lt;/a&gt; &lt;span class=&quot;d2_readcont&quot; id=&quot;show_opt&quot; style=&quot;DISPLAY:none;&quot;&gt;&lt;a&gt;&lt;img src=&quot;http://img.yahoo.co.kr/md/2007/reply/btn_atcview1017.gif&quot;&gt;&lt;/a&gt;&lt;/span&gt; &lt;div class=&quot;c&quot; id=&quot;content&quot;&gt;【워싱턴=뉴시스】최철호 특파원 = 최근 유럽에서 &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BD%C5%C1%BE%C7%C3%B7%E7&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신종플루&lt;/font&gt;&lt;/a&gt;(&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H1N1&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H1N1&lt;/font&gt;&lt;/a&gt;) 보다 더 치명적이며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가 확산되면서 우려를 주고 있다.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최근 동유럽의 &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BF%EC%C5%A9%B6%F3%C0%CC%B3%AA&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우크라이나&lt;/font&gt;&lt;/a&gt;에서 발생한 &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BD%C5%C1%BE+%C0%CE%C7%C3%B7%E7%BF%A3%C0%DA&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신종 인플루엔자&lt;/font&gt;&lt;/a&gt;가 치사율이 높은 가운데 빠른 확산 속도를 보이면서 신종플루 보다 더 우려를 주고 있는 것을 확인, 유럽 국가들과 함께 조사에 들어갔다.&lt;br&gt;&lt;br&gt;치사율이 높은 이번 인플루엔자는 바이러스성 폐렴을 일으키는 것으로 우크라이나에서 발생, 이미 200명 가까이를 숨지게 한 뒤 급속도로 번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lt;br&gt;&lt;br&gt;빅토르 유스첸코 우크라이나 &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B4%EB%C5%EB%B7%C9&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대통령&lt;/font&gt;&lt;/a&gt;은 16일 &amp;quot;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amp;quot;고 호소하고 &amp;quot;이번 질병은 확산되면서 의사들도 죽게 하고 있으며, 21세기에 전혀 파악되지 않은 종류이다&amp;quot;고 국민들에게 경고했다.&lt;br&gt;&lt;br&gt;유스첸코 대통령은 &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BC%BC%B0%E8%BA%B8%B0%C7%B1%E2%B1%B8&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세계보건기구&lt;/font&gt;&lt;/a&gt;(WTO)에 전문인력의 파견을 호소, 이미 4명의 WHO 방역전문가들이 현지에서 조사를 벌이고 있으며, 병원균 샘플을 영국 런던으로 보내 원인규명에 나서고 있다.&lt;br&gt;&lt;br&gt;CDC 등 전문가들은 이번 인플루엔자가 신종플루와는 다른 종류의 것으로, 두 가지의 평범한 감기 바이러스와 캘리포니아 플루로 불리는 바이러스가 합쳐져 이룬 변종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lt;br&gt;&lt;br&gt;그러나 치사율이 신종플루 보다 더 높은 것으로 지적되는데다 전염속도도 빠른 것으로 지적된다.&lt;br&gt;&lt;br&gt;이 때문에 이미 우크라이나에서는 현재 약 100만명이 감염돼 앓고 있으며, 이 가운데 19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lt;br&gt;&lt;br&gt;유스첸코 대통령은 &amp;quot;전문가들이 이번 질병은 서로 다른 바이러스가 합쳐진 것으로 결론내고 있으며, 변종을 만들어내면서 더욱 공격적으로 됐다고 밝히고 있다&amp;quot;고 말했다.&lt;br&gt;&lt;br&gt;현재 이 감염은 우크라니아의 &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C5%B0%BF%A1%C7%C1&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키에프&lt;/font&gt;&lt;/a&gt;와 르비프시 지역에 광범위하게 확산된 상태이며, 현지 병원 응급실에서는 감염환자들로 붐비는 등 비상상황이다.&lt;br&gt;&lt;br&gt;&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C0%B2%B8%AE%BE%DF+%C6%BC%B8%F0%BC%BE%C4%DA&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율리야 티모센코&lt;/font&gt;&lt;/a&gt; 총리는 이 때문에 병원을 찾아 감염환자와 가족들을 위로하는 등 실태파악에 나서고 있기도 하다.&lt;br&gt;&lt;br&gt;우크라이나는 이 때문에 내년 1월에 예정된 대통령 선거를 취소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lt;br&gt;&lt;br&gt;현지 병원의 의사 마이론 보르세비치는 &amp;quot;숨진 환자는 22살에서 35세 사이었으며, 앓고 있는 다른 두 명의 환자는 60대이다&amp;quot;고 말하고 &amp;quot;이미 검사 결과 등을 키에프로 보냈으며, 이는 H1N1과는 다른 것으로, 현재 아무도 이 폐렴을 일으키는 병원균에 대해 알지 못한다&amp;quot;고 말했다.&lt;br&gt;&lt;br&gt;hay@newsis.com&lt;br&gt;&lt;/div&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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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7 Nov 2009 07:30:07 +0900</pubDate>
    <category><![CDATA[마음가는 대로]]></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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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39;땜방사장&#39; 이병순과 &#39;돌아온 낙하산&#39; 김인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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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div class=&quot;t&quot; id=&quot;title&quot;&gt;&lt;b&gt;&lt;/b&gt;&amp;nbsp;&lt;/div&gt;&lt;div class=&quot;d&quot;&gt;&lt;span class=&quot;d1&quot;&gt;[오마이뉴스] 2009년 11월 12일(목) 오후 07:00&lt;/span&gt; &lt;span class=&quot;d2&quot; id=&quot;chg_fsize&quot;&gt;가&lt;img id=&quot;fontSizeBig&quot; style=&quot;CURSOR:　pointer;&quot; src=&quot;http://img.yahoo.co.kr/md/2006/news/i_pls.gif&quot; align=&quot;absMiddle&quot;&gt;&lt;/span&gt;&amp;nbsp;&amp;nbsp;가&lt;img id=&quot;fontSizeSmall&quot; style=&quot;CURSOR:　pointer;&quot; src=&quot;http://img.yahoo.co.kr/md/2006/news/i_mns.gif&quot; align=&quot;absMiddle&quot;&gt;&lt;/div&gt;&lt;font color=&quot;#c3c3c3&quot;&gt;|&lt;/font&gt; &lt;a&gt;이메일&lt;/a&gt;&lt;font color=&quot;#c3c3c3&quot;&gt;|&lt;/font&gt; &lt;a&gt;프린트&lt;/a&gt; &lt;span class=&quot;d2_readcont&quot; id=&quot;show_opt&quot; style=&quot;DISPLAY:none;&quot;&gt;&lt;a&gt;&lt;img src=&quot;http://img.yahoo.co.kr/md/2007/reply/btn_atcview1017.gif&quot;&gt;&lt;/a&gt;&lt;/span&gt; &lt;div class=&quot;c&quot; id=&quot;content&quot;&gt;[오마이뉴스 김갑수 기자]&lt;font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color=&quot;#996633&quot;&gt;&lt;br&gt;&lt;table width=&quot;10&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gt;&lt;img title=&quot;&amp;#x00d074;&amp;#x00b9ad;&amp;#x00d558;&amp;#x00c2dc;&amp;#x00ba74; &amp;#x00c6d0;&amp;#x00bcf8;&amp;#x00d06c;&amp;#x00ae30;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amp;#x00b97c; &amp;#x00bcf4;&amp;#x00c2e4; &amp;#x00c218; &amp;#x00c788;&amp;#x00c2b5;&amp;#x00b2c8;&amp;#x00b2e4;.&quot; style=&quot;MARGIN:5px 0px;CURSOR:　hand;&quot; src=&quot;http://l.yimg.com/go/news/picture/2009/24/20091112/2009111219000788224_190505_0.jpg&quot; border=&quot;0&quo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gt;&lt;table style=&quot;MARGIN:0px;&quot; width=&quot;491&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 width=&quot;489&quot; colSpan=&quot;2&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9pt;&quot;&gt;&lt;b&gt;▲ &lt;/b&gt;왼쪽부터 강동순 전 KBS 감사, &lt;/font&gt;&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B1%E8%C0%CE%B1%D4&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9pt;&quot; color=&quot;#000000&quot;&gt;김인규&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9pt;&quot;&gt; 한국디지털미디어산업협회 회장, &lt;/font&gt;&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C0%CC%BA%B4%BC%F8&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9pt;&quot; color=&quot;#000000&quot;&gt;이병순&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9pt;&quot;&gt; 현 KBS 사장. &lt;/fon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 width=&quot;469&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9pt;&quot;&gt;ⓒ 오마이뉴스&lt;/font&gt;&lt;/td&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righ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8pt;BACKGROUND-COLOR:#e1e1e1;&quot;&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amp;quot;이제 KBS도 거듭나야 한다.&amp;quot;&lt;/font&gt;&lt;/p&gt;&lt;/font&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이것은&amp;nbsp;지난해 8월 11일 &lt;/font&gt;&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C0%CC%B8%ED%B9%DA+%B4%EB%C5%EB%B7%C9&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 color=&quot;#000000&quot;&gt;이명박 대통령&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이 &lt;/font&gt;&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C1%A4%BF%AC%C1%D6&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 color=&quot;#000000&quot;&gt;정연주&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 KBS 사장을 해임하면서 한 말이다. 이 말에서 우리는 이전의 KBS를 죄악시하는 이 대통령의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amp;nbsp; &amp;#39;거듭나다&amp;#39;라는 말은 주로 기독교에서 쓰는 어휘로서, &amp;#39;원죄로 인해 죽었던 영이 예수를 믿어 새 사람이 된다&amp;#39;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lt;/fon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그로부터 1년 남짓, 이 대통령의 말대로 KBS는 거듭났는가? 그의 말대로 KBS는 &amp;#39;원죄&amp;#39;(잃어버린 10년?)를 씻고 새 사람(방송)이 되었는가 말이다.&amp;nbsp;&amp;nbsp;&amp;nbsp;&amp;nbsp; &lt;/fon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돌이켜보건대 이명박 정부가 정연주 사장을 축출하는 데 경주한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로 집요했다. 그들은 임기가 1년여밖에 남지 않은 방송사 사장 하나를 집어내기 위해 국가기관을 동원하여 감사를 벌이고 사장을 무고하고 이사를 불법 축출하고 이사회를 변칙 개최하는 등 별의별 희한한 수단을 다 구사했다.&amp;nbsp;마침내 그것이 효력을 보아 녹록찮게 버티던 사장이 물러나게 된 마당에 대통령으로서 어찌 감회와 희망사항이 없었겠는가? 그래서 대통령은 말했을 터이다. 이제 KBS도 거듭나야 한다고.&lt;/fon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그로부터 1년, 과연 KBS는 거듭났는가&lt;/fon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그때 그의 심중에 어떤 생각이 있었는지 잘 알 수는 없다. 다만 이미 청와대에서는 차기 사장으로 김인규씨를 내정해 놓은 상태였다. 김인규씨는 이명박 대통령의 후보 시절 언론특보로서 방송전략팀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당시는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구본홍 YTN 사장이 낙하산 인사 시비로 YTN 노조원들로부터 드센 저항을 받고 있던 때였다. &lt;/fon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또한 &lt;/font&gt;&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C7%D1%B3%AA%B6%F3%B4%E7&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 color=&quot;#000000&quot;&gt;한나라당&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은 이미 노무현 대통령의 후보 특보를 지낸 서동구 KBS 사장을 &amp;#39;낙하산 인사&amp;#39;라고 하여 부임 9일 만에 몰아낸 전력도 있었다. 그때 한나라당이 내놓은 논평은 오늘에 비추어 다소 희극적이다.&lt;/fon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LINE-HEIGHT:150%;&quot; color=&quot;#996633&quot;&gt;&amp;quot;공영방송을 어용방송으로 만들기 위한 폭거다. 밀실에서 제청된 측근인사의 임명은 대통령의 언론관은 물론 공영방송의 공정성마저 의심케 한다. 우리 당은 국민이 주인인 공영방송을 지키기 위해 모든 양심세력과 연대, 당력을 모아 강력 투쟁할 것이다.&amp;quot; (한나라당 박종희 대변인, 2003년 3월 25일) &lt;/fon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150%;&quot; color=&quot;#996633&quot;&gt;&lt;/font&gt;&lt;br&gt;&lt;/font&gt;&lt;/font&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LINE-HEIGHT:150%;&quot; color=&quot;#996633&quot;&gt;&amp;quot;서 사장 선임 배경으로 현 정권 실세의 개입 의혹이 확산되고 있다. 방송을 정권의 홍위병으로 삼아 포퓰리즘 정치를 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반민주적, 시대착오적 폭거다. 국민이 주인인 공영방송사 사장은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과 코드가 맞고 전문성과 도덕성을 갖추고 있으면서 방송중립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amp;quot; (한나라당 김영일 사무총장, 2003년 3월 26일)&lt;/fon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다시 작년으로 논의를 되돌린다. 그때는 무엇보다도 광우병 촛불 열기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amp;#39;김인규의 대안&amp;#39;을 모색해야 했다. 그들은 8월 11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긴급히 비밀회동을 한다. 