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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핵물리 학자 이휘소]]></title>
<description><![CDATA[gamroomgg의 블로그 입니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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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핵물리 학자 이휘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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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노년기까지 건강한 성생활 즐기려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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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p&gt;연구에 따르면 노년기에 성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은 나이에 비해 평균 4년에서 7년 정도는 더 젊어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미 여러 차례의 연구를 통해 밝혀졌듯이 노년기 성생활은&amp;nbsp;스트레스를 줄이고&amp;nbsp;행복감을 높여줄 뿐 아니라, 건강을 증진시키고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 &lt;br&gt;&lt;br&gt;다음은 노년기에도 성욕을 향상시키고 건강하게 사는 방법이다. &lt;br&gt;&lt;br&gt;&lt;strong&gt;1. 귀리를 먹는다&lt;/strong&gt;&lt;br&gt;&lt;br&gt;귀리는 이미 오랜 세월 성욕을 증진시키는 &amp;#39;숨은 약재&amp;#39;로 인정 받아 왔다. 귀리에 함유된 avenacoside라 불리는 영양소는 몸 속에 &amp;#39;죽어있는&amp;#39; 남성 호르몬을 활성화시켜 성욕을 상승시키는 효과가 있다. 나이가 들수록 남성 호르몬 테스터스테론은 점점 더 많은 양이 활용 불가 상태로 묻혀 버리는데 이 때문에 성욕이 감소하는 것이다. 귀리를 많이 먹으면 이 호르몬의 많은 양이 활성화 되어서 (성욕을 물론) 근육의 힘, 지구력, 사고력까지 높여준다. &lt;br&gt;&lt;br&gt;&lt;br&gt;&lt;strong&gt;2. 아마씨를 먹는다&lt;/strong&gt; &lt;br&gt;&lt;br&gt;린시드(linseed)라고도 불리는 아마씨(Flaxseed)는 껍데기 부분에 리그난 성분이 많이 함유돼 있는데, 리그난은 몸에 좋은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라디올(estradiol)의 분비를 촉진시켜 심장병, 골다공증, 질 건조증 같은 여성 질환을 예방해 준다. 리그난은 또한 남성 호르몬의 수치 유지, 탈모 방지, 여드름 예방, 콜레스테롤과 혈당 수치 유지, 항산화 작용 등의 기능을 제공한다. 아마씨 기름에는 리그난 성분이 많지가 않으니 반드시 껍질채 있는 통 아마씨를 먹는 것이 바람직하다. 매일 한 스푼씩 아침식사에 뿌려 먹으면 가장 좋다. &lt;br&gt;&lt;br&gt;&lt;br&gt;&lt;strong&gt;3. 견과류와 씨앗을 많이 먹는다&lt;/strong&gt; &lt;br&gt;&lt;br&gt;중국에선 오랜 세월 호두와 아몬드, 밤, 참깨, 삼 등을 정력 증강제로 사용해 왔다. 이들 견과류와 씨앗에는 아르기닌(arginine) 아미노산이 잔뜩 들어 있어서 성 호르몬의 분비를 활성화시키는 것으로 연구 결과 밝혀졌다. 성생활을 향상시키려면 하루에 6-10그램의 아르기닌을 (영양제 등으로) 섭취하거나, 매일 한줌의 견과류/씨앗을 먹는 것이 바람직하다. 달걀과 고기에도 아르기닌 성분이 많이 들어 있으니 참고하도록. &lt;br&gt;&lt;br&gt;&lt;br&gt;&lt;strong&gt;4. 히스티딘(Histidine) 성분을 먹는다&lt;/strong&gt; &lt;br&gt;&lt;br&gt;히스티딘(Histidine) 역시 성적 욕구 및 능력을 향상시키는 아미노산으로, 가금류, 생선, 고기, 달걀, 콩에 많이 들어 있다. 실제 실험 결과, 성관계 1시간 전 히스티딘을 먹은 여성들은 성감이 훨씬 향상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 성분은 중년 이후의 남성들에게도 효과가 있다. 영양제로 복용할 경우 하루 500mg이 적당량이다. 물론 음식을 통해 섭취하는 것이 가장 이롭다. &lt;br&gt;&lt;br&gt;&lt;br&gt;&lt;strong&gt;5. 생강 같은 자극적인 음식을 즐긴다&lt;/strong&gt; &lt;br&gt;&lt;br&gt;마늘, 양파, 계피, 생강, 후추, 고수(실란트로 혹은&amp;nbsp;코리앤더) 등의 자극적인 음식들은 아랫도리의 기능을 활성화시키는데 대단히 효과적이다. 특히 생강의 경우 성욕을 증진시키는데 특효가 있을 뿐 아니라 우울증을 해소하고 정서적인 안정을 가져오는 기능도 제공한다. 하루 5그램 정도면 성생활을 증진시키는데 충분한 양이 될 수 있다. &lt;br&gt;&lt;br&gt;&lt;br&gt;&lt;strong&gt;6. 냄새을 이용한 성욕 증진&lt;/strong&gt;&lt;br&gt;&lt;br&gt;연구에 따르면 특정 냄새가 남성의 성욕을 높이고 성기로의 혈액 순환을 활성화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호박 파이, 감초, 바닐라 향이 가장 효과적. &lt;br&gt;&lt;br&gt;&lt;br&gt;&lt;strong&gt;7. 삼지구엽초 &lt;/strong&gt;&lt;br&gt;&lt;br&gt;중국어로 음양곽이라고도 불리는 이 식물은 영어로 흔히 &amp;quot;Horny goat weed&amp;quot;로 알려져 있다. 염소가 이 풀을 먹고 짝짓기를 하기 때문. 이 풀은 중국에서 오랜 세월 발기부전 치료제로 사용돼 왔으며, 그밖에도 신장, 관절 등에 생긴 장애를 치료하기 위한 약재로도 사용돼 왔다. 이른바 &amp;quot;장수 약초&amp;quot;로도 알려진 이 풀은 감각 신경을 자극하고 신경전달 물질을 활성화시켜&amp;nbsp;성욕을 증진시키는데 효과가 있다. 효과를 얻기 위해선 매일 복용하는 것이 좋다. 건강 식품 매장이나 온라인에서도 이 약초를 팔고 있으니 참고하도록. &lt;br&gt;&lt;br&gt;출처: 7 Secrets for Lifelong Libido&lt;br&gt;&lt;a href=&quot;http://health.yahoo.com/experts/drmao/19740/7-secrets-for-lifelong-libido/&quot;&gt;http://health.yahoo.com/experts/drmao/19740/7-secrets-for-lifelong-libido/&lt;/a&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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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1 Nov 2009 15:35:56 +0900</pubDate>
    <category><![CDATA[고구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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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천연 식물로 만든 비아그라 나오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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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p&gt;독일의 연구진들이 비아그라보다 더 효능이 좋은 천연 식물 약재를 발견했다. &lt;br&gt;&lt;br&gt;&lt;img hspace=&quot;5&quot;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42/75/health_blog/folder/10/img_10_9490_2?1253595304.jpg&quot; vspace=&quot;5&quot; border=&quot;0&quot;&gt;&lt;br&gt;남가새(tribulus terrestris)라고 불리는 이 식물은 열매를 동양 한의학에서 약재로 쓰기도 한다. 질려자(?藜子)라고 불리는 약재가 바로 이 식물의 열매로 만든 것이다. &lt;br&gt;&lt;br&gt;베를린에 위치한 Charite 병원의 임상 실험 결과, 남가새 식물 성분을&amp;nbsp;복용한 50명의 남성들은 더 나은 성생활을 영위하게 됐다고 한다. 이들은 섹스에 더 많은 즐거움을 느꼈으며, 그에 따라 자신감도 더 높아졌다고. &lt;br&gt;&lt;br&gt;놀라운 사실은 비아그라를 복용한 그룹보다 이 식물을 복용한 그룹이 더 높은 성기능 향상 효과를 보았다는 것이다. &lt;br&gt;&lt;br&gt;이 연구에 사용된&amp;nbsp;약재는 남가새 식물의 성분을 주원료로 섞은 것으로 &amp;quot;플란타그라(Plantagrar)&amp;quot;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약은 2010년 시중에 실제로 출시될 예정이다. &lt;br&gt;&lt;br&gt;남가새 식물은 동양에서 뿐만 아니라 남미 안데스 민족들 사이에서도 약재로 활용된 역사가 있다. &lt;br&gt;&lt;br&gt;그러나 이 약재에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실험 참가자 중 2명은 이 약을 먹고 심한 설사에 시달렸다고. &lt;/p&gt;&lt;p&gt;&lt;br&gt;German researchers testing veggie Viagra: reports&lt;br&gt;&lt;a href=&quot;http://health.yahoo.com/news/afp/lifestylegermanysciencemedicinesex_20090316160900.html&quot;&gt;http://health.yahoo.com/news/afp/lifestylegermanysciencemedicinesex_20090316160900.html&lt;/a&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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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08 Nov 2009 10:29:18 +0900</pubDate>
    <category><![CDATA[고구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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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비아그라보다 훌륭한 중국 한약재?]]></title>
    <description>
        &lt;P&gt;&lt;IMG hspace=5 src=&quot;http://img.blog.yahoo.co.kr/ybi/1/42/75/health_blog/folder/10/img_10_8946_0?1223478549.jpg&quot; vspace=5 border=0&gt;&lt;BR&gt;&lt;BR&gt;중국 한방에서 '음양곽'이라 불리는 삼지구엽초(horny goat weed)가 천연 성분의 '비아그라' 역할을 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lt;BR&gt;&lt;/P&gt;&lt;P&gt;&lt;/P&gt;&lt;P&gt;이탈리아 밀라노대학 연구팀은&amp;nbsp;삼지구엽초가 발기 부전 치료에 효과적이며 비아그라보다 부작용이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lt;BR&gt;&lt;BR&gt;비아그라는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발기부전 치료제이나, 일부의 경우 두통이나 위통, 시각 교란 등과 같은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한다.&lt;BR&gt;&lt;BR&gt;연구팀에 따르면 삼지구엽초 추출성분인 이카린(Icariin)이 남성 성기로의 혈액 공급을&amp;nbsp;통제하는 효소인&amp;nbsp;'PDE5A1'를&amp;nbsp;억제함으로써 성기로 흐르는 혈류를 증가시켜 발기를 돕게 된다.&lt;BR&gt;&lt;BR&gt;연구팀은 &quot;아직&amp;nbsp;동물 실험을 거치지 않은 단계라&amp;nbsp;인체에 적용하기는 어렵지만,&amp;nbsp;이카린 성분이 정확하게 성기로의 혈류를 차단하는 효소를 억제한다는 점에서 비아그라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quot;고 설명했다. &lt;BR&gt;&lt;BR&gt;삼지구엽초는 예로부터 한방에서 양기를 보충하거나 월경 장애를 치료하고 기력을 돋우기 위해 사용되어 왔다. &lt;BR&gt;&lt;BR&gt;'horny goat weed'라 불리는 것은 이&amp;nbsp;약초를 먹은 숫양들이 수많은 암양과 교미한다 해서 붙여졌다. &lt;BR&gt;&lt;BR&gt;출처: Could Chinese Herb Be a Natural Viagra? &lt;BR&gt;&lt;A href=&quot;http://health.yahoo.com/news/healthday/couldchineseherbbeanaturalviagra.html&quot;&gt;http://health.yahoo.com/news/healthday/couldchineseherbbeanaturalviagra.html&lt;/A&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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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08 Nov 2009 10:28:41 +0900</pubDate>
    <category><![CDATA[고구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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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삼국사기에 나타난 장수왕의 외교...]]></title>
    <description>