이 자리에는 정정길 대통령실장과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 최시중 방통위원장에다 나경원 한나라당 정조위원장 그리고 난데없이 김회선 국정원 제2차장까지 참석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lt;/fon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이것은 이명박 정부가 KBS 사장 자리를 얼마나 중시하는지를 단적으로 알려준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많은 고위급 인사들을 긴급히 회동하게 만들 정도라면 그것이 누구의 뜻에 의한 것인지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아무튼 그들은 공영방송의 후임 사장 자리를 놓고 음험한 밀실 논의를 했다는 혐의를 벗을 수 없었다. &lt;/fon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그래서 그들은 심중에도 없던 이병순 KBS 비즈니스 사장을 궁여지책으로 KBS 사장에 낙점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정연주 사장을 몰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김인규 사장을 앉히는 데에는 실패했다. 요컨대 그들의 KBS 장악 시나리오는 3악장 정도에서 미완으로 남은 셈이었다. 하지만 &amp;#39;이병순 사장&amp;#39;도 어차피 그들의 &amp;#39;선택&amp;#39;이었음은 분명한 것이다. &lt;/fon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그들의 &amp;#39;선택&amp;#39;, 이병순 사장이 벌인 일들&lt;/fon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그들의 &amp;#39;선택&amp;#39;이었던 이병순 사장은 가을개편을 하면서 &amp;lt;미디어포커스&amp;gt;를 &amp;lt;미디어비평&amp;gt;으로, &amp;lt;시사투나잇&amp;gt;을 &amp;lt;시사360&amp;gt;으로 바꾸어 시사성과 비판성을 무디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사장 취임을 반대한 &amp;#39;사원행동&amp;#39; 관련자들을 징계했다. 또한 KBS는 보신각 제야행사를 중계하면서 새로운 화면 조작 테크닉을 선보이기도 했다. &lt;/fon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라디오는 라디오대로 퇴행을 거듭하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정관용, 박인규씨 등 역량 있는 시사 전문가들이 마이크를 놓았다. 시사·뉴스 프로그램들의 진행은 거의 아나운서들이 맡아 따분해졌다.&lt;/fon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KBS는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와 관련한 보도에서는 대다수 국민의 빈축을 샀다. 봉하마을에서 쫓겨난 KBS 뉴스 중계차는 1km 이상 떨어진 들판에서 황소들이 풀을 뜯는 것을 배경으로 중계방송을 하기도 했다. 메인 뉴스인 &amp;lt;뉴스9&amp;gt;에서는 첨예한 현안이었던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 청문회 관련 기사를 11번째 꼭지로 내보냈는데 그것도 야당 의원들의 질문 가운데서 비교적 온건한 부분만을 인용하여 편집한 것이었다.&lt;/fon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한편 KBS 사장을 희망했던 김인규씨는 &amp;#39;이명박 정부를 위해 KBS 사장직을 포기한다&amp;#39;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그는 디지털미디어산업협희 회장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그는 KBS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은 것 같다. 노무현 정부 때도 &lt;/font&gt;&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KBS+%BB%E7%C0%E5+%B0%F8%B8%F0&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 color=&quot;#000000&quot;&gt;KBS 사장 공모&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에 지원한 적이 있는 그가&amp;nbsp;이번 사장 공모에도 다시 지원서를 낸 것이다. 그는&amp;nbsp;지난해 12월 23일 한국방송 기자협회 송년회에 안형환 한나라당 의원 등과 함께 모습을 나타내기도 했다.&lt;/fon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그는&amp;nbsp;지난 1월 6일 서울대 &amp;lt;동문회보&amp;gt;와 인터뷰에서 이례적인 발언으로 주변의 관심을 모았다. 그는 &amp;quot;KBS PD 300명을 들어내도 아무 문제가 없다&amp;quot;면서, &amp;quot;방송 개혁 1번이 PD 개혁&amp;quot; &amp;quot;PD들이 비정상적으로 권력화돼 있다&amp;quot;고 주장했다. 요컨대 그는 방송 PD들에 대한 대폭적인 구조조정을 촉구한 것이다. 아무튼 그가 유난히도 PD를 공격한 의도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런 발언이 누구의 &amp;#39;코드&amp;#39;와 맞는 것인지?&lt;/fon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또한 그는 디지털미디어산업협회 회장으로서 비정상적인 업무 때문에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전병헌 민주당 의원이 낸 보도자료에 의하면 &amp;quot;(이)협회는 창립 때 20억 원, 올 들어 또 20억 원을 추가징수하고도 하반기 들어 수백억 규모의 기금 조성을 위해 통신사들에게 출연금 납부를 요청했으며 통신사들이 난색을 표하자 청와대까지 나서 통신사들을 압박했다&amp;quot;는 것이다. 전 의원은 김인규 회장이 &amp;#39;차기 KBS 사장 및 방송통신위원장으로 거론되는 정권 실세&amp;#39;라고 지적하기도 했다.&lt;/fon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이명박 정권이 낙점한&amp;nbsp;차기 KBS 사장은 누구일까&lt;/font&gt;&lt;/p&gt;&lt;br&gt;&lt;table width=&quot;10&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img title=&quot;&amp;#x00d074;&amp;#x00b9ad;&amp;#x00d558;&amp;#x00c2dc;&amp;#x00ba74; &amp;#x00c6d0;&amp;#x00bcf8;&amp;#x00d06c;&amp;#x00ae30;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amp;#x00b97c; &amp;#x00bcf4;&amp;#x00c2e4; &amp;#x00c218; &amp;#x00c788;&amp;#x00c2b5;&amp;#x00b2c8;&amp;#x00b2e4;.&quot; style=&quot;MARGIN:5px 0px;CURSOR:　hand;&quot; src=&quot;http://l.yimg.com/go/news/picture/2009/24/20091112/2009111219000788224_190505_1.jpg&quot; border=&quot;0&quot;&gt;&lt;/fon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gt;&lt;table style=&quot;MARGIN:0px;&quot; width=&quot;98%&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 colSpan=&quot;2&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b&gt;▲ &lt;/b&gt;이명박 대통령. 사진은 지난 8월 15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제64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는 모습. &lt;/font&gt;&lt;/fon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 청와대&lt;/font&gt;&lt;/td&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righ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lt;/fon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이런 사람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KBS 사장 공모에 응모했을까? &amp;lt;조선일보&amp;gt;는 11일 &amp;#39;KBS 사장 누가?&amp;#39;에서 &amp;quot;현재 KBS 안팎에서는 이병순 현 KBS 사장과 강동순 전 KBS 감사, 권혁부 전 KBS 이사 등이 유력 후보로 꼽힌다&amp;quot;고 전하면서도 &amp;quot;마지막 변수는 김인규 한국디지털미디어산업협회장의 거취라고 보는 의견도 적지 않다&amp;quot;고 보도했다.&lt;/fon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KBS 사장은 형식상 이사회와 사추위가 인선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임명권자는 대통령이다. 10일 마감된 차기 사장 공모에는 이병순 현 한국방송 사장, 김인규 한국디지털미디어산업협회 회장 등 15명이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추위는 13~14일 이틀 동안 공모자들에 대한 서류심사를 진행한다. 이사회는 사추위에서 압축한 5명의 후보를 받아 19일 전체회의를 열어 최종 후보자를 결정한다. 그리고 20일 대통령에게 사장 후보자에 대한 임명을 제청한다. &lt;/fon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다시 말하지만 형식상 그렇다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KBS 사장 인선을 앞두고 이동관 홍보수석을 통해 이례적인 훈수를 두었다. 이 대통령의 발언 내용은 첫째 &amp;#39;KBS 이사회는 책임감과 소명의식을 갖고 최적임자를 뽑아주기 바란다&amp;#39;, 둘째 &amp;#39;신임사장 선임 과정에서 불필요한 정치적 오해나 부적절한 논란이 없도록 선임 절차가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뤄져야 한다&amp;#39;, 셋째 &amp;#39;신임사장은 공영방송으로서 KBS 위상을 회복시킬 수 있는 비전과 철학을 갖추고, 방송통신 융합 시대에 미래 방송 산업의 발전을 선도하는 역할을 다해야 한다&amp;#39;는 것으로 요약된다.&lt;/fon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여기에서 첫째는 의례적인 발언일 뿐이다. 둘째는 작년 사장 선임 때 있었던 실패를 되풀이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아니면 선임 이후 불거질 논란을 예방하기 위해서 한 말일 수도 있다. 의미심장한 것은 셋째 발언으로 보인다. 이 발언은 신임사장의 조건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KBS의 위상을 &amp;#39;회복시킬 수 있는 인물&amp;#39;이라면 이미 1년 동안 재임한 이병순 현 사장은 아니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리고 그 다음 말, &amp;#39;방송통신 융합 시대에 미래 방송 산업을 선도하는 역할을 다해야 한다&amp;#39;는 말이 아주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lt;/fon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최시중 방송통신위원위원장은 금년 초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amp;#39;2009년 방송통신인 신년인사회&amp;#39; 축사에서, &amp;quot;올해는 미디어 빅뱅의 해가 될 것&amp;quot;이라고 예고하고, &amp;quot;구시대의 유물인 매체간 장벽을 과감히 허물고 창의적 아이디어와 능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시장에 진입할 수 있게 해 미디어산업의 체질을 강화시켜 갈 계획&amp;quot;이라고 말한 바 있다. &lt;/fon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이 자리에는 김인규 디지털미디어산업협회장도 참석했는데, 이 발언은 이명박 대통령의 이번 KBS 사장 훈수발언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런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이명박 정권이 낙점한 차기 KBS 사장이 누구인지 추정이 가능해진다.&lt;/fon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방송 파국만 초래하는 방송장악 시나리오&lt;/fon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많은 언론들은 이병순 사장의 유임을 점치기도 하지만 이 사장은 이미 &amp;#39;사원행동&amp;#39;과 노조 등 KBS 대다수 구성원들에게 배척을 받고 있다. 정연주 사장에 대해서도 반대한 바 있는 KBS 노조는 &amp;quot;KBS 내부구성원 76.9%가 연임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고, 지난 1년간 권력에 대한 비판·감시를 제대로 하지 못해 정치권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해내지 못했으며, 무리한 연봉계약직 해고와 제작비 삭감, 비판 프로그램 축소 등을 통해 제작진의 방송에 대한 열정과 창의력을 없애버렸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amp;quot;고 주장한다. &lt;/fon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강동순 전 감사에 대해서는 &amp;quot;2007년 대선 직전 한나라당 집권을 위해 언론을 어떻게 장악할지 논의한 이른바 &amp;#39;녹취록 파문&amp;#39;의 핵심 당사자로 사회적 물의를 빚은 인물&amp;quot;이며 &amp;quot;한나라당의 대선 전략을 조언해주는 &amp;#39;정치 브로커&amp;#39;에 가까운 발언들과 지역 차별 발언, 젊은 판사들에 대한 비하발언 등으로 가득 차 있다&amp;quot;고 하면서 반대를 분명히 했다.&amp;nbsp; 그들은 &amp;#39;김인규 안&amp;#39;에도&amp;nbsp; &amp;#39;낙하산 인사 불가&amp;#39;라는 명목으로 반대하고 있다. &lt;/fon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결국 누가 KBS 사장이 되더라도 아주 심각한 부작용과 후유증을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 KBS의 대다수 구성원들은 파업이 불가피하다고 말하고 있다. 사태는 매우 비관적이다. 이것은 공영방송의 파행과 파국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다. 불행한 것은 누가 사장이 되더라도 KBS의 공영방송체제는 완벽하게 붕괴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불도저 권력을 앞세워 방송장악을 한다고 해도, 그에 대한 심판은 결코 피해갈 수 없다는 점이다.&lt;/fon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KBS 사장 공모자들에 대한 서류심사가 시작되기 하루 전인 12일 정연주 전 KBS 사장이 이명박 대통령을 상대로 낸 해임무효 소송에서 법원이 정 전 사장의 손을 들어준 것은 아주 상징적인 사건이다. &lt;/font&gt;&lt;/p&gt;&lt;br&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0pt;&quot;&gt;이 모든 것은 방송장악에 병적으로 집착한 이명박 정부가 자초한 일이다.&lt;br&gt;&lt;br&gt;&lt;/font&gt;&lt;/p&gt;&lt;/div&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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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7 Nov 2009 06:26:32 +0900</pubDate>
    <category><![CDATA[사설 및 칼럼]]></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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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언제부터 친일행위가 애국이었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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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div class=&quot;t&quot; id=&quot;title&quot;&gt;&lt;b&gt;&lt;/b&gt;&amp;nbsp;&lt;/div&gt;&lt;div class=&quot;d&quot;&gt;&lt;span class=&quot;d1&quot;&gt;[프레시안] 2009년 11월 12일(목) 오전 09:02&lt;/span&gt; &lt;span class=&quot;d2&quot; id=&quot;chg_fsize&quot;&gt;가&lt;img id=&quot;fontSizeBig&quot; style=&quot;CURSOR:　pointer;&quot; src=&quot;http://img.yahoo.co.kr/md/2006/news/i_pls.gif&quot; align=&quot;absMiddle&quot;&gt;&lt;/span&gt;&amp;nbsp;&amp;nbsp;가&lt;img id=&quot;fontSizeSmall&quot; style=&quot;CURSOR:　pointer;&quot; src=&quot;http://img.yahoo.co.kr/md/2006/news/i_mns.gif&quot; align=&quot;absMiddle&quot;&gt;&lt;/div&gt;&lt;font color=&quot;#c3c3c3&quot;&gt;|&lt;/font&gt; &lt;a&gt;이메일&lt;/a&gt;&lt;font color=&quot;#c3c3c3&quot;&gt;|&lt;/font&gt; &lt;a&gt;프린트&lt;/a&gt; &lt;span class=&quot;d2_readcont&quot; id=&quot;show_opt&quot; style=&quot;DISPLAY:none;&quot;&gt;&lt;a&gt;&lt;img src=&quot;http://img.yahoo.co.kr/md/2007/reply/btn_atcview1017.gif&quot;&gt;&lt;/a&gt;&lt;/span&gt; &lt;div class=&quot;c&quot; id=&quot;content&quot;&gt;&lt;b&gt;&lt;font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color=&quot;#1b438d&quot;&gt;[기고] 보수논객 &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C1%B6%B0%A9%C1%A6&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조갑제&lt;/font&gt;&lt;/a&gt;·&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B7%F9%B1%D9%C0%CF&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류근일&lt;/font&gt;&lt;/a&gt;의 &amp;#39;친일옹호론&amp;#39;&lt;/font&gt;&lt;/b&gt;&lt;br&gt;&lt;br&gt;&amp;nbsp;[프레시안 &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C0%CC%C5%C2%B0%E6&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이태경&lt;/font&gt;&lt;/a&gt; 토지정의시민연대 사무처장]&lt;br&gt;&lt;br&gt;&amp;nbsp;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amp;lt;친일인명사전&amp;gt;에 대한 수구진영의 대응이 사납다. 특히 주목할 것은 수구진영의 이념적 교사라 할 조갑제(전 &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BF%F9%B0%A3%C1%B6%BC%B1&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월간조선&lt;/font&gt;&lt;/a&gt; 대표)와 류근일(&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C1%B6%BC%B1%C0%CF%BA%B8&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조선일보&lt;/font&gt;&lt;/a&gt; 논설위원)의 반응이다. 조갑제는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amp;quot;親日派와 親北派 비교&amp;quot;라는 글에서, 류근일은 &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B4%BA%B5%A5%C0%CF%B8%AE&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뉴데일리&lt;/font&gt;&lt;/a&gt;에 기고한 &amp;quot;친일사전 만든 이유&amp;quot;라는 글에서 각각 &amp;lt;친일인명사전&amp;gt;발간을 비판하고 있다.&lt;br&gt;&lt;br&gt;조갑제와 류근일은 자신들의 글에서 친일행위를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서는 불가항력적인 선택이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미 일제에 의해 조선이라는 나라가 사라진 마당에 식민지의 대중과 지식인들이 생계를 위해서건, 출세를 위해서건 체제에 순응한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이를 탓하는 건 가혹한 일이라는 것이 조갑제와 류근일의 주장이다.&lt;br&gt;&lt;br&gt;조갑제와 류근일은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과 식민통치를 불행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가혹함으로 묘사하면서, 그런 가혹한 운명에 내던져진 식민지 조선의 백성들에게는 그에 순응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음을 넌지시 설파하고 있다.&lt;br&gt;&lt;br&gt;조갑제는 이를 &amp;quot;日帝 시대에 한국인의 선택은 抗日독립운동하여 죽거나 감옥에 갈 것인가, 아니면 순응하여 살면서 실력을 길러 독립준비를 할 것인가의 兩者擇一이었다&amp;quot;라고 묘사하고 있다. 류근일 역시 &amp;quot;경술국치(國恥) 이후 조선은 망하고 없었다. 나라 자체가 없어졌다. 조선왕조의 황제라는 작자도, 그 잘난 조선선비라는 작자들도 없었다. 이 황무지에서 조선 엘리트와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야 했던가? 엘리트는 일본제국의 근대적인 교육 과정에 들어가 세계의 문물을 배우면서, 동시에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비애를 느꼈을 것이다. 반면에 대중은 일제의 근대적인 제도를 통해 수리조합원으로, 무엇으로, 먹고 살며 신분상승을 꾀했을 것이다&amp;quot;라고 설명하면서 체념론의 한 극단을 선보이고 있다.&lt;br&gt;&lt;br&gt;이들은 친일행위를 소극적으로 변호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일제하에서 친일행위를 통해 습득한 근대적 지식과 기술이 건국의 기초가 됐다는 적극적 친일옹호론을 펼친다. &amp;quot;朴正熙, 申鉉碻 같은 분들이 日帝에 순응하는 척하면서 실력을 길러 대한민국의 발전에 이바지한 사람이다(북한군의 남침에 대항하여 조국을 지켜낸 한국군 지휘관들은 거의가 일본-만주군 장교로서 전술을 배웠던 이들이다)&amp;quot;라는 조갑제의 주장과 &amp;quot;일제 때 동경대학, &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B0%E6%BC%BA%B4%EB%C7%D0&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경성대학&lt;/font&gt;&lt;/a&gt;에서 공부한 지식 엘리트를 빼면, 일제 때 경성전기, 발전소, 사법부, 행정부, 방직공장, 수리조합, 은행, 경찰, 세무서, 세관, 학교, 문화예술 전문가들…을 몽땅 빼면 신생 대한민국을 대체 누가 어떻게 경영할 수 있었겠는가&amp;quot;라는 류근일의 주장이 이를 잘 보여준다.&lt;br&gt;&lt;br&gt;조갑제와 류근일은 친일행위를 애국으로 둔갑시키는 논리적 비약을 서슴없이 시도한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친일행위를 애국행위의 범주 안에 넣는다면 독립운동과 친일행위는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것일까? 조갑제와 류근일은 이처럼 인류가 누대로 쌓아온 보편적 상식과 양식을 무참히 파괴하는 가치의 전도를 감행하고 있다. 그리고 &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B9%DA%C1%A4%C8%F1&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박정희&lt;/font&gt;&lt;/a&gt;, &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BD%C5%C7%F6%C8%AE&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color=&quot;#000000&quot;&gt;신현확&lt;/font&gt;&lt;/a&gt; 같은 자들이 일제에 순응하는 척하면서 (장차 건국될 조국을 위해) 실력을 길렀는지, 자신의 영달을 위해 적극적으로 친일행위를 했는지를 조갑제가 어떻게 알 수 있는지도 궁금하다.&lt;br&gt;&lt;br&gt;&lt;br&gt;물론 조갑제나 류근일이 친일행위 자체(이들이 부정적인 의미에서 사용하는 친일행위는 적극적인 친일에 한정되는 것이지만, 적극적인 친일행위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에 대해서 긍정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들이 그럴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조갑제와 류근일은 일제의 조선강점과 그로 인한 식민통치를 불행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운명으로 전제한 후 친일행위를 한 자들이 습득한 지식과 기술이 대한민국의 건국 및 경영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는 점을 들어 이들의 친일행위를 적극적으로 변호한다.&lt;br&gt;&lt;br&gt;친일행위에 대한 조갑제와 류근일의 생각을 거칠게 요약하면 아무리 잘못되고 불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특정 체제와 질서가 성립된 이후에는 그에 순응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목적이나 과정이야 어쨌건 간에 결과만 좋으면 다 용서된다는 것이다. 뉴라이트가 입만 열면 말하는 자학(自虐)사관과 결과만능주의의 기묘한 결합인 셈이다.&lt;br&gt;&lt;br&gt;조갑제와 류근일의 관점으로 보면 일제의 조선강점, 친일매국행위, 군사쿠데타, 불균형성장전략, 유신, 광주학살 등이 모두 나름의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강자에 의해 만들어진 질서는 언제나 정당하며 그와 같은 질서가 일부 부작용도 있었지만 경제성장과 물질적 풍요를 보장해 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조갑제와 류근일에게 세상은 우승열패의 원칙이 작동하는 정글이기에 강자의 논리가 항상 관철될 수밖에 없고, 인간이 추구할 최고의 목표는 물질적 풍요 밖에 없는 것이다. 정의(正義)나 공정함, 연대성, 박애, 평화 같은 가치들은 조갑제와 류근일에게는 이루지 못할 이상에 불과하거나 쓸모없는 가치에 불과하다.&lt;br&gt;&lt;br&gt;조갑제와 류근일로 대표되는 한국의 수구진영이 왜 그토록 친일잔재 청산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가가 이제 분명해지는 느낌이다. &amp;#39;친일&amp;#39;이야말로 이들이 사수해야 할 가치들-우승열패, 결과만능, 물질제일 등-의 시발점이기 때문이다.&lt;br&gt;&lt;br&gt;이태경 토지정의시민연대 사무처장 ( ons　car@pressian.com ) &lt;br&gt;&lt;br&gt;&lt;/div&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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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2 Nov 2009 11:03:24 +0900</pubDate>
    <category><![CDATA[사설 및 칼럼]]></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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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곡괭이로 찾아 낸 세계 8대 기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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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p&gt;&lt;strong&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오마이뉴스 모종혁 기자] &lt;/font&gt;&lt;table width=&quot;527&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width=&quot;525&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img title=&quot;&amp;#x00d074;&amp;#x00b9ad;&amp;#x00d558;&amp;#x00c2dc;&amp;#x00ba74; &amp;#x00c6d0;&amp;#x00bcf8;&amp;#x00d06c;&amp;#x00ae30;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amp;#x00b97c; &amp;#x00bcf4;&amp;#x00c2e4; &amp;#x00c218; &amp;#x00c788;&amp;#x00c2b5;&amp;#x00b2c8;&amp;#x00b2e4;.&quot; style=&quot;MARGIN:5px 0px;CURSOR:　hand;&quot; height=&quot;348&quot; hspace=&quot;0&quot; src=&quot;http://l.yimg.com/go/news/picture/2009/24/20091111/2009111110504483224_105509_0.jpg&quot; width=&quot;520&quot; border=&quot;0&quot;&gt;&lt;/fon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width=&quot;525&quot;&gt;&lt;table style=&quot;MARGIN:0px;&quot; height=&quot;88&quot; width=&quot;98%&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 colSpan=&quot;2&quot; height=&quot;56&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 병마용 1호갱의 전경. 전체 면적 1만4260㎡ 중 1만㎡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lt;/font&gt;&lt;/fon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 모종혁&lt;/font&gt;&lt;/td&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righ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img title=&quot;&amp;#x00d074;&amp;#x00b9ad;&amp;#x00d558;&amp;#x00c2dc;&amp;#x00ba74; &amp;#x00c6d0;&amp;#x00bcf8;&amp;#x00d06c;&amp;#x00ae30;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amp;#x00b97c; &amp;#x00bcf4;&amp;#x00c2e4; &amp;#x00c218; &amp;#x00c788;&amp;#x00c2b5;&amp;#x00b2c8;&amp;#x00b2e4;.&quot; style=&quot;MARGIN:5px 0px;CURSOR:　hand;&quot; height=&quot;348&quot; hspace=&quot;0&quot; src=&quot;http://l.yimg.com/go/news/picture/2009/24/20091111/2009111110504483224_105509_1.jpg&quot; width=&quot;520&quot; border=&quot;0&quo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able style=&quot;MARGIN:0px;&quot; width=&quot;98%&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 colSpan=&quot;2&quot;&gt;&lt;b&gt;▲ &lt;/b&gt;1호갱 뒤에는 발굴되어 갓 복원작업을 끝낸 병마용이 늘어 서 있다. 병사들 자세가 단 한 개도 같지 않고 얼굴 표정도 다양하다. &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gt;ⓒ 모종혁&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lt;/strong&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p&gt;&lt;p&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 align=&quot;center&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일곱 명 농민들, 관개용 우물을 파다 진시황 병마용을 발견하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1974년 3월 어느 날 아침 중국 내륙 산시(陝西)성 린퉁(臨潼)현의 한 작은 마을 시양(西楊)촌.&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양페이옌(楊培彦), 양즈파(楊志發), 양취안이(楊全義) 등 일곱 명의 농민이 땅을 파 내려갔다. 오랜 가뭄으로 땅이 메말라가자 마을회의에서 관개용 우물을 파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마을 남쪽 감나무 숲에서 한창 땅을 파내려 가던 중 곡괭이 끝에 사람 모양의 도용(陶俑)이 걸려 나왔다. 옛날부터 시양촌 곳곳에서는 파손된 토용 조각이 발견되곤 했다. 하지만 이번 것은 사람의 몸통 모양을 완벽히 갖춘 토용(土俑)이었다. 몸통 옆에는 사람 얼굴과 똑같은 도용도 발견됐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오늘날 세계 제8대 기적으로 불리는 진시황 병마용(兵馬俑)이 지하 속에서 세상 밖으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lt;/font&gt;&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C1%F8%BD%C3%C8%B2%B8%AA&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 color=&quot;#000000&quot;&gt;진시황릉&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과 달리 2200여 년 동안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지하보물의 출현이었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병마용의 발견은 중국 대륙을 흥분시켰다. 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 말기로, 홍위병의 광란 속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역사 유적과 유물이 파괴된 상태였다. 1971년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에서 발견되어 발굴작업이 막바지였던 마왕퇴(馬王堆)에 이은 쾌거였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중국정부는 곧바로 1년여의 기초 조사에 들어갔다. 조사 끝에 막대한 유물이 잠들어 있음을 확인하고, 1976년 1호갱 전시관을 시공했다. 1호갱은 길이 230ｍ, 넓이 62ｍ, 총 면적은 1만4260㎡에 달했다. 1호갱 주변에서는 2호갱부터 4호갱까지도 잇따라 발견됐다. 2호 갱과 3호 갱의 규모는 각각 6000㎡와 520㎡. 1호갱보다 작지만 군대 편제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병마용의 배치 구조는 중국 고대 군대 편제와 같은 좌·중·우 3군이었다. 1호갱은 좌군, 2호갱은 우군, 3호갱은 지휘부에 해당한다. 3군을 보급·지원하는 4호갱도 있으나 완성되지 못한 채 비어있었다.