        &lt;FONT color=#0000ff&gt;十三年 &lt;BR&gt;&lt;BR&gt;遣使如魏貢.&lt;BR&gt;&lt;BR&gt;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十五年 &lt;BR&gt;&lt;BR&gt;移都平壤.&lt;BR&gt;&lt;BR&gt;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lt;BR&gt;&lt;BR&gt;二十三年&lt;BR&gt;&lt;BR&gt;夏六月, 王遣使入魏朝貢, 且請國諱. 世祖嘉其誠款, 使錄帝系及諱以與之. 遣員外散騎侍郞李敖, 拜王爲都督遼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遼東郡開國公高句麗王. 秋, 王遣使入魏謝恩. 魏人數伐燕, 燕日危蹙. 燕王馮弘曰: &quot;若事急, 且東依高句麗, 以國後擧.&quot; 密遣尙書陽伊, 請迎於我.&lt;BR&gt;&lt;BR&gt;여름 6월, 왕이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역대 황제의 이름을 알려 줄 것을 요청하였다. 위 나라 세조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서 제실의 계보와 이름을 기록하여 보내게 하였으며, 원외 산기 시랑 이 오를 보내 왕을 도독요해제군사정동장군영호동이중랑장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으로 책봉하였다. 가을에 왕이 사신을 위 나라에 보내 사은하였다.&lt;BR&gt;위 나라 사람들이 연 나라를 자주 공격하였기 때문에 연 나라의 형세가 나날이 위급해졌다. 연 나라 임금 풍 홍이 &quot;만일 사태가 위급하면, 동쪽으로 고구려에 잠시 의탁하며, 훗날을 도모하겠다&quot;라고 말하고, 비밀리에 상서 양 이를 우리 나라에 보내 받아주기를 요청하였다.&lt;BR&gt;&lt;BR&gt;二十四年 &lt;BR&gt;&lt;BR&gt;燕王遣使入貢于魏, 請送侍子. 魏主不許, 將擧兵討之, 遣使來告諭. &lt;BR&gt;&lt;BR&gt;夏四月, 魏攻燕白狼城, 克之. 王遣將葛盧孟光, 將衆數萬, 隨陽伊至和龍, 迎燕王. 葛盧孟光入城, 命軍脫弊褐, 取燕武庫精仗, 以給之, 大掠城中. &lt;BR&gt;&lt;BR&gt;五月, 燕王率龍城見戶東徙, 焚宮殿, 火一旬不滅. 令婦人被甲居中, 陽伊等勒精兵居外, 葛盧孟光帥騎殿後, 方軌而進, 前後八十餘里. 魏主聞之, 遣散騎常侍封撥來, 令送燕王. 王遣使入魏奉表, 稱當興馮弘, 俱奉王化. 魏主以王違詔, 議擊之, 將發右騎卒, 劉樂平王丕等諫之, 乃止.&lt;BR&gt;&lt;BR&gt;연 나라 임금이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시자를 보내주기를 요청하였다. 위 나라 임금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군사를 동원하여 연 나라를 공격하려 하면서, 우리 나라에 사신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려 주었다.&lt;BR&gt;&lt;BR&gt;여름 4월, 위 나라가 연 나라의 백낭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왕은 장수 갈로와 맹광으로 하여금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연 나라 사신 양 이를 따라 화룡에 가서 연 나라 임금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갈로와 맹광이 연 나라 성에 들어가, 군사들에게 헌 옷을 벗게 하고, 연 나라 무기고에 있는 정장을 내주어 입게 하였다. 그들은 대규모로 성을 약탈하였다.&lt;BR&gt;&lt;BR&gt;5월, 연 나라 임금이 용성에 남아 있는 주민들을 동쪽 고구려로 옮기고, 궁전에 불을 질렀다. 불길은 열흘 동안 꺼지지 않았다. 이동하는 부녀자들에게는 &lt;SPAN style=&quot;COLOR: #ff001e; BACKGROUND-COLOR: #fff000&quot;&gt;&lt;FONT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quot; color=#0000ff&gt;갑옷&lt;/FONT&gt;&lt;/SPAN&gt;을 입혀 행렬의 복판에 서게 하고, 양 이 등은 정병을 거느리고 행렬의 바깥 쪽에 서게 하였으며, 갈로와 맹광은 기병을 거느리고 후미에 서서 수레를 나란히 몰아 진군하였다. 행렬의 길이가 80여 리에 이어졌다. 위 나라 임금이 이 소문을 듣고, 산기 상시 봉 발을 고구려에 보내 연 나라 임금을 압송하라고 하였다. 왕이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바치면서, 연 나라 임금 풍 홍과 함께 위 나라 임금의 교화를 받들겠다고 하였다. 위 나라 임금은 고구려 왕이 자기의 소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논의하였다. 그는 농우 지방의 기병을 출동시키려 하였으나, 유 혈·낙평·비 등이 간하여 이를 중지하였다.&lt;BR&gt;&lt;BR&gt;二十五年 &lt;BR&gt;&lt;BR&gt;春二月, 遣使入&amp;lt;魏&amp;gt;朝貢.&lt;BR&gt;&lt;BR&gt;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二十六年 &lt;BR&gt;&lt;BR&gt;春三月, 初, 燕王弘至遼東. 王遣使勞之曰: &quot;龍城王馮君, 爰適野次, 士馬勞乎!&quot; 弘慙怒, 稱制讓之. 王處之平郭, 尋徙北. 弘素侮我, 政刑賞罰, 猶如其國. 王乃奪其侍人, 取其太子王仁爲質. 弘怨之, 遣使如宋, 上表求迎. 宋太祖遣使者王白駒等迎之, 幷令我資送. 王不欲使弘南來, 遣將孫漱高仇等, 殺弘于北, 幷其子孫十餘人. 白駒等帥所領七千餘人, 掩討漱仇, 殺仇, 生擒漱. 王以白駒等專殺, 遣使執送之. 太祖以遠國, 不欲違其意, 下白駒等獄, 已而原之.&lt;BR&gt;&lt;BR&gt;봄 3월, 처음, 연 나라 임금 풍 홍이 요동에 당도했을 때, 왕이 사신을 보내 위로하여 말했다. &quot;용성왕 풍군이 이곳에 와서 야숙을 하고 있으니, 군사와 말이 피곤하겠소.&quot; 풍 홍은 부끄러워 하면서도 분노하여, 법도를 들먹이며 왕을 꾸짖었다. 왕은 풍 홍을 평곽에 있게 하다가, 얼마 후에 다시 북풍으로 옮겼다. 풍 홍은 원래 우리를 업수이 여기고, 정치와 법제도와 상벌을 자기 나라와 동일하게 하려고 하였다. 왕은 곧 그의 시종을 빼앗고, 그의 태자 왕인을 볼모로 삼았다. 풍 홍이 이를 원망하여 송 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리고 자기를 맞아가 줄 것을 요청하였다. 송 태조가 사신 왕 백구 등을 보내 그를 맞이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를 치송하게 하였다. 왕은 풍 홍이 남쪽으로 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장수 손 수·고 구 등으로 하여금 북풍에서 풍 홍과 그의 자손 10여 명을 죽이도록 하였다. 송의 사신 왕 백구 등은 풍 홍이 지휘하던 군사 7천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 장수 손 수와 고 구를 습격하여, 고 구를 죽이고 손 수를 생포하였다. 왕은 왕 백구 등이 고 구를 마음대로 죽였다는 이유로, 그를 잡아 사신편에 송 나라로 보냈다. 송 태조는 먼 곳에 있는 나라인 고구려의 뜻을 어기지 않게 위하여 왕 백구 등을 옥에 가두었으나, 얼마 후에 석방하였다.&lt;BR&gt;&lt;BR&gt;二十七年 &lt;BR&gt;&lt;BR&gt;冬十一月, 遣使入魏朝貢. &lt;BR&gt;&lt;BR&gt;十二月, 遣使入魏朝貢.&lt;BR&gt;&lt;BR&gt;겨울 11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1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二十八年 &lt;BR&gt;&lt;BR&gt;新羅人襲殺邊將. 王怒, 將擧兵討之, 羅王遣使謝罪, 乃止.&lt;BR&gt;&lt;BR&gt;신라인이 우리의 변방 장수를 습격하여 죽였다. 왕이 노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공격하려 하였으나,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와 사죄하였으므로 이를 중단하였다.&lt;BR&gt;&lt;BR&gt;四十二年 &lt;BR&gt;&lt;BR&gt;秋七月, 遣兵侵新羅北邊.&lt;BR&gt;&lt;BR&gt;가을 7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하였다.&lt;BR&gt;&lt;BR&gt;四十三年&lt;BR&gt;&lt;BR&gt;遣使入宋朝貢.&lt;BR&gt;&lt;BR&gt;송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五十年&lt;BR&gt;&lt;BR&gt;春三月, 遣使入魏朝貢.&lt;BR&gt;&lt;BR&gt;봄 3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五十一年 &lt;BR&gt;&lt;BR&gt;宋世祖孝武皇帝策王爲車騎大將軍開府儀同三司.&lt;BR&gt;&lt;BR&gt;송 나라 세조 효무 황제가 왕을 거기대장군개부의동삼사로 책봉하였다.&lt;BR&gt;&lt;BR&gt;五十三年 &lt;BR&gt;&lt;BR&gt;春二月, 遣使入魏朝貢.&lt;BR&gt;&lt;BR&gt;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五十四年&lt;BR&gt;&lt;BR&gt;春三月, 遣使入魏朝貢. 魏文明大后, 以顯祖六宮未備, 敎王令薦其女. 王奉表云: &quot;女已出嫁.&quot; 求以弟女應之, 許焉, 乃遣安樂王眞尙書李敷等, 至境送幣. 或勸王曰: &quot;魏昔與燕婚姻, 旣而伐之, 由行人具知其夷險故也. 殷鑑不遠, 宜以方便辭之.&quot; 王遂上書, 稱女死. 魏疑其矯詐, 又遣假散騎常侍程駿, 切責之: &quot;若女審死者, 聽更選宗淑.&quot; 王云: &quot;若天子恕其前愆, 謹當奉詔.&quot; 會, 顯祖崩, 乃止.&lt;BR&gt;&lt;BR&gt;봄 3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위 나라 문명 태후가 현조의 6궁이 미비하다 하여, 우리 왕에게 지시하여 왕의 딸을 바치라고 하였다. 왕이 표문을 올려 &quot;딸은 이미 출가하였다&quot;고 말하고, 아우의 딸을 대신 바치기를 요청하였다. 위 나라에서 이를 인정하고 곧 안락왕 진과 상서 이 부 등을 국경으로 파견하여 폐백을 보내왔다. 이 때 어떤 사람이 왕에게 권하기를 &quot;위 나라가 이전에 연 나라와 혼인한 후 얼마 안되어 연 나라를 쳤으니, 이는 사신들이 지리적 상황을 상세히 조사해갔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머지않은 시기에 이러한 교훈을 얻었으니, 적당한 방법으로 거절해야 합니다&quot;라고 하였다. 왕은 곧 위 나라에 편지를 보내 아우의 딸이 죽었다고 말했다. 위 나라에서는 이것이 거짓이라고 의심하여, 다시 대리산기상시 정 준을 보내 엄중히 질책하여, &quot;만약 딸이 정말 죽었다면, 다시 종실의 다른 여자를 선택하는 것을 인정하겠다&quot;라고 말하였다. 왕이 말했다. &quot;만약 천자가 나의 전일의 잘못을 용서한다면 삼가 지시대로 따르겠다.&quot; 그 때 마침 현조가 죽었으므로 이 일은 중단되었다.&lt;BR&gt;&lt;BR&gt;五十五年 &lt;BR&gt;&lt;BR&gt;春二月, 遣使入魏朝貢.&lt;BR&gt;&lt;BR&gt;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五十六年 &lt;BR&gt;&lt;BR&gt;春二月, 王以靺鞨兵一萬, 攻取新羅悉直州城. &lt;BR&gt;&lt;BR&gt;夏四月, 遣使入魏朝貢.&lt;BR&gt;&lt;BR&gt;봄 2월, 왕이 말갈의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신라의 실직주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lt;BR&gt;&lt;BR&gt;여름 4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五十七年 &lt;BR&gt;&lt;BR&gt;春二月, 遣使入魏朝貢. &lt;BR&gt;&lt;BR&gt;秋八月, 百濟兵侵入南鄙.&lt;BR&gt;&lt;BR&gt;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가을 8월, 백제의 군사가 남쪽 변경에 침입하였다.&lt;BR&gt;&lt;BR&gt;五十八年 &lt;BR&gt;&lt;BR&gt;春二月, 遣使入魏朝貢.&lt;BR&gt;&lt;BR&gt;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五十九年 &lt;BR&gt;&lt;BR&gt;秋九月, 民奴各 等奔降於魏, 各賜田宅. 是魏高祖延興元年也.&lt;BR&gt;&lt;BR&gt;가을 9월, 민노각 등이 위 나라에 도망가 항복하였다. 위 나라는 그들에게 각각 토지와 주택을 주었다. 이 때가 위 고조 연흥 원년이었다.&lt;BR&gt;&lt;BR&gt;六十年, &lt;BR&gt;&lt;BR&gt;春二月, 遣使入魏朝貢. &lt;BR&gt;&lt;BR&gt;秋七月, 遣使入魏朝貢. 自此已後, 貢獻倍前, 其報賜, 亦稍加焉.&lt;BR&gt;&lt;BR&gt;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가을 7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 때부터 공물의 수량이 종전에 비하여 배로 늘었으며, 보답으로 위 나라에서 주는 물량도 다소 증가하였다.&lt;BR&gt;&lt;BR&gt;六十一年 &lt;BR&gt;&lt;BR&gt;春二月, 遣使入魏朝貢. &lt;BR&gt;&lt;BR&gt;秋八月, 遣使入魏朝貢.&lt;BR&gt;&lt;BR&gt;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가을 8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六十二年 &lt;BR&gt;&lt;BR&gt;春三月, 遣使入魏朝貢. &lt;BR&gt;&lt;BR&gt;秋七月, 遣使入魏朝貢. 遣使入宋朝貢.&lt;BR&gt;&lt;BR&gt;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가을 7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송 나라에도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六十三年, &lt;BR&gt;&lt;BR&gt;春二月, 遣使入魏朝貢. &lt;BR&gt;&lt;BR&gt;秋八月, 遣使入魏朝貢. &lt;BR&gt;&lt;BR&gt;九月, 王帥兵三萬, 侵百濟, 陷王所都漢城, 殺其王扶餘慶, 虜男女八千而歸.&lt;BR&gt;&lt;BR&gt;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가을 8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9월, 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하여, 백제왕의 도읍지 한성을 점령한 후, 백제왕 부여 경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생포하여 돌아왔다.&lt;BR&gt;&lt;BR&gt;六十四年 &lt;BR&gt;&lt;BR&gt;春二月, 遣使入魏朝貢. &lt;BR&gt;&lt;BR&gt;秋七月, 遣使入魏朝貢. &lt;BR&gt;&lt;BR&gt;九月, 遣使入魏朝貢.&lt;BR&gt;&lt;BR&gt;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가을 7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9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六十五年 &lt;BR&gt;&lt;BR&gt;春二月, 遣使入魏朝貢. &lt;BR&gt;&lt;BR&gt;秋九月, 遣使入魏朝貢.&lt;BR&gt;&lt;BR&gt;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가을 9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六十六年 &lt;BR&gt;&lt;BR&gt;遣使入宋朝貢. 百濟燕信來投.&lt;BR&gt;&lt;BR&gt;송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백제의 연신이 투항하였다.&lt;BR&gt;&lt;BR&gt;六十七年 &lt;BR&gt;&lt;BR&gt;春三月, 遣使入魏朝貢. &lt;BR&gt;&lt;BR&gt;秋九月, 遣使入魏朝貢.&lt;BR&gt;&lt;BR&gt;봄 3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가을 9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六十八年 &lt;BR&gt;&lt;BR&gt;夏四月, 南齊太祖蕭道成, 策王爲驃騎大將軍. 王遣使餘奴等, 朝聘南齊, 魏光州人, 於海中得餘奴等, 送闕. 魏高祖詔責王曰: &quot;道成親弑其君, 竊位江左. 朕方欲興滅國於舊邦, 繼絶世於劉氏, 而卿越境外交, 遠通簒賊, 豈是藩臣守節之義? 今不以一過掩卿舊款, 卽送還藩, 其感恕 思愆, 祗承明憲, 輯寧所部, 勤靜以聞.&quot;&lt;BR&gt;&lt;BR&gt;여름 4월, 남제 태조 소 도성이 왕을 표기대장군으로 책봉하였다. 왕은 남제에 사신 여노 등을 보내 예방하게 하였는데, 위 나라 광주 사람이 바다에서 여노 등을 붙잡아 위 나라 대궐에 송치하였다. 위 나라 고조가 왕에게 조서를 보내 다음과 같이 책망하였다. &quot;소 도성은 직접 자기 임금을 시해하고 강남에서 왕으로 자칭하고 있다. 나는 이제 멸망한 나라를 옛 터에서 다시 일으키고, 끊어진 대를 유씨에게 이어주려 하고 있다. 