&lt;/font&gt;&lt;/p&gt;&lt;p&gt;&lt;br&gt;&lt;table width=&quot;10&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img title=&quot;&amp;#x00d074;&amp;#x00b9ad;&amp;#x00d558;&amp;#x00c2dc;&amp;#x00ba74; &amp;#x00c6d0;&amp;#x00bcf8;&amp;#x00d06c;&amp;#x00ae30;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amp;#x00b97c; &amp;#x00bcf4;&amp;#x00c2e4; &amp;#x00c218; &amp;#x00c788;&amp;#x00c2b5;&amp;#x00b2c8;&amp;#x00b2e4;.&quot; style=&quot;MARGIN:5px 0px;CURSOR:　hand;&quot; height=&quot;348&quot; hspace=&quot;0&quot; src=&quot;http://l.yimg.com/go/news/picture/2009/24/20091111/2009111110504483224_105509_2.jpg&quot; width=&quot;520&quot; border=&quot;0&quot;&gt;&lt;/fon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gt;&lt;table style=&quot;MARGIN:0px;&quot; width=&quot;98%&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 colSpan=&quot;2&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 병마용박물관 표지석과 2호갱의 외경. 2호갱은 1호갱 바로 옆에 있다. &lt;/font&gt;&lt;/fon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 모종혁&lt;/font&gt;&lt;/td&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righ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p&gt;&lt;p&gt;&lt;br&gt;&lt;table width=&quot;10&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img title=&quot;&amp;#x00d074;&amp;#x00b9ad;&amp;#x00d558;&amp;#x00c2dc;&amp;#x00ba74; &amp;#x00c6d0;&amp;#x00bcf8;&amp;#x00d06c;&amp;#x00ae30;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amp;#x00b97c; &amp;#x00bcf4;&amp;#x00c2e4; &amp;#x00c218; &amp;#x00c788;&amp;#x00c2b5;&amp;#x00b2c8;&amp;#x00b2e4;.&quot; style=&quot;MARGIN:5px 0px;CURSOR:　hand;&quot; height=&quot;348&quot; hspace=&quot;0&quot; src=&quot;http://l.yimg.com/go/news/picture/2009/24/20091111/2009111110504483224_105509_3.jpg&quot; width=&quot;520&quot; border=&quot;0&quot;&gt;&lt;/fon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gt;&lt;table style=&quot;MARGIN:0px;&quot; width=&quot;98%&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 colSpan=&quot;2&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 오른쪽 1번 자리가 병마용이 처음 발견된 곳이다. 병마용은 농민들이 우물을 파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됐다. &lt;/font&gt;&lt;/fon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 모종혁&lt;/font&gt;&lt;/td&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righ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강력한 제국 진, 진시황 사후 4년 만에 멸망하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진시황(秦始皇, 기원전 259~210)은 중국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진의 군주 장양왕의 아들로 태어나 13세에 재위에 올랐다. 당시 중국은 전국시대 말기로, 일곱 제후국이 협력과 전쟁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진나라는 호전적이고 강대하여 나머지 여섯 나라들이 야만국이라 멸시하고 경계했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진이 부강한 이유는 강력한 법치주의와 관료제 덕분이었다. 주변국의 견제와 척박한 자연환경을 이겨내기 위해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탄탄한 군사력을 갖추었다. 힘을 키워나갔던 진은 노련한 외교술과 우월한 군사력을 앞세워 주변국을 하나둘씩 제압했다. 기원전 221년 제나라를 마지막으로 멸망시켜, &lt;/font&gt;&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C3%E1%C3%DF%C0%FC%B1%B9%BD%C3%B4%EB&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 color=&quot;#000000&quot;&gt;춘추전국시대&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의 오랜 분열시대를 종식했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진시황은 통일제국이 만세(萬歲)토록 영원할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각종 제도를 개혁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었지만, 진은 진시황이 죽은 지 4년 만에 멸망했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중국 역사 최초의 통일제국 진이 짧은 시간에 멸망한 것은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대형 토목사업과 화려한 궁전·왕릉 건설에 국력을 낭비하고 백성들을 쥐어짰다. 흉노족을 막기 위한 &lt;/font&gt;&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B8%B8%B8%AE%C0%E5%BC%BA&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 color=&quot;#000000&quot;&gt;만리장성&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 거대하고 호화로운 아방궁, 세계 최대 규모 무덤인 진시황릉 등이 대표적이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백성들은 가혹한 세금 부담을 짊어지고 고된 노역에 동원 당했다. 통일제국 아래 평화의 시대가 올 것이라 기대했던 민심과는 달리 진나라 조정은 수탈과 착취에 골몰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정치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은 오늘날까지 폭군의 이미지로 남아있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진시황은 죽은 뒤에도 대륙을 호령코자 했다. 사후에 잠들 자신의 능묘를 기원전 246년부터 208년까지, 무려 36년에 걸쳐 건설했다. 능원에는 죽은 진시황을 모시기 위해 함께 순장된 사람들의 묘군(墓群), 평소에 타던 청동거마 등까지 묻혀있다. 병마용은 진시황릉의 부속시설 중 하나로, 통일사업을 완수한 진시황의 군대였다.&lt;/font&gt;&lt;/p&gt;&lt;p&gt;&lt;br&gt;&lt;table width=&quot;10&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img title=&quot;&amp;#x00d074;&amp;#x00b9ad;&amp;#x00d558;&amp;#x00c2dc;&amp;#x00ba74; &amp;#x00c6d0;&amp;#x00bcf8;&amp;#x00d06c;&amp;#x00ae30;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amp;#x00b97c; &amp;#x00bcf4;&amp;#x00c2e4; &amp;#x00c218; &amp;#x00c788;&amp;#x00c2b5;&amp;#x00b2c8;&amp;#x00b2e4;.&quot; style=&quot;MARGIN:5px 0px;CURSOR:　hand;&quot; height=&quot;348&quot; hspace=&quot;0&quot; src=&quot;http://l.yimg.com/go/news/picture/2009/24/20091111/2009111110504483224_105509_4.jpg&quot; width=&quot;520&quot; border=&quot;0&quot;&gt;&lt;/fon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gt;&lt;table style=&quot;MARGIN:0px;&quot; width=&quot;98%&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 colSpan=&quot;2&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 뒤쪽에서 바라 본 1호갱의 앞면. 문과 벽이 있는 지하궁전의 형태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lt;/font&gt;&lt;/fon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 모종혁&lt;/font&gt;&lt;/td&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righ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 align=&quot;center&quot;&gt;&lt;table width=&quot;10&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img title=&quot;&amp;#x00d074;&amp;#x00b9ad;&amp;#x00d558;&amp;#x00c2dc;&amp;#x00ba74; &amp;#x00c6d0;&amp;#x00bcf8;&amp;#x00d06c;&amp;#x00ae30;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amp;#x00b97c; &amp;#x00bcf4;&amp;#x00c2e4; &amp;#x00c218; &amp;#x00c788;&amp;#x00c2b5;&amp;#x00b2c8;&amp;#x00b2e4;.&quot; style=&quot;MARGIN:5px 0px;CURSOR:　hand;&quot; height=&quot;348&quot; hspace=&quot;0&quot; src=&quot;http://l.yimg.com/go/news/picture/2009/24/20091111/2009111110504483224_105509_5.jpg&quot; width=&quot;520&quot; border=&quot;0&quot;&gt;&lt;/fon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gt;&lt;table style=&quot;MARGIN:0px;&quot; width=&quot;98%&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 colSpan=&quot;2&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 아직 발굴되지 않은 1호갱의 남아있는 면적은 1만여㎡에 달한다. 지난 6월 24년 만에 3차 발굴이 재개됐다. &lt;/font&gt;&lt;/fon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 모종혁&lt;/font&gt;&lt;/td&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righ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1987년 병마용과 진시황릉, 중국 최초 &lt;/font&gt;&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BC%BC%B0%E8%B9%AE%C8%AD%C0%AF%BB%EA&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 color=&quot;#000000&quot;&gt;세계문화유산&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 등재&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오늘날 병마용의 명성은 전 세계적으로 이름 높다. 중국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세계인이 가고 싶어하는 유적지다. 1987년 12월 &lt;/font&gt;&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C0%AF%B3%D7%BD%BA%C4%DA&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 color=&quot;#000000&quot;&gt;유네스코&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는 병마용과 진시황릉을 만리장성, 자금성, 막고굴(莫高窟)과 더불어 중국 최초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2008년 8월 &lt;/font&gt;&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BA%A3%C0%CC%C2%A1%BF%C3%B8%B2%C7%C8&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 color=&quot;#000000&quot;&gt;베이징올림픽&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에 참가한 중국 대표 선수단의 운동복은 병마용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됐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할리우드 영화 &amp;lt;미이라3: 황제의 무덤&amp;gt;에서는 미이라 대신 병마용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세계적인 명성과 달리 병마용의 발굴 작업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1978년 5월 1호갱 전시관 완공을 앞두고 첫 정식 발굴이 시작됐다. 당시 중국은 문혁 기간 동안 대학이 문을 닫아 전문적인 발굴인력이 극소수에 불과했다. 몇몇 학자의 지도에 따라 60명의 고고학 연수생과 100여 명의 군인이 발굴에 동원됐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전시관 막바지 공사와 발굴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느라 1호갱 현장은 항상 어수선했다. 발굴에 참여했던 한 대학교수는 &amp;quot;1979년 건국 30주년에 병마용박물관을 개관해야 했기에 발굴과 유물 수습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투적으로 이뤄졌다&amp;quot;고 회고했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1985년에 이뤄진 2차 발굴까지 해서 1호갱은 기본적인 면모가 드러났다. 두 차례의 발굴로 1000여 점의 병사용, 6대의 전차용, 24대의 우마차용, 검과 창 등 각종 무기용을 출토됐다. 1호갱은 보병과 전차로 혼합 편성된 장방형 군진으로, 대략 6000여 점의 병사용과 40여 승의 전차용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측됐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지난 6월에는 2차 발굴이 있은 지 24년 만에 1호갱에 대한 발굴이 재개됐다. 1, 2차 발굴 후 남아있는 면적은 1만여㎡. 이번 3차 작업에서는 우선 200㎡를 발굴하고 범위를 넓혀나갈 계획이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3차 발굴은 첫날부터 큰 성과를 거두었다. 앞뒤로 일렬이 된 4두마차 2대를 처음으로 발굴해 낸 것. 4두마차 외에 채식 병마용과 토기 파편, 칠기 목기도 출토됐다.&lt;/font&gt;&lt;/p&gt;&lt;p&gt;&lt;br&gt;&lt;table width=&quot;10&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img title=&quot;&amp;#x00d074;&amp;#x00b9ad;&amp;#x00d558;&amp;#x00c2dc;&amp;#x00ba74; &amp;#x00c6d0;&amp;#x00bcf8;&amp;#x00d06c;&amp;#x00ae30;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amp;#x00b97c; &amp;#x00bcf4;&amp;#x00c2e4; &amp;#x00c218; &amp;#x00c788;&amp;#x00c2b5;&amp;#x00b2c8;&amp;#x00b2e4;.&quot; style=&quot;MARGIN:5px 0px;CURSOR:　hand;&quot; height=&quot;348&quot; hspace=&quot;0&quot; src=&quot;http://l.yimg.com/go/news/picture/2009/24/20091111/2009111110504483224_105509_6.jpg&quot; width=&quot;520&quot; border=&quot;0&quot;&gt;&lt;/fon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gt;&lt;table style=&quot;MARGIN:0px;&quot; width=&quot;98%&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 colSpan=&quot;2&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 고대 군대 편제상 우군에 해당하는 2호갱. 시험 발굴을 통해 실체만 확인하고 발굴은 중단된 상태다. &lt;/font&gt;&lt;/fon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 모종혁&lt;/font&gt;&lt;/td&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righ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 align=&quot;center&quot;&gt;&lt;table width=&quot;10&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img title=&quot;&amp;#x00d074;&amp;#x00b9ad;&amp;#x00d558;&amp;#x00c2dc;&amp;#x00ba74; &amp;#x00c6d0;&amp;#x00bcf8;&amp;#x00d06c;&amp;#x00ae30;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amp;#x00b97c; &amp;#x00bcf4;&amp;#x00c2e4; &amp;#x00c218; &amp;#x00c788;&amp;#x00c2b5;&amp;#x00b2c8;&amp;#x00b2e4;.