그런데 그대는 국경을 넘어서 외부와 접촉하며, 자기 임금을 죽인 역적과 내통하고 있다. 이것이 어찌 번신의 절개를 지키는 도리이겠는가? 나는 이제 한 가지 과오 때문에 그대의 옛 정성을 무시하지 않기 위하여 여노를 즉시 돌려 보낸다. 나의 관대한 조치에 감동하여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법도를 지킬 것이며, 다스리는 지역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그대의 동정을 보고하라.&quot;&lt;BR&gt;&lt;BR&gt;六十九年 &lt;BR&gt;&lt;BR&gt;遣使南齊朝貢.&lt;BR&gt;&lt;BR&gt;남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七十二年, &lt;BR&gt;&lt;BR&gt;冬十月, 遣使入魏朝貢. 時, 魏人謂我方强, 置諸國使邸, 齊使第一, 我使者次之.&lt;BR&gt;&lt;BR&gt;겨울 10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 때, 위 나라 사람들은 우리 나라가 이제 강성하다고 보고, 여러 나라 사신들의 사관을 둠에 있어서, 제 나라 사신을 첫번째, 우리 나라 사신을 두 번째에 두었다.&lt;BR&gt;&lt;BR&gt;七十三年 &lt;BR&gt;&lt;BR&gt;夏五月, 遣使入魏朝貢. 冬十月, 遣使入魏朝貢.&lt;BR&gt;&lt;BR&gt;여름 5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겨울 10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七十四年 &lt;BR&gt;&lt;BR&gt;夏四月, 遣使入魏朝貢.&lt;BR&gt;&lt;BR&gt;여름 4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七十五年 &lt;BR&gt;&lt;BR&gt;夏五月, 遣使入魏朝貢.&lt;BR&gt;&lt;BR&gt;75년 여름 5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七十六年 &lt;BR&gt;&lt;BR&gt;春二月, 遣使入魏朝貢. &lt;BR&gt;&lt;BR&gt;夏四月, 遣使入魏朝貢. &lt;BR&gt;&lt;BR&gt;秋閏八月, 遣使入魏朝貢.&lt;BR&gt;&lt;BR&gt;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여름 4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가을 윤 8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七十七年 &lt;BR&gt;&lt;BR&gt;春二月, 遣使入魏朝貢. &lt;BR&gt;&lt;BR&gt;夏六月, 遣使入魏朝貢. &lt;BR&gt;&lt;BR&gt;秋九月, 遣兵侵新羅北邊, 陷狐山城. &lt;BR&gt;&lt;BR&gt;冬十月, 遣使入魏朝貢.&lt;BR&gt;&lt;BR&gt;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여름 6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가을 9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호산성을 점령하였다.&lt;BR&gt;&lt;BR&gt;겨울 10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七十八年 &lt;BR&gt;&lt;BR&gt;秋七月, 遣使入魏朝貢.&lt;BR&gt;&lt;BR&gt;九月, 遣使入魏朝貢.&lt;BR&gt;&lt;BR&gt;가을 7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9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七十九年&lt;BR&gt;&lt;BR&gt;夏五月, 遣使入魏朝貢. &lt;BR&gt;&lt;BR&gt;秋九月, 遣使入魏朝貢. &lt;BR&gt;&lt;BR&gt;冬十二月, 王薨. 年九十八歲, 號長壽王. 魏孝文聞之, 制素委貌·布深衣, 擧哀於東郊. 遣謁者僕射李安上, 策贈車騎大將軍太傅遼東郡開國公高句麗王, 諡曰康.&lt;BR&gt;&lt;BR&gt;여름 5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가을 9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lt;BR&gt;&lt;BR&gt;겨울 12월, 왕이 별세하였다. 그의 나이 98세였다. 호를 장수왕이라 하였다. 위 나라 효문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흰 색의 위모관를 쓰고, 베로 만든 심의를 입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한 후, 알자 복야 이 안상을 보내와 왕을 거기대장군태부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강이라 하였다.&lt;BR&gt;&lt;/FONT&gt;&lt;BR&gt;&lt;BR&gt;&lt;FONT color=#000000&gt;삼국사기 고구려가 위 - 북위 - 와 남조에 조공한 것들을 포함 주변 국과의 관계에 대한 기사들이다. &lt;BR&gt;&lt;BR&gt;삼국사기는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그때까지 남아 있던 삼국의 기록들 가운데 기이하거나 허황되어 믿을 수 없는 - 삼국유사에 수록된 것과 같은 - 이야기들은 철저히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검증가능한 사실 가운데 중국측 기록과 비교하여 중국측 기록에 있으면 그것을 따르고, 중국측 기록에 없으면 다시 엄정하게 검증하여 수록한 유교적인 합리주의에 의해 기술된 책이다.&amp;nbsp;&lt;BR&gt;&lt;BR&gt;아마 그렇게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왜 하필 중국 기록이냐고. 왜 하필 중국 기록을 참고해 우리 역사를 기록하느냐고. 그러나 당시&amp;nbsp;중국과 삼국의 문화적인 차이는 매우 컸다. 특히 역사기술에 있어서는 공자 이래 나름의 유교적 합리성과 객관성에 의거 역사를 기록해 왔던 중국의 그것에 대해 아직 삼국의 역사기술은 크게 못 미치고 있었다.&lt;BR&gt;&lt;BR&gt;당장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들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amp;nbsp;분명 연구방법에 따라 그 안에서 역사적 사실을 유추해 낼 수는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자체만으로 역사로 보기에는 난감한 부분들이 많다. 설마 곰이 실제 사람이 되었을 것이며,&amp;nbsp;귀신이 되어 나타난 왕이&amp;nbsp;여자를 임신시켜 아이를 낳게 했겟는가. 그러한 신화&amp;nbsp;안에서 역사를 추출해내기 시작한 것이 19세기 이후부터이고, 아직까지도&amp;nbsp;그로부터 확실히 역사라 할 만한 사실들을 온전히 복구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보면, 당시로서 역사적 엄밀함을 추구하려 할 때 그러한 부분들을 배제하는 건 나름대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lt;BR&gt;&lt;BR&gt;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삼국유사가 지금과 같이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도 정사인 삼국사기가 있기 때문이지 삼국유사 그 자체로서는 역사서로서의 가치가 크게 떨어진다. 아마 삼국사기가 삼국유사와 마찬가지로 신화나 전설까지도 가리지 않고 실었다면 한반도의 고대사를 연구함에 있어 더욱 중국이나 일본 등 다른 나라의 사료에 의존해야 했을 것이다. 하기야 그러지 않아도 당장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믿지 못하겠다며 중국측 사료만을 가지고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도 적지 않지만 말이다. &lt;BR&gt;&lt;BR&gt;뭐라더라...? 삼국사기는 중국 사료의 짜깁기라던가? 4세기 이전의 기록은 그 이후의 기록을 카피 복사라던다? 아무튼 백제의 하남위례성으로 확실시되고 있는 풍납토성이 발굴된 뒤에도 여전히 학계에서는 원삼국이라는 말이 당연하게 쓰이고 있다. 삼국이 아직 국가로서 체계를 갖추지 못했기에 원시적인 단계의 원삼국이라는 것이다. &lt;BR&gt;&lt;BR&gt;어찌되었거나 그러한 우리 민족의 가장 오랜 역사의 기록이며 정사인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장수왕은 즉위 13년 째 북위에 처음 조공을 시작한 이래 재위기간 내내 꾸준히 조공사절을 보내고 있다.&amp;nbsp;물론 삼국사기 기록이라 믿기 싫다면 믿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삼국의 역사에 대한 가장 권위있는 사서는 그것도 한 해 세 번이나 조공사신을 보낸 것으로 보아 적잖이 북위와의 관계에 신경쓰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으니. &lt;BR&gt;&lt;BR&gt;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도 굴욕이니 굴복이니 불쾌해 하기부터 할 것이다.&amp;nbsp; 지금 시각에서 다른 나라에 선물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것은 주권을 부정하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그러나 당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민족들에게 있어 중국과 교류를 하는 방법은 단 두 가지 뿐이었다. 힘으로 쓰러뜨리거나, 아니면 조공을 바치고 사대를 하거나. 당연히 고구려로서는 북조를 통일한 북위와 대적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기에 사대를 선택했던 것 뿐이다. &lt;BR&gt;&lt;BR&gt;말하자면 고구려가 북위에 저리 자주 조공 사신을 보내고 있는 것은 북위를 두려워했다기보다는 북위와의 관계를 그만큼 중히 여기고 있었다는 뜻이라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신라와도 백제와도 다툼이 잦고, 또 대흥안령 너머 북방 초원의 유연과도 갈등이 있었다. 국경까지 마주하고서 쓸데없이 분쟁을 일으키기보다는 자세를 낮추어 북위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고구려로서도 이익이었으니까. 이익이 있다면야 자신을 굽히는 정도야 당연한 거다. &lt;BR&gt;&lt;BR&gt;그렇다고 북위로서도 고구려를 소홀히 여길수는 없었던 것이, 고구려의 사신이 역대 황제의 계보를 청해 왔을 때&lt;/FONT&gt; &lt;FONT color=#000000&gt;都督遼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遼東郡開國公高句麗王이라고 하는 작위와 관직을 제수한 것을 보더라도 고구려에 대해 상당히 의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속국이나 다름없던 북연을 공격함에 있어서도 고구려가 북연의 수도를 약탈하여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이나, 북연의 처리에 대해 북위와 뜻을 달리 하고 있었음에도 무력으로 어찌할 생각을 못했었던 것이나, 고구려가 조공의 양을 늘리자 북위에서도 답례물품의 양을 늘린 것등을 보더라도 북위와 고구려의 관계가 겉으로 드러난 사대관계 이상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lt;BR&gt;&lt;BR&gt;그렇게 본다면 북위의 문명태후가 굳이 장수왕의 딸을 황제의 후비로 삼으려 한 이유도 납득이 간다. 그렇게 강한 고구려다. 당장은 책봉을 받고 조공을 바치고 있지만 그 실력은 남조와, 북쪽의 유연과 대치하고 있는 북위로서도 쉽사리 무시할 수 있는 것이 못 된다. 그렇다면 그러한 나라와의 관계에서 결혼을 통한 인척관계 이상이 어디 있을까? 그렇다고 정비로 삼는 것은 스스로 천자국을 자처하는 북위로서는 무리일 테고, 장수왕의 딸을 후비로 삼아 고구려와의 관계를 그때까지의 이상으로 돈독히 하고자 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단지 장수왕으로서는 그것이 북위에 대해 신속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에 거부하려 했던 것이고. 속뜻이야 어찌되었든 자기 딸을 후비로 바친다는 것은 신하의 예로 비치기 십상이니까. &lt;BR&gt;&lt;BR&gt;그러나 역시 장수왕 역시 한 나라의 임금이라 그러한 굴욕에도 차라리 북위와의 관계가 틀어지기보다는 그리 하는 것을 선택하기로 한다. 비록 북위의 황제가 죽어 없었던 일이 되어 버리기는 하지만. 자신의 딸을&amp;nbsp;강요에 못이겨 후비로 내주어야 한다고 하는&amp;nbsp;굴욕조차도,&amp;nbsp;장차 이익을 위해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장수왕의 철저히 나라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냉철한 군주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lt;BR&gt;&lt;BR&gt;아무튼 다사다난했던 시대였다. 왕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겼고, 그때껏 왕권에 도전하던 무리들에 대해서도 처절한 숙청이 가해졌다. 광개토대왕 시절 한 번 크게 당했던 백제에 대해서는 하남 위례성을 함락시키고 백제의 개로왕&amp;nbsp;부여 경을 죽였다. 어느새 반항할 만큼 머리가 커 버린 신라에 대해서도 몇 번이나 군사를 보내 적당히 어루만지고,&amp;nbsp;북위에 멸망한 북연의 뒷처리도 하는 등, 79년이라는 기록적인 재위기간 만큼이나 일도 많았던 장수왕 재위기간이었다. 그러함에도 고구려가 전혀 흔들림 없이 오히려 광개토대왕 시절보다 더한 전성기를 이어간 것은 싸울 상대와 싸워서는 안 되는 상대를 철저히 구분하여 서로 다른 외교전략을 구사했던 장수왕의 탁월한 외교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lt;BR&gt;&lt;BR&gt;그러나 전성시의 빛이 너무 강해서일까? 장수왕이 일구어낸 고구려의 전성기는 문자명왕 이후 장수왕의 철권통치에 숨죽이고 있던 귀족들이 다시 발호하면서&amp;nbsp;긴 쇠퇴기로 바뀌게 된다.&amp;nbsp;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마음대로 왕을 죽이고 새로&amp;nbsp;세운 것도 그러한 귀족들이 분열하여 대립하던 결과였으니,&amp;nbsp;당과 신라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스스로에 의해 고구려는 천천히 멸망해 간다. &lt;BR&gt;&lt;BR&gt;아무튼 이렇게 정리해 놓고 보니 고등학교 국사시간 왜 그리 장수왕의 외교력에 대해 높이 평가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겠다. 하긴 하나의 제국으로까지 성장한 고구려를&amp;nbsp;유지하자면 단순히 군사력만 강해서 될 일이 아니었을 터이니 말이다.&amp;nbsp;한 나라가 강하다고 하는 것은 군대가 강해서가 아니라 군주 - 즉 정치와 외교가 강하기에 강국이라 하는 것이란 그런 뜻이리라. 분명.&lt;/FON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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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1 Jan 2008 02:36:3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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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대조영이 발해를 세우기까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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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의 시조 대조영에 대해 삼국지에서와 같이 숫자로 능력치를 메기면 어떻게 될까? 다른 건 몰라도 개인적으로 지력만큼은 100을 주고 싶다. 절대 불가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상황에서 그야말로 당과 신라를 어르고 달래며 완벽하게 농락하여 발해를 건국했으니.&lt;br /&gt; &lt;br /&gt; 사실 발해의 건국에는 운도 많이 따랐다. 당시 영주에는 당에 의해 강제로 이주당한 고구려인과 말갈족, 거란족이 함께 머물고 있었는데, 당의 지배에 대해 거란족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이 지역에 대한 당의 지배가 일시적으로 약화된다. 그때 대조영은 말갈과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요동으로 돌아왔고, 이어 이들을 토벌하고자 파견된 당의 군대를 천문령에서 격파함으로써 행동의 자유를 얻어낸다. 그러고서 동모산에서 나라를 세우고 즉위하니 이것이 진振, 후일 발해라 불리우게 될 나라다. &lt;br /&gt; &lt;br /&gt; 물론 당은 발해를 토벌하여 멸망시키고자 여러 번 시도했다. 그러나 이미 698년 고구려의 옛영토를 모두 관할하던 안동도호부는 요동으로 철수해 안동도독부로 축소되어 있던 상태였다. 요동 동쪽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한 상황에 이진충이 돌궐과 연결되어 통로를 차단하니 당으로서는 마음만 있을 뿐 실제 실행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lt;br /&gt; &lt;br /&gt; 그러한 때 대조영은 기민하게 움직여 이제 막 건국해 모든 것이 불안하고 미숙한 진振의 안전과 발전을 꾀하게 된다. 가장 먼저 한 것이 당시 당과 대립하고 있던 돌궐에 사신을 보내 군사적으로 당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영주를 장악하고 있는 이진충의 거란을 흡수하면서 더욱 당과 직접적으로 부딪히게 된 돌궐로서는 당으로부터 고구려의 옛영토를 되찾아 독립하려 하는 대조영은 상당히 입맛 끌리는 동맹자일 수밖에 없었다.&lt;br /&gt; &lt;br /&gt;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 남쪽의 신라에도 사신을 파견하니, 진이 발전하는 데 있어 가장 위협이 될 수 있는 남쪽의 불안요소를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신라는 나당전쟁으로 당과 소원해져 있던 상태였는데, 평양일대를 완충지대삼아 당과 마주하고 있는 부담스런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하고 있었다. 남쪽으로부터의 안정을 꾀하는 대조영과 당의 세력이 고구려의 옛땅에서 완전히 물러나기를 바라는 신라, 양자의 입장이 맞아떨어지면서 대조영은 신라로부터 대아찬의 벼슬을 받아 그 실체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이렇게 서로는 돌궐과 연결되어 당을 압박하고, 남으로는 신라로부터 벼슬을 제수받아 안전을 확보하게 되면서 비로소 진은 나라로서의 기틀을 닦는 데 있어 탄력을 받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만주는 고구려가 멸망하고 불과 30년, 고구려에 대한 기억이 많이 남아 있던 상태였다. 고구려의 유민이나 고구려를 기억하고 있던 말갈을 흡수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구심점을 필요로 하던 그들에게 있어 약간의 실력만 보여주면 되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동모산에서 건국하고 5년 뒤, 이진충으로부터 영주를 되찾지 않으면 안 되었던 당으로부터 그 실체를 인정받기에 이르렀다.&lt;br /&gt; &lt;br /&gt; 원래 진을 토벌하고자 했던 당이었다. 그러나 이진충이 돌궐과 연결하여 영주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 그것은 단지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그러는 와중에 발해는 급속도로 세력을 키웠고, 돌궐과 거란의 공격으로 국경이 혼란스럽던 당으로서는 이 새로운 실력자를 인정하고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703년 당은 진에 대한 공격의도를 포기하고 사신을 보내 그 실체를 인정하기에 이른다.&lt;br /&gt; &lt;br /&gt; 그리고 이것은 또 다시 대조영에게 기회가 되었다. 당시 진의 동북에는 진에 복속되지 않은 불녈, 월희, 철리, 흑수 등의 유력한 말갈부족이 머물고 있었는데, 대조영은 이들에게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어했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패자로서 이들 말갈들에게까지 동경의 대상이었던 당과 국교를 맺는다고 하는 것은 이들과의 관계에 있어 우월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최소한 이들 말갈이 당과 통하고자 하여도 발해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되니 최소한 이 지역에 있어 주도권은 발해에게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물론 대조영은 그러한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과의 국교에 있어 매우 적극적이었다. 태자를 당에 숙위로 보내 적대할 뜻이 없음을 밝히는가 하면, 711년에는 대조영이 직접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을 것을 청하기도 했다. 당의 접근을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을 낮춤으로써 당과의 관계를 능동적으로 이용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당이 돌궐과 화친을 하게 되면서 당과 진 사이에 길이 열리고 대조영은 당으로부터 발해왕에 봉해지게 된다. - 이후 진은 발해로 나라 이름을 바꾼다. -&lt;br /&gt; &lt;br /&gt; 그 뒤로는 당연히 탄탄대로였다. 619년 고왕 대조영이 죽고 무왕 대무예가 즉위했을 때 신라 성덕왕은 발해와의 접경에 장성을 쌓아 발해의 위협에 대비하기에 이른다. 그동안 소원하던 당에도 사신을 보내 관계를 복원하는 데 힘쓴 것도 모두 발해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었다. 당 역시 신라와 관계를 수복함으로써 발해를 남에서 압박하고, 흑수말갈과 직접 연결하여 발해를 배후에서 위협하려 시도한다. 불과 21년 사이 신라와 당 양자가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고왕 대조영의 당대에 발해는 이미 그 성세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물론 대조영이 싸움을 잘 하기도 했을 것이다. 천문령에서 압도적인 당의 토벌군을 물리친 것은 어지간한 군사적인 재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을 테니까. 이후 고구려 유민을 흡수하고 말갈을 포섭하는 과정에서도 적잖이 싸움을 치러야 했을 터이니 싸움을 못 하고서야 발해와 같은 큰 나라를 이루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lt;br /&gt; &lt;br /&gt;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당과 신라, 돌궐은 모두 당시 최전성기를 누리던 강대국들이었다. 대조영이 제아무리 싸움의 천재라 할지라도 인구에서, 경제력에서, 장비와 보급에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이들 나라들과 경쟁하며 나라를 세워 안정시킨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었다. 더구나 최전성기에조차 발해의 인구와 생산력을 고구려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고구려의 옛영토 자체가 크게 황폐화되어 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발해와 같은 큰 나라를 세워 장차 수백 년을 이어갈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군사적인 강함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했다. 바로 외교력이었다.&lt;br /&gt; &lt;br /&gt; 이진충의 반란이 있자 머뭇거리지 않고 재빨리 요동으로 이동해 행동의 자유를 찾았으며, 나라를 세우고는 돌궐과 신라로 사신을 보내 외부의 위협을 미연에 방지했고, 당이 사신을 파견해 오자 도리어 태자까지 보내가며 적극적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할 것을 요청하여 만주에서의 주도권을 인정받은 것 등의 모든 과정에서 보여준 국제정세를 정확히 파악하여 능동적으로 이용할 줄 알았던 탁월한 외교적 안목과 능력, 그것이 있었기에 불과 21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발해라고 하는 대제국이 건설될 수 있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하긴 원래 국가간의 겨룸이란 힘의 겨룸이라기보다는 외교의 겨룸이기 쉬웠다.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도 돌궐을 복속시키고, 거란을 이간질시키고, 신라와 연결하는 외교적인 노력이 뒷받침되었고, 발해가 융성하여 이를 견제할 때도 신라와 연결하고, 흑수말갈로 배후를 위협하며, 발해 내부의 권력다툼을 이용하는 등의 외교적인 수단이 먼저 동원되었다. 군사적인 행동이 필요하더라도 그렇게 이미 이겨 놓은 다음에나 한다. 그것이 나라를 세우고 다스리는 법이다.&lt;br /&gt; &lt;br /&gt; 싸워서 이기는 것은 장수가 하는 일이다. 그 전에 싸우기 전에 이기고, 싸우지 않아도 이기도록 하는 것이 제왕의 일이다. 일조일석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그런 나라들과는 달리 발해가 수백 년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대조영이라고 하는 제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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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16 Dec 2007 06:48:37 +0900</pubDate>
    <category><![CDATA[고구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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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무엇이 광개토대왕을 가능하게 했을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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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FONT color=#0000ff&gt;&lt;STRONG&gt;&lt;FONT color=#000000&gt;邑落有豪民民下戶皆爲奴僕&lt;/FONT&gt;&lt;BR&gt;&lt;/STRONG&gt;&lt;/FONT&gt;&lt;FONT color=#0000ff&gt;읍락에는 호민과 민이 있어 하호는 모두 노복으로 삼았다.&lt;/FONT&gt;&lt;BR&gt;&lt;BR&gt;&lt;STRONG&gt;&lt;FONT color=#000000&gt;有敵諸加自戰下戶俱擔量飮食之&lt;/FONT&gt;&lt;BR&gt;&lt;/STRONG&gt;&lt;FONT color=#0000ff&gt;적이 있으면&amp;nbsp;제가는 스스로 전투를 수행하고 하호는 양식을 져다가 음식을 만들어준다.&lt;/FONT&gt;&lt;BR&gt;&lt;BR&gt;&amp;lt;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amp;gt;&lt;BR&gt;&lt;BR&gt;&lt;FONT color=#000000&gt;&lt;STRONG&gt;其國中大家不佃作坐食者萬餘口下戶遠擔米量魚鹽供給之&lt;BR&gt;&lt;/STRONG&gt;&lt;/FONT&gt;&lt;FONT color=#0000ff&gt;그 나라의 대가는 농사를 짓지 않는 좌식자로 만여구가 있었고, 하호가 멀리서&amp;nbsp;쌀과 물고기와 소금을&amp;nbsp;가져다 바쳤다.&lt;/FONT&gt;&lt;BR&gt;&lt;BR&gt;&lt;FONT color=#000000&gt;&lt;STRONG&gt;國小迫于大國之間逐臣屬句麗句麗復置其中大人為使者使相主領又使大加統責其租貊布魚鹽海中食物千里擔負致之又送其美女以爲婢妾遇之女奴僕&lt;/STRONG&gt;&lt;/FONT&gt;&lt;BR&gt;&lt;FONT color=#0000ff&gt;옥저는 나라가 작아 큰 나라에 끼어 핍박받다가 구려에 신속하게 되었다. 구려는 그 가운데 대인을 두고 사자를 삼아 더불어 통치하게 하였다. 또 대가로 하여금 그 세금을 거두어 맥포와 물고기와 소금, 바다에서 나는 먹거리들을 천리를 지어다 바치며, 또 미녀를 보내는데 비첩으로 삼아 노복으로 대한다.&lt;BR&gt;&lt;/FONT&gt;&lt;BR&gt;&amp;lt;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amp;gt;&lt;BR&gt;&lt;BR&gt;&lt;STRONG&gt;漢已來其官有侯邑君三老統主下戶其耆老舊自謂與句麗&lt;/STRONG&gt;&lt;BR&gt;&lt;FONT color=#0000ff&gt;예에는 한 이래로 관직이 후와 읍군과 삼로가 있었는데, 하호를 다스렸다. 그곳의 늙은이들은 스스로를 구려와 같은 종족이라 하였다.&lt;BR&gt;&lt;/FONT&gt;&lt;FONT color=#0000ff&gt;&lt;BR&gt;&lt;/FONT&gt;&lt;FONT color=#000000&gt;&amp;lt;삼국지 위지 동이전 동예&amp;gt;&lt;/FONT&gt;&lt;BR&gt;&lt;BR&gt;&lt;BR&gt;삼국지에 등장하는 하호의 존재는 부여, 고구려,&amp;nbsp;예 등과 그 밖의 한이나 왜등과는 사뭇 다른 점이 있다. 특히 부여를 계승한 고구려나, 고구려와 인접한 예에서 여러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데, 한 마디로 스스로 일하지 않는 전사집단인 귀족을 먹여 살리는, 중세 유럽식으로 말하자면 농노와 같은 존재였다.&lt;BR&gt;&lt;BR&gt;물론 농노와는 또 다른 것이 동예의 관직이 하호를 다스리는 것이며, 그곳의 늙은이들이 스스로를 고구려와 뿌리가 같다고 했다던가, 옥저에 대한 기록에서 보이는 고구려의 하호와 일치하는 부분들을 비추어 볼 때 이들 하호란 고구려에 의해 복속된 지역의 피지배 예속민을 가리키는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lt;BR&gt;&lt;BR&gt;그러니까 부여도 마찬가지고 고구려 역시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옥저나 동예 등 주위 여러 부족이나 종족, 나라들을 병합시키거나 복속시켰고, 이렇게 병합되거나 복속되어 새로이 편입된 피지배예속민에 대해 고구려인과 구분하여 하호라 이름하고, 이들에게 세금 등의 부담을 지웠던 것이다.