&quot; style=&quot;MARGIN:5px 0px;CURSOR:　hand;&quot; height=&quot;348&quot; hspace=&quot;0&quot; src=&quot;http://l.yimg.com/go/news/picture/2009/24/20091111/2009111110504483224_105509_7.jpg&quot; width=&quot;520&quot; border=&quot;0&quot;&gt;&lt;/fon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gt;&lt;table style=&quot;MARGIN:0px;&quot; width=&quot;98%&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 colSpan=&quot;2&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 본래 병마용은 모두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었다. 2호갱에서는 채색이 완벽하게 보존된 병마용 6개가 발굴됐다. &lt;/font&gt;&lt;/fon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 모종혁&lt;/font&gt;&lt;/td&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righ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amp;quot;현 중국 고고학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amp;quot; &amp;quot;발굴 과정에서 도용 손상될 것&amp;quot;&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성과가 있지만 1호갱의 재발굴은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중국을 대표하는 역사 유적인 병마용을 왜 지금 다시 발굴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자오난펑(焦南峰) 전 산시성 고고학연구소 소장을 비롯한 시안 지역 학자들은 발굴을 적극 지지한다. 그들은 &amp;quot;오늘날 발굴 기술에 있어 중국 고고학의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amp;quot;이라며 &amp;quot;현 기술로 출토되는 도용을 완벽히 보존할 수 있다&amp;quot;고 자신한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이에 대해 베이징(北京)대학 왕쉰(王迅), 자오화청(趙化城) 교수 등 주류 역사학계는 &amp;quot;지금 조급하게 발굴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amp;quot;며 &amp;quot;발굴하는 과정에서, 수습하는 과정에서 도용이 손상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amp;quot;고 반박한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3차 발굴을 전후해 중국 포털사이트 신랑(新浪)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네티즌 4100여 명 중 62.5%가 발굴과 보존에 있어서 기술적인 문제가 있기에 대규모 발굴은 피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31.1%만이 기술상 문제가 없기 때문에 1호갱을 모두 발굴해야 한다고 답했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실제 병마용은 발굴 및 수습, 복원, 전시 과정에서 적지 않게 훼손당했다. 병마용은 땅에 묻혀있을 당시 선명한 색채를 유지했지만, 발굴 후 산화되어 검게 퇴색했다. 1호갱 2차 발굴에서 출토된 장군용은 수습 과정에서 실수로 머리 부분이 부서졌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발굴 과정에서 손상되거나 퇴색한 병마용을 복원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1개의 병마용을 제대로 복원하는 데는 최소 한 달이 걸리고 퇴색한 색깔의 복원은 지금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일부 전문가들은 병마용이 퇴색뿐만 아니라 세균에 의한 대규모의 부식이 진행 중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한 해 200만 명 이상 병마용을 찾는 관광객들이 그 주범이다. 별다른 환기 대책 없이 1호갱을 개방하면서 갱 내부의 실내 공기가 전시 중인 병마용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이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저우톄(周鐵) 병마용박물관 연구원은 &amp;quot;갱 내부에서 48종의 곰팡이균이 발견됐다&amp;quot;고 밝혔다. 차오쥔지(曹軍驥) 중국 지구환경과학원 대기환경소장은 &amp;quot;병마용을 이대로 방치하면 100년 뒤 병마용은 심각하게 부식해 탄광처럼 변할 것&amp;quot;이라고 경고했다.&lt;/font&gt;&lt;/p&gt;&lt;p&gt;&lt;br&gt;&lt;table width=&quot;10&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img title=&quot;&amp;#x00d074;&amp;#x00b9ad;&amp;#x00d558;&amp;#x00c2dc;&amp;#x00ba74; &amp;#x00c6d0;&amp;#x00bcf8;&amp;#x00d06c;&amp;#x00ae30;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amp;#x00b97c; &amp;#x00bcf4;&amp;#x00c2e4; &amp;#x00c218; &amp;#x00c788;&amp;#x00c2b5;&amp;#x00b2c8;&amp;#x00b2e4;.&quot; style=&quot;MARGIN:5px 0px;CURSOR:　hand;&quot; height=&quot;348&quot; hspace=&quot;0&quot; src=&quot;http://l.yimg.com/go/news/picture/2009/24/20091111/2009111110504483224_105509_8.jpg&quot; width=&quot;520&quot; border=&quot;0&quot;&gt;&lt;/fon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gt;&lt;table style=&quot;MARGIN:0px;&quot; width=&quot;98%&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 colSpan=&quot;2&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 병마용은 얼굴 모습과 표정이 생생하다. 말은 지금이라도 당장 달릴 듯한 활력이 느껴진다. &lt;/font&gt;&lt;/fon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 모종혁&lt;/font&gt;&lt;/td&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righ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p&gt;&lt;p&gt;&lt;br&gt;&lt;table width=&quot;10&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img title=&quot;&amp;#x00d074;&amp;#x00b9ad;&amp;#x00d558;&amp;#x00c2dc;&amp;#x00ba74; &amp;#x00c6d0;&amp;#x00bcf8;&amp;#x00d06c;&amp;#x00ae30;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amp;#x00b97c; &amp;#x00bcf4;&amp;#x00c2e4; &amp;#x00c218; &amp;#x00c788;&amp;#x00c2b5;&amp;#x00b2c8;&amp;#x00b2e4;.&quot; style=&quot;MARGIN:5px 0px;CURSOR:　hand;&quot; src=&quot;http://l.yimg.com/go/news/picture/2009/24/20091111/2009111110504483224_105509_9.jpg&quot; border=&quot;0&quot;&gt;&lt;/fon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gt;&lt;table style=&quot;MARGIN:0px;&quot; width=&quot;98%&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 colSpan=&quot;2&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 전장에서의 전투 전 긴 창을 끼고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의 병사용. &lt;/font&gt;&lt;/fon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 모종혁&lt;/font&gt;&lt;/td&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righ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병사들 자세 단 한 개도 같지 않아, 얼굴 표정도 인간 심리 섬세히 묘사&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병마용의 발굴이 사회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 가치가 황금보다 높기 때문이다. 병마용은 머리와 몸통, 팔, 다리 등을 따로 빚은 뒤 구워 조합해 완성했다. 병사용은 키 175~195㎝의 늠름한 체격인데 실제 사람과 흡사하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놀라운 점은 병사들의 자세가 단 한 개도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얼굴 표정도 각양각색으로 인간의 심리를 섬세히 묘사했다. 진시황을 호위하여 전장에 나가는 병사들의 마음과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다. 방대한 규모와 정교함으로 병마용은 곧 &lt;/font&gt;&lt;a class=&quot;lw&quot;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amp;cs=bz&amp;amp;p=%C0%CC%C1%FD%C6%AE+%C7%C7%B6%F3%B9%CC%B5%E5&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 color=&quot;#000000&quot;&gt;이집트 피라미드&lt;/font&gt;&lt;/a&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 바빌론 공중정원 등 고대 7대 기적에 더해져 세계 8대 기적으로 불리게 됐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이런 천문학적 가치와 중요성 때문에 중국정부도 병마용 발굴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 발굴이 종료된 3호갱 외에 2호갱에 대해서는 시험 발굴을 통해 실체만 확인한 뒤 본격적인 발굴은 미루고 있다. 일반 중국인들도 현 시점에서의 발굴보다 후세에게 그대로 물려주자는 의견이 우세하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병마용박물관 경내에 들어서면 거대한 스포츠센터를 연상케 한다. 박물관 표지석 앞에 1호갱, 그 옆에는 2호갱, 오른쪽으로는 청동거마(靑銅車馬)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공개된 세 갱 중 가장 큰 1호갱 내부는 선봉, 주력, 후위, 익위 등 4부분의 군진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갱의 가장 앞에는 갑옷을 입지 않은 경보병용이 서 있다. 모두 3열로 매 열마다 68점, 총 204점이 있다. 머리는 속발을 하고 다리에는 행전을 맸으며 손에 궁을 들어 용감하고 활을 잘 쏘는 선봉부대임을 알 수 있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경보병용 뒤는 11개 동·서 방향 통로가 갈라져 있는데, 38대의 전차와 보병이 서로 엇갈려서 배치되어 있다. 이들은 갑옷을 입고 손에 긴 창, 칼, 활 등 병장기를 든 중보병이다. 전차와는 유기적으로 조합된 군진 주력으로 기세가 날카롭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1호갱 남·북 양쪽 변두리에는 병사용이 1열로 서 있는데, 군진의 좌·우익에 해당한다. 적군의 &amp;#39;성동격서&amp;#39;(聲東擊西)를 방지하는 것이 주 임무다. 갱 내 뒤에 서있는 병사용은 군진의 후위이다. 부대 진군시 적이 배후에서 기습하는 것을 방어하여 후방의 근심을 제거한다.&lt;/font&gt;&lt;/p&gt;&lt;p&gt;&lt;br&gt;&lt;table width=&quot;10&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img title=&quot;&amp;#x00d074;&amp;#x00b9ad;&amp;#x00d558;&amp;#x00c2dc;&amp;#x00ba74; &amp;#x00c6d0;&amp;#x00bcf8;&amp;#x00d06c;&amp;#x00ae30;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amp;#x00b97c; &amp;#x00bcf4;&amp;#x00c2e4; &amp;#x00c218; &amp;#x00c788;&amp;#x00c2b5;&amp;#x00b2c8;&amp;#x00b2e4;.&quot; style=&quot;MARGIN:5px 0px;CURSOR:　hand;&quot; height=&quot;348&quot; hspace=&quot;0&quot; src=&quot;http://l.yimg.com/go/news/picture/2009/24/20091111/2009111110504483224_105509_10.jpg&quot; width=&quot;520&quot; border=&quot;0&quot;&gt;&lt;/fon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gt;&lt;table style=&quot;MARGIN:0px;&quot; width=&quot;98%&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 colSpan=&quot;2&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 1~3호갱 중 유일하게 발굴이 모두 완료된 3호갱. 3호갱은 군대 지휘부에 해당한다. &lt;/font&gt;&lt;/fon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 모종혁&lt;/font&gt;&lt;/td&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righ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p&gt;&lt;p&gt;&lt;br&gt;&lt;table width=&quot;10&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img title=&quot;&amp;#x00d074;&amp;#x00b9ad;&amp;#x00d558;&amp;#x00c2dc;&amp;#x00ba74; &amp;#x00c6d0;&amp;#x00bcf8;&amp;#x00d06c;&amp;#x00ae30;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amp;#x00b97c; &amp;#x00bcf4;&amp;#x00c2e4; &amp;#x00c218; &amp;#x00c788;&amp;#x00c2b5;&amp;#x00b2c8;&amp;#x00b2e4;.&quot; style=&quot;MARGIN:5px 0px;CURSOR:　hand;&quot; height=&quot;348&quot; hspace=&quot;0&quot; src=&quot;http://l.yimg.com/go/news/picture/2009/24/20091111/2009111110504483224_105509_11.jpg&quot; width=&quot;520&quot; border=&quot;0&quot;&gt;&lt;/fon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gt;&lt;table style=&quot;MARGIN:0px;&quot; width=&quot;98%&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 colSpan=&quot;2&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청동거마. 진시황이 생전 타던 마차를 1/2로 축소하여 제작한 것이다. &lt;/font&gt;&lt;/fon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 모종혁&lt;/font&gt;&lt;/td&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righ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지휘부인 3호갱, 병사부대인 1, 2호갱 뒤에 위치&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2호갱은 1호갱에서 동북쪽으로 약 20ｍ 떨어져 있다. 길이 124ｍ, 넓이 98ｍ에 달한다. 기초 조사로 2호갱에는 전차에 메인 마용 350점, 기병용 마용 116점, 각종 병사용 900여 점 등 1400여 점의 병마용과 89대의 목제 전차가 매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보병·기병·전차가 혼합 편성한 군진인 셈이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2호갱은 4개의 작은 진을 &amp;#39;ㅁ&amp;#39;자형으로 배치했다. 첫째 진은 곡형진의 선봉으로 330여 점의 궁수(弓手)로 구성됐다. 중앙의 160점은 중장비한 갑옷을 입은 병사용으로 8열 종대로 자리 잡았다. 둘레는 170여 점의 경무장한 입사(立射)용이 진을 에워쌓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둘째 진은 곡형진 우측에 64대의 전차로 구성됐다. 전차마다 3명의 병사가 타고 있는데, 전차 앞뒤로 수행하는 보병이 없어 순수한 전차편대임을 알 수 있다. 셋째는 곡형진 중앙으로 전차, 보병, 기병으로 구성된 진이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넷째 진은 곡형진 좌측에 위치한 기병대다. 108점의 기병을 위주로 하고 6대의 전차가 보조한다. 이들 기병은 키가 크고 몸이 건장하며 가죽모자를 쓰고 발에는 가죽장화를 신었다. 한 손에는 활, 다른 한 손에는 고삐를 쥐어 날렵해 보인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2호갱 내에서 발굴된 병사용과 마용, 병기 등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 있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지휘부인 3호갱은 1, 2호갱 뒤편에 있다. 병사용 66점, 전차를 끄는 마마 4필, 목제 전차 1대가 출토됐다. 병사용은 손에 의장용 병기인 동수를 들고 얼굴을 마주한 채로 정렬하여 지휘관을 호위하는 모습이다. 3호갱이 &amp;#39;군막&amp;#39;(軍幕), 즉 사령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2호갱 앞에 있는 청동거마전시관에는 1978년 진시황릉에서 발굴된 채색 동거마(銅車馬)와 병마용 관련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청동거마는 모두 2대로, 진시황릉 서쪽의 한 부장갱에서 출토됐다. 발굴시 길이 7ｍ, 넓이 2.3ｍ의 대형 나무관 속에 놓여 있었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청동거마 크기는 진짜 말과 수레의 1/2에 해당한다. 두 대의 청동거마는 모두 네 필의 구리 말에 매여 있지만 모습과 구조는 다르다. 차형이 크고 장식이 화려하며 모방도 정교해 중국 내에 발굴된 청동거마 중 최고의 예술적 가치를 지녔다.&lt;/font&gt;&lt;/p&gt;&lt;p&gt;&lt;br&gt;&lt;table width=&quot;10&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img title=&quot;&amp;#x00d074;&amp;#x00b9ad;&amp;#x00d558;&amp;#x00c2dc;&amp;#x00ba74; &amp;#x00c6d0;&amp;#x00bcf8;&amp;#x00d06c;&amp;#x00ae30;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amp;#x00b97c; &amp;#x00bcf4;&amp;#x00c2e4; &amp;#x00c218; &amp;#x00c788;&amp;#x00c2b5;&amp;#x00b2c8;&amp;#x00b2e4;.&quot; style=&quot;MARGIN:5px 0px;CURSOR:　hand;&quot; height=&quot;348&quot; hspace=&quot;0&quot; src=&quot;http://l.yimg.com/go/news/picture/2009/24/20091111/2009111110504483224_105509_12.jpg&quot; width=&quot;520&quot; border=&quot;0&quot;&gt;&lt;/fon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gt;&lt;table style=&quot;MARGIN:0px;&quot; width=&quot;98%&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 colSpan=&quot;2&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 흡사 산과 같이 거대한 진시황릉. 진시황릉은 지금까지 도굴되지 않은 채 역사의 비밀은 간직하고 있다. &lt;/font&gt;&lt;/fon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 모종혁&lt;/font&gt;&lt;/td&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righ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p&gt;&lt;p&gt;&lt;br&gt;&lt;table width=&quot;10&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img title=&quot;&amp;#x00d074;&amp;#x00b9ad;&amp;#x00d558;&amp;#x00c2dc;&amp;#x00ba74; &amp;#x00c6d0;&amp;#x00bcf8;&amp;#x00d06c;&amp;#x00ae30; &amp;#x00c774;&amp;#x00bbf8;&amp;#x00c9c0;&amp;#x00b97c; &amp;#x00bcf4;&amp;#x00c2e4; &amp;#x00c218; &amp;#x00c788;&amp;#x00c2b5;&amp;#x00b2c8;&amp;#x00b2e4;.&quot; style=&quot;MARGIN:5px 0px;CURSOR:　hand;&quot; height=&quot;348&quot; hspace=&quot;0&quot; src=&quot;http://l.yimg.com/go/news/picture/2009/24/20091111/2009111110504483224_105509_13.jpg&quot; width=&quot;520&quot; border=&quot;0&quot;&gt;&lt;/fon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gt;&lt;table style=&quot;MARGIN:0px;&quot; width=&quot;98%&quot; align=&quot;center&quot; border=&quot;0&quot;&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 colSpan=&quot;2&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 진시황이 전국시대 제후국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는 과정을 담은 부조도. &lt;/font&gt;&lt;/fon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lef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 모종혁&lt;/font&gt;&lt;/td&gt;&lt;td style=&quot;FONT-SIZE:100%;LINE-HEIGHT:150%;&quot; align=&quot;righ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병마용에서 1.5㎞ 떨어진 진시황릉은 지난 2천여 년 동안 도굴꾼의 로망이었다. 진시황릉 발굴은 37년 동안 무려 70만 명이 동원된 대역사였다. 완공 당시 전체 부지는 50㎢, 봉분 높이는 120ｍ에 달했다. 규모로는 세계 최대의 황제 능원이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진시황릉 지하궁전에는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든 금은보화와 부장품이 묻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수많은 도굴꾼들이 진시황릉의 보물을 노렸다. 하지만 지하궁전으로 이르는 길은 미로와 같고, 화살이 자동 발사되는 부비트랩이 있어 약탈을 피했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지하궁전은 진시황이 생전 살았던 아방궁을 모방해 지어졌다. 지하궁전 내부는 천상과 지상 세계를 축소해서 만들었다. 사마천은 &amp;lt;사기&amp;gt;에서 지하궁전이 &amp;#39;수은이 흐르는 수백 개의 강이 큰 바다를 이루고 있다&amp;#39;고 묘사했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진시황의 바람과 달리 통일제국 진은 기원전 206년 멸망했다. 그러나 진은 &amp;#39;중국&amp;#39;(China)이라는 이름과 병마용, 진시황릉을 남겼다. 진시황이 남긴 성과는 오늘날까지 불로장생하고 있는 셈이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 여행Tip&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font style=&quot;FONT-SIZE:10pt;FONT-FAMILY:굴림;&quot;&gt;&lt;/font&gt;&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병마용박물관은 시안시에서 동쪽으로 35㎞ 떨어져 있다. 병마용에 가려면 시안 기차역에서 병마용과 진시황릉으로 가는 전용 관광버스 306번을 타면 된다. 버스비는 7위안(한화 약 1200원)이고, 30분마다 출발한다. 좌석은 넓고 냉방도 잘되어 승차감이 좋다. 시안역에서 병마용까지는 약 50분이 소요된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병마용의 개방시간은 여름철 8:30~17:30, 겨울철 08:30~17:00이다. 입장료는 90위안(약 1만5300원)이다. 최근에는 병마용을 찾는 한국인이 늘고 있어 한국어가 가능한 가이드가 경내에 있다. 가이드비는 90위안이다.&lt;/font&gt;&lt;/p&gt;&lt;p&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gt;&lt;/font&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진시황릉은 병마용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가다 내리면 된다. 병마용의 개방시간은 매일 8:30~17:30이다. 입장료는 50위안(약 8500원)이다. 여기는 한국어 가이드가 따로 없다.&lt;/font&gt;&lt;/p&gt;&lt;p&gt;&lt;br&gt;&lt;br&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11pt;&quot;&gt;&lt;br&gt;&lt;/font&gt;&lt;/font&gt;&lt;/p&gt;&amp;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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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1 Nov 2009 18:58:16 +0900</pubDate>
    <category><![CDATA[역사에 관한 글]]></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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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일본인도 모르는 ‘진짜’ 일본 고대사]]></title>
    <description>
        &lt;span style=&quot;FONT-SIZE:11pt;COLOR:#000000;LINE-HEIGHT:23px;FONT-FAMILY:'굴림';LETTER-SPACING:0px;TEXT-ALIGN:justify;&quot;&gt;&lt;br /&gt; &lt;br /&gt; &lt;br /&gt; &lt;b&gt;369년 부여족이 왜(倭) 정벌, 신도(神道)는 한국 무속신앙에서 유래 &lt;/b&gt;&lt;br /&gt;  &lt;br /&gt; 왜가 4세기 가야를 정벌했다? 일본의 지배자 혈통은 ‘서기전 660년부터 한번도 단절된 적 없이 이어온 만세일계의 왕가’다? &lt;br /&gt; 현재 일본 젊은이들이 배우는, 어이없을 정도로 왜곡된 고대사다. &lt;br /&gt; 4~7세기 고대 일본을 장악한 것이 한국계 혈통이었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은 얼마나 실망할까. 1982년 일본 교과서 왜곡 파동 직후, 존 카터 코벨이 한·중·일 고대 역사서 연구를 통해 일본의 역사왜곡을 낱낱이 파헤친 미공개 논문을 최초로 소개한다. &lt;br /&gt;  &lt;br /&gt;  &lt;img src=&quot;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5/04/22/200504220500025/image/200504220500025_1.jpg&quot;&gt;&lt;br /&gt;  &lt;br /&gt;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갑옷으로 무장한 고구려 무사. 말에도 갑옷을 입혔다.  &lt;br /&gt; 일본인들의 9할은 제 나라의 진짜 역사를 모른다. 진실을 알게 된다면 마음이 혼란스러울 것이다. 일본 교육부는 국가적 자신감을 얻기 위해 고대 이래 현대까지 역사적 사실을 위조하고, 가미카제식의 맹목적 충성을 요구했다. 이는 역사를 들춰보면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의 역사왜곡은 외국 역사가들에겐 잘 알려진 반면 일본인에게는 대부분 은폐되어왔다. 이 글은 왜곡된 일본역사 중에서도 가장 분명하고 어이없기까지 한 고대사에 관한 것으로 그간 연구해온 것이 바탕이 되었다. &lt;br /&gt; &lt;br /&gt; 근대 일본의 젊은이들은 일본의 지배자 혈통이 ‘서기전 660년부터 한번도 단절된 일 없이 백수십대를 이어온 만세일계의 왕가’라고 배웠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교사는 한국 학생들에게도 이런 내용을 주입했다. &lt;br /&gt; &lt;br /&gt; ‘진무왕은 서기전 660년 신의 계보에서 나온 1대조이고 일본 열도 전체를 통일한 개국자’라고 이상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신화는 보편적인 것이 되고, 1930년대 군부는 이를 더욱 강조하면서 이를 믿지 않으면 감옥에 가두기까지 했다. &lt;br /&gt; &lt;br /&gt;  &lt;br /&gt; 다른 어떤 나라도 갖지 못한’ 건국 26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전세계 37개국에서 일본문화를 주제로 한 에세이 공모가 있었다. 필자도 젊은 시절 이에 응모해 ‘일본의 미(美), 시부미’라는 글로 상을 받았다. 이후 내가 일본의 미학이 사실은 한국의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를 아는 데 40년이 걸렸다. &lt;br /&gt; &lt;br /&gt; 일본이 서기전 660년에 나라를 세우고 천황혈통이 한 줄로 이어져 왔다는 기록이 712년과 720년에 각각 편찬된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 두 역사서에 나와 있다. 두 책에는 ‘천황가문은 서기전 660년 건국한 1대 조상으로부터 이어져온 혈통’이라고 씌어 있다. 이는 8세기 당대의 일왕을 합법화하기 위해 씌어진 것이다. 역사 편찬 당시의 일본 왕가는 왕위에 오른 지 겨우 100년 정도 된 집안이었을 뿐이고, 그때도 일본에는 글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문자로 기록된 역사서가 없었다. 앞서 7세기에 역사서가 편찬됐으나 왕권 다툼의 전란 속에 불타버렸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gt;망명 사관들이 날조한 ‘일본서기’ &lt;/b&gt;&lt;br /&gt; &lt;br /&gt; 일본 천황은 백제에서 망명한 학자들에게 ‘일본서기’ 편찬을 맡겼다. 조국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에 원한을 품은 이들은 새로 섬기는 일본 임금에게 충성을 서약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 손에서 만들어진 일본 역사서는 엄청난 모순과 날조로 가득 차게 됐다. 그들이 알고 있는 실제 역사는 오직 300년 전부터였지만, 1000여 년이나 길게 역사를 늘리기 위해 어떤 일왕은 100년도 넘게 통치했다고 썼다. &lt;br /&gt; &lt;br /&gt; 그 전에는 오랜 가계를 노래처럼 외우던 가다리베(語部)들이 역사서 구실을 했다. 가다리베는 일본말로 가계를 외워 불렀다. 그에 비해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한문으로 씌어 있는데 어떤 경우는 음을 따서 쓰고 어떤 것은 뜻을 차용해 썼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다. &lt;br /&gt; &lt;br /&gt; 신생 왕가의 역사를 오래된 것으로 탈바꿈시켜야 했고, 신라에 대한 증오에 불타면서 일본어로 들은 것을 한자로 옮겨야 했던 역사학자들의 어려움을 헤아린다면, ‘일본서기’에 수없이 나타나는 모순이나 오류는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다. &lt;br /&gt; &lt;br /&gt; 그중 대표적인 실수는 없애야 할 사실 하나를 완전히 지우지 못하고 그대로 뒀다는 것이다. 즉 일본 최초의 왕조는 4세기경 일본에 온 일부 학자들이 ‘기마족’이라고 일컫는 부족으로, 바다 건너 북쪽에서 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무시해버려도 좋을 일개 유목민집단이 아니라 한 세기에 걸쳐 한국의 북쪽 끝에서 남쪽까지 휩쓴 부여족으로 3세기에 북쪽에서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왔다. 선진기술을 지닌 부여족이 가야와 백제에 둘러막힌 지역을 버리고 부산에서 바다 건너 새로운 땅 왜(倭)를 점령하러 온 것이 369년 무렵. 이들은 가야와 백제에 많은 ‘사촌’을 남겨두고 떠났다. 그들은 바다 건너 일본땅 남서부에 많은 한국인이 수백년 동안 정착해 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부여족은 야심만만한 부족이었다. 그들은 일본에 최초의 실제 왕조를 건국하고 척박한 그곳에 중앙집권화된 정부체제와 기마병술을 전수했다. 8세기 역사학자들의 첫 임무는 이런 부여족의 일본 정복을 은폐하고 부여족이 이룩한 중앙집권 국가를 당대 천황네 조상들이 만든 것으로 바꿔치기하는 것이었다. 글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시대였으므로 이런 작업이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lt;br /&gt; &lt;br /&gt; 서기전 660년의 일본은 구석기 혹은 신석기시대였으며 금속문명은 그때까지 도래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 사람들이 최초의 거주민은 아니다. 10만년 전 일본땅에도 인간이 거주해 돌도끼, 돌칼 같은 물건을 남겼다고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gt;조몬(繩文)인과 야요이인 유적 &lt;/b&gt;&lt;br /&gt; &lt;br /&gt;  &lt;br /&gt; ① ‘일본서기’ 영문판 표지 그림. 동굴 밖으로 나오는 천조대신이 한국 무당의 차림을 하고 있다. &lt;br /&gt; ② 가야 말머리 갑옷.  &lt;br /&gt; 그들이 누구인지, 원시도구를 만들어 쓴 호모 사피엔스가 그대로 멸족했는지, 아니면 그 다음 신석기시대 조몬(繩文)인과 연결됐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필자의 의견으로는 구석기시대 인류와 일본의 신석기 조몬시대 인류는 모두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에서 시작해 한반도와 알래스카까지 뻗어나간 북방족에 속한다는 것이다. 방사성 탄소 측정 결과 조몬 토기는 서기전 1만년에서 서기전 3000년대와 그보다 조금 늦게까지 분포한다. &lt;br /&gt; &lt;br /&gt; 일본 홋카이도 섬 최북단에 일부 남아 있는 아이누족은 오랫동안 조몬인의 후손으로 여겨졌다. 일본 정부가 종족외혼을 장려한 결과 순수 아이누는 지금 100여 명밖에 없지만 이들은 현재 일본인들보다 몸에 털이 많고 얇은 입술과 잘 발달된 턱을 지녔으며 몽골형 눈꺼풀이 없다. 백인인 코카서스 인종이 분명한 이들의 먼 조상은 아시아 북서부에서 이주해온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다. &lt;br /&gt; &lt;br /&gt; 조몬인은 수천년 동안 사냥으로 먹고 산 종족으로 농사를 짓지 않았으나 서기전 3세기경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으로 오가는 관문인 규슈 북부에서부터 나타났다. 