&lt;BR&gt;&lt;BR&gt;그런데 이러한 하호는 정작 광개토대왕릉비를 보면 수묘인을 구성하는 데 있어 원래 고구려에 속해 있던 구민舊民과 새로이 한과 예로부터 복속된 신래한예新來韓濊를 동격으로 취급하고 있다. 옛 백성과 새로운 백성으로 구분짓고 있기는 하지만 이전과 같이 하호라 하여 차별하여 부르고 있지 않는 것이다.&lt;BR&gt;&lt;BR&gt;이것은 매우 혁명적인 변화다. 말하자면 이전까지의 고구려는 단순한 정복국가였다. 고구려라는 나라가 있어 부여며 옥저며 동예며 정복하여 그 주민들을 예속하여 노예처럼 부리는 나라였다. 그러던 것이 광개토대왕 대에 이르면 이들 예속민들은 고구려인으로 완전히 흡수하게 되는 것이다.&lt;BR&gt;&lt;BR&gt;그것은 고구려의 세계관이 확장되었음을 말해준다. 이전까지 처음 고구려를 건국한 무리들을 중심으로 하는 아주 작은 세계에서, 지금껏 그들이 정복하고 다스려 온 모든 지역의 모든 사람들을 자신들의 세계관 안에 받아들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로마가 처음 도시국가 로마만을 일컫다가 점차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아우르고, 심지어 게르만까지도 로마의 시민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lt;BR&gt;&lt;BR&gt;그리고 이러한 고구려의 세계관의 확장은 왕권의 강화와 관계가 있다. 좌식자의 예에서 보듯 이들 하호들은 전사집단인 고구려의 귀족들에게 예속된 무리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존재는 귀족의 기득권과 관계가 있다. 더 많은 하호를 확보해야 더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으니 귀족들로서는 결코 이러한 하호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제군주인 왕에 있어 귀족에 속해 귀족을 먹여살리는 하호란 자신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는 존재였다. 차라리 고구려인과 같은 백성으로서 자신에게 세금을 바치고 자신의 병사가 되어 자신을 위해 싸우도록 하는 편이 좋았다. &lt;BR&gt;&lt;BR&gt;사실 이것은 신라나 고려, 조선은 물론 중국과 일본, 유럽 등 문명이 존재한 곳에는 어디서나 존재해 왔던 지배계급 내의 갈등이었다. 국경 안의 모든 구성원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전제군주와 군왕을&amp;nbsp;배제하고 이들에 대해 직접&amp;nbsp;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하는 귀족과의 갈등 여부에 따라 역사는 달라져 왔던 것이다. 왕이 승리하여 왕의 전제정치로 가거나, 귀족이나 관료가 승리하여 집단지배체제로 가거나.&lt;BR&gt;&lt;BR&gt;그처럼 처음 귀족의 세력이 강해 국왕의 지배력이 이들 하호에게 직접 미치지 못했던 것이, 왕권이 강화되면서 왕의 지배력이 직접 하호에게 미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귀족들에게 예속되어 있던 하호가 고구려인과 동등한 신분으로 끌어올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광개토대왕비에 이르러 하호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심지어 광개토대왕대에 흡수한 새로운 예속민들에 대해서도 옛백성들과 동등한 존재로서 대우한 것으로 드러난 것이었다.&lt;BR&gt;&lt;BR&gt;바로 이것이 광개토대왕대에 이르러 이전까지 조위에, 북연에, 백제에, 지리멸렬하다 싶을 정도로 열세에 몰렸던 고구려가 요동과 만주, 한반도 북부를 아우르는 대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amp;nbsp;가장 근원이 되는 힘이었다.&amp;nbsp;단순히 싸움을 잘하거나 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전술이나 전략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이러한 근본적인 변화가 뒷받침되어 주었기에&amp;nbsp;광개토대왕에 의한 혁명에 가까운 영토확장도 가능했던 것이다.&lt;BR&gt;&lt;BR&gt;실제 조위의 주력도 아닌 관구검의 1만 대군에 대해&amp;nbsp;5천의&amp;nbsp;철기병으로 맞섰던 것이 불과&amp;nbsp;2세기도 지나기 전이었다.&amp;nbsp;광개토대왕이 즉위하기 불과 얼마 전에도 백제로부터는 평양성을 공격당해 국왕이 전사당하는 수모를 당했고, 북연은 국내성을 공격해 선왕의 시신을 약탈하고 태후를 납치해&amp;nbsp;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광개토대왕이 즉위하는 바로 그 순간에조차 고구려는 도저히 이후에 보이는 강대국으로서의 면모를 보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lt;BR&gt;&lt;BR&gt;그러던 것이&amp;nbsp;광개토대왕 대에 이르러 무려 5만에 이르는 대군 - 방어군과 원정군은 그 의미가 전혀 차원이 다르다. - 을 이끌고 멀리 북만주로, 대흥안령산맥으로, 북위로, 한강으로, 단기간에 마치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과 같은 격렬한 전쟁을 치르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만다. 5천도 겨우 모아 대항하고, 그 5천이 흩어지자 왕성마저 버리고 도망쳐야 했던 고구려가 불과 2세기도 지나기 전에 그 열 배의 병력으로 끊임없는 원정전쟁을 벌일 정도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lt;BR&gt;&lt;BR&gt;그것은 아직까지 고구려 안에 있으면서도 완전히 고구려가 되지 못했던 하호들을 흡수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귀족들을 억압하여 하호들을 고구려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고구려의 힘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가능했던 일이었다.&amp;nbsp;단순히 싸움을 잘해서만이 아니라 고구려라고 하는 세계를 넓히고 고구려라고 하는 세계 안의 모든 힘을 하나로서 사용할 수 있었기에 광개토대왕의 위업은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다.&lt;BR&gt;&lt;BR&gt;물론 광개토대왕이 모든 것을 이룬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구려가 건국된 이래 수많은 왕들이 왕권을 강화하고자&amp;nbsp;시도했을 것이고, 자신이&amp;nbsp;지배하는 세계를 넓히고자 했을 것이다. 단지 그것이 광개토대왕에 이르러 꽃피워을 뿐. 당연히 광개토대왕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이 평양성으로 천도한 것도 결국 국내성을 기반으로 한 귀족집단을 권력의 중심에서 배제하고자 하는 정치적 결단이었다. 당시 중국 사료를 보더라도 고구려에서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장수왕에 의해 얼마나 무자비한 숙청이 이루어졌던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lt;BR&gt;&lt;BR&gt;결국 광개토대왕에&amp;nbsp;이르러 하호마저도 고구려의 구성원으로 흡수하고, 장수왕에 의해 귀족들의 세력을 억압하여 왕권을 강화함으로써, 고구려는 요동과 만주, 한반도 북부를 아우르는 대제국으로써 장차 667년 당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아니 수와 당이라고 하는 중원의 거대한 제국에 맞서 몇 번이고 선전하는 기틀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비록 이후 왕권이 다시 약해지며 귀족의 전횡으로 고구려의 내정이 크게 어지러워지기는 하지만, 이때 이룩한 토대가 그러한 어려움에도 고구려가 고구려로서 버티는 힘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lt;BR&gt;&lt;BR&gt;역사를 보더라도 단순히 한 개인의 무용이나 재능으로 수백 년을 이어가는 제국을 건설한 예는 없다. 티무르가 그랬고, 알렉산더가 그랬으며, 한니발이 그랬다. 한 개인의 뛰어남이란 당대, 길어야 2대나 3대를 갈 수 있을 뿐, 제국이란 보다 더 근본적인 어떠한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오히려 그러한 것이 싸우기만 하면 반드시 이기는 것보다 더 뛰어난 능력이라 할 수 있다.&lt;BR&gt;&lt;BR&gt;흔히 광개토대왕이라 하면 싸움을 잘하고, 전술전략에 뛰어난 정복군주라 보기 쉽다. 그러나 그는 북위가 강성할 때는 스스로 굽힐 줄 아는 시세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왕이었다. 이전까지 지리멸렬해 있던 고구려의 내정을 다잡고, 고구려의 기운을 다스리고 북돋아 고구려를&amp;nbsp;고구려로서 바로 설 수 있도록 만든 왕이었다. 그것을 물려받아 우리가 하는 대제국 고구려로&amp;nbsp;만든 것이 그의 아들 장수왕이었고 말이다.&lt;BR&gt;&lt;BR&gt;싸워서 이기는 것이야 장군의 재능이라 할지라도 싸우기 전에 이미 이길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야 말로&amp;nbsp;군왕의 뛰어남이라 할 것이니 말이다.&amp;nbsp;광개토대왕은 바로 그 군왕으로서의 뛰어남을 지닌 왕이었다. 단지 그것이 정복전쟁이라는 형태로 드러났을 뿐.&amp;nbsp;광개토대왕의 영토확장은&amp;nbsp;결과일 뿐, 그것만을 전부라 여기는 것은 그를 모독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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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2 Dec 2007 13:18:59 +0900</pubDate>
    <category><![CDATA[고구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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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고산자는 발로 대동여지도를 만들었을까...?]]></title>
    <description>
        &lt;P&gt;&lt;IMG src=&quot;http://kr.img.blog.yahoo.com/ybi/1/69/fe/sawoochi/folder/1199874/img_1199874_1242959_1?1193197764.jpg&quot; border=0&gt;&lt;BR&gt;&lt;BR&gt;&lt;STRONG&gt;&lt;FONT color=#000000&gt;신증동국여지승람 팔도총도&lt;/FONT&gt;&lt;/STRONG&gt;&lt;BR&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 color=#0000ff&gt;&lt;FONT style=&quot;FONT-SIZE: 9pt&quot;&gt;『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첫머리에 수록된 조선전도. 이 지도는 지리지에 수록된 부도로 판심(版心)에 '동람도(東覽圖&quot;라고 쓰여 있어서 일명 &amp;lt;동람도&amp;gt;라고도 불린다. 현존하는 인쇄본 단독 지도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16세기로 추정된다. &amp;lt;팔도총도&amp;gt;는 동서가 남북의 길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넓어 한반도 전체가 남북으로 압축된 느낌을 주며, 특히 북부 지방의 왜곡이 심하다. &amp;nbsp;이것은 책 크기에 지도를 맞추어 그렸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진산(鎭山)과 주요 하천, 도명(道名), 주요 섬만 표시한 간략한 지도이며 바다에는 파도 무늬가 그려져 있다. 섬으로 울릉도와 우산도가 따로 표시되어 있으나 그 위치는 반대로 되어 있다. 이 지도는 조선 후기에 널리 보급되었던 지도책에서 대부분 만날 수 있다&lt;/FONT&gt;.&lt;BR&gt;&lt;BR&gt;&lt;BR&gt;&lt;/FONT&gt;&lt;IMG src=&quot;http://kr.img.blog.yahoo.com/ybi/1/69/fe/sawoochi/folder/1199874/img_1199874_1242959_6?1193197764.jpg&quot; border=0&gt;&lt;BR&gt;&lt;BR&gt;&lt;STRONG&gt;조선방역지도&lt;/STRONG&gt;&lt;BR&gt;&lt;BR&gt;&lt;FONT color=#0000ff&gt;조선 전기에 제작된 한국 전도(韓國全圖). 《동국지도》 계통의 지도이다. 제작자와 제작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지도 아래쪽의 좌목(座目)에 기록된 지도 제작 관계자들의 관직 성명과 지명 충주(忠州)가 유신(惟新)으로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제용감(濟用監)에서 1557년(명종 12) 또는 58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회의 《팔도지도》보다 두만강과 북동부 지방을 많이 수정하였으며 만주(滿洲)와 쓰시마섬[對馬島(대마도)]을 한국의 영토로 표기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8도의 주현(州縣)과 수영·병영을 표시하였고, 기타 산계와 하계를 자세히 나타냈다. 한편 각 군현은 도별로 색을 구별하여 경기도는 주황색, 강원도는 담녹색, 전라도는 흰색으로 표시하였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유출되었던 것을 1930년대에 입수하였다. 국보 제248호. 국사편찬위원회 소장.&lt;BR&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 color=#0000ff&gt;&amp;nbsp;&lt;/FONT&gt;&lt;BR&gt;&lt;/FONT&gt;&lt;IMG height=720 alt=&quot;&quot; hspace=5 src=&quot;http://kr.img.blog.yahoo.com/ybi/1/69/fe/sawoochi/folder/1199874/img_1199874_1243128_0?1197027477.jpg&quot; width=520 vspace=5 border=0&gt;&lt;BR&gt;&lt;TABLE height=178 cellSpacing=0 cellPadding=0 border=0&gt;&lt;TBODY&gt;&lt;TR&gt;&lt;TD&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PADDING-RIGHT: 0px; PADDING-LEFT: 0px; PADDING-BOTTOM: 0px; PADDING-TOP: 10px&quot; height=164&gt;&lt;STRONG&gt;팔도총도&lt;/STRONG&gt; &lt;BR&gt;&lt;BR&gt;&lt;FONT color=#0000ff&gt;관서와 관북 지방이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있는 조선 전기의 우리 나라 전도의 윤곽을 갖는 지도이면 하계망이 상세하고 군현·병영·수영·관찰사영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지도의 제작연대는, 숙종 9년(1683)에 다시 府로 회복한 경상도의 순흥이 있으므로 1683년 이후이고 숙종 10년(1684)에 신설된 함경도의 무산이 없으므로 1684년 이전의 지도이다. 지명변천으로만 본다면 1683년작으로 추정된다. 이 지도는 세조 9년(1463)에 완성하여 조정에 바쳤다는 기록이 있는 정척과 심성지의 &amp;lt;동국지도&amp;gt;와 같은 형에 속하는 지도이며, 조선 후기에도 이 지도의 윤곽과 하계망은 계속 이용되었다고 사료된다. 