논농사법과 금속지식을 지닌 완전히 다른 혈통의 야요이(彌生)종족이 나타나 조몬인을 밀어내고 규슈에 정착했다. 이들의 신기술은 일본땅 절반을 넘어 동부까지 퍼져갔다. 규슈에서 발굴된 야요이인의 두개골은 한반도 남부 사람의 것과 유사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야요이인은 조몬인과도 결혼해 논농사를 가르치기도 했지만 농토를 빼앗기 위해 원주민을 토벌하기도 했다. 몇몇 고분에서는 조몬과 야요이 유물이 섞여 나오기도 하는데, 이때 토기의 생산이라는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lt;br /&gt; &lt;br /&gt; 서기 57년 씌어진 중국역사서는 이 당시 왜에 100여 개가 넘는 부족집단이 청동기문명을 누리며 살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일본 역사가들이 말하는, “이보다 700년 전 신인(神人) 진무천황이 나타나 통일국가를 건국했다”는 주장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한반도에서 온 야요이인은 대부분 농부였다. 한국인들이 엄청난 학식과 신기술을 가지고 이주해온 것은 이보다 훨씬 뒤인 고분시대 이후의 일이다. 새로운 이주자들은 집단 정착지를 이루고 군림했으며 조몬인은 피지배계층이 됐다. &lt;br /&gt; &lt;br /&gt; 위의 상황으로 미뤄보건대, 일본 외무성이 내놓은 ‘일본약사(日本略史)’에서 “일본에 논농사와 금속문화가 들어온 것이 서기전 9세기”라고 한 것은 실제보다 500여 년이나 앞당겨 쓴 것이다. 일본 외무성은 또 “야마토 정부는 서기전 5세기경 일어났다”고 했다. 그러나 그 시기는 여전히 구석기 조몬시대라 철로 된 창칼도 없었고 논농사도 짓지 않았고 대단위 정부조직도 없었다. 고고학은 일본 외무성의 이런 역사기술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lt;br /&gt; &lt;br /&gt; 고고학은 구석기 인간인 조몬과 아이누족이 정벌당했거나 바다를 건너온 한국인 집단과 섞여버렸음을 시사한다. 이 시기에 바다를 건너온 한국인 집단은 일본 열도 여러 군데에서 한국문화를 발달시켰는데 그중 세 군데가 발달의 본산이 됐다. 규슈지방, 북쪽 해안의 이즈모 지방, 그리고 야마토로 알려진 오사카 나라평원이 그곳이다. &lt;br /&gt; &lt;br /&gt; 3세기에 중국 한나라가 망하자 난징과 산둥 부근에서 ‘진인(秦人)’이라 불리는 중국인들이 일본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을 거쳐야만 일본으로 들어올 수 있었고 그중 일부는 한국땅에서 몇 대를 살다가 한국인이 됐다. &lt;br /&gt; &lt;br /&gt; ‘일본서기’ 이전 후한의 공식 사서인 ‘한서(漢書)’나 ‘위지(魏志)’ 등 3세기 의 중국책에 따르면 왜에서 부족간 권력투쟁에 의한 내전이 있었다. 중국에서는 이들을 ‘왜구’ ‘난쟁이 족속’이라 일컫고 있었다. 몇 구절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lt;br /&gt; &lt;br /&gt; ‘왜인들은 새해도 모르고 사계절도 모른다. 그저 봄에 밭을 갈고 가을에 추수하는 것으로 한 해를 가늠한다. 한 족장이 다른 부족장들보다 강력해 보인다. 규슈에 그 족장의 부(副)족장이 있다. 여자들은 몸에 분홍과 붉은 물감을 칠하고 맨발로 다니는 것이 보통이다. 길은 날짐승의 통로나 다름없고 좋은 논이 없다. 주민들은 물고기를 잡아 나무그릇에 담아서 맨손으로 집어먹는다. 독한 술을 많이 마신다.’&lt;br /&gt; &lt;br /&gt; &lt;img src=&quot;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5/04/22/200504220500025/image/200504220500025_3.jpg&quot;&gt;&lt;br /&gt; &lt;br /&gt; 적어도 중국인 기록자의 판단에 따르면 3세기 후반 일본문명은 거의 원시시대나 다름없었다. 당시의 상류층은 조그만 봉분형 무덤을 만들고 청동거울이나 동검, 동탁을 부장했다. 청동방울을 쓰는 한국인의 도래로 청동과 더불어 철기를 사용하며 지석(支石)을 세우는 사람이 많아졌다. &lt;br /&gt; &lt;br /&gt; 이처럼 연달아 일본땅에 들어온 이주자는 뒤떨어진 왜국에 와서 쉽사리 지배층이 되어 더 낳은 삶을 구가하려는 한국인들이었다. 이 시대에는 민족주의란 개념도 없고 한국과 왜국에 대한 충성심이 대립하는 것도 아니었다. 바다는 주요 수송통로이고 소통할 수 있는 길이었다. 한반도의 같은 지역에서 떠나온 한국인들은 왜국에 와서도 같은 지역에 모여 살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gt;첫 번째 신라인 개척자, 스사노오노 &lt;/b&gt;&lt;br /&gt; &lt;br /&gt; 신라인은 그중에서도 활동적인 이주집단이었다. 북쪽 해안의 이즈모(현재 시마네현 마쓰에)가 그들의 주된 거주지였다. 오늘날에도 이즈모에는 신도(神道)에 나오는 천조대신 아마데라스 오미가미의 오빠로 알려진 맹렬한 남성 스사노오노 미코도(素?鳴尊 또는 須佐之男)를 받드는 신사가 있다. &lt;br /&gt; &lt;br /&gt; 스사노오노는 실존인물로 신라에서 온 첫 번째 개척자인 듯하다. 그의 아들은 신라에서 옷감을 취급하는 상인이라는 암시가 일본서기에 나와 있다. 이즈모 신사는 천조대신을 받드는 이세 신사보다 오래된 곳이며 한때는 일본에서 가장 큰 목조건물이었다. 지금도 ‘이즈모 신사에서 결혼하면 복을 받는다’고 알려져 있다. 성스러운 백마 모형을 안치한 마구간 건물도 있다. &lt;br /&gt; &lt;br /&gt; 이로 미루어 초기에 신라지역에서 건너간 이주민을 이끈 스사노오노 같은 무속적인 지도자는, 그보다 늦은 시기 경주 천마총을 만든 사람들과 같은 일파임을 알 수 있다. 스사노오노를 상징하는 신칼은 그가 머리를 베어 죽인 용의 꼬리에서 뽑아낸 것이라 한다. 이 칼은 ‘오로시노 가라스키’, 다시 말해 ‘한국의 용검(龍劍)’이라고 불린다. 이 칼은 일본 왕권을 상징하는 삼종신기(三種神器)의 하나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당시 한반도에 삼국이 있던 것처럼 일본에도 세 곳의 새로운 한인 정착지가 있었다. 신라인들은 이즈모에, 고구려에서 건너간 이주민들은 규슈 북쪽에 자리잡았다. 부산-가야-백제 지역에서 건너간 사람들은 동쪽 깊숙이 야마토 또는 나라라고 불리는 땅으로 모였다. &lt;br /&gt; &lt;br /&gt; 기운 찬 한국인들이 일본땅으로 건너가면서 시베리아 지방에 성행한 것과 비슷하게 그들의 무속신앙도 옮겨갔다. 따라서 이들은 신의 경지에 들어가 영혼세계와 소통하면서 무리를 재난에서 막아줄 사람을 지도자로 받들었다. 지방에 따라 다르지만 이 당시 모든 한국인은 무속신앙을 갖고 있었고, 일본의 무속은 한국에서 유입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찍이 세계 여러 나라가 샤머니즘 형태의 신앙을 받들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gt;이즈모·규슈·야마토가 한인 정착지 &lt;/b&gt;&lt;br /&gt; &lt;br /&gt; 북방 전역에서 태양은 소중한 존재였다. 곡식을 여물게 하는 태양을 우러르지 않을 수 없었다. 뱃사람의 삶에 중요한 바람도 숭상되긴 마찬가지였다. 또한 지방마다 특수한 신을 모셨다. &lt;br /&gt; &lt;br /&gt; 논농사에는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대가족이 필요하다. 풍년을 기원하는 온갖 행사가 치러졌다. 다산과 풍년은 매우 중요하게 간주되어 오늘날에도 신도 신앙에는 풍년과 다산의 성적 상징이 가득하다. &lt;br /&gt; &lt;br /&gt; 애초에 존재하던 수천 개의 조그만 마을은 야요이 시대에 와서 점차 통합되고, 가미신도 넓은 지역을 부여받으면서 줄어들었다. 지도자가 나타나 지배영역을 확보하면서 조상신 가미도 더욱 숭상됐다. 이에 따라 지도자인 왕의 조상신은 훨씬 우월한 것이 됐다. &lt;br /&gt; &lt;br /&gt; 일찍이 신라에서 건너와 이즈모에 모여 사는 집단과 그보다 늦게 건너와 천조대신 아마데라스 오미가미를 수호신으로 받드는 집단 사이에는 모호하게나마 권력분배가 이뤄진 듯하다. 당시 중국의 기록에는 여왕 히미코(卑彌呼)가 3세기 말 실제로 일본의 일부 지방을 다스린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고대 일본사에는 이런 여걸이 많이 등장한다. &lt;br /&gt; &lt;br /&gt; 일본 천황 혈통이 천조대신과 태풍의 남신(男神) 스사노오노 미코도의 결합으로 비롯됐다는 설정은 그때 일종의 타협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남신이 아마데라스 여신의 목걸이인 곡옥 500개를 씹어먹은 후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lt;br /&gt; &lt;br /&gt; 이즈모의 신라인 집단은 시간적으로 먼저 일본에 건너왔다. 그런데 뒤늦게 김해에서 떠나온 부여 기마족 또는 가야 백제인 집단은 성능이 뛰어난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규슈에서 오사카 나라지역으로 이동했는데, 본질적으로 같은 한국인인 두 집단은 평화협정을 맺어 이즈모 그룹이 해의 여신에게 첫째 자리를 내주며 항복했다(이것이 일본역사에서 말하는 ‘국양(國讓)’이다). 이리하여 천조대신은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나와 있는 대로 초대 일왕의 거룩한 조상이 됐다.&lt;br /&gt; &lt;br /&gt; &lt;img src=&quot;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5/04/22/200504220500025/image/200504220500025_4.jpg&quot;&gt;&lt;br /&gt; &lt;br /&gt; &lt;br /&gt; 이즈모에 모인 집단은 아마도 뱃사람과 어부들이었기에 바람신을 숭상하다가 논밭을 지닌 아마데라스 여신 그룹에게 제압당했을 것이다. 이즈모 주변 땅은 벼농사에 적당하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같은 한국인인 두 개척자 집단은 결국 경쟁보다는 타협 쪽으로 뜻을 모았는데, 그 방법은 혼인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아마데라스의 자손인 1~3대 천황은 모두 스사노오노 쪽의 여자들과 결혼한 것이다. 스사노오노, 즉 이즈모 바람신의 후손인 이 여자들은 조상으로부터 신통력과 점성술을 이어받은 무당이었을 것이다. &lt;br /&gt; &lt;br /&gt; 실제로 초기 천황들의 이름과 가계를 살펴보면 이즈모에 정착한 신라인의 자취가 어렴풋이 드러난다. 그들에 대한 기억이 역사를 암기하던 7~8세기 직업 사관들에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gt;일본이 가야를 정복했다고? &lt;/b&gt;&lt;br /&gt; &lt;br /&gt; 4세기 후반 왜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변화는 아주 급격한 것이었다. 3세기의 중국사서에는 ‘일본에 말이 없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데 갑자기 많은 말의 존재가 입증된 것이다. 이 말들은 배에 실려 한국에서 바다를 건너온 것이다. 고구려 이웃 북방지역의 부여족이 길들여 사용하던 작달막한 몽고말인데, 부여족이 한반도 서부지역(백제로 알려진 곳)을 점령하고 부산 근처 가야지역으로 퍼지던 때에도 부여족이 대동하고 다녔다. 한국 고대사에 ‘동부여가 바다로 사라졌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일본사는 이를 회피한다. &lt;br /&gt; &lt;br /&gt; 백제지역을 정복한 부여족은 그대로 남아 살기도 하고 일부는 나아가 가야족을 정벌, 그곳에서 입지를 굳건히 다진 뒤 더 용감한 일부는 369년 바다 건너 일본땅으로 갔다. 대담하게도 말이 동승할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간 이들은 4세기의 가장 큰 선단부대였으며 작전은 성공했다. &lt;br /&gt; &lt;br /&gt; 일본의 어용 사학자들은 물론 이를 ‘부여족의 일본 정벌’로 기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공왕후, 진무 및 여러 왕대의 기록에는 이 사실이 수없이 반영돼 있다. &lt;br /&gt; &lt;br /&gt; 8세기 당대 지배자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한 역사 쓰기에서 사실은 왜곡되고 180도 뒤집어져 ‘일본이 가야(미마나)를 정벌했다’고 기록됐다. 사실은 그와 정반대로 가야가 일본을 정벌한 것인데 말이다! &lt;br /&gt; &lt;br /&gt; 서기전 18년 백제 건국에서 6갑자, 즉 360년 이후를 보면 당시 부여 기마족의 이런 움직임과 대략 부합한다. 중국 한나라 멸망 이후 동아시아 전역에서 역사 개편의 소요가 지속되던 때였음을 생각해야 한다. 진나라와 고구려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리던 부여족은 남하하면서 멸망한 낙랑족과 합류하며 세를 불렸을지 모른다. &lt;br /&gt; &lt;br /&gt; 일본에서 말하는 이른바 ‘역사’에 따를 것 같으면 중애천황은 362년 죽었다. 그의 통치 이후 신공왕후(오키나지 다라시 공주)의 섭정이 이어졌다. 신공은 한국에서 출생한 왕녀다. 신공과 그녀의 아들 오진왕(호무다 와게 또는 이와레 히코노 수메라 미코도 왕자로도 불린다)의 출연은 일본의 역사서에서 그 연대가 정확히 두 갑자인 120년 전으로 앞당겨졌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전체적인 왜곡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약과다. 그들에 따르면 신공이 가야(미마나)를 정복하고 이곳을 ‘일본(일본이라는 이름이 생기기도 전에)’이 지배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369년에 가야에 기반을 둔 부여족이 바다 건너 규슈로 건너가 왜를 정벌했다. &lt;br /&gt; &lt;br /&gt; 부여족 선단의 항해 방향을 거꾸로 돌려놓은 사실을 그럴 듯하게 만들기 위해 일본역사서는 ‘신공왕후가 대구까지 올라가 신라와 가야를 정복했으며 신라왕은 자발적으로 항복했다’고 덧붙였다. 물론 이는 모두 날조다. 왜는 한반도에 침입해 대구까지 올라갔다가 방향을 틀어 다시 남하하면서 신라와 백제를 정복한 일이 없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gt;진무천황 = 이와레 왕자 = 오진천황 &lt;/b&gt;&lt;br /&gt; &lt;br /&gt; 8세기 일본 사가들은 ‘구다라기(백제기)’를 참고했을 것이다. 부여족은 대구를 정복하고 계속 남하했다. 그들은 만주의 본거지를 떠난 이래 계속 몽고말을 타고 이동했다. 부여는 남쪽에 퍼져 있던 마한 원주민을 제압하고 백제 지역에서 전리품을 얻어낸 뒤 낙동강 유역의 근거지나 부산으로 떠났다. &lt;br /&gt; &lt;br /&gt; 이러한 부여족의 정복활동 전체가 일본사서에는 ‘이와레 왕자의 야마토 동정(東征)’으로 기록돼 있다. 이와레 왕자는 후일 진무(神武)천황이란 이름으로 알려진다. 여기서 이와레의 ‘이와’는 지금도 바위(岩)를 뜻하며 ‘레(余, 餘)’는 족속이란 의미의 말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lt;br /&gt; &lt;br /&gt; 진무천황이란 이름은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편찬된 이후인 800년경에 와서야 처음 등장한다. 이와레, 즉 부여 바위왕자가 지나간 길에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는 규슈에서 출발해 일본 내해를 따라 동쪽으로 400km 넘게 떨어진 나라의 야마토 평원으로 항해한 것이다. 지름길인 시고쿠섬의 남쪽 태평양 바다로 들어올 수 있지만 당시 배의 성능상 내해를 따라 들어가는 것이 훨씬 안전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이와레 왕자의 동정 속도는 느렸다. 곳곳에서 원주민의 저항에 부딪혔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와레 왕자의 동정은 4년, ‘고사기’에 따르면 16년이 걸렸다. 마침내 그의 부대는 오사카와 요도강에 상륙했지만 여기서 오랜 원주민(아마 야요이족일 것이다)의 저항을 받아 패했다. &lt;br /&gt; &lt;br /&gt; 이에 그들이 받드는 해의 여신 아마데라스 오미가미가 해 뜨는 동쪽을 향해 진군해온 것을 노여워해 패했다고 생각하고 이즈(紀伊)반도로 배를 돌려 해를 등지고 서쪽으로부터 상륙했다. 후쿠오카현 동굴 고분벽화에 아마도 진무와 야다노 가라스(八咫烏)의 전설을 묘사한,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진무의 배를 인도하는 그림이 있다. 이때 이와레 왕자의 두 형제가 폭풍에 휘말려 죽었다. 그들의 어머니는 용왕의 딸이었다고 한다. &lt;br /&gt; &lt;br /&gt; 시련이 많아지만 마침내 그릇에 제물을 담아 제사를 지내게 됐다. 이와레 왕자도 토기를 직접 빚었다. 또다시 치른 전투가 패색이 짙어졌을 때 금빛 깃털이 달린 연(매를 말한다)이 이와레 왕자의 활에 내려앉아 적들을 눈부시게 만든 덕분에 이겼다. 오늘날 일본군부의 최고 휘장은 금빛 연 훈장이다. 이와레 히코노 수메라 미코도(磐餘(余)彦) 왕자, 즉 진무천황은 오진천황을 말한다. 일본사를 늘리기 위해 오진천황의 활동을 진무라는 가상 인물에 갖다붙여 기록한 것이다. &lt;br /&gt; &lt;br /&gt; 이와레 왕자(오진천황)는 우네비산에 안장됐다. 지금도 매년 4월 초사흗날 왕실의 제관이 나와 산과 강, 바다에서 나는 제물로 제사를 지낸다. 제관들은 그 제사가 현재의 일본 천황가문이 큰 덕을 입은 외국인 정복자에게 올리는 것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lt;br /&gt; &lt;br /&gt; 그런데 첫 역사책에 그의 동정(東征)에 관한 기록은 대단히 세밀하게 기록된 반면, 그의 치세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 하지만 그의 아들 닌도쿠(仁德)왕의 통치에 대해서는 많이 기록돼 있다. 닌도쿠왕은 가장 큰 능묘를 축조했다. 이 능묘는 경주고분의 것보다 크다. 일본에는 규모가 다른 2000여 기의 고분이 있는데 한반도에 가까운 규슈 북부의 후기 야요이 시대 무덤은 자그마하다. 그러나 5세기가 되면서 고분은 갑자기 엄청난 규모로 커진다. 이 대형 고분틀이 모두 오사카 나라지역에 분포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gt;닌도쿠 왕릉 발굴이 금지된 이유 &lt;/b&gt;&lt;br /&gt; &lt;br /&gt; 또한 이들 고분에는 수많은 부장품이 매장돼 있다. 3세기 중국의 책 ‘위지’는 “왜에는 말이 없다”고 했으나 대형 고분에는 한국식 마구와 무기류가 부장돼 있었다. 부여족이 전투에 쓰던 말과 마구, 당시의 최신무기인 철제무기들로 보인다. &lt;br /&gt; &lt;br /&gt; 옛 천황들의 무덤으로 알려진 이 고분군은 일본 정부의 방침에 따라 발굴이 금지된 상태다. 그런데 1872년 폭풍으로 닌도쿠 왕릉이 무너져 이를 복원할 때 내부를 본 컬럼비아대학의 쓰노다 류사쿠(須田龍作) 일본사 교수는 부장된 유물이 “더할 나위 없이 한국적이었다”고 했다. 