또 이 지도의 특징은 현재의 만주 지방의 하계망은 부정확하나 흑룡강·송화강을 표시한 것과 제주도와 대마도를 동서로 나란히 그려 넣은 것이다. 대마도는 우리 나라의 영토는 아니지만 우리 나라와 문화적인 유대가 깊어 『신증동국여지승람』&amp;lt;동람도&amp;gt;의 &amp;lt;팔도총도&amp;gt;(도판 41)에도 제주도와 같은 위도에 그려져 있다. &lt;BR&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lt;IMG src=&quot;http://kr.img.blog.yahoo.com/ybi/1/69/fe/sawoochi/folder/1199874/img_1199874_1242959_5?1193197764.jpg&quot; border=0&gt;&lt;BR&gt;&lt;BR&gt;&lt;STRONG&gt;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lt;/STRONG&gt;&lt;BR&gt;&lt;BR&gt;&lt;FONT color=#0000ff&gt;&lt;FONT style=&quot;FONT-SIZE: 9pt&quot;&gt;17세기. 채색사본. 이전의 어느 지도보다도 색감을 중시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아름다운 지도이다. 많은 산봉우리에 봉화가 촛불처럼 그려져 있는데, 특히 압록강, 두만강의 국경 지대에 밀집되어 있다. 주현읍치(州縣邑治) ·도로, 산천과 대소 산맥 ·준령(峻嶺) ·성곽 ·역참(驛站) ·봉수대 등을 그려 넣어 봉수의 직간선(直間線)을 한 번에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서해쪽의 네모 안에는 목멱산(木覓山:서울의 남산)을 중심으로 한 함경강원도래양주아차산봉수(咸鏡江原道來楊州峨嵯山烽燧) ·경상도래광주천림산봉수(慶尙道來廣州天臨山烽燧) ·평안도육로래모악동봉봉수(平安道陸路來母岳東峯烽燧) ·평안황해도수로래모악서봉봉수(平安黃海道水路來母岳西峯烽燧) ·충청전라도래양천개화산봉수(忠淸全羅道來陽川開花山烽燧) 등 5대 봉수로와 동서 및 남북의 길이, 서울에서 동서남북 주요지점까지의 거리 등이 표기되어 있다.&lt;BR&gt;&lt;BR&gt;&lt;BR&gt;&lt;/FONT&gt;&lt;/FONT&gt;&lt;IMG src=&quot;http://kr.img.blog.yahoo.com/ybi/1/69/fe/sawoochi/folder/1199874/img_1199874_1242959_2?1193197764.jpg&quot; border=0&gt;&lt;BR&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 9pt&quot;&gt;&lt;STRONG&gt;조선전도&lt;/STRONG&gt;&lt;BR&gt;&lt;BR&gt;&lt;FONT color=#0000ff&gt;이 지도는 1757년(영조 33)에 영조의 명으로 정상기의 &amp;lt;동국대전도&amp;gt;를 모사하여 홍문관과 비변사에 보관하도록 한 모사지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산과 강, 섬 등 자연 지명과 군현 이름, 창고, 진보(진보), 찰방, 산성 등 인문 지명 및 중국과 일본 등 모두 2,580여 개의 주기(주기)를 담고 있다. 산맥의 표현은 백두산을 기점으로 남쪽으로 뻗어내린 백두대간을 크게 강조하고, 여기서 뻗어나간 주요 산맥들을 강조함으로써 국토를 인체(人體)로 인식하는 전통적 지리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병영, 수영, 읍성, 진보, 찰방, 봉수 등을 기호화하고, 산성, 고갯길, 관문 등을 그림으로 표현한 진일보한 방식을 보이고 있으며, 이는 19세기 김정호에 의해 한 층 더 발전했다. 한편 지도에 육로, 해로, 고갯길을 나타내어 군사적, 경제적, 행정적 필요를 모두 수용했음을 보여준다.&lt;BR&gt;&lt;/FONT&gt;&lt;/FONT&gt;&lt;BR&gt;&lt;BR&gt;&lt;/FONT&gt;&lt;IMG src=&quot;http://kr.img.blog.yahoo.com/ybi/1/69/fe/sawoochi/folder/1199874/img_1199874_1242959_7?1193197764.jpg&quot; border=0&gt;&lt;BR&gt;&lt;BR&gt;&lt;STRONG&gt;동국대지도&lt;/STRONG&gt;&lt;BR&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 9pt&quot; color=#0000ff&gt;18세기 후반에 제작된 지도다. 조선 후기 지도사에서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되는 정상기(鄭尙驥, 1678 ~ 1752)의 &amp;lt;동국지도&amp;gt;이다. 정상기가 제작한 &amp;lt;동국지도&amp;gt;는 대전도와 팔도분도가 있는데 현존하는 것은 대부분 팔도분도이고 대전도는 매우 드물다. 이 지도는 제척(梯尺)의 형태인 백리척을 사용하여 그린 대전도로서, 당시로서는 대축척지도인 약 1 : 42만 지도이다. 한반도 북부지방의 왜곡된 윤곽이 정상기의 지도에서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지도는 대전도를 후대에 전사한 것으로 초기의 지도에 비해 정교함이 다소 떨어지지만 원형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lt;BR&gt;&lt;BR&gt;&lt;BR&gt;&lt;IMG src=&quot;http://kr.img.blog.yahoo.com/ybi/1/69/fe/sawoochi/folder/1199874/img_1199874_1242959_3?1193197764.jpg&quot; border=0&gt;&lt;BR&gt;&lt;BR&gt;&lt;FONT color=#000000&gt;&lt;STRONG&gt;아국총도&lt;/STRONG&gt;&lt;/FONT&gt;&lt;BR&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FONT color=#0000ff&gt;&lt;FONT style=&quot;FONT-SIZE: 9pt&quot;&gt;18세기 후반 정&lt;/FONT&gt;&lt;FONT style=&quot;FONT-SIZE: 9pt&quot;&gt;조대에 제작된 지도첩인 &amp;lt;여지도(輿地圖)&amp;gt;에 수록되어 있는 전국지도다. 전체적인 윤곽은 정상기의 &amp;lt;동국지도&amp;gt;를 따르고 있다. 이 지도는 무엇보다 화려한 색채가 돋보이는데, 산줄기를 녹색으로 하천을 청색, 그리고 팔도의 군현을 색채를 다르게 하여 구분하였다. 또한 해안의 섬들이 아주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이 시기 도서 지방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있던 사회적인 분위기가 반영되어 있다. 지금의 독도가 울릉도 동쪽 동해에 우산도(于山島)라는 명칭으로 표시되어 있고 대마도도 그려져 있다. 지도의 여백에는 국토의 좌향(坐向), 동서와 남북의 길이, 사방(四方)의 끝에서 서울까지의 거리, 그리고 각 도의 군현 수가 기재되어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lt;BR&gt;&lt;BR&gt;&lt;BR&gt;&lt;IMG src=&quot;http://kr.img.blog.yahoo.com/ybi/1/69/fe/sawoochi/folder/1199874/img_1199874_1242959_8?1193197764.jpg&quot; border=0&gt;&lt;BR&gt;&lt;BR&gt;&lt;FONT color=#000000&gt;&lt;STRONG&gt;조선팔도지도&lt;/STRONG&gt;&lt;BR&gt;&lt;BR&gt;&lt;/FONT&gt;&lt;FONT style=&quot;FONT-SIZE: 9pt&quot; color=#0000ff&gt;18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지도. 조선 후기 지도 발달에 큰 획을 그었던 정상기의 &amp;lt;동국지도&amp;gt;의 수정본 계열에 속하는 전조(全圖)이다. 각 도의 군현을 원으로 나타내고 바탕색을 구별함으로써 팔도의 경계를 구분하였다. 감영(監營), 병영(兵營), 수영(水營)은 사각형으로, 진보(鎭堡), 역(驛)은 작은 원으로 표시하였다. 우측 주기(註記:지리정보)에는 서울에서 각지에 이르는 거리를 수록하였다. 다른 전도와 달리 도로망을 그리지 않아 미완의 작품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18 ~ 19세기로 이어지는 조선전도의 발달과정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지도이다. 역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lt;BR&gt;&lt;/FONT&gt;&lt;BR&gt;&lt;/FONT&gt;&lt;/FONT&gt;&lt;/FONT&gt;&lt;BR&gt;&lt;/FONT&gt;&lt;IMG src=&quot;http://kr.img.blog.yahoo.com/ybi/1/69/fe/sawoochi/folder/1199874/img_1199874_1242959_4?1193197764.jpg&quot; border=0&gt;&lt;BR&gt;&lt;BR&gt;&lt;STRONG&gt;해좌전도&lt;BR&gt;&lt;BR&gt;&lt;/STRONG&gt;&lt;FONT style=&quot;FONT-SIZE: 9pt&quot; color=#0000ff&gt;19세기 중반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표적인 목판본 조선전도. 지도의 윤곽과 내용은 정상기의 &amp;lt;동국지도&amp;gt;와 유사하며 산계(山系)와 수계(水系), 자세한 교통로 등이 동일한 수법으로 그려져 있다. 지동의 여백에는 백두산, 금강산, 설악산 등 10여 개의 명산의 위치와 산수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섬 정계비, 초량왜관(草梁倭館) 등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그리고 고조선(古朝鮮), 한사군(漢四郡), 신라구주(新羅九州), 고려팔도(高麗八道)의 고을 수를 좌측상부의 여백에 기록하여 우리나라의 현재와 과거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한 지도로서, 목판 인쇄술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보이고 있다.&lt;BR&gt;&lt;BR&gt;&lt;/FONT&gt;&lt;BR&gt;&lt;IMG src=&quot;http://kr.img.blog.yahoo.com/ybi/1/69/fe/sawoochi/folder/1199874/img_1199874_1242959_11?1193197764.jpg&quot; border=0&gt;&lt;BR&gt;&lt;STRONG&gt;대동여지도&lt;/STRONG&gt;&lt;BR&gt;&lt;BR&gt;&lt;FONT color=#0000ff&gt;1861년(철종 12) 김정호(金正浩)가 제작한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으로 된 한국지도. 축척은 약 1/16만. 남북 22층으로 되어 있고, 각층은 세로 30.2㎝, 가로 20.1㎝ 크기의 8폭으로 접을 수 있게 되어 있다. 각 층을 책의 크기로 접은 판의 크기는 실제거리가 동서 80리, 남북 120리가 되도록 만든 것이다. 이 22층을 순서대로 접합하면 세로 7m, 가로 3m에 달하는 커다란 1장의 한국전도가 되도록 고안되어 있다. 지도 첫머리인 제1층에는 좌표와 지도표(地圖標), 지도유설(地圖類說), 서울의 도성도(都城圖),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 등이 실려 있다. 《대동여지도》의 특징은 첫째, 지도에 축척표시는 되어 있지 않으나, 좌표에 방안(方眼)을 그리고 ＜매방(每方)10리＞라 표시하여 사실상 축척을 표시하고 있다. 둘째, 지형의 표시와 하천과 교통로 등이 자세하고 정밀하다. 셋째, 이전의 지도에서 즐겨 사용하던 설명식의 주기(註記)를 없애고 지도표를 제시하여 지도내용을 간단명료하게 도식화하여 기호식으로 표현하였다. 넷째, 지지적(地誌的) 내용의 기재가 생략되어 주기를 중시하던 지도의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근대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대동여지도》의 정확성을 현재의 지도와 비교하면, 서해안과 남해안의 해안선은 별 차이가 없으나 동북부지방의 압록강 상류지방과 동해안의 울진 부근이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지도 가운데 가장 정밀한 세밀도라고 할 수 있다. 목판본.&lt;BR&gt;&lt;BR&gt;&lt;/FONT&gt;&lt;BR&gt;&lt;IMG src=&quot;http://kr.img.blog.yahoo.com/ybi/1/69/fe/sawoochi/folder/1199874/img_1199874_1242959_0?1193197764.jpg&quot; border=0&gt;&lt;BR&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 9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 9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 9pt&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 9pt&quot;&gt;&lt;STRONG&gt;대동여지전도&lt;/STRONG&gt;&lt;BR&gt;&lt;BR&gt;&lt;/FONT&gt;&lt;/FONT&gt;&lt;/FONT&gt;&lt;/FONT&gt;&lt;/FONT&gt;&lt;/FON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 color=#0000ff&gt;&lt;FONT style=&quot;FONT-SIZE: 9pt&quot;&gt;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소축척으로 줄여 만든 약 92만분의 1의 우리나라 전도. 이 지도는 지도에 제작자와 제작 연대가 표기되지 않으나 지도의 내용과 표현 방식으로 보아 김정호의 제작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동여지도는 도면의 첫 머리에 표시된 축척 방안을 현대식 축척으로 환산하면 1:162,000이며 이를 기초로 거리, 방위, 면적을 측정 할 수 있다. 지표의 정보를 통일적인 기호 체계에 따라 표시하여 산악과 산맥은 소박한 회화식 기호를 사용하였으며, 산의 형태, 산정의 모양, 하천, 호수, 항만 등을 자세하게 표시하였다. 행정구역의 경계, 문화유적, 군사시설, 교통 등은 근대식 방법으로 도식화 하였으며 22개의 첩본으로 이루어져 휴대하기에 편리하다.&lt;BR&gt;&lt;BR&gt;&lt;BR&gt;&lt;/FONT&gt;&lt;FONT color=#000000&gt;&lt;FONT style=&quot;FONT-SIZE: 9pt&quot;&gt;참고(라기보다는 거의 인용) - 야후백과사전, &lt;/FONT&gt;&lt;A href=&quot;http://www.angangi.com/omchosun.htm&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 9pt&quot;&gt;http://www.angangi.com/omchosun.htm&lt;/FONT&gt;&lt;/A&gt;&lt;BR&gt;&lt;BR&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 9pt&quot;&gt;아직까지도 고산자 김정호가 직접 발로 뛰어 돌아다녀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사실처럼 믿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때껏 제대로 된 지도가 없어 그것을 안타깝게 여겨 분연히 자신의 발로 직접 조선팔도를 몇 번이고 돌아다니며 지도를 만들었다나?&lt;BR&gt;&lt;BR&gt;하지만 위에 올려놓은 조선의 고지도에서 보듯 조선에 지도가 아주 없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 건국 이래 계속해서 지도를 제작해 왔고 축적된 지리지식만큼 지도 역시 보다 정교해지며 발전하고 있다. 심지어 18세기에 이르면 근대적인 서양의 축척법을 사용해 만든 지도마저 있을 정도다. 그것은 다시 말해 대동여지도가 어느 한 개인의 재능과 노력에 의해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amp;nbsp;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러한 조선 고지도의 발전선상에 존재하는 그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lt;BR&gt;&lt;BR&gt;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amp;nbsp;지도가 너무 정교해 고산자가 흥선대원군에 의해 핍박을 받았더라며 핍박받는 천재의 이미지까지 만들어낸다. 이미 그 전부터 당시의 모든 지식과 기술을 총동원한 지도가 제작되고 있었다. 이미 그 전 세기에 비록&amp;nbsp;대동여지도에 비하면&amp;nbsp;약간 떨어질지는 몰라도 이미 충분히 정교한 지도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왜이겠는가? 조선을 지배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lt;BR&gt;&lt;BR&gt;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배를 위해서는 정확한 정보와 지식이 필요했다. 대항해시대 유럽인들에게 정교한 해양지도가 필요했듯 조선을 지배하는&amp;nbsp;조정의 입장에서도&amp;nbsp;조선을 지배하자면 조선에 대한 정확한 지리지식이 필요했고, 따라서 지도의 제작은 조선을 지배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amp;nbsp;그런데 한창 왕권을 강화하던 흥선대원군이 정교한 지도를 보고 오히려 고산자를 핍박한다? 차라리 왕권을 강화하는 일환으로 지도제작을 명령했다면 오히려 쉽게 납득이 가겠지만 정교한 지도를 만들었다고 처벌하다니? 조선은 왕조국가가 아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 뒤에 김정호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대동여지전도는 또 무엇인 걸까?&lt;BR&gt;&lt;BR&gt;한 마디로&amp;nbsp;김정호가 조선에 이렇다 할 지도가 없어 스스로 제대로 된 지도를 만나보겠다&amp;nbsp;조선팔도를&amp;nbsp;일일이&amp;nbsp;자기 발로 걸어다니며 기록하고, 백두산을 몇 번 올랐다더라 하는 것은&amp;nbsp;조선의 지도제작기술과 지리지식을 얕잡아&amp;nbsp;본 결과라 할 수 있다. 조선의 지도라는 게 대단하겠느냐 이미 얕잡아보고 들어가니 대동여지도와 같이 현대의 시각으로 보아도 대단히 정교한 지도를 보고서 그것이 조선의 기술과 지식으로 만들어진 지도라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lt;BR&gt;&lt;BR&gt;그래서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조선의&amp;nbsp;지도를 멋대로 설정하고, 그것에 실망하여 스스로 지도를 만들어보겠다 전국을 직접 발로 답사하며 지도를 만드는 선지자를 만들고, 나중에는&amp;nbsp;지도가 너무 정교해 국가로부터 탄압받았다더라 하는 순교자의 이미지까지 만들고... 그런 것을 두고 아직까지도 고산자 김정호 개인적인 목적에 의한 제작이며, 고산자 김정호 개인의 의지와 노력의 산물이라고만 여기고 있는 이들이 아직도 적지 않으니.&amp;nbsp;흔히 하는 말처럼&amp;nbsp;일제강점기 일제에 의해 조작된 것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한국의 역사를 멸시하고, 한국인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는 데는 성공했다 할 수 있겠다. 지도도 만들 줄 모르고, 지도를 만들어도 오히려 핍박받는 한심한 역사를 지닌 민족으로.&lt;BR&gt;&lt;BR&gt;아니 따지고 보면 그것은 개인의 책임이기도 하다. 인터넷만 잠시 뒤져 보았어도 결코 전설이나 신화에 현혹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제대로 알아보려 노력하지도 않고 그저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믿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믿으려 하는 한심한 역사의식이 결국 역사가 아닌 것을 역사로 만들고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만들어 여직껏 믿어지게 하고 있는 것이다. &lt;BR&gt;&lt;BR&gt;하기야 요즘에는 간도도 독도도 표기되어 있지 않다고 대동여지도를 일제강점기 조작된 것이라 주장하는 이들마저 있는 실정이니. 간도와 독도가 대동여지도라는 조선 600년 지리지식과 지도제작기술의 총화조차 조작된 가짜로 만들어버릴 만큼 그리 가치가 있는 모양이다. 스스로의 역사와 문화조차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것이 어찌 민족이고 민족주의일 수 있는지. 자신의 역사도 문화도 돌아볼 줄 모르는 민족과 민족주의라니, &amp;nbsp;그 천박함에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amp;nbsp;&lt;BR&gt;&lt;BR&gt;항상 하는 말이지만&amp;nbsp;제발 공부 좀 하자. 하다못해 인터넷이라도 열심히 찾아 뒤지고 돌아다녀도 보고,&amp;nbsp;몇 번이고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관점과 해석들을 서로 교차해 비교하고 검증하며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사실인지 알려고 노력은 해 보고서야 욕을 하든 비난을 하든 부정을 하든 해야 하지 않은가? 그러고 나서야 민족이든 민족주의이든 말할 수 있을 것이다.&lt;/FONT&gt;&lt;/FONT&gt;&lt;/FONT&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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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3 Dec 2007 13:47:0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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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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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IMG hspace=5 src=&quot;http://kr.img.blog.yahoo.com/ybi/1/69/fe/sawoochi/folder/1199874/img_1199874_1243105_0?1196699291.jpg&quot; vspace=5 border=0&gt;&lt;BR&gt;&lt;BR&gt;&lt;FONT color=#0000ff&gt;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세계지도. 세로 148㎝, 가로 164㎝. 1402년(태종 2) 김사형(金士衡)·이무(李茂)·이회 등이 만들었으며 원본은 전하지 않고 사본만 전한다. 지도 하단에 권근(權近)이 쓴 발문과 《양촌집》 권22 ＜역대제왕혼일강리도지＞에 의하면 이 지도는 김사형이 명(明)나라에서 가지고 온 원(元)나라 이택민(李澤民)의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와 승려 청준(淸濬)의 《역대제왕혼일강리도》를 합하여 이 두 지도에서 미흡하게 다루어진 한국과 일본을 새로 편집한 지도이다. 이 지도에 나타난 조선도는 이회의 ＜팔도지도＞라고 추정되며, 일본지도는 박돈지(朴敦之)가 일본에서 가져와 보충해 만든 새로운 일본지도를 참고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1267년(원종 8) 베이징[北京(북경)]에서 가져온 자말 알 딘의 지구의(地球儀)와 비슷하게 그려진 것이 많아 이슬람과학의 영향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7세기 M. 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가 한국에 들어오기까지 당시 가장 훌륭하고 유일한 세계지도였으나, 중화적 세계관에 의해 중국과 한국을 너무 크게 그려 전체적인 균형을 이루지 못하였다. 채색필사본. 일본 교토[京都(경도)] 류코쿠대학[龍谷大學(용곡대학)]도서관 소장.&lt;/FONT&gt;&lt;BR&gt;&lt;BR&gt;야후백과사전을 찾아보니 이렇단다. 여기에 더 추가하거나 뺄 능력이 안되므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lt;BR&gt;&lt;BR&gt;아무튼 당시 조선인이 생각한 세계가 이렇다. 가장 크고 위대한 문명 중화 명, 그리고 그에 버금가는 소중화 조선, 그리고 나머지 듣보잡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소중화란 중국에 대한 굴종이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선진문명이었던 중국에 이어 그에 버금가는 문명국가라고 하는 자부심의 표현이었다.&amp;nbsp;지금이야 오히려 중국이 듣보잡취급을 받고 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지금의 미국 이상의 선진국이면서 강대국이 중국이었으니까.&lt;BR&gt;&lt;BR&gt;사실 조선이 임진왜란을 앞두고 일본이 쳐들어 올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하고서도 방심한 데에는 이러한 세계관의 영향이 컸다. 지도에도 나왔다 시피 당시 조선사람들에게 있어 일본이란 조선에 비해 한참 작은 나라다. 당연히 바다를 건너 쳐들어온다고&amp;nbsp;하더라도 이전의 왜구에 머리 몇 개 더한 수준의 만 명에서 2만 명 정도나 동원할 수 있을 거라&amp;nbsp;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영토는 조선의 두 배를 넘어서고 있었고, 인구에 있어서도 초월한 지 오래였다.&amp;nbsp;결국 1 ~ 2만 정도만 생각하고&amp;nbsp;대비해 준비했다가 제대로 털려버리고 말았으니 그것이&amp;nbsp;임진, 정유 양대 왜란이었다.&lt;BR&gt;&lt;BR&gt;그런데&amp;nbsp;또&amp;nbsp;일본에 대해&amp;nbsp;제대로 모르고 있었다고&amp;nbsp;조선의 탓만 할 수도 없는 것이 일본인이 생각하는 조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있기 전 조선에 간첩을 파견해 조선의 지리며 내정을 샅샅이 파악하고 있었다는 소설이나 만화의 내용과는 전혀 다르다. 오죽하면&amp;nbsp;원래&amp;nbsp;전국시대 일본에서라면 다이묘가 도망치면 그 휘하 병사들은 흩어지는 게 당연했는데, 조선에서는 어떻게 된 게 조선의 왕이 도망치고 몇 번의 승전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병사와 장수를 베어 쓰려뜨렸음에도 끊임없이 꾸역꾸역 어디선가 솟아나와 압박해 오는 조선군과 의병을 보고는 일선의 무장들마저&amp;nbsp;조선이란 얼마나 큰 나라인가 두려워하는 마음마저 품었다고&amp;nbsp;할까?&lt;BR&gt;&lt;BR&gt;당시 일본인들에게 있어서도 조선은 일본보다 한참 크고 선진적인 문명국이었던 때문이었다.&amp;nbsp;그래서 조선이 중화를 동경하듯 조선을 동경하여 조선을 치겠다 출병을 명령한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목숨을 걸고 반대하고 심지어 전쟁을 치르던 도중 조선에 투항하여 조선군의 일원으로서 일본군과 싸운 이들마저 있었던 것이다. 하긴 한양에 처음으로 진군한 고니시 유키나카조차 어지간한 조선빠라 경복궁의 크고 화려한 모습에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고까지 할 정도이고 보면... 그런 관계는 19세기까지 이어진다.&lt;BR&gt;&lt;BR&gt;하긴 동아시아의 경우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유럽 역시 아직까지 지리정보가 어둡긴 마찬가지여서 심지어 중국보다 일본을 더 큰 나라로 여기고 두려워하는가 하면, 아즈테카와 잉카를 멸망시킨 자신감으로 중국의 야만인 정도는 약간의 병력만으로도 충분히 정복할 수 있다며 원정군을 조직하기도 했었다. 한 선교사가 목숨을 걸고 유라시아를 횡단해서 중국이 공포로 남아 있는 바로 그 키타이라는 사실을 전해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역사보다 수백 년 더 일찍 유럽 원정군과 중국의 전쟁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대충 그런 시대였다. 그 무렵이라는 게.&amp;nbsp;&lt;BR&gt;&lt;BR&gt;그러고 보면&amp;nbsp;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이면서 곤여만국전도가 나오기까지 가장 정교한 세계지도이기도 했다. 그 말은 당시 동아시아 사람들의 지리지식수준이라는 게 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도 된다. 동아시아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아직 교통이나 통신 등의 현실적인 한계로 인해 심지어 지도제작자들조차 현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확한 지식 없이 지도를 만드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지금을 기준으로 당시를 재단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lt;BR&gt;&lt;BR&gt;그런 것을 두고 몇 세기 전의 지도에 나온 그림 몇 개나 그보다 더 오래 전 쓰여진 사료에 나온 문구만으로 무어라도 대단한 걸 알아낸 양 호들갑을 떨어댄다는 건 얼마나 우스운가. 그런 식으로 옛 기록에 나온 내용들을 모조리 지도에 옮기려 했다가는 피카소나 달리가 와서 지도를&amp;nbsp;그려도 부족하지 않을까?&amp;nbsp;적어도 수십 차원은 되어야 할 지도를 과연 그들이라고 그릴 수 있을까는 의문이지만. 그래서 역사라는 게 어렵다는 거다. 의도적이거나 시대적 한계로 말미암은 의도하지 않은 오류나 오해까지 모두 찾아 바로잡아가며 진실에 접근해야 하니. &lt;BR&gt;&lt;BR&gt;아무튼&amp;nbsp;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가치라고 한다면&amp;nbsp;당시 조선인이 생각하던 세계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 버금가는 문명국, 주위의 듣보잡 나라들과는 차원이 다른 문명국이라고 하는 자부심이 그대로 지도로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지금에서야 사대주의니 비굴함이니 비웃고 경멸하며 욕하는 이들이 이리 많지만 말이다.&lt;BR&gt;&lt;BR&gt;하기야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그리 동경하던 중화 중국이 판타지랜드라며 조롱의 대상이 되고, 그리 야만인이라 멸시하던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받던 끝에 일본이라면 똥조차 달다는 일빠들이 이리 많아질 것이라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역사란 돌고 돈다고 하는 모양이다. 음지가 양지가 되고 뽕밭이 푸른 바다가 되고. 다 그런 것 아니던가.&lt;BR&gt;&lt;BR&gt;뭐 어쨌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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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06 Dec 2007 06:43:51 +0900</pubDate>