일본 당국이 부여 기마족의 야마토 정벌을 논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닌도쿠 왕릉을 발굴해야 한다. &lt;br /&gt; &lt;br /&gt; 부여족 혈통의 두 번째 왕이 되는 닌도쿠 천황(‘일본서기’에는 16대 왕으로 기재되어 있다)은 능의 규모로 보아 가장 강력한 군주였던 듯하다. 그의 통치형식은 봉건제이지만 장관이나 봉건영주와 같은 4개의 우지(氏)가 있어 왕명은 모두 그들을 통해 전달됐다. 4명의 우지 중 3인은 부여 기마족 건국자 오진왕을 보좌하는 무장이었다. 나머지 한 명은 옛 야요이족 출신으로 무속의례를 주관하는 모노노베(物部) 가문이었다. &lt;br /&gt; &lt;br /&gt; 후일 모노노베 가문은 임금이 되는 근거가 무속신앙에 있음을 주장하면서 무속과 대치될 불교가 왜에 유입되는 것을 반대했다. 나카도미 가문도 오래전 왜에 자리잡은 집안으로 여러 신에게 종교의례를 집전하며 사슴뿔을 갖고 점술을 행하였다. &lt;br /&gt; &lt;br /&gt;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 일본 전역에서는 무속을 믿었지만 군사권력이나 종교권력은 모두 세습되고 있어서 혈통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일본 역사가들이 당대 주요 가문의 역사를 모두 신의 시대라는 고대와 연관시키고 조상을 모두 신으로 설정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gt;삼종신기가 가리키는 것은 한국 &lt;/b&gt;&lt;br /&gt; &lt;br /&gt; 일본 왕권의 상징으로, 이를 소유한 사람이 왕이 된다는 삼종신기(三種神器)는 4세기부터 전해 내려왔다. 그러한 전통은 전적으로 무속신앙에 따른 것이다. &lt;br /&gt; &lt;br /&gt; 그중 하나인 동경(銅鏡)은 처음엔 중국에서 제작됐는데 이것은 신통력을 지닌 것이라 하여 죽은 자의 가슴에 놓인 채 사후세계를 위해 부장되었다. 동경의 번쩍이는 기능은 고대 농경사회에서 일반화한 태양숭배와 통했다. 6세기 초 신라금관에 달려 있는 조그맣고 둥근 금판도 태양을 뜻한다. &lt;br /&gt; &lt;br /&gt; 삼종신기의 둘째 물건인 칼은 왕권의 상징으로 일찍이 신라에서 이즈모로 이주한 한국인의 권세를 말해준다. 이 특별한 칼은 맹렬남 바람신 스사노오노가 머리 8개 달린 용을 쳐부수고 얻어냈다.&lt;br /&gt;  &lt;br /&gt; ① 왕권의 상징, 곡옥이 장식된 신라 미추왕릉 출토 금제장식. &lt;br /&gt; ②5세기경 일본의 하니와 토용 무사(프랑스 기메 박물관 소장).  &lt;br /&gt; 셋째 신기는 곡옥 또는 곡옥목걸이다. 곡옥은 일본에서 나지 않고 한반도 북부에서 나는 연옥이나 경옥을 깎아 만들었다. 고대에는 다른 신기보다 이 곡옥(일본에서 마가타마라고 부른다)이 진정한 왕권의 상징이었다. 경주 고분에는 이런 곡옥이 수십 개씩 장식된 금관이 많이 부장됐다. &lt;br /&gt; &lt;br /&gt; 곡옥은 태아나 올챙이와 비슷한 모습이다. 물고기는 아시아 전체에서 부의 상징이다. 그 위에 한국 무속에서 호랑이는 산신의 전령으로 중요한 존재이며 벽사(?邪·요사스런 귀신을 물리침)용으로 지니는 호랑이 발톱은 곡옥과 생김새가 같다. 그러나 곡옥이라 해서 모두 똑같은 것은 아니며 그중에는 곰의 발톱도 있다. 단군은 웅녀(곰 토템 부족의 여인)의 아들이며 아이누족은 곰을 신으로 받든다. 홋카이도의 아이누족은 지금도 곰 축제를 연다. 곡옥은 일본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많이 발굴된다. 이 물건의 이동경로는 북에서 남으로 향한 것이지 절대 그 반대방향으로 역류해온 것이 아니다. &lt;br /&gt; &lt;br /&gt; ‘고사기’, 특히 ‘일본서기’에선 왕가의 분열상을 감추려는 끊임없는 조작이 행해졌지만, 14대 중애대(代)에 결정적인 단절이 있었다. 중애 이전 13명의 왕들은 모두 야마토에 거주했다는데, 중애왕만은 규슈에서 살았던 것이다. 중애왕은 10척 장신이라는 식의 특징적인 묘사가 많다. 그는 마지막 야요이 종족인 듯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중애왕비 신공왕후에 대한 기록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gt;한국의 왕녀 신공왕후 &lt;/b&gt;&lt;br /&gt; &lt;br /&gt; ‘일본서기’에 따르면 신공은 신라에서 온 것이 분명한 한국 왕자 아마노 히코코의 딸이지만 가야에서 왔을 확률이 더 높다. 중애왕은 신공과 결혼했다. 그는 이미 두 왕비에게서 얻은 아들 둘을 두고 있었다. 새롭게 왕비가 된 신공은 매우 명석하고 영리했으며 얼굴은 피어나는 꽃처럼 아름다워 아버지가 그를 매우 특별히 여겼다고 기록에 나와 있다. &lt;br /&gt; &lt;br /&gt; 신공은 야심이 대단하고 수완도 비범한 한국 왕녀였던 듯하다. 그녀가 한국을 원정했다는 일본의 주장은 정반대의 것일 수 있다. 그녀의 전설적인 행적은 369년 한국에서 바다를 건너와 일본을 정벌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외국인 왕족 신공의 개인적 거사(擧事)인 이 원정이 일본사에는 이와레 왕자의 무공에 가려 기록되지 않았다. 일본사가들은 부여족의 일본 원정 중 일부를 따서 이 두 인물의 전설적인 무공으로 돌려놓은 듯하다. &lt;br /&gt; &lt;br /&gt; 한반도가 이들에게 점령당해 왜땅으로 편입되고 신라왕이 굴복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 남녀가 신무기를 들고 바다를 건너와 왜를 정복한 것이다. 또다시 ‘바위’가 저변에 드러난다. 신공은 중애왕의 아이인 태아(이와레 왕자, 즉 오진왕을 말한다)를 한국이 아닌 왜땅에서 낳으려고 자궁에 돌을 끼워 막아 출산을 지연시켰다. 부여족의 일본 집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왜땅에서 태어난 자주적 왕가라는 해석이 가능하게끔 한바탕 작전이 연출된 것이다. 이로부터 350년 뒤 일본사를 처음 편찬할 때 한국과의 혈연관계를 덮어버리기 위해 역사기록의 전후좌우를 뒤바꾼 것이다. &lt;br /&gt; &lt;br /&gt; &lt;br /&gt; 신성시되나 실권 없는 日王 &lt;br /&gt; &lt;br /&gt; 5세기는 신라와 야마토 두 나라 모두 무당이자 제관인 지배자의 힘이 정점에 달했다. 527년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면서 무속의 색채는 많이 사라졌지만 일본에서는 계속 무속이 힘을 발휘했다. 이 원시 민중종교, 신도는 9세기에 불교와 대치되는 종교로서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lt;br /&gt; &lt;br /&gt; 신도는 점차 일왕 숭배를 위한 도구로 변질된 반면, 한국 무속에는 그러한 요소가 없었다. 한국에서는 왕권을 강화하는 요인으로 처음에는 불교가, 나중에는 유교가 작용했지만 그것은 신비한 주술적 힘을 이용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군사권이 무속과 결부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일본에서는 군국주의, 또는 ‘신성한 천황’을 위해 싸우는 일이 점점 중요하게 부각되고 정책상 우위를 차지하게 됐다. 13세기에서 14세기에 걸친 고다이고(後醍歸) 천황조와 메이지 유신 이후 19세기에 이러한 풍조는 극에 달했다. &lt;br /&gt; &lt;br /&gt; 일본 역사 초기의 무속신앙은 한국에서와 비슷한 것이었다. 한국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인 산신(山神)은 일본 무속신앙에 전적으로 흡수됐다. 즉 천조대신 아마데라스의 손자 니니기는 규슈에 하강하여 산신의 딸을 만나 사랑하면서 그녀가 그날 밤 잉태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는 단군설화와도 비슷하다(이 부분에 관해서는 최태영이 쓴 ‘인간 단군을 찾아서’의 가야 지명연구 항목을 참고하기 바란다. 여기서 산신으로 소개된 고황산령신(高皇産靈尊)이 고령가야의 한국인이었다는 연구가 가야지명 연구자인 다카모도(高本政俊)와 최태영의 연구로 나와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성군이 나오면 받들지만 패륜 군주가 나오면 제거한다는 것이 중국의 천명 개념이다. 중국에서는 천명을 내세워 왕조를 바꾸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나 이 개념은 결코 일본에는 도입되지 않았다. 그 대신 권력가문이 내세운 총리나 장군이 권력을 행사했으며 천황은 신성시되긴 했지만 실권 없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lt;br /&gt; &lt;br /&gt;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은 한적(漢籍)을 옆에 두고 이를 표절한 것이 분명하다. 한 예가 닌도쿠 천황은 거대한 묘 규모로 보아 일단의 강제노역을 동원한 왕이었으나, ‘일본서기’는 그를 민가에 밥 짓는 연기가 올라오지 않는다 하여 3년간 세금을 면제해준 매우 인자한 군주로 기술했다. 중국 사서를 그대로 베낀 것이다. &lt;br /&gt; &lt;br /&gt; 닌도쿠왕대(代)에 부여 기마족이 들여온 오락거리, 매사냥이 유행했다. 석빙고에 얼음을 저장했다가 여름에 쓰기도 했다. 경주 석빙고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를 통해 비단과 무명을 비롯해 금, 은, 철, 한문책 등이 들어오고 교역량이 늘었다. 이때도 불교는 유입되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gt;흔들리는 부여왕통 &lt;/b&gt;&lt;br /&gt; &lt;br /&gt; 8세기 역사기술의 방편 중 하나는 유명 가문 우지(氏)의 조상을 일본 건국자 이와레 왕자의 원정에 동참한 신(神)들과 연결하는 것이다. 대표 우지는 가문 전체에 군림했다. 왕의 명령은 대표 우지나 장관을 통해 하부로 전달되고 농민과 장인이 여러 우지에 종속되어 노역을 하면서 살았다. &lt;br /&gt; &lt;br /&gt; 우지는 외국, 특히 한국이나 중국 진나라에서 비단옷 재봉, 직조 같은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일본에 들어온 장인들이 형성한 것으로, 외래 예술과 기술을 망라한 이런 전문 우지가 700여 개나 됐다. 노예도 있었다. 남부 규슈가 전쟁에 패하며 생겨난 구마소족 같은 전쟁포로나 동부 혼슈에 굴종한 에미시족이 그러했다. &lt;br /&gt; &lt;br /&gt; 우지들의 존재로 왕권은 일정 부분 제한됐지만 천황이 군부의 손에 놀아나는 꼭두각시가 되면서 누가 천황이 되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천황은 그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시나 짓고 꽃밭이나 산책하고 제사나 지내고 빈둥거리면 그만이었다. 대신 국가의 정무는 민간 출신의 권력자가 집행하면서 어떻게든 자기 아들에게 대를 물려주거나 천황가와 혼사를 맺는 방법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lt;br /&gt; &lt;br /&gt; 한국 출신 가문이 번성하여 부여 지배계급과 혼사를 맺었다. 이 가문에서는 몇 대에 걸쳐 딸을 왕위 상속할 만한 자들에게 비로 들여보내고는 뒤에서 조종 하여 사위를 왕위에 올려놓았다. 후일 후지와라(藤原) 가문 같은 총리대신급 집안에서도 딸과 손녀를 줄줄이 왕비로 들여보냄으로써 일본의 왕권을 자기 뜻대로 조종했다. &lt;br /&gt; &lt;br /&gt; 5세기를 통틀어 왜국의 왕위는 부여 기마족의 후손이 차지했다. 닌도쿠왕의 비 바위 공주, 즉 이와노히메(磐之媛)는 가야 출신 가쓰라기 우지의 선조인 가쓰라기노 소츠의 딸이었고 그의 손녀딸 하에는 부여왕족 혈통의 두 임금 겐조(顯宗)와 닌켄(仁賢)의 어머니다. 겐조 왕대에는 경주 포석정에서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잔치를 벌인 것처럼 그도 닷새씩이나 연회를 계속하며 곡수연을 즐겼다. &lt;br /&gt; &lt;br /&gt; 그러는 동안 부여왕통은 차츰 유약해지고 혈통과 파벌 간에 왕권 다툼이 생겼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26대 왕인 게이타이가 즉위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변방 지역에서는 이에 대한 저항이 있었다. 527년 북규슈에서 일어난 이와이(岩井)의 난은 왕권교체에 반발하는 부여 기마족 후손들의 저항으로 보인다. 이즈음에 백제가 가야땅을 조금씩 먹어들어가고 있었으므로 부여 기마족의 한반도 내 지지기반도 전과 같지 않았다. 얼마 뒤 532년에는 신라가 가야의 북부를, 이어서 562년 남부 가야를 정복함으로써 가야는 끝났다. &lt;br /&gt; &lt;br /&gt; 6세기 말에는 불교 도입을 놓고 가야출신 신진세력과 화족 사이에 큰 대립이 생겼다. 한국인 후손으로 일본에 불교를 받아들이자는 소가(蘇我)와 오래된 무속을 그대로 받들자는 모노노베 두 파의 대립이 그것이다. 여기에선 친불교파가 승리했다. 이후 50여 년간 한국인 후손 소가 가문이 일본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어 딸들을 계속 왕비로 만들었던 만큼 일본 왕의 혈통에는 한국인 소가파의 피가 많이 스며들어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gt;비단 직조술 전파한 하타 가문 &lt;/b&gt;&lt;br /&gt; &lt;br /&gt; 점차 한국의 상류층이 전문기술을 가지고 이주해오기 시작했다. 한 예로 300년경 백제에서는 가께쯔(眞毛津)라는 이름의 옷 만드는 여성을 보냈다. 그 후손들은 기누누이(衣縫· 비단 직조 공인)로 자리잡았다. &lt;br /&gt; &lt;br /&gt; 덧붙여 기록에는 265년 중국 진시황(또는 사마염)의 방계손 하나가 일본에 왔다고 한다. 그 궁월군이 처음에는 한국에 정착하여 120가구를 거느리고 살았다. 시국이 복잡해지자 그는 후손을 모두 거느리고 왜로 이주했다(‘일본서기’에는 처음 백제인 궁월군으로 기록됐다가 9세기에 나온 책 신찬성씨록에는 ‘진시황제 3세손 효무왕’으로 그 표현이 바뀌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에서 뛰어난 비단 직조기술을 가지고 온 하타 우지는 부여 기마족의 통치 아래 번성했다. 이들은 광대한 토지를 하사받았다. 175년이 지난 후 하타 가문은 1만8670명으로 불어났다. 한국말을 하면서 살던 하타 사람들은 별도의 지역에 모여 살았으며 불교가 들어왔을 때 강력한 후원자가 됐다. &lt;br /&gt; &lt;br /&gt; 600년경 이 집안의 우두머리는 하타 가와가쓰(秦河勝)라는 사람이었다. 왜국과 한국의 관계를 평화롭게 유지하던 성덕태자가 죽었을 때 하타 가와가쓰는 이를 진정으로 슬퍼한 주요 인물이다. 그리고 100년쯤 지나 하타의 후손은 이번에는 간무(桓武) 천황의 통치를 도왔다. 그는 하타 집안 소유의 땅 중에서 지금 교토시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대지를 간무 천황에게 내주어 795년 여기에 새 수도 교토를 건설하게 했다. &lt;br /&gt; &lt;br /&gt; 예나 지금이나 교토는 비단 직조로 유명하다. 하타 우지의 후손들이 지금도 그 일에 종사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히데요시는 직조인들을 교토의 서북쪽 니시진(西陣)으로 이주시켰다. 그들의 혈통은 근본적으로 일본계가 아니지만 지금 그 일을 들춰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lt;br /&gt; &lt;br /&gt; 부여 기마족 시절 일본과 중국 사이의 광활한 바다를 건너는 직항로를 개척하기는 불가능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필연적으로 중국과 일본 간의 소통은 한정적이었고 그나마 한국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부여 기마족이 일본에 들어오면서 해상수송업도 성장했다. 이를 입증하는 사실 하나는 가라노(枯野)라는 배가 26년이 되어 더 쓸 수 없게 되자 태워버리면서 소금을 만들었다는 기록이다. 배에 불이 났을 때 신라 사신들이 신라에서 배 만드는 장인을 불러다 수리해주었다. 이것이 저명부(猪名部)의 시초다. &lt;br /&gt; &lt;br /&gt; 또한 가라노베에서 나온 나뭇조각으로 고토라는 악기를 만들었다. 고토의 원조격인 가야금은 1세기에 가야에서 처음 만들어 썼으며 신공왕후가 일본에 올 때 가지고 온 것으로 보인다. 그의 아들 오진왕이 가라노베에 대한 노래를 지어 부르기도 했다. &lt;br /&gt; &lt;br /&gt; 기마족이 온 뒤로 일본은 큰 변화를 겪었다. 일본의 관념론자들은 부여족의 원정에서 힌트를 얻어 이를 진무천황의 동정(東征)으로, 신공왕후 이야기로 꾸미고 이즈모 사람들이 진무에게 항복했다는 기이한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8세기의 일본 사관들은 부여족의 정복을 은폐하고 만세일계의 일왕가를 만들어 정복 사실을 반대로 뒤집고 그럴 듯하게 보이려고 최선을 다했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수백년 동안 잠자던 씨가 후일 ‘현인신 천황’을 핵심으로 한 군국주의로 발아되었다. 이토 히로부미와 그 일파가 일본을 세계강국으로 만들고자 했을 때 그들은 불교나 기독교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종교임을 알았다. 고대 신도 신앙은 초군국적, 초애국적 이념을 고취하는 데 이용하기 꼭 좋은 비조직적 신앙이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gt;한국인의 도움으로 탄생한 불상 &lt;/b&gt;&lt;br /&gt; &lt;br /&gt; 한국에서는 불교 유입 이후, 왕이 신과 소통하는 제관을 겸하던 무속적 개념이 좀더 현학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일본에서는 불교로 완전한 몰입이 이루어졌다. 맹렬한 불심을 가진 쇼무(聖務)왕은 딸(효겸(孝謙) 천황)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출가해 중이 되었다. 일본 불교는 도경(道鏡) 선사(효겸의 사랑을 받아 권력을 전횡한 승려)처럼 파행적인 경우도 있지만 기적과 천황 숭배를 중심으로 하여 국가안보를 주도한 무속 가문 나가토미(中臣)와 모노노베 우지에 의해 보존돼 왔다. &lt;br /&gt; &lt;br /&gt; 한국에서 불교가 들어오고 200년이 채 안 되어 불교는 이 섬나라를 완전 점령했다. 불심이 깊은 쇼무는 지방마다 절을 짓고 7층탑을 세웠다. 더 나아가 온 나라의 자원을 긁어모아 구리 100만근을 녹여 거대한 불상을 만들었다. 그런데 불상 제조가 여섯 번이나 실패로 돌아가자, 나중에는 그 일을 한국인 후손인 불교예술가에게 일임했다. 마침내 한국인의 손에 의해 불상이 만들어졌고, 그는 궁중의 4급관인 벼슬을 받았다. 그때까지도 일본은 한국인의 도움 없이는 잘 움직이지 못했던 것이다.   (끝) &lt;br /&gt; &lt;br /&gt; &lt;/span&gt;&lt;br /&gt; 동아 닷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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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1 Nov 2009 18:09:2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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