    <category><![CDATA[고구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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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제나라, 고구려인이 세운 잊혀진 ‘왕국’ 제나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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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인이 세운 잊혀진 ‘왕국’&lt;br /&gt; &lt;br /&gt;  2007년 03월 23일(금)&lt;br /&gt; &lt;br /&gt; 이정기(李正己)&lt;br /&gt; 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에는 동양 중세사학자(연세대 교수)인 저자의 역할이 컸다. 그의 연구 결과는 이렇다. “고구려 멸망 이후 중국으로 끌려간 고구려인의 후예인 이정기와 그의 후손들은 4대 55년(765~819) 동안 산동 지방에 제(齊)나라를 세워 15개 주를 다스렸다. 신라보다 넓은 영토를 차지하며 막강한 경제력으로 당나라와 맞섰고, 한때 낙양을 공략하며 천하 패권을 넘보기도 했다.” 이 책은 그 ‘잊혀진 왕국’의 통사(通史)인 셈이다.&lt;br /&gt; &lt;br /&gt; 저자는 “당나라가 ‘흉악한 고구려 무리’라고 불렀던 데서 역으로 이들의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드러난다”고 설명한다. 지금까지 이정기 가문은 학계에서 당나라 후기 지방에서 발호, 중앙의 권위를 약화시켰던 독립 절도사인 번진(藩鎭) 세력 중 하나로 여겨져 왔다. 저자는 “제나라는 당나라에 대해서 세금을 내지 않았고 관료 임명도 거부했으며 장기간 군사적으로 맞선 자주적인 독립국이었다”고 말한다.&lt;br /&gt; &lt;br /&gt; 그 주장이 성립하려면 한국사뿐 아니라 중국사의 체계 전체가 달라지는 대전환이 이뤄져야 한다. 당나라 후기가 지금까지의 해석처럼 ‘약해진 통일제국의 시대’가 아니라 ‘독립국들로 분열된 시대’로 바뀌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제나라 독립국설(說)’이 정설이 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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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01 Jul 2007 16:04:59 +0900</pubDate>
    <category><![CDATA[고구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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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中, 고구려 이어 “부여도 우리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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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15 width=&quot;100%&quot; border=0&gt;&lt;TBODY&gt;&lt;TR vAlign=top&gt;&lt;TD class=text id=clix_content style=&quot;PADDING-BOTTOM: 8px; LINE-HEIGHT: 1.3&quot; width=&quot;100%&quot; bgColor=#ffffff&gt;&lt;P&gt;&lt;B&gt;&lt;SPAN class=artTitle&gt;&lt;FONT size=4&gt;中, 고구려 이어 “부여도 우리 역사” &lt;!--E_ARTICLE_TITLE--&gt;&lt;/FONT&gt;&lt;/SPAN&gt;&lt;/B&gt;&lt;/P&gt;&lt;P&gt;&lt;!--#### 관련 사진 시작 ####--&gt;&lt;/P&gt;&lt;DIV class=art13 id=fontSzArea&gt;&lt;!!--bodystart&gt;&lt;!--S_ARTICLE_CONTS--&gt;&lt;!--google_ad_section_start--&gt;&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260 align=right border=0&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PADDING-LEFT: 10px; PADDING-BOTTOM: 10px&quot;&gt;&lt;TABLE cellSpacing=3 cellPadding=10 width=&quot;100%&quot; bgColor=#efefef border=0&gt;&lt;TBODY&gt;&lt;TR&gt;&lt;TD bgColor=#ffffff&gt;&lt;IMG hspace=0 src=&quot;http://www.chosun.com/media/photo/news/200606/200606300558_00.jpg&quot; width=260 border=0 no=&quot;0&quot;&gt; &lt;DIV style=&quot;PADDING-RIGHT: 0px; PADDING-LEFT: 0px; PADDING-BOTTOM: 0px; PADDING-TOP: 3px&quot;&gt;&lt;FONT size=2&gt;▲ 중국이 부여의 유물로 분류해 랴오닝성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서차구유적(서기전 3세기~서기전 1세기) 고분 출토 금귀고리. 부여는 고구려와 백제의 뿌리를 이룬 나라이지만, 전시설명판에는 중국 동북지역 소수민족이 세운 국가로, 일찍부터 한(漢)왕조에 복속됐다고 적혀있다. /랴오닝성박물관 도록&lt;/FONT&gt;&lt;/DIV&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P style=&quot;LINE-HEIGHT: 150%&quot;&gt;지금 중국 선양(瀋陽) 랴오닝(遼寧)성 박물관에서 ‘요하문명전(遼河文明展)’이 열리고 있다. 이 전시는 동양사, 더 나아가 세계사를 새로 쓰게 하려는 기획이다. &lt;U&gt;요하 유역을 아우르는 ‘요하문명’이 세계적인 문명 발상지임을 세계에 알리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만리장성 밖 요서·요동을 포괄하는 요하문명 전체를 자기 역사로 만드는 ‘&lt;B&gt;요하문명 공정&lt;/B&gt;’에 중국이 박차를 가하고 있다&lt;/U&gt;. 지금까지의 ‘동북공정’을 넘어서는 일이다.&lt;BR&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 150%&quot;&gt;일찍이 중국은 만리장성을 쌓은 뒤, 장성 밖의 무지몽매한 새외(塞外)민족과 차별을 두었다. 그것은 중국문명의 ‘북방한계선’을 긋는 상징성을 띠고 있다. 그런데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만리장성 밖에서 중국문명보다 시기적으로 앞설 뿐만 아니라 더 발달된 구석기·신석기문화가 속속 확인됐다. 요하유역의 구석기문화인 영구(營口)의 금우산인(金牛山人)은 북경인(北京人)보다 형질인류학적으로 더 발달된 것이다. 이 지역 사해(査海)의 신석기문화는 서기전 8000년에 이르며, 신석기 말기(서기전 3500년~2500년)의 것이 바로 독특한 옥기 작품을 낳은 홍산문화(紅山文化)다. 이번 전시에서 신석기 빗살무늬토기에서 개구리의 뒷다리를 물려고 하는 뱀의 도상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신라의 도우에 많이 나타나는 도상과 똑같지 않은가.&lt;BR&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 150%&quot;&gt;그런데 전시 중 세 번째 테마 ‘화하일통’은 중국(=華夏)이 요하문명을 통일(=一統)했다는 뜻이다.&lt;B&gt; 우리 민족의 원류를 이룬 부여(서기전 3세기~서기 5세기)와 고구려는 물론, 삼연(북연-전연-남연)의 유물이 이 주제 아래 전시되고 있었다.&lt;/B&gt;&lt;BR&gt;&amp;nbsp;&lt;/P&gt;&lt;P style=&quot;LINE-HEIGHT: 150%&quot;&gt;부여를 소개하는 코너에서는 “&lt;B&gt;부여는 우리나라 동북지역에서 이른 시기에 국가를 세운 소수 민족의 하나&lt;/B&gt;”라고 기술했다. 중국은 지금까지 금귀고리나 철검 등 위세품이 출토된 랴오닝성 서풍현 서차구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을 ‘초기 철기시대 것’이라고만 소개해 왔다. 그러나 이번 전시부터는 ‘(중국에 속한) 부여’ 유물이라고 처음으로 밝혔다. 요하지역에서 ‘화하일통’의 역사는 최소한 2500여 년은 됐음을 선언하는 셈이다.&lt;/P&gt;&lt;P style=&quot;LINE-HEIGHT: 150%&quot;&gt;내몽골·요하유역의 각 유적과 이 일대 평원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은 빗살무늬토기, 고인돌, 요령식 동검, 다뉴세문경, 옥룡(=곡옥) 등을 공유하는 알타이어계 요하문명권이었다. 한국은 요하문명의 굳건한 바탕 위에 중국 문명을 접목하며 역사를 형성해 왔다. &lt;!--google_ad_section_end--&gt;&lt;/P&gt;&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160 align=right border=0&gt;&lt;TBODY&gt;&lt;TR&gt;&lt;TD style=&quot;PADDING-LEFT: 10px; PADDING-BOTTOM: 10px&quot;&gt;&lt;TABLE cellSpacing=3 cellPadding=10 width=&quot;100%&quot; bgColor=#efefef border=0&gt;&lt;TBODY&gt;&lt;TR&gt;&lt;TD bgColor=#ffffff&gt;&lt;P style=&quot;LINE-HEIGHT: 150%&quot;&gt;&lt;IMG hspace=0 src=&quot;http://www.chosun.com/media/photo/news/200606/200606300558_01.jpg&quot; width=160 border=0 no=&quot;1&quot;&gt; &lt;/P&gt;&lt;DIV style=&quot;PADDING-RIGHT: 0px; PADDING-LEFT: 0px; PADDING-BOTTOM: 0px; PADDING-TOP: 3px&quot;&gt;&lt;P style=&quot;LINE-HEIGHT: 150%&quot;&gt;&lt;FONT size=2&gt;▲ 강우방 이화여대 교수·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 대표&lt;/FONT&gt;&lt;/P&gt;&lt;/DIV&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P style=&quot;LINE-HEIGHT: 150%&quot;&gt;이 지역에서는 우리 말고도 타민족들의 영웅 호걸들이 등장해 여러 제국을 건설했지만 결국 중국에 흡수되고 말았다. 그러나 고구려는 한 때 요하문명의 패자(覇者)로 비록 중국과 신라의협공에 멸망했지만 그 정신과 예술은 지금까지 맥맥이 살아 남아, 세계적으로 독창적인 문화를 형성하도록 활력소를 제공해준 요하문명의 유일한 문화국가였다. 북부여-고구려-남부여(백제가 사비로 천도하면서 바꾼 국호)-통일신라-고려-조선-한국이라는 전승관계를 통해 우리 민족이 요하문명의 완성자이기에, 중국은 사활을 걸고 동북공정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중국은 고구려를 넘어 한국의 미래까지 노리고 있는 셈이다.&lt;/P&gt;&lt;P style=&quot;LINE-HEIGHT: 150%&quot;&gt;한국으로 돌아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북녘의 문화유산’ 특별전을 보러 전시장 입구에 들어섰을 때 놀라움에 발걸음이 멈칫했다. 평양에서 출토된 높이 90㎝의 당당하고 아름다운 빗살무늬토기. 요하문명의 빗살무늬 토기들 가운데 황제같은 늠름한 모습이었다. 우리 문화의 자화상이라고 생각했다.&lt;!--E_ARTICLE_CONTS--&gt;&lt;!!--bodyend&gt;&lt;/P&gt;&lt;/DIV&gt;&lt;DIV class=td_gray&gt;&lt;!--S_ARTICLE_AUTHR--&gt;&lt;!-- @ --&gt;&lt;P style=&quot;LINE-HEIGHT: 150%&quot;&gt;강우방 이화여대 교수·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 대표&lt;BR&gt;&lt;!--E_ARTICLE_AUTHR--&gt;&lt;/P&gt;&lt;/DIV&gt;&lt;DIV class=td_gray&gt;&lt;!--S_ARTICLE_WTIME--&gt;&lt;P style=&quot;LINE-HEIGHT: 150%&quot;&gt;입력 : 2006.06.30 22:55 59' / 수정 : 2006.06.30 23:00 53'&lt;/P&gt;&lt;/DIV&gt;&lt;/TD&gt;&lt;TD style=&quot;PADDING-LEFT: 0px&quot; vAlign=top noWrap align=right&gt;&lt;!-- 아바타 --&gt;&lt;!-- 여기까지 --&gt;&lt;BR style=&quot;FONT-SIZE: 3px; LINE-HEIGHT: 100%&quo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5 width=&quot;100%&quot; border=0&gt;&lt;TBODY&gt;&lt;TR&gt;&lt;TD class=text_gray align=middle&gt;102&lt;/TD&gt;&lt;TD&gt;&lt;/TD&gt;&lt;TD class=onetext style=&quot;PADDING-RIGHT: 5px&quot; noWrap&gt;&lt;/TD&gt;&lt;!--td&gt;&lt;/td--&gt;&lt;!-- ijpark newsurl:: --&gt;&lt;TD style=&quot;WORD-BREAK: break-all&quot;&gt;&lt;A class=con_link href=&quot;http://cafe199.daum.net/_c21_/bbs_list?grpid=yyVk&amp;amp;fldid=C6Fs&quot; target=_blank&gt;&lt;B&gt;&lt;FONT color=#5000af&gt;&lt;FONT face=굴림 size=2&gt;中, 고구려 이어 “부여도 우리 역사”&lt;/FONT&gt;&lt;/B&gt;&lt;/FONT&gt;&lt;FONT face=굴림 size=2&gt;&amp;nbsp;&amp;nbsp;&amp;nbsp;&lt;/FONT&gt;&lt;/A&gt; &lt;IMG height=5 hspace=4 src=&quot;http://cafeimg.hanmail.net/cf_img2/2005new.gif&quot; width=15 align=absMiddle border=0&gt; &lt;/TD&gt;&lt;TD&gt;&lt;/TD&gt;&lt;TD style=&quot;WORD-BREAK: break-all&quot;&gt;　&lt;A class=link_board_04 onc　lick=&quot;showSideView(this, 'ZJFPb2qxGg10', '', '보은');&qu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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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02 Mar 2007